2024년 1월 25일 하늘언어교회
본문: 마가복음 7장 34절(개역성경, 공동번역성경)
개역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공동번역 34절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 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제목: 에바다와 에파타
본문은 예수님이 청각장애인을 치료하는 장면입니다. 치료하는 중에 에바다-에파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열려라 즉 귀가 열려서 듣게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그는 귀가 열려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개역과 공동번역이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개역에서는 에바다로, 공동번역에서는 에파타로 표현했습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원문을 알면 답이 나옵니다. 원문은 그리스어로 엡실론, 퓌, 퓌, 알파, 세타, 알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엡실론은 에, 퓌는 영어의 f, 알파는 아, 세타는 영어의 th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정확한 발음은 한글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에파타, 에파싸, 에파따 등으로 표기할 수 있지만 어느것도 완전한 발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의 에바다는 원어에서 많이 멀어져 있습니다. 공동번역의 에파타가 그나마 원문에 가까운 표기입니다. 이렇게 여러 번역이 다를 경우에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취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개역성경을 비롯해 개신교 성경의 대부분이 에바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히 틀린 번역입니다. 이런 틀린 번역을 고집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처음에 잘못 번역된 것을 오래도록 읽다 보니 틀린 번역에 익숙해져서 올바른 번역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통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습관으로 굳어지는 속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전통화되고 관습화된 오류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번역의 오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보통 도덕적인 것에는 잘 적용을 하지만 언어상의 잘못에는 회개를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언어로 쓰여 있기에 언어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느님 말씀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언어로 나타내는 것 자체가 크나큰 모험입니다. 그리고 무한한 의미를 유한한 의미로 축소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원칙상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면 하느님 말씀 고유의 무한성이 극도로 훼손되기에 그 언어 자체로는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으로 남겨둘 때 가장 완전한 언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불완전한 언어로 계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무한한 언어의 섭리를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토막내는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시언어의 가치를 폄하해서도 안 됩니다. 이 불완전한 인간 언어로서 나타낼 수 있는 최상의 진리가 바로 계시된 언어입니다. 그래서 그 값어치는 실로 무한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계시언어는 유한한 손가락으로 무한한 우주를 가리키듯이 유한한 언어로 무한한 진리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시언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무한자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올바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한한 언어도 체계가 반듯한 언어가 있고 무질서한 언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완벽한 질서의 세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잘 부여된 언어가 하늘나라에 가까운 언어입니다.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것이 당연히 하늘나라에 가깝고 원문에서 멀어진 번역은 무질서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는 언어라는 그릇은 가장 온전하고 질서가 잘 잡힌 것으로 골라야 비로소 말씀을 담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면 잘못을 알면서 눈감아버리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한 안이함은 비도덕, 비논리, 반지성주의, 문자주의 등 수많은 영역에 걸쳐 만연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한오류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오류의 존재입니다. 무오류와 무한오류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 때문에 무한오류의 존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무오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무한오류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무오류를 향해 바로 서는 것 뿐입니다.
다시말해 무한오류의 존재는 무오류를 지향하는 것으로 무오류를 향한 무한한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그 여정은 스스로 완성할 수 없기에 무오류 자신이 무한오류에게 다가오셔야만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무한오류가 무오류를 바라보는 방법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언어와 번역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번역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표현을 원문에 가까운 표현으로 바로잡는 것은 무한한 여정을 위한 최소한의 자세입니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올바른 번역을 오히려 잘못되게 끌어내리려는 태도가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엄마와 딸이 1더하기 2의 답을 구하고자 할 때 딸은 3이라고 했고 엄마는 2라고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연히 엄마는 자기가 맞으니 딸도 2로 고치라고 강요하게 됩니다. 말을 안 들으면 야단을 치거나 체벌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습관을 가진 사람은 자기보다 옳은 사람을 정죄하고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습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바른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의 잘못된 길을 고집하는 죄성에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잘못된 언어습관은 최대한 바로잡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 인격, 행동 그리고 삶 전체를 지배합니다. 결국 언어를 고치고 바로 잡는 일은 인생 전체를 고치고 바로잡는 일이 되고 성경적인 회개에 이르게 하는 첩경입니다.
교회소식
1. 예배시간 조율
그동안 제가 예배시간과 광고를 지나치게 오래 끄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배운 것을 어디가서 열강하지 못해서 생긴 병입니다.
하지만 예배를 오래 끌면 다들 피로해지기 때문에 앞으로는 시간을 조율하고자 합니다.
광고가 길어지거나 전하고 싶은 글들이 있을 때에는 아래에 부록처럼 기재하겠습니다.
피로를 무릅쓰고 인내해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금주의 성경읽기
오늘은 잠언을 읽겠습니다.
분량은 상황에 따라 조율하시면 됩니다.
3. 손담 소개
성경 읽기가 끝나고 정종익목사님께서 손담에 대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게임요청
룰렛게임 등은 원하시는 분이 계시면 진행하겠습니다.
사랑의 메시지
사랑과 위안이 흐르는
언어의 벤치에 앉아
사랑하는 님들을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봅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에
칼바람을 헤치며 눈길을 다니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삶에 지치고 외로움에 찌든 가녀린 어깨에
북풍한설까지 가세하면
우리 존재는 한없이 움츠러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뜨거운 사랑으로 온기를 보내주시는
영혼의 태양을 기억하십시오.
그 무한히 포근한
고향의 햇볕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본연의 자아를 상상해보십시오.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따스해지고
가슴을 적셔 오는
치유의 온기를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평안과
무한한 돌보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