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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올렷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ai해석을 바로 아래에 첨가햇습니다...이를 참조하여 다른소리가 번역 설명햇던것을 매끄럽게 다시 수정햇습니다)
세상이 매우 혼동스러운 듯 보입니다.
미국의 패권이 눈에 띄게 소멸하고 잇고...멀티 폴라의 세상이 열린듯 합니다.
우리에겐 더욱 혼동스럽습니다.
80년대 민주화 투쟁 이후 펼처진 세계는 민주화투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조차도 혼동스럽게 합니다.
모든것이 불안하고 믿을 수 없습니다..
달러도, 핵도, fta도, 사회복지도..서울대 졸업장도..심지어는 부동산 까지도...믿을 수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뭔가 먼지 모르겟을 땐 과거의 경험을 참조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지금의 사태는 우리가 조금만 냉철하게 과거를 되 돌아 보면...낯선것도 아니고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잇엇던 것입니다..
70년도 중반,소위 자본주의 르네상스가 끝난이 후 진행된 것들을 찬찬히 되 돌려 보면
지금의 혼란과 불확실은 당연한 것이고..우린 꼭 같은 답을 얻어 낼 수 잇습니다.
그때 대충 대충 눈감고 지나간 세월이 누적되어 불과 몇십년만에 이런 세상을 만들엇습니다.
사람들의 나태가 지금의 위기의 원인임을 알 수 잇습니다.
우리도 민주화이후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진행되어왓던 것들을 꼭 같이 눈감고 대충대충 넘겻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강남과 삼성만의 세상에 대해 자포자기하고 한숨을 쉬고 잇는 모습은....
나태햇던 자들의 자업자득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처벌 받지 않아도 되고(실제 처벌은 계속되고 잇다),,대통령을 맘대로 욕 할 수 잇는 자유가
평등하고 공정한 세상을 보장 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격차는 오히려 평등과 공정이란 그럴싸한 상식으로 진행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위기를 느끼고 치열하게 투쟁햇던 80년대 민주화 투쟁 처럼
지금 진행되고 잇는 세상에 위기감을 느끼고 그때 처럼 투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기미 조차 없습니다..
투쟁은 이젠 노무현교 똥파리때들과 수구꼴통 쥐쇄기때들 만의 저급한 멀채쌈질로 퇴화 되어 버렷습니다.
아래글은
다른소리 세대들 중에서 시대와 사상에 고민햇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격거 봣을 의문을 정리한 좋은 글이다는 생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알고잇는 사람들에겐 또 다시 반복되는 진부함이겟지만....
바뀐것이 없다면 진부할 것도 없지요.
이글을 공지에 올린 이유는
이런 기조를 이해 하고 공감하고 동조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꺼지라는 뜻입니다.
이 정도가 다른소리의 기초 인식이니...
처 먹은 뇌물이 뽀록나 되진 경상도 꼴통 교주님 할렐루야 타령질이나 처 하고 싶은 쥐쇄끼들은
그런곳을 찾아 그곳에서 니들 끼리 취지지지지 거리라는 뜻입니다.
Free Market Genocides: The Real History of Trade One reason this hushed-up history matters is that even today economic “rationality” and plunder often remain partners in crime. 자유 시장(이 저지른) 대량 학살 : 무역의 진정한 역사 이 쉬쉬하는 역사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오늘날에도 경제적인 '합리성'과 약탈이 자주 범죄의 파트너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September 10, 2022 By Jag Bhalla What role should greed play in how we run the world? Should it rule us and shape all that we do? I’d argue that we live under “greedocracy” disguised as a form of liberalism. Gussied-up as the only rational way, greed has become the guilt-free guiding star of global elites. But the grand narrative usually used to justify this world-shaping greed-is-good creed vigorously ignores salient history, and disingenuously suppresses data on greed’s present-day harms. This essay will walk you through why the “liberal world order’s” free markets are not really remotely in the business of maximizing flourishing—to rightly judge their track record requires reckoning with the greedocracy’s glossed-over genocides and hushed-up holocausts. 탐욕이 세상을 운영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결정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자유주의의 탈을 쓴 '탐욕주의(greedocracy)' 아래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직 유일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양 화려하게 꾸며진 탐욕은, 이제 글로벌 엘리트들에게 죄책감 없는 길잡이 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탐욕이 곧 선'이라는 교리를 정당화하는 거대 서사는 두드러진 역사를 격렬하게 무시하며, 탐욕이 오늘날 초래하는 해악에 대한 데이터를 기만적으로 은폐합니다. 본 에세이는 왜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의 자유 시장이 실제로는 인류의 번영을 극대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지를 설명할 것입니다. 그들의 실적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탐욕주의가 겉치레로 가려버린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와 은폐된 **홀로코스트(대참사)**에 대한 냉혹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탐욕은 세상 돌아가는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가? 나는 우리가 자유주의의 탈을 쓴 '탐욕주의(greedocracy)하에 살고 있다고 주장해왓다. 유일한 이성적인 방법이라 위장된 탐욕은 세계 엘리트들의 죄의식 없는 이정표가 되엇다. 그러나 탐욕은 선한것이다는 신념을 정당화하는 거대한 서사는 분명한 역사를 강력하게 무시하고, 탐욕이 현재 초래하는 해악에 대한 자료를 기만적으로 은폐한다. 이글은 '자유로운 세계 질서'의 자유 시장이 실제로는 인류의 번영을 극대화하는 일과 왜 거리가 먼지를 설명할 것이다. 즉 그런 관련기록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탐욕주의(자유주의)가 은폐해온 엄청난 제노사이드와 은폐 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계산이 필요하다. Consider how “rational optimist” Steven Pinker paints the history of trade in his billionaire-beloved good-news-bearing bible,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its “the most inspiring book I’ve ever read” gushed Bill Gates, the prominent predatory philanthropist). In it Pinker preaches thinking “like an economist” using “the theory of gentle commerce from classical liberalism,” under which trade becomes “more appealing than … war.” Rationally-enlightened leaders reasoned that your “trading partner suddenly becomes more valuable to you alive than dead.”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온건한 상업 이론'을 활용해, 무역이 전쟁보다 매력적인 대안이 되며 교역 상대방이 생존해 있을 때 더 가치 있다는 논리로 무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핑커는 이를 통해 합리적이고 계몽된 지도자들이 폭력 대신 평화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은 스티븐 핑커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인 스티븐 핑커가, 억만장자들이 사랑하는 좋은 뉴스만 담은 성경이라 할수 잇는 그의 책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에서 무역의 역사를 어떻게 그렷는지 생각해보라. 뛰어난 약탈주의적 박애주의자 빌 게이츠는 이 책을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영감을 주는 책" 이라고 과장하여 지껄어됫다...이 책에서 핑커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신사적인 상업 이론'을 이용하여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라고 설교한다. 이 이론에서 무역은 '전쟁보다 더 매력적'이다. 합리적으로 계몽된 지도자들은 당신의 '거래 파트너'가 죽은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갑자기 당신에게 더 가치 있게 된다고 논설하엿다. Compare that glorified life-affirming tradeoff to the views of a frontline practitioner of that so-called gentle commerce: “There can be no trade without war,” declared Jan Pieterzoon Coen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That’s a quote from Amitav Ghosh’s The Nutmeg’s Curse (an eloquently alarming book about gigantic ideological gaps in climate crisis discourse). 이른바 그 '온화한 상업'의 최전선 실무자가 가졌던 견해와, 앞서 언급된 미화되고 생명 긍정적인 절충안을 비교해 보십시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zoon Coen)**은 "전쟁 없이는 무역도 없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문구는 아미타브 고시의 저서 『너트메그의 저주』(기후 위기 담론에 존재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격차를 설득력 있고 경고조로 다룬 책)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앞선 언급한 이 찬란한 긍정적인 삶의 절충안을 소위 "신사적인 상업"의 최전선 실무자들의 견해와 비교해보자. (이후 그들의 이론과 실제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얼마나 정 반대로 전개 되어 왓는가를 죽 살펴보게 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Jan Pieterzoon Coen은 "전쟁 없는 무역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문구는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저서 『넛메그의 저주(The Nutmeg's Curse)』(기후 위기 담론에서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격차에 대해 웅변적으로 경고한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Jan Pieterzoon Coen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 『넛메그의 저주(The Nutmeg's Curse)』 Unlike Pinker’s, Coen’s words weren’t abstract theorizing, and he concretely came to the opposite conclusion on the value of trading “partner” lives. He ordered a monopoly-securing massacre of the Banda Islanders. This involved 50 vessels, and 2,000 men (including 80 Japanese ronin, masterless samurai mercenaries) who displaced, “killed, captured, or enslaved” 90% of the 15,000 indigenous “trading partners.” This “almost total annihilation of the population of the Banda Islands [was] clearly a genocidal act” (concluded a 2012 paper in the Journal of Genocide Studies). The cursed spice of Ghosh’s title was so valuable that a handful of nutmegs “could buy a house or ship.” which sadly meant Coen’s gentle-commerce genocide made greedy profits even at the cost of 5,000 slaves per year (“labor” didn’t last long under gentle-commerce conditions). 핑커와 달리, 쿤의 말은 추상적인 이론 정립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역 '파트너'의 생명 가치에 대해 핑커와 정반대의 결론을 구체적으로 도출했습니다. 그는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반다 제도 주민들의 학살을 명령했습니다. 이 작전에는 50척의 함선과 2,000명의 병력(80명의 일본 로닌, 즉 주군 없는 사무라이 용병 포함)이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15,000명의 원주민 '무역 파트너' 중 90%를 축출하거나 **"살해, 생포 또는 노예화"**했습니다. 이러한 "반다 제도 인구의 거의 완전한 전멸은 명백한 제노사이드 행위였다"라고 2012년 《제노사이드 연구 저널》의 한 논문은 결론지었습니다. 고시의 책 제목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향신료'는 육두구 몇 알만으로도 "집이나 배 한 척을 살 수 있을" 만큼 가치가 높았습니다. 슬프게도 이는 쿤의 '온화한 상업' 제노사이드가 매년 5,000명의 노예를 희생시키면서도(그 '온화한 상업'의 조건 아래에서 '노동력'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탐욕스러운 이익을 창출했음을 의미합니다. ++ Coen 말은 Pinker와 같이 추상적인 이론 따위를 만들기 위한것이 아니엇다. 그는 '무역 상대방의 생명에 대한 시각에서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Coen은 독점권의 확보을 위해 반다 섬 주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은 50 척의 선박과 2,000 명의 남자(80 명의 일본인 낭인- 무자비한 사무라이 용병- 포함)이 동원되엇고 15,000 명의 원주민 무역 파트너 중 90 %를 추방, 살해, 체포 또는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반다 군도의 인구 거의 대부분의 완전한 전멸은 명백한 제노사이드(대량 학살) 행위에 해당한다(Journal of Genocide Studies의 2012 년 논문의 결론). Ghosh의 책의 저주받은 향신료(넷메그)는 매우 가격이 높아 넉멕(육두구) 한줌이면 집이나 배를 살 수 있엇다. 이런것은 안타깝게도 Coen의 "신사적인 상업"의 제노사이드는 ( Pinker 의 견해와는 매우 다르게) 탐욕스러운 이익을 남겼기 위해 연간 5,000명의 노예를 희생시켯음을 의미한다(신사적인 상업적 조건하에서의 노동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Pinker isn’t wrong in reporting Enlightenment views. Economist Albert Hirschman, in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an influential book on the long process of alchemizing the once-deadly vice of avarice into plainly-rational “self-interest” during the rise of early capitalism, confirms there was “much talk… about the douceur of commerce.” Douceur translates to “sweetness, softness, calm, and gentleness… the antonym of violence.” Hirschman and Pinker cite a long list of Enlightenment luminaries, for instance, Kant in 1795 wrote that “The spirit of commerce … can not exist side-by-side with war.” Pinker concurs, “commercial powers …tended to favor trade over conquest.” 핑커가 계몽주의 시대의 견해를 전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초기 자본주의가 부상하던 시기, 한때 치명적인 악덕이었던 탐욕을 명백히 합리적인 '자기 이익'으로 연금술처럼 변화시킨 긴 과정을 다룬 영향력 있는 저서 『욕망과 이익(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에서 경제학자 앨버트 허쉬먼은 당시에 **"상업의 감미로움(douceur)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음을 확인해 줍니다. 'Douceur'는 '달콤함, 부드러움, 고요함, 그리고 온화함'을 뜻하며, '폭력'의 반대말입니다. 허쉬먼과 핑커는 수많은 계몽주의 석학들을 인용합니다. 예컨대 칸트는 1795년에 "상업 정신은 전쟁과 공존할 수 없다"라고 썼습니다. 핑커 또한 이에 동의하며 **"상업 강대국들은 정복보다 무역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Pinker의 계몽주의 관점이틀린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 앨버트 허쉬먼(Albert Hirschman)은 저서 "열정과 관심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에서 -초기 자본주의의 발흥기때 한때 치명적이었던 탐욕의 악덕을 지극히 합리적인 '자기 이익'으로 연금술처럼 변화시킨 긴 과정을 다룬 영향력 있는 책- "상업의 감미로움(Douceur)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음을 확인햇다. 감미로움이란 달콤함, 부드러움, 평온, 신사다움 따위의, 폭력과는 정 반대어로 번역하엿다..Hirschman와 Pinker는 많은 계몽주의의 석학들을 인용하엿다. 예를 들면, 1795년 칸트는 『상거래 정신은 ... 전쟁과 병존 할 수 없다.』라고 썼다. 핑커는 이말에 동의하고, 『상업적 강대국은... 정복보다 무역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썼다. But this majestic myth-making of modernity—the Enlightenment as a triumph of rationality and humanism—must not be allowed to mask that the Age of Reason ran parallel to and often justified the vast violent plunder of imperial economics (now often euphemistically called “free trade”). One reason this hushed-up history matters is that even today economic “rationality” and plunder often remain partners in crime. For all of Pinker’s elegant-stats-wielding elite-soothing sermons that “in fact a free market puts a premium on empathy,” there was little empathy, empirically evident, for the likes of the Banda Islanders. Or for many millions more lives ended or blighted by “gentle commerce” and “free trade,” which as we’ll see could materialize at your border in the form of a genocidal corporate army bent on “premium-empathy”-ing your way of life into your own blood-soaked dust. 하지만 이 장엄한 근대의 신화 만들기—계몽주의를 이성과 휴머니즘의 승리로 묘사하는 것—가, '이성의 시대'가 제국주의 경제의 방대한 폭력적 약탈(오늘날 흔히 **'자유 무역'**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불리는 것)과 나란히 진행되었으며 종종 이를 정당화했다는 사실을 가리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은폐된 역사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오늘날에도 경제적 **'합리성'**과 약탈이 여전히 공범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유 시장은 공감을 중시한다"라며 정교한 통계를 휘둘러 엘리트들을 달래는 핑커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반다 제도 주민들 같은 이들에게 공감이 발휘되었다는 실증적 증거는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온화한 상업'과 '자유 무역'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삶이 망가진 수천만 명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들은 당신의 국경에 나타나 **'공감의 가치'**를 앞세워 당신의 삶의 방식을 피로 물든 먼지로 바꾸어 놓으려 했던 제노사이드적 기업 군대의 모습으로 실체화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엄한 근대성 신화만들기가 -계몽주의를 합리성과 휴머니즘의 승리로 묘사하기가- (계몽주의의) 이성의 시대가 제국주의 경제학의 광대한 폭력적 약탈과 병존하엿고 종종 이러한 약탈을 정당화시켯다는 것을 감추게 허용해서는 않된다(이 제국주의 경제학의 폭력적인 약탈은 오늘날에는 '자유무역'이라 완곡하게 불린다). 이런 감춰진 역사가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오늘날에도 경제적 '합리성'과 "약탈"이 여전히 공범관계에 잇는 경우가 많기때문이다. 우아한 통계 자료들을 휘둘러 엘리트들을 달래주는 -사실, 자유시장은 공감능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는 - Pinker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반다 섬에서 학살된 사람들과 같은 이들에게 "공감"이 발휘되엇다는 실증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 또한 '신사적인 상업'과 '자유무역'으로 죽엇거나 삶이 망가졋을 수백만 명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렇다.. 앞으로 살펴보겟지만, 이런것들은 "당신의 삶의 방식을 '프리미엄급 공감'으로 포장해 피바람 부는 먼지로 만들어버리려 혈안이 된 제노사이드적 기업 군대의 형태로 당신의 나라에서도 시체화되곤 햇다. (--자유 시장 경제에서는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불편을 겪는지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공감)이 결국 비즈니스의 성공과 혁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공감 능력이 매우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는 주장 따위는 아무런 실증적인 증거가 없는 주장이고. 겉으로는 '고객의 니즈를 이해한다(공감)'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를 동사형(-ing)으로(“premium-empathy”-ing)표현해 조롱하고 있습니다. ) 이런책은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에겐 경제개발, 나라의 부강 정도로면 열씸히 세뇌된 그 현대화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냉정하게 알아 볼 수 잇는 내용이 들어 잇습니다. 본 글의 계속하여 지적 하겟지만, 계몽사상과 현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이나 비판등은 특히 후발 개발 도상국들이나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무시되거나 오히려 반드시 흉내내거나 찬양 찬송할 덕목으로 쇄뇌 되어잇습니다. Consider what classical-liberalism’s gentle-commerce blessings brought to the basic business of staving off starvation. As presented in Pinker’s brand of rigorous rationality, which seems to require boiling history’s byzantine complexities down to whatever sort of weak grasp can be gained by glancing at “the numbers.” Dispositive data should preferably be plotted on a now rhetorically powerful sexy chart or failing that, one should squeeze hyper-complex histories into spreadsheet-like tables with columns for nifty swift numerical comparisons. For instance, the Deadliest Disasters of All Time table on page 195 of Pinker’s Better Angels of Our Nature. 고전적 자유주의의 '온화한 상거래(gentle commerce)'가 굶주림을 면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가져다준 축복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스티븐 핑커 식의 엄격한 합리주의 안에서 제시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의 복잡다단함을 "수치"를 훑어보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빈약한 이해 수준으로 축소해버리는 듯합니다. 결정적인 데이터는 가급적이면 수사적으로 강력하고 매혹적인 도표로 그려져야 하며, 그것이 안 된다면 초복잡한 역사들을 멋진 수치 비교가 가능한 칸들이 있는 스프레드시트 같은 표로 욱여넣어야 합니다. 핑커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195페이지에 있는 '역대 최악의 재앙들' 표가 그 예입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신사적인 상업"이 굶주림을 막는 기본적인 문제에 가저다준 축복들을 생각해보자.(역설법) 핑커 특유의 엄격한 합리성으로 표현되엇듯이, 이런방식은 역사의 비잔틴적 복잡성을, "숫자"를 훑어보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어설픈 이해 수준으로 단순화 시켜 버린듯 하다. 결정적인 데이터는 이제 수사적으로 강력하고 섹시한 도표로 재치잇게 그려저야 하며, 지독하게 복잡한 역사를 멋진 수치 비교가 가능한 칸들이 있는 스프레드시트 같은 표로 욱여넣어야 한다. 예를 들어, Pinker 의 "Better Angels of Our Nature"의 195 페이지에있는 "역대 최악의 재앙표"가 그런 예이다. This lethal league table of tribulations has just two entries explicitly called “Famines.” At number two “Mao Zedong (mostly government-caused famine)” with 40,000,000 deaths, and at number 12 “British India (mostly preventable famine)” at 17,000,000 deaths. Pinker also provides figures adjusted for relative population growth, which makes the adjusted British-in-India famine number 35,000,000. That’s deadlier than World War I (15,000,000) and many-times more murderous than the Nazi holocaust (6,000,000). Pinker blames Mao’s “harebrained schemes” which he feels illustrate how “utopian leadership selects for monumental narcissism and ruthlessness.” But nowhere does Pinker note that, as I’ll show, those Brits-in-India famines were policy-driven and explicitly justified by liberal free market doctrine. These “enlightened” imperial policies were implemented by impeccably elegant elites selected for at least industrial-scale ruthlessness, if not also monumental statue-seeking narcissism. Surely such colossal crimes should weigh against “gentle commerce” in history’s moral scale? 이 치명적인 재앙들의 리그 테이블에는 명시적으로 **'기근'**이라 불리는 항목이 단 두 개뿐입니다. 2위는 4,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마오쩌둥(주로 정부가 초래한 기근)"**이며, 12위는 1,7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영국령 인도(주로 예방 가능했던 기근)"**입니다. 핑커는 상대적인 인구 증가율을 조정한 수치도 제공하는데, 이에 따르면 인도 내 영국발 기근의 조정 사망자 수는 3,500만 명에 달합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1,500만 명)보다 치명적이며, 나치의 홀로코스트(600만 명)보다 수 배나 더 살인적인 수치입니다. 핑커는 마오쩌둥의 "터무니없는 계획"을 비난하며, 이것이 어떻게 "유토피아적 지도력이 기념비적인 자기애와 무자비함을 선택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핑커는 인도 내 영국발 기근이 정책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자유 시장 교리에 의해 명시적으로 정당화되었다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계몽된" 제국주의 정책들은 기념비적인 동상을 세우려는 자기애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산업적 규모의 무자비함을 지닌 우아한 엘리트들에 의해 집행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거대한 범죄들은 역사의 도덕적 척도에서 '온화한 상업'의 가치와 대조하여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치명적인 재앙의 리그 테이블에는 명시적으로 "기근"이라 표시된 항목은 두개 뿐이다. 2 위는 4000만명의 사망자를 낸 마오 쩌둥 (대부분 정부가 초래한 기근에 의한 사망)이며,12 위는 1700만 명이 사망자를 낸 영국령인도 (대부분 예방 가능햇던 기근)이다. Pinker는 상대적 인구 증가에 맞게 조정된 수치도 제시햇다.이 조정된 숫치에 따르면 영국령 인도의 아사자수는 35,000,000이 된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15,000,000명)보다 더 치명적이고, 나치의 대학살(6,000,000명)보다 수십배 더 잔인한 숫치다. (핑거는 영국 통치기 인도 기근(British-led famines in India, 1870년대~1890년대)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당시 인구 대비 비율로 조정했을 때, 오늘날의 인구 기준으로 약 3,500만 명에 해당한다고 계산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들을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기 위한 핑커만의 통계적 접근 방식입니다. ) 핑커는 마오쩌둥의 '무모한 계획'을 비난하엿는데, 이는'유토피아 지도부가 얼마나 엄청난 나르시즘과 무자비함을 선택하는지를 보여준것이다 고 생각햇다. 그러나, 앞으로 이야기 될 것이지만, 영국영 인도의 기근이 자유주의 시장 교리에 의해 정책적으로 주도되엇고 명시적으로 정당화되었다는 것을 핑커는 어디에도 말 하지 않앗다. 이러한 "계몽된" 제국주의 정책은 완벽하게 우아한 엘리트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이들은 기념비적인 동상을 세우려는 나르시시즘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산업적 규모의 무자비 함을 위해 선정된 자들이엇다. 그런 거대한 범죄는 역사의 도덕적 척도로써 '신사적인 상업' 의 가치와 대조하여 반드시 고려 되어야 한다. Plus ‘Pinkering’ (rationally optimistic number-narrowed thinking) too easily hides how imperial “free market” policies contributed to the series of revolutions that culminated in Mao, triggered by those paragon gentle-commerce programs known as the Opium Wars (1839-1860). Britain’s noble narco-capitalist armed forces wrecked China’s multi-millenia old social fabric, which centrally featured famine prevention infrastructure. This vast opulence-enabling opium operation was run by the most successful narcotics gang in history (these Brit nobles were O.G. drug kingpins). These sorts of intricately entangled causal interconnections are easily lost in neatly labeled “numbers” (under a risible ruse of rigor). Historian Mike Davis reports Brit-ruled Indian famine deaths at 12 to 29 million, in his book Late Victorian Holocausts. He explicitly blames the “imposition of free-trade,” noting that these millions were killed “in the golden age of Liberal Capitalism.” The first public reports in February 1878 by journalist Robert Knight declared British officials were guilty of “multitudenous murder.” 게다가 '핑커링(Pinkering)'(수치에만 매몰된 합리적 낙관주의적 사고를 영어의 진행형을 사용 빈정거림)은 제국주의의 '자유 시장' 정책이 어떻게 마오쩌둥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혁명에 기여했는지를 너무나 쉽게 은폐합니다. 이 혁명들은 '온화한 상업' 프로그램의 전형으로 알려진 **아편전쟁(1839~1860)**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영국의 고결한 마약 자본주의 군대는 기근 방지 인프라를 핵심으로 하던 중국의 수천 년 된 사회적 구조를 파괴했습니다. 이 거대한 부를 가능케 한 아편 사업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마약 조직(영국 귀족들은 '원조 마약 왕'들이었습니다)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러한 복잡하게 얽힌 인과적 연결 고리들은 엄격함을 가장한 가소로운 수법 아래, 깔끔하게 라벨이 붙은 '수치' 속에서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그의 저서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Late Victorian Holocausts)』에서 영국 치하 인도의 기근 사망자 수를 1,200만 명에서 2,900만 명으로 보고합니다. 그는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사망했음을 지적하며, 그 원인이 **"자유 무역의 강요"**에 있다고 명시적으로 비난합니다. 1878년 2월, 언론인 로버트 나이트(Robert Knight)는 최초의 공개 보도를 통해 영국 관리들이 "다수에 대한 살인(multitudenous murder)" 죄를 지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게다가 핑커링(Pinkering)( 수치에만 매몰된 합리적 낙관주의적 사고를 영어의 진행형을 사용 빈정거림 )은 제국주의적인 '자유시장' 정책이 어떻게 마오쩌둥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혁명에 기여했는지를 너무 쉽게 은폐한다. 마오의 혁명은 '신사적 상업' 프로그램의 전형으로 알려진 **아편전쟁(1839~1860)**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의 고귀한 "마약(아편) 자본주의" 의 군대는, 기근 방지 장치를 핵심으로 한 중국의 수백년을 이어온 오래된 사회적 구조를 파괴했다. (과거 중국 왕조들은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상평창(常平倉)'과 같은 국가 곡물 비축 시스템을 고도로 발달시켰습니다. 풍년일 때 곡물을 사들여 저장했다가 흉년일 때 저렴하게 풀어 기근을 막는 인프라였습니다. 영국의 군사적 압박과 아편 무역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이러한 기근 방지 시스템이 작동을 멈췄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국가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하면서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엄청난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아편 전쟁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마약 갱단에 의해 운영 되었다 (이 영국 귀족들은 종경받는 원조 마약왕들이엇다.)..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과관계는, 엄격함을 가장한 가로소운 수법아래 깔끔한 라벨이 붙은 숫치의 치장표 속에서 쉽게 사라저 버린다.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자신의 저서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에서 영국이 통치하는 인도에서의 기근 사망자가 1200만 명에서 2900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 수백만 명이 자유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사망하엿음을 지적하면서 "자유 무역의 강제적인 부과"가 원인이라고 분명하게 비난했다. 1878년 2월 언론인 로버트 나이트에 의한 최초로 공개된 보고서에서는 영국 관리들은 "다수에 대한 살인"의 죄를 지엇다고 선언했다. ==경제학이 오늘날의 경제"난"이 되어 버린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로, 경제학의 계량화을 말 하는 사람들이 잇습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스 피카티도 그중 한 사람으로 볼수 잇습니다. 이런 경제학의 수리 중독은 ...무식한 이공계들의 사랑도 미적분을 하겟다는 호기와 다를것이 없고, 세상에는 수리와 통계로 표현될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고, 특히 경제에도 그렇습니다. 필자는 본 글에서 역사의 비잔틴적 복잡성을 "숫자"를 훑어보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어설픈 이해 수준으로의 단순화 를 이야기 하며, 수리와 통계에 대한 중독을 빈정거렷습니다. "사망자 숫자가 적엇쓰니 더 평화로웟네" 따위의 역사에 대한 얕은 이해는 gdp만보고 이 나라가 더 잘 사네 따위의 경제학적인 이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티븐 핑커 같은 학자들 조차도 그들이 사용하는 '도표'와 '수치'가 실제 역사의 참혹함과 복잡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을 무시해 버린다면, 우리네들 같은 범인들은 얼마나 "숫자의 단순화의 늪","논리의 단순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잇는지를 쉽게 알 수 잇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우리 탓만은 아닙니다.... 그 잘난체 하는 학자놈들, 정치인들, 인푸르엔서들의 괴기적인 단순화와 선형적인 패가르기가 사회악의 근원이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종국적인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잇습니다. Mike Davis Applying Pinker’s scaling factor To Davis’s figures, we get the equivalent to 24 to 58 million 20th-century-scaled deaths (four to ten times the size of the Nazi holocaust). During all this the decorously dining Downton-Abbey set exported grain to world markets as millions starved. Market “efficiency,” then as now, means allocating resources to whomever pays most. But fear not, noble Brits acted quickly to protect what mattered most to them— their beloved free market. They imposed the “Anti-Charitable Contributions Act of 1877, outlawing private relief that might interfere with the “market-fixing of grain prices.” The only aid permitted was at horrifyingly harsh hard labor camps, such as in Madras, which offered fewer daily calories than Buchenwald. As Davis writes, while “Asia was starving the United States was harvesting the greatest wheat crop in world history… and in California’s Central valley worthless surplus wheat was burned”—malicious market morality in action. To understand the frame of mind of this enchanted circle of imperial overlords, consider that in 1874, those exemplary classical liberals at The Economist wrote that it was unwise to encourage “indolent Indians” to believe that “it is the duty of the Government to keep them alive.” Lord Salisbury,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felt it was a mistake to spend “money to save a lot of black fellows.” 데이비스의 수치에 핑커의 비율 조정 계수를 적용하면, 20세기 규모로 환산했을 때 2,400만 명에서 5,800만 명이 사망한 것과 같습니다(나치 홀로코스트의 4배에서 10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나는 동안, '다운튼 애비' 스타일의 품격 있는 식사를 즐기던 영국 상류층은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도 곡물을 세계 시장으로 수출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장의 **'효율성'**이란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이에게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결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그들이 사랑하는 자유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곡물 가격의 **'시장 결정'**을 방해할 수 있는 민간 구호 활동을 불법화하는 **'1877년 반(反)자선 기부법'**을 시행했습니다. 허용된 유일한 구호는 마드라스와 같은 끔찍할 정도로 가혹한 강제 노동 수용소뿐이었는데, 그곳에서 제공된 하루 칼로리는 **부헨발트(나치 수용소)**보다 적었습니다. 데이비스가 기술했듯이, "아시아가 굶주리는 동안 미국은 세계 역사상 최대의 밀 수확을 거두고 있었으며... 캘리포니아 중앙 계곡에서는 처치 곤란한 잉여 밀이 불태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시장 도덕성이 악의적으로 작동한 사례입니다. 이 제국주의 지배층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1874년 당시 《이코노미스트》의 전형적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나태한 인도인들"에게 "그들을 살려두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믿게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기록한 점을 참고하십시오. 또한 당시 인도부 장관이었던 솔즈베리 경은 [유색인종들]을 구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했습니다. ++핑커의 측정치를 데이비스의 수치에 적용하면, 20세기 환경에서는 2,400만 명에서 5,800만명에 해당하는 사망자 숫치를 얻게 된다 이는 나치 대학살의 4배에서 10배에 해당된다. 이 비극의 모든 기간동안, 우아하게 식사나 즐겻던 Downton-Abbey(영국의 역사 tv드라마의 주인공등-영국상류층)들은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세계 시장에 곡물을 수출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시장의 '효율성'은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귀한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그들이 사랑하는 자유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재빨리 행동했다. 그들은 '시장의 곡물 가격을 결정을 훼손하는 개인적인 자선을(구제) 금지하는 '1877년 자선 기부 금지법'을 시행했다. 유일하게 허용된 개인적인 자선(구제)는 부헨발트(나찌의 강제수용소)보다도 적은 하루 칼로리를 제공하고 잇엇던 마드라스(지금의 인도 차이나)와 같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혹한 노동 수용소 뿐이였다. (당시 영국 식민 당국은 기근 구제를 '자선'이 아닌 '경제적 거래'로 보았습니다. 극심한 기아 상태인 인도인들에게도 노동의 대가로만 음식을 제공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무상 구호가 나태함을 부른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이는 오늘날에도 자유주의자들이 떠 받들고 잇는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이들의 복지에 대한 증오는 역사적 산물일 뿐만 아니라, 가혹한 서구 문명의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추앙와 교조적인 복종 때문입니다.. 자유, 자유주의는 정신질환입니다. 인도인들은 구호를 받기 위해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진 노동 수용소(Relief Works)로 가야 했습니다. 마드라스 는 당시 남인도 기근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서 굶주린 사람들은 도로 건설이나 철도 부설 같은 무거운 육체노동에 투입되었습니다. 이곳의 노동 수용소에서 제공된 이른바 '템플 배식(Temple Wage)'은 하루 약 1,625kcal 미만(일부 기록에는 그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등은 당시 영국이 제공한 식량이 나치 수용소의 식단보다 칼로리가 낮았으며, 성인 남성의 기초 대사량조차 충족하지 못해 결국 '노동을 통해 서서히 진행된 학살'이었다고 비판합니다.) 데이비스가 쓴 것처럼, "아시아가 굶주리고 있는 동안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밀 작물을 수확하고 있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센트럴 밸리에서는 쓸모없는 잉여 밀을 불에 태워버렷다. 악질적인 "시장의 도덕"이 작용하고 있엇다. 이 제국의 군주들의 사고을 이해하기 위해서, 1874년에 『이코노미스트』의 전형적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게으른 인디언들"에게 "그들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믿도록 부추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기록한 점을 생각하라. 인도의 국무장관 솔즈베리 경은 "흑인들을(유색인종) 구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실수엿다"고 생각햇다. (market Morality (시장 도덕):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 정의롭다"는 당시의 자유방임주의 경제 윤리를 의미합니다. 아시아가 기근으로 고통받을 때 미국은 사상 최대의 풍작을 누렸습니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굶어죽어가고 잇는 사람들의 고통 보다는 시장 가격을 방어하기 위해 남는 식량을 불태워버리는 잔인한 경제 논리를 선택한 것이지요. 오늘날의 남아도는 식량을 버리거나 불태우지 못하게 금지한 법은 이런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제정되엇습니다..그런데 이 법이 지켜지고 잇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Lord Salisbury Many Brits weren’t nearly as callous as the glamorous imperial ghouls of their governing elite. As Shashi Tharoor notes in his book Inglorious Empire, a piece in The Times of London lamented that “the Viceroy had interposed to repress the impulses of charity.” And relief fund of “£820,000 was raised from millions of small contributions by individuals, schools, churches, and regiments throughout the British world.” Viceroy Lord Lytton, whose main qualification for governing India was that he was Queen Victoria’s favorite poet, called the fund a “complete nuisance.” Tharoor concludes that “the facts of British culpability even at the height of their ‘civilizing mission’ … are overwhelming” but often still glossed over. 많은 영국인이 통치 엘리트층의 매혹적인 제국주의적 악귀들만큼 무자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시 타루르(Shashi Tharoor)**는 그의 저서 『영광 없는 제국(Inglorious Empire)』에서, 당시 런던 《타임스》의 한 기사가 "부왕(Viceroy)이 자선이라는 인간적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개입했다"라고 한탄했음을 언급합니다. 또한 "영국 전역의 개인, 학교, 교회, 군 부대 등으로부터 수백만 건의 소액 기부가 모여 82만 파운드의 구호 기금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인도를 통치할 주된 자격이 '퀸 빅토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다는 점뿐이었던 부왕 **리턴 경(Lord Lytton)**은 이 기금을 "완전한 골칫거리"라고 불렀습니다. 타루르는 "영국이 그들의 '문명화 임무'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저지른 과오의 사실들은... 압도적이다"라며,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여전히 자주 겉치레로 가려지고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많은 영국인들이 지배 엘리트들의 찬란한 제국 주의 악귀들만큼 냉담하지는 않았다. 샤시 타루어(Shashi Tharoor)가 자신의 저서 "수치스러운 제국(Inglorious Empire")에서 지적했듯이, <런던 타임스The Times of London>의 한 기사는 "인도 총독이 자선의 충동을 억누르도록 방해햇다"고 탄식했다. 영국 전역의 개인, 학교, 교회, 등등에서 수백만 건의 소액 기부로 82만 파운드의 구호 기금이 조성되었다.Lord Lytton 총감은 이 펀드는 완전한 골치덩어리라고 햇다..이자가 인도의 통치자가 될수 잇엇던 주요 자격은 빅토리아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Tharoor는 "문명화의 사명"을 내세우던 절정기에서도 영국이 저지른 과오는절대적이엇지만 종종 여전히 얼버무리고 넘엇갓다고 결론을 내렷다.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리튼 경(Lord Lytton)은 철저한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신봉자였습니다. 그는 시장에 정부가 개입해 식량을 나눠주는 것이 경제 원칙을 해친다고 믿었습니다...아사자들에 대한 구호또한 시장의 원칙을 방해한다고 보앗습니다. 그래서 민간들이 기금이나 물자를 모아 기근 피해자들에게 '너무 관대한' 구호를 베풀려 할 때, 오히려 이를 방해하거나 제한했습니다. 인도 현지정부의 구호 사업도 금지시켯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근본적인 가치 보다 "경제적 교리"나 "시장도덕"등의 과정과 절차를 우선시하는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자유주의의 신념"이 구현된 것이지요. =="문명화의 임무", "명백한 운명", "백임들의 신으로 부터 무여 받은 의무(짐)" 등이 의미는 완전히 꼭 같습니다.. 다른소리는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이 어떻게 이런 것에 대한 점검도 없이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그리도 쉽게 받아 들일수 잇엇는지......그냥 경이로움을 느낄 뿐입니다. 무식은 죄악이라고 햇지요? 우리의 건국자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 잇엇다 하더라도 그런 엄청난 죄악은 저지르지 않앗을 것입니다... 무식하니 정의감에 쩌러 독립운동이나 처 한다며 쏴돌아 다닌것 말고는 대가리에 처 든 것이 없쓰니 크고 강한 외모만 보고 흉내내기나 처 한 것이지요.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 건국자들의 과오는 고스란히 민주주의를 민주주의화를 통해 대 물림하여 내려오고 잇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낸 그 찬란한 경제발전의 이면엔는 미국과 멕시코 칠레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빈부격차가 오히려 발전을 위한 자극제로 포장되어 자리하고 잇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가장 큰 빈부격차를 벌렷고, 가장 큰 부동산 투기질이 일어나게 하엿고, 가장 많은 비 정규직 노동자를 만들어낸 사람이 진보, 민주주의 라는 포장으로 존경을 받고 잇는 현실은 ...........그저 꿈 만 같습니다. Lord Lytton Shashi Tharoor....이 사람의 책 한권 정도는 읽어 두시기 바랍니다. Why, one wonders, aren’t these famines rightly called Imperial Holocausts? British Holocausts? Free Market Holocausts? Liberal Holocausts? Corporate Holocausts? Capitalist Holocausts? 사람들은 궁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기근들을 마땅히 제국주의 홀로코스트, 영국발 홀로코스트, 자유 시장 홀로코스트, 자유주의 홀로코스트, 기업 홀로코스트, 또는 자본주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이런 기근을 '제국의 홀로코스트', '영국의 홀로코스트,'자유 시장 홀로코스트, 자유주의 홀로코스트? 기업 홀로코스트? 자본주의 홀로코스트? 라고 부르지 않는가?? Readers repelled by linking that term to much-lauded much-laundered liberalism, should recall that ‘holocaust’ means any mass destruction. It derives from the Greek for a wholly burnt sacrificial offering (hence many Jews use the term Shoah —catastrophe — which lacks godly links). 그 용어를 그토록 찬양받고 미화된(세탁된) 자유주의와 연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라면,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본래 '대규모 파괴' 전반을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전체를 태워 바치는 제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이런 이유로 많은 유대인은 신성한 제물이라는 의미가 배제된 히브리어 **'쇼아(Shoah, 대재앙)'**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저런 용어를 그토록 찬사를 받고, 많이 세탁된 자유주의와 연관시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은 '홀로코스트'가 본래 "어떤 대량 파괴"을 의미하는 단어 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전체를 태워 바치는 제물을 말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엇다(이러한 이유로 많은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신성한 제물이라는 의미가 없는(신과의 관계가 배제된) Shoah {catastrophe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In his history of the global food system, Animal, Vegetable, Junk, Mark Bittman notes that free-market loving classical liberals lorded it over a 3,000% increase in the Indian famine rate—from less than one famine per century to one every three years. Explicitly invoking the name of rational free market efficiency, Brits violently disrupted ancient practices of storing local food reserves which had for centuries enabled Indian elites to discharge duties to feed their poor in times of famine. And ruthlessly increased British taxation had eviscerated the peasantries purchasing power (Tharoor calls this “the culmination of two centuries of colonial cruelty”). 글로벌 식품 시스템의 역사를 다룬 저서 『동물, 식물, 정크(Animal, Vegetable, Junk)』에서 마크 비트먼(Mark Bittman)은 자유 시장을 사랑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인도 내 기근 발생률을 3,000%나 급증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세기당 한 번 미만이었던 기근이 3년마다 한 번꼴로 일어나는 수준이 된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합리적인 자유 시장 효율성'**이라는 명분을 명시적으로 내세워, 수세기 동안 인도 엘리트들이 기근 시기에 가난한 이들을 먹여 살리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해주었던 현지 식량 비축 관습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또한 무자비하게 인상된 영국의 조세 제도는 농민들의 구매력을 완전히 박살 냈습니다(타루르는 이를 **"2세기에 걸친 식민지 잔혹 행위의 정점"**이라 부릅니다). ++마크 비트먼은 Animal, Vegetable, Junk: A History of Food, from Sustainable to Suicidal, 에서 자유시장을 사랑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인도의 기근발생율을 3,000퍼센트 이상 증가시켰다고 지적햇다. 세기당 1건 미만의 기근이 3년마다 1건의 기근으로 증가한 것이다. 분명하게 "합리적인 자유 시장 효율성"의 이름으로, 영국인들은, 수세기 동안 인도 엘리트들이, 기근의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각 지역의 식량를 저장하는 고대 관행을 폭압적으로 파괴 시켯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인상된 영국의 세금은 농민들의 구매력을 소멸시켯다(Tharoor 는 이것을 '2세기에 걸친 식민지 잔혹성의 정점'이라고 불럿다). Mark Bittman Of course, these stupendous century-spanning imperial sins had contemporary critics. For instance, Thomas Paine of American revolution-launching pamphlet fame, wrote that “the naked and untutored Indian, is less Savage than…King of Britain.” His incendiary ink-fire inflamed the colonial settlers against the “crowned ruffians” of royalty that ruthlessly ruled such that “every spot of the old world is overrun with oppression.” Paine skewered the supposed divine right of kings, by calling William the Conqueror “a French bastard landing with an armed banditti …[to] establish himself king against the consent of the natives.” Lets skip the ire-raising ironies of Paine promoting a genocidal invasion without securing the consent of American natives, to focus on his divine debunking of royal rights: he concludes that William the Conqueror was “in plain terms a very paltry rascally original—[whose claim to kingship] certainly hath no divinity in it.” 물론 수세기에 걸친 이 거대한 제국주의적 죄악에 대해 당대에도 비판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혁명을 촉발한 팸플릿으로 유명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은 "벌거벗고 교육받지 못한 인도인이... 영국의 국왕보다 덜 야만적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의 선동적인 필력은 "구세계의 모든 곳이 압제로 가득 차 있다"라고 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통치했던 왕실의 "왕관 쓴 악당들"에 대항해 식민지 정착민들의 분노를 타오르게 했습니다. 페인은 정복왕 윌리엄을 "무장한 강도 떼와 함께 상륙하여... 원주민의 동의 없이 스스로 왕이 된 프랑스 서출"이라고 부르며, 이른바 왕권신수설을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페인이 미국 원주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제노사이드적 침공을 장려했다는 점이 불러일으키는 분노 섞인 아이러니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왕권의 신성함에 대한 그의 폭로에 주목해 봅시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이 "한마디로 매우 비열하고 불량한 원조 악당일 뿐이며, [그의 왕위 계승 주장에는] 분명히 어떠한 신성함도 깃들어 있지 않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물론, 세기에 걸친 이 엄청난 제국주의적 죄악에 대해 동시대의 비평가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혁명(독립)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햇던 팜플렛(토머스 페인의 "상식론"을 의미)으로 명성이 높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은 "벌거벗고 교육받지 않은 인디언은 ...영국의 왕보다 덜 야만적이다"라고 썼다. 그의 선동적인 인쇄물은 영국 왕족의 '왕관을 쓴 악당들 에 대항하도록 식민지 정착민들을 자극했다, 그들 영국 왕족들은 '구 세계의 모든 곳에서 억압으로 넘쳐나리 만큼 무자비하게 통치했다".페인은 정복왈 윌리엄을 '영국 원주민들이 동의없이 왕이 되기 위해, 무장한 산적때들과 함께 영국에 상륙한 프랑스의 찌지리'라고 부르면서 영국왕의 신성한 권리를 빈정거렷다. 페인이 미국 원주민의 동의를 얻지 않은체 제노사이드적 침공을 장려 햇다는 점이 불러일으키는 분노하게 만드는 아이러니는, 왕권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반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우선 건너뛰자. 그는, 정복왕 윌리엄은 쉽게 말하자면 매우 비열하고 불량한 원조악당일 뿐이며 [그들의 왕위계승 주장] 은 그 어떠한 신성함도 깃들어 잇지 않앗다." 고 결론내렷다. Paine was disgusted by the “horrid cruelties exercised by Britain in the East Indies — How thousands perished by artificial famine.” His moral reflex here is laudable, but his numbers are a thousand times too small, and he got the guilty party slightly wrong: as Horace Walpole, son of a British Prime Minister wrote “We have murdered, deposed, plundered, usurped—nay, what think you of the famine in Bengal, in which three millions perished, being caused by a monopoly of the provisions by the servants of the East India Company”). Don’t forget Boston’s totemic tea-tossing was of East India Company shipments. Sadly, Paine’s deep political desire that such decorous dastardliness should “never, never be forgotten” has failed to hold up. Did your schools teach this history? That the private army of a corporation (twice the size of the king’s) killed millions to enforce “free trade” and “gentle commerce”? 페인은 "동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참혹한 잔혹 행위들—수천 명이 인위적인 기근으로 어떻게 스러져 갔는가"를 보며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도덕적 반사 신경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가 제시한 수치는 실제보다 천 배나 작았고 가해자 설정도 약간 빗나갔습니다. 영국 총리의 아들이었던 호러스 월폴(Horace Walpole)이 썼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살해하고, 폐위시키고, 약탈하고, 찬탈했다. 아니, 동인도 회사 직원들의 식량 독점으로 인해 300만 명이 사망한 벵골 기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스턴 차 사건의 상징적인 차 투척 대상이 바로 동인도 회사의 화물이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슬프게도, 이러한 품격 있는 비열함이 "절대,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된다"라는 페인의 깊은 정치적 염원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학교에서 이런 역사를 배웠습니까? 한 **기업의 사병(국왕 군대의 두 배 규모)**이 '자유 무역'과 '온화한 상업'을 강요하기 위해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페인은 "동인도에서 영국이 자행한 끔찍한 잔혹 행위들- 인재적인 기근으로 수천 명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며 혐오감을 느꼈다. 여기서 그의 도덕적 성찰은 칭찬받을 만하지만, 그가 말한 희생자의 숫자는 실제보다 천 배나 적고, 그는 가해자 설정도 약간 빗나갓다. 영국 총리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작가)이 썻듯이 "우리는 살해하고, 타도하고, 약탈하고, 빼앗았다.----아니다...동인도 회사 직원들의 식량 독점 때문에 3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벵골의 기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폴은 이 기근이 단순히 자연재해가 아니라,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직원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주장. 이들은 쌀과 같은 필수 식량을 독점하고 가격을 폭리하여 원주민들이 음식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주장, 월폴은 이 편지를 통해 영국이 인도에서 쌓은 부가 실제로는 수많은 인도인의 피와 굶주림 위에 세워진 것임을 강조하며 영국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 보스턴의 토템적인 차 집어 던지기의 그 차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선적물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라.(즉 동인도 회사에 대한 분노) 슬프게도, 그런 예의 바른 악랄함은 "절대, 결코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페인의 깊은 정치적 염원은 오래가지 못햇다...(이런것은 곳 잊혀졋다) 당신들의 학교에서 이런 역사를 가르쳤나?? 기업의 사병들이 (왕의 군대의 두 배)이 '자유무역'과 '신사적인 상업'을 구현하기 위해 수백만 명을 죽였다는 것을 가르쳣나?? 보스턴의 차 집어 던지기. Readers tempted to shake their heads at all this monumental moral ignorance and nakedly nasty nonchalance, while feeling assured that our Pinker-reading elite would never allow anything like any of the above to happen today should consider the global Covid immunization situation. Our greed-is-rational elite are again putting profits above saving lives by not lifting vaccine patent restrictions (Pinker’s pal Gates has played a leading far from philanthropic role in this). Millions of avoidable mostly-distant-dark-skinned deaths are again being offered for sacrifice on the altar of the almighty liberal god of greed. This horrific fiasco has been dubbed “vaccine apartheid” by many Global South advocates, including World Health Organization Director-General Tedros Adhanom Ghebreyesus, because of how deeply under-protected non-white poor nations remain. 이러한 엄청난 도덕적 무지와 노골적으로 추악한 무관심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핑커를 읽는 우리의 엘리트들이 오늘날에는 결코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는 독자라면, 글로벌 코로나19 예방 접종 상황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탐욕을 합리적이라 여기는 우리의 엘리트들은 백신 특허 제한을 해제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이윤을 다시 한번 우선시하고 있습니다(핑커의 친구인 게이츠는 이 과정에서 박애주의와는 거리가 먼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수백만 명의 죽음—대부분 멀리 떨어진 유색인종들—이 전능한 자유주의의 탐욕이라는 신의 제단에 다시금 제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비백신 빈곤 국가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두고,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를 비롯한 많은 글로벌 사우스 활동가들은 이 끔찍한 참사를 **'백신 아파르트헤이트(백신 인종격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모든 기념비적인 도덕적 무지와 노골적으로 추악한 무관심에 고개를 젖고 싶고, 핑커를 읽는 우리의 엘리트들은 오늘날에는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독자들은 오늘날의 세계적인 코로나 백신 접종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탐욕스러움이 합리적인 것이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엘리트들은 백신 특허 규제를 철폐하지 않음으로써..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이익을 다시한번 더 우선시하고 있다. (핑커의 친구 빌 게이츠는 이 문제에서 박애주의적인 역할과는 한참 거리가 먼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왔다). 피할 수 있었던 수백만 명의 죽음—대부분 멀리 떨어진 유색인종들—이 전능한 자유주의의 탐욕이라는 신의 제단에 다시금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dhanom Ghebreyesus)를 비롯한 많은 글로벌 사우스 활동가들은, 가난한 나라의 비 백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두고 이 끔찍한 대참사를, '백신 아파르트헤이트(vaccine Apartheid)'라고 불렀다. To be fair, we should note that those jolly jodhpur-clad classy Brits weren’t quite being racist in today’s sense. They were equally elegantly evil on an industrially deadly scale to their Irish neighbors. Davis writes “India like Ireland before it had become a Utilitarian laboratory where millions of lives were wagered against dogmatic faith in omnipotent markets.” Regarding the Irish famine, that cherished champion of classical liberalism John Stuart Mill wrote that “The Irish are indolent, unenterprising,” he feared “it may require a hundred thousand armed men to make the Irish people submit to the common destiny of working in order to live” (a position lately lampooned as: Let them eat liberty). Don’t forget Mill was for decades employed by the looting-Lords of the East India Company before entering Parliament as a Liberal. In case you haven’t kept track of the Irish Famine details, a million perished, two million fled, and Ireland’s population took 170 years to recover (achieved pre-famine levels only in 2021). 공정하게 말하자면, 승마 바지를 입은 유쾌하고 품격 있는 영국인들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웃인 아일랜드인들에게도 산업적 규모의 치명적이고 우아한 악행을 똑같이 저질렀습니다. 데이비스는 **"먼저 유린당한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인도 또한, 전능한 시장에 대한 교조적 믿음에 수백만 명의 생명을 판돈으로 건 공리주의의 실험실이 되었다"**라고 썼습니다. 아일랜드 대기근에 관해, 고전적 자유주의의 추앙받는 옹호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아일랜드인들은 나태하고 진취적이지 못하다"라고 썼으며, "아일랜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공동의 운명에 복종하게 하려면 10만 명의 무장 군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라고 우려했습니다(이 입장은 최근 "그들에게 자유를 먹게 하라"는 식으로 풍자되기도 합니다). 밀이 자유당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약탈을 일삼던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일랜드 대기근의 세부 사항을 잘 모르실 수도 있기에 덧붙이자면, 당시 100만 명이 사망하고 200만 명이 피난을 떠났으며, 아일랜드 인구가 대기근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는 170년이 걸렸습니다(2021년이 되어서야 회복되었습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조드푸르(승마용 반 장화 복장) 복장을 한 유쾌하고 품격잇는 상류층 영국인들이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그다지 인종차별적이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이웃 아일랜드인들에게, 산업적으로 치명적인 규모로 똑같이 우아하게 (인종차별 없이)악질적이엇다. 데이비스는 "이전의 아일랜드과 꼭 같이, 인도는, 전능한 시장에 대한 독단적인 믿음에 판돈으로 수백만 명의 목숨을건 공리주의 실험실이 되엇다"고 썼다. 아일랜드의 기근에 대해, 고전적 자유주의의 추앙받는 옹호자엿던 존 스튜어트 밀은 "아일랜드인들은 나태하고 진취적이지 못하다"고 썼다. "아일랜드인들이 살기위해 일하는공동의 운명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10만 명의 무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후 자유나 처 먹으라지 라는 식으로 풍자되고 잇다) 밀이 자유당으로 의회에 입성하기 이전 수십년 동안 동인도 회사의 약탈자 영주들에게 고용되어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아일랜드 기근의 세부 사항까지 잘 모른다면, 그냥 백만 명이 사망하고 2 백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낫쓰며 아일랜드 인구를 회복하기까지 170 년이 걸렸다. (2021 년에 기근 이전 수준으로 회복)는 것을 알아두라. ==="자유나 처 먹으라지(Let them eat liberty)": 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망언으로 와전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지"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생존권(배고픔)의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대책 대신 허울 좋은 **'자유주의(Liberty)'**나 설파하는 태도를 비꼬는 표현입니다 And, lest we forget, European elites also starved their own poor in the internal colonization process of enclosing the commons. Public lands used for collective benefit (enabling a “Golden Age” for European peasants) were privatized. This was part of the vast organized political effort to create and naturalize economic liberalism and emerging capitalism. As economic anthropologist Karl Polanyi writes in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eople of the countryside were pauperized” in “a revolution of the rich against the poor.” From 1500 to 1700 real wages fell 70%, starvation became common, and life expectancy fell from 43 to the low 30s (hitting 25 in the urban squalor of Blake’s “dark Satanic Mills,” he didn’t but could just as well have meant John Stuart). Polanyi provides extensive evidence that “There is nothing natural about laissez-faire free markets.”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도록 덧붙이자면, 유럽의 엘리트들은 **커먼즈(공유지)를 인클로저(사유화)**하는 내부 식민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가난한 동포들마저 굶주시게 했습니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며 유럽 농민들에게 '황금기'를 가능케 했던 공공 토지들이 사유화되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신흥 자본주의를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거대하고 조직적인 정치적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경제 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이를 **"빈민에 대항한 부자들의 혁명"**이라 칭하며 "농촌 사람들이 빈곤화되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1500년부터 1700년까지 실질 임금은 70% 하락했고, 기아는 일상이 되었으며, 기대 수명은 43세에서 30대 초반으로 떨어졌습니다(윌리엄 블레이크가 '어둡고 악마적인 공장들'이라 묘사한 도시 빈민가에서는 25세까지 추락했습니다.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그를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폴라니는 **"자유방임적 자유 시장에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라는 광범위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 그리고, 결코 잊지 마라...유럽의 엘리트들은 또한 공유지를 둘러싸는(인크러우저) 내부 식민지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가난한 사람들도 굶주리게햇다. 집단 이익을 위해 사용되엇던 공공 토지 (유럽 농민들의 '황금 시대'를 가능하게 함)는 사유화되엇다.. 이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신흥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자연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려는 방대한 조직화된 정치적 노력의 일환이였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변화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이를 "빈곤층에 대항한 부자들의 혁명"으로 "농촌 사람들은 가난해졌다"고 썼다. 1500~1700년에는 실질임금이 70%나 떨어졌고, 기아는 흔해졌으며, 기대수명은 43세에서 30세 이하로 떨어졌다( 월리엄 프레이크가 “dark Satanic Mills-어둡고 악마적인 공장- 이라 묘사한 도시지역의 기대수명은 25세엿다...그의 Satanic Mills의 S,M은 존 스튜어트 밀의 SM을 의미 하지 않앗지만,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잇다). 폴라니는 "자유방임적인 시장에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곤 없다"는 광범위한 증거를 제시햇다. --폴라니의 빈곤층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은 .....오늘날은 일반론입니다. 거꾸로의 혁명....따위는 너무 진부합니다.. 알랭 바데우는 지금의 서구 민주주의 체체가 바로 빈곤층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이라고 하엿고...이것을 오늘날의 파시즘이라고 하엿습니다.. 쉘던 울린은 ,,,전도된 전체주의 라는 말로...지금의 민주주의를 비판햇고...부자들의 빈곤층에 대한 혁명을 빈정거렷습니다. -미국의 체체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체다................아직도 이딴 개 소리를 씨불리는 등쉰쇗끼들이 잇습니다. 미국의 체체는 자본가와 때부자들에겐 철처한 사회주의이고 하층인민들에겐 철저한 시장의 경쟁을 강제 하는 2중 체제입니다.. 미국에서 때 부자들이 망햇다는 소리 소문이라도 들어 본 적 잇습니까?? 미국의 모든 체체는 월가의 부를 지켜 주기 위해서 작동하는 가장 완벽한 월가 사회주의 체체 입니다.............. 국민??....이것들은 4년 단위로 열씸히 표나 찍어 주는 진정한 븅융쉰 쇗끼들이지요.. 노무현교 똥파리때들 보세요.....똥파리 때들은 똥이 주식입니다.. 대한민국 역사 생긴 이후 가장 많은 빈부격차를 벌린 대통령은 노무현입니다...가장 더런 똥이지요.. 똥 파리가 똥에 환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지만,,,,,사람들에게-호모 싸피언스- 이런 똥과 똥파리때들은 참 지겹지요.. Here we must re-examine a view dear to many Pinker-parroting pious liberals and greedocrats alike, who feel certain that their own unbridled greed is just inalienably at the very heart of human nature. Polanyi debunks this as an anthropologically and historically ignorant self-serving projection. Many cultures have been studied that are not organized around unbridled individual greed (and there is no evidence of any of them having extraterrestrial origins). In sharp contrast to Enlightened European liberalism, Polanyi says ”as a rule, the individual in primitive society is not threatened with starvation unless the community as a whole is.” He cites three examples, South Africa’s Kaffirs (for whom “destitution is impossible: whosoever needs assistance receives it unquestioningly”), Canada’s Kwakitul tribe (“No Kwakitul ever ran the slightest risk of going hungry”) and pre Brit-blighted India. “Under almost every and any type of social organization up to about the beginning of 16th century Europe” a principle for freedom from starvation prevailed. Sadly the logic of “smashing up social structures in order to extract labor” under threat of starvation became standard “civilized” liberal market practice (as violently imposed in Ireland and India and many places beyond). 여기서 우리는 핑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건한 자유주의자들과 탐욕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애호하는 견해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억제되지 않은 탐욕이 인간 본성의 핵심에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폴라니는 이것이 인류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무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정당화하려는 투영일 뿐이라고 폭로합니다. 억제되지 않은 개인적 탐욕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은 수많은 문화가 연구되어 왔으며(그 문화들이 외계에서 기원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계몽된' 유럽식 자유주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폴라니는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의 개인은 공동체 전체가 기아에 직면하지 않는 한 굶주림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남아프리카의 부족 사례로, "빈곤이 불가능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 당연하게 도움을 받는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둘째는 캐나다의 콰키우틀 부족으로, "어떤 부족민도 굶주릴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사례는 영국 식민 지배 이전의 인도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6세기 초 유럽 이전의 거의 모든 사회 조직 유형"에서는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일랜드와 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폭력적으로 강요되었듯이, 기아의 위협을 이용해 "노동력을 추출하기 위해 사회 구조를 해체하는" 논리가 '문명화된' 자유 시장의 표준 관행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Pinker 추종자들의 경건한 자유 주의자들과 탐욕주의자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소중한 견해를 재검토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제약없는 탐욕이 인간 본성의 바로 핵심과 분리될수 없는 것이다고 확신한다. 폴라니는 이것을 인류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무지한 "자기 봉사적 투영"이라고 비난햇다. 억제되지 않은 개인의 탐욕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은 많은 문화들이 연구되어 왔다(그리고 그들 중 어느 것도 외계세계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계몽화된 유럽의 자유주의와는 대조적으로 폴라니는 "원시 사회의 개인은, 공동체 전체가 굶주림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면 굶주림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고 말햇다. 폴라니는 세 가지 예를 들었다. 남아프리카의 카피르 족("극빈은 불가능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도움을 받앗다"), 캐나다의 콰키툴 부족("콰키툴 족에겐 결코 조금도 굶주림의 위험이 없엇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 지배 이전의 인도가 그것이다. 유럽의 16세기 초에 이르기 이전 까지 거의 모든 형태의 사회조직에서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원칙이 지배적이었다. 슬프게도, 기아의 위협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착출하기 위해 사회 구조를 해체하는 논리는 "문명화 된"자유주의 시장의 표준 관행이되었다 (아일랜드와 인도 및 그 밖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런것이 폭력적으로 강요되엇다). Importantly, Polanyi notes that this destruction of the material fabric of a peasantry’s way of life, to force them into capitalist labor, was first done to “white populations by white men” before being exported globally to the benighted barbarians of distant dusky-maiden-laden lootable lands. The idea that letting the poor starve is just human nature took vast industrial-scale evil-evangelizing efforts to make the “creed of liberalism” feel like it was human nature itself. As Paine noted in his other smash-hit, The Rights of Man: “a great portion of mankind, in what are called civilized countries, are in a state of poverty and wretchedness, far below the condition of an Indian.” Classical liberal market-oriented “civilization” historically went hand-in-hand with making mass starvation amid plenty seem morally acceptable or like an unavoidable necessity. 1830s Britain saw “an almost miraculous increase in production accompanied by a near starvation of the masses.” Polayni calls Britain’s 1834 Poor Law Reform a “scientific cruelty” under which the prior “right to live was abolished” for the sake of the labor market. The threat of starvation was a “psychological torture coolly advocated and smoothly put into practice… as a means of oiling the wheels of the labor mills.” 중요한 점은, 폴라니가 농민들의 물질적 삶의 방식을 파괴하여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강제 편입시킨 이 과정이, 멀리 떨어진 '약탈 가능한 땅의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수출되기 전, 우선적으로 “백인들에 의해 백인 인구에게” 자행되었다고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굶주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은, **'자유주의의 신조'**를 마치 인간 본성 그 자체처럼 느끼게 만들기 위해 거대한 산업적 규모의 악질적인 복음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토마스 페인이 그의 또 다른 화제작 『인권(The Rights of Man)』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문명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인류의 상당 부분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상태보다 훨씬 낮은 빈곤과 비참함 속에 처해 있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시장 지향적 "문명"은 역사적으로 풍요 속의 대량 기아를 도덕적으로 용인하거나 피할 수 없는 필연처럼 보이게 만드는 과정과 병행되었습니다. 1830년대 영국은 **“생산량의 기적적인 증가와 더불어 대중의 아사 직전 상태”**를 목격했습니다. 폴라니는 영국의 1834년 '구빈법 개정'을 **“과학적 잔혹 행위”**라 불렀으며, 이 법 아래에서 노동 시장을 위해 이전의 **“생존권은 폐지”**되었습니다. 기아의 위협은 "노동이라는 공장의 바퀴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냉정하게 옹호되고 매끄럽게 실행된… 심리적 고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농민들의 생활 방식이라는 물질적 구조를 파괴하여 그들을 자본주의적인 노동으로 강제적으로 내몰았던 것이, '백인들에 의해 백인들에게 먼저 행해졌다는 점이다. 그 이후 전 세계로 멀리 떨어진 음울한, 미 경험의 약탈 가능한 땅의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수출되었다 는 점을 폴라니는 지적햇다.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다는 생각을 '자유주의의 신조'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인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 거대한 산업적 규모의 "악을 전도하는 노력"이 필요햇다. 페인이 또 다른 대히트작 <인간의 권리>에서 "문명화된 국가들 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인류의 많은 부분은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들 보다 훨씬 낮은 빈곤과 비참한 상태에 있다." 고 지적햇다..."고전적인 자유주의 시장 지향적인 문명"은 대량의 기아를 도덕적으로 용인하거나 또는 어쩔수 없는 필연처럼 보이게 하는 것과 밀접하게 함께하고 잇다. 1830년대 영국은 거의 기적적인 생산 증가"를 보앗지만 이는 대중들의 굶주림을 동반한 것이엇다. 폴라니는 영국의 1834년 빈민법 개혁(구민법)을 노동시장을 위해 이전의 "생존권"을 폐지한 "과학적 잔혹행위"이라고 불럿다. 굶주림의 위협은 노동이라는 공장의 바퀴에 기름을 바르는 수단으로 '냉정하게 옹호되고 부드럽게 실행되는 심리적 고문'이었다 ... --)) 칼 폴라니의 이 빈민법에 대한 비판은 미국 닉슨 행정부의 기본소득 시행을 취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햇습니다.. 관련글은 아래에 다시 카피 해서 올렷습니다. https://cafe.daum.net/othersound/slB2/26 Here, the concept of “conscience management” can illuminate. That’s just one of many important ideas in historian Priya Satia’s 2020 book Time’s Monster (on the role of historians in building the “ethical scripts” and elite-soothing grand narratives that enabled empire’s evil). Conscience management explains how “for the most part, empire was not the work of villains, but of people who believed they acted conscientiously.” Some (especially elites) were in it for “loot and adventure” but millions “sincerely believed they were in the business of spreading liberty.” Under that exquisitely engineered oxymoron ‘liberal imperialism’ the vast violence of colonialism was justified to bring the blessings of civilization to the savage races—they’ll thank us later. She rightly rejects today’s moral-balance-sheet-minded defenders of British occupation benefits as akin to saying “Hitler was horrible to Jews but, on the other hand, he built the autobahn.” 여기서 **‘양심 관리(conscience management)’**라는 개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역사가 프리야 사티아(Priya Satia)의 2020년 저서 『시간의 괴물(Time’s Monster)』에 등장하는 여러 중요한 아이디어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제국의 악행을 가능케 했던 ‘윤리적 대본’과 엘리트들을 안심시키는 거대 서사를 구축하는 데 역사가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다룹니다. ‘양심 관리’는 어떻게 **“제국이 대부분 악당들의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 양심적으로 행동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일부(특히 엘리트들)는 ‘약탈과 모험’을 위해 가담했지만, 수백만 명은 “자신들이 자유를 전파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정교하게 설계된 이 형용모순 아래, 식민주의의 방대한 폭력은 야만적인 인종들에게 문명의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그들도 나중에는 우리에게 고마워할 것’이라는 식이었죠. 사티아는 영국 점령의 이득을 따지며 도덕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려는 오늘날의 옹호자들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녀는 그것이 마치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는 끔찍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우토반을 건설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양심경영'이라는 개념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학자 프리야 사티아(Priya Satia)의 2020년 저서 『시간의 괴물Time's Monster』에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엿다. 이 책은 제국의 악행을 가능케 했던 ‘윤리적 대본’과 엘리트들을 안심시키는 거대 서사를 구축하는 데 역사가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다룹니다. 양심 경영은 "대부분 제국은 악당들의 작품이 아니라 자신들은 양심적으로 행동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작품이엇다고"고 설명햇다. 몇몇 사람들은(특히 엘리트들) "약탈과 모험"을 위해 가담햇지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자유를 전파하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모순덩어리 "자유 제국주의" 치하에서의 식민주의의 광대한 폭력은 단지 문명의 축복을 야만적인 종족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한것으로 합리화 되엇다. 야만인들도 나중에는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다는 식이엿다. 사티아는 영국의 지배 혜택 따지며 도덕적인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려는 오늘날의 옹호론자들을 단호기 거부햇다 이는 "히틀러는 유대인들에게 끔찍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우토반을 건설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Speaking of Hitler, many post WWII intellectuals and artists, of many stripes, have cast the Nazi holocaust as a “chasm in history,” as exemplified by Adorno’s declaration that “to write poetry after Auschwitz was barbaric.” But this serene studious sophistication sails on an ocean of ill-informed ink, premised on ignoring the prior gentlemanly genocides noted above. To cast Nazi atrocities as history-remaking exceptions requires an act of mindbogglingly-monumental collective amnesia, of industriously suppressing the centuries-long carnage of liberal imperialism. Not to mention the role of liberal civilization’s own artists and intellectuals in creating the “ethical scripts” of empire. As Ghosh points out, Alfred Lord Tennyson, his era’s leading lyric poet, in 1849 wrote that nature’s “red in tooth and claw” battles would ensure the victory of a “crowning race” of European conquerors. That was a decade before Darwin’s The Descent of Man declared that “the civilized races of man will almost certainly exterminate… the savage races.” Darwin was a liberal and abolitionist, but these sorts of race-ranking, death-to-the-lesser-losers ideas were in Ghosh’s view “mere common sense [for] a great number of liberal progressive Westerners.” Such license to kill en-mass for profit goes back to another rational Enlightenment hero, Francis Bacon, who in An Advertisement Touching on Holy War, concludes it is both lawful and godly “for any nation that is policed and civil [to].. cut from the face of the Earth” those who are not. 히틀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역사의 단절"**로 규정해 왔습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선언한 것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온하고 학구적인 세련미는 앞서 언급한 '신사적인 제노사이드'들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무지함이 가득한 잉크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격입니다. 나치의 만행을 역사를 새로 쓰는 예외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은, 수 세기에 걸친 자유주의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부지런히 은폐하려는, 실로 기만적이고 거대한 집단적 건망증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제국의 '윤리적 대본'을 작성했던 자유주의 문명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시(Ghosh)가 지적하듯, 당대 최고의 서정시인이었던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은 1849년, 자연의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의 투쟁이 유럽 정복자라는 **"최정상의 인종"**의 승리를 보장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는 다윈이 『인간의 유래』에서 "문명화된 인종이 야만적 인종을 멸절시킬 것이 거의 확실하다"라고 선언하기 10년 전의 일입니다. 다윈은 자유주의자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였지만, 고시의 관점에서 이러한 인종 서열화와 '열등한 패배자들에게 죽음을'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수많은 자유주의적·진보적 서구인들에게 그저 상식"**에 불과했습니다. 수익을 위해 대량 학살을 자행할 수 있도록 정당화한 이러한 논리는 또 다른 합리적 계몽주의 영웅인 프란시스 베이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성전에 관한 광고』에서, 치안이 잘 유지되는 문명국가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지구상에서 쓸어버리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할 뿐만 아니라 신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글은 서구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공생하며 폭력을 정당화해 왔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많은 지식인과 온갖 종류의 예술가들이 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역사의 단절'로 규정했다. 아도르노(프랑크푸르트 학파 의 대부).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적인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다"고 선언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요한 학구적인 세련미는 위에서 언급한 이전의 신사적인 대량학살을 무시햇다는 점에서 잘못된 정보가 가득한 잉크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나치의 잔학 행위를 역사를 다시써야할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면 수 세기에 걸친 자유주의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부지런히 은폐하려는, 실로 기만적이고 거대한 집단적 기억상실이 필요하다. 제국의 '윤리적 대본'을 만드는 자유 문명 자체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다. 고쉬(Ghosh) 가 지적했듯이, 그 시대 최고의 서정시인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은 1849년에, 자연의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야만적인 전쟁이(자연계의 냉혹한 약육강식과 생존 경쟁) '왕관을 쓴 종족'인 유럽 정복자들의 승리를 보장할 것이다 라고 썼다. 그것은 다윈의 『인간의 기원』이 "문명화된 종족들이 거의 틀림없이 야만적인 종족들을 몰살시킬 것이다."라고 선언하기 10년 전의 일이엇다. 다윈은 자유주의적이고 노예제 폐지론자였지만, 고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종족간의 계급, 열등한 폐배자들에 대한 죽임에 대한 생각은 많은 자유주의 진보적인 서양인들에게는 그저 상식에 불과 햇다. 이익을 위한 대량 살상을 자행할수 잇다는 이런 논리는 또 다른 합리적인 계몽주의 영웅인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은 " An Advertisement Touching on Holy War" 에서 "치안이 유지되고 문명화된 모든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를 지구상에서 쓸어 버리는 것은 것은 합법적이고 경건하다"고 결론 지었다. The point here isn’t to judgmentally impose our moral norms retrospectively, rather it is to consider the magnificent ambient amnesia necessary for the educated today to feel that Nazi atrocities were unthinkable exceptions for civilized art-loving European elites, rather than a centuries-long pattern that was coming home to roost. A pattern long celebrated in “civilized” literature and the arts, for instance Rudyard Kipling’s 1899 hymn to empire, exhorting imperialists to “send forth the best ye breed” to take up the “White Man’s burden” and “serve your captive’s need.” Captives lyrically painted as “your new-caught sullen people, half devil, half child.” He was awarded one of his “civilization’s” highest honors,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in 1907 for the “virility” of such ideas. And don’t forget that shortly before the allied intelligentsia exerted itself to express an inability to grasp Hitler’s “history-rupturing” horrors, that lion of liberalism, Winston Churchill in 1943 enacted policies that starved another 3 million Indians. 여기서 핵심은 과거에 대해 사후적으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교육받은 이들이 나치의 만행을 '예술을 사랑하는 문명화된 유럽 엘리트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예외적 사건'으로 느끼기 위해, 얼마나 거대하고 만연한 집단적 건망증이 필요한지를 고찰해 보려는 것입니다. 사실 나치의 행위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패턴이 본토로 되돌아온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소위 "문명화된" 문학과 예술 속에서 오랫동안 찬양받아 왔습니다. 예를 들어, 러디어드 키플링은 1899년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시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너희가 길러낸 최고의 자식들을 보내" **"백인의 짐"**을 짊어지게 하고 "너희가 사로잡은 이들의 필요를 보살피라"고 독려했습니다. 시 속에서 피정복자들은 "이제 막 붙잡은, 시무룩한 사람들, 절반은 악마이고 절반은 어린애 같은 이들"로 묘사됩니다. 키플링은 이러한 사상의 "기백"을 인정받아 1907년 그 "문명"의 최고 영예 중 하나인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연합국의 지식인들이 히틀러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공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공을 들여 표현하기 직전인 1943년, 자유주의의 사자라 불리는 윈스턴 처칠이 300만 명의 인도인을 굶겨 죽인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요점은, 과거에 대해 사후적으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나치의 잔학 행위가 문명화된 예술을 사랑하는 문명화된 유럽 엘리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외적인 사건라고 느끼는 데 얼마나 거대하고 만연된 집단적 건망증이 필요한지를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사실 나치의 행위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패턴이 본국으로 되돌아온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패턴은 문명화된 문학과 예술에서 오랫동안 찬양받앗다-예를 들어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1899년에 쓴 시 "제국에 보내는 찬송가"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백인의 책무를"을 짊어지게 하고 '너희가 사로잡은 자들의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send forth the best ye breed”-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을 신민지나 전쟁터에 보네라- 고 권고햇다. 시에서 피정복자들은 '당신의 새로 취득한 부루퉁한 사람들, 반은 악마, 반은 아이'들 같은 자들로 서정적으로 묘사되엇다. 그는 그와 같은 사상의 남성스러움을 인정 받아 1907년에 "문명"의 가장 높은 영예 중 하나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연합국의 지식인들이 히틀러의 '역사를 단절시키는'의 공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다며 공을 들여 호들갑들을 떨어되기 바로 직전인 1943년 자유주의의 사자인 윈스턴 처칠은 또 다른 300만 명의 인도인을 굶기는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All this matters because as Satia rightly fears, “the historical sensibility that enabled imperialism is still intact.” I’d add that that sensibility’s most dangerous disguise now goes under cover of the grand narrative of neoliberal globalization’s free-market growth supposedly lifting the poor out of poverty. This is Pinker-approved, let-the-market-decide, free market economic doctrine—whereby elite greed is alchemized into awesomely being what’s best for everyone, and especially the poor. Meanwhile, in reality, this form of greed-excusing economics systematically underweights the preferences, rights, and even lives of the planet’s poor.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티아가 정당하게 우려했듯, “제국주의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감수성이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감수성이 오늘날 취하고 있는 가장 위험한 변장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자유 시장 성장이 가난한 이들을 빈곤에서 구제하고 있다는 식의 거대 서사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핑커(Steven Pinker)가 승인한, '시장이 결정하게 하라'는 식의 자유 시장 경제 교리입니다. 이 교리 속에서 엘리트의 탐욕은 모두를 위해,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최선인 무언가로 멋지게 연금술처럼 변모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탐욕을 정당화하는 경제학은 지구상 가난한 이들의 선호와 권리, 심지어 그들의 생명조차 체계적으로 저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티아 (Satia) 가 당연히 두려워하엿듯이, "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한 역사적 감성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잇기 때문이다." 그 감성이 오늘날 취하고 잇는 가장 위험한 위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자유시장 성장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웅장한 서사적 위장과 함께가고 잇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이것이 핑커가 승인한-시장이 결정하게 하라..는 자유 시장 경제 교리다. 이 교리속에서 엘리트 탐욕은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선의 무엇으로 멋지게 꾸며졋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형태의 탐욕을 정당화 하는 경제학은 지구의 가난한 사람들의 선호, 권리, 심지어 생명조차도 체계적으로 과소 평가한다. Consider what lurks in savvy-sounding jargon like economic rationality and “efficiency.” As a leaked memo signed by the sadly-still-influential former Treasury Secretary Larry Summers revealed: “the economic logic behind dumping a load of toxic waste in the lowest wage country is impeccable.” Since “measurements of the costs of health impairing pollution depends on the foregone earnings … a given amount of health impairing pollution should be done in the country with the lowest cost, which will be the country with the lowest wages.” 경제적 합리성이나 "효율성" 같은 영리해 보이는 전문 용어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안타깝게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인물인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 전 재무장관이 서명한 유출 메모가 밝혀냈듯, "유독 폐기물을 임금이 가장 낮은 나라에 버리는 것의 배후에 깔린 경제적 논리는 완벽합니다." 그 논리에 따르면 "건강을 해치는 오염으로 인한 비용 측정은 상실된 소득에 달려 있으므로... 일정량의 오염 행위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나라, 즉 임금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제적 합리성 이나 '효율성'과 같은 그럴싸해 보이는 전문 용어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생각해보자. 슬프게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전직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가 서명한, 나중에 누출된 메모에 따르면, " 임금이 가장 낮은 나라에 유독성 폐기물을 버리는 짓의 이면의 경제 논리는 완벽하다..고 하엿다... 건강을 해치는 오염 비용의 측정은 포기된 소득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 건강을 해치는 주어진 양의 오염은 가장 낮은 비용의 국가에서 일어나야 하며, 이는 가장 낮은 임금을받는 국가가 될 것이다." 는 것이다.. --(레리 서머스는 가장 가난한 나라가 온갖 공해 산업을 운영하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공해를 배출 하는 것이다고 설파 햇습니다.......... 미국의 10 g의 공해를 배출을 막는데 드는 비용과....뱅글라데시가 10g의 공해 배출을 막는데 드는 비용을 비교 하면....뱅글라대시가 훨씬 저렴합니다.. 저임금 국가 사람들은 소득이 낮기 때문에, 그들이 병들거나 죽음으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도 선진국에 비해 훨씬 작다고 계산합니다. 따라서 독성 폐기물을 저임금 국가에 버리는 것이 경제학적으로는 "결함 없는(impeccable) 완벽한 논리"가 됩니다. 따라서 세계인들의 소비를 위한 재화의 생산에 따른 공해산업을 부자나라가 아닌 가난한 나라로 이전 시켜 거기서 배출 하게 하면 경제학적 관점에서 세계적인 공해추방 비용을 줄인 것이라고 하엿지요.. 이것이 그들 미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의 경제학적 사고 입니다...... 필자의 빈정거림 처럼,이들은 이런것을 경제의 효율성, 합리성이라고 아갈 거리며 경제학 지식과 경제학 책을 팔아처 먹고...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돈 주고 유학가서 이런 것을 배워와 나라을 발전 시킨답 시고 꼭 같은 욤병질을 떨고 잇는 것이지요..) This sort of “rational” economics is riddled with systematic anti-poor biases. A view seconded by the spiciest Federal Reserve footnote ever, in 2021 long-time Fed economist Jeremy Rudd wrote of his “deeper concern that the primary role of mainstream economics… is to provide an apologetics for a criminally oppressive, unsustainable, and unjust social order.” He noted that did “not necessarily reflect the views of the Board of Governors or the staff of the Federal Reserve System.” Scandalously few economists actually address poverty in their work (research from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found only 1.4% of papers in the top 10 economics journals focused on poverty). Unless this kind of impeccable economic rationality and “efficiency” is explicitly countered, it structurally adds to the burdens of the poor—Summers-style standard economic ‘logic’ sees the loss of earnings of one American as equivalent to the lost earnings of 265 Barundians (using the ratio of national gross domestic product per capita as a proxy for typical earnings in each economy). However rational and “efficient” that looks in your Pinker-approved think-like-an-economist [liberal-loot-orama] calculus, it is clearly contrary to basic morality and to any semblance of resource justice. 이러한 종류의 "합리적" 경제학은 체계적인 반(反)빈곤층 편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연방준비제도 역사상 가장 신랄한 각주로 뒷받침되는데, 2021년 오랜 경력의 연준 경제학자 제레미 러드(Jeremy Rudd)는 **"주류 경제학의 일차적 역할이 범죄적일 정도로 억압적이고, 지속 불가능하며, 불공정한 사회 질서를 위한 변론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는 이 견해가 "연준 이사회나 직원들의 의견을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수의 경제학자들만이 실제로 자신들의 연구에서 빈곤 문제를 다룹니다(국제통화기금의 연구에 따르면 10대 경제학 학술지 논문 중 빈곤에 초점을 맞춘 것은 단 1.4%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완벽한'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에 명시적으로 대항하지 않는 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빈곤층의 짐을 가중시킵니다. 서머스 스타일의 표준 경제 '논리'에 따르면, 미국인 한 명의 소득 손실은 부룬디인 265명의 소득 손실과 맞먹는 것으로 간주됩니다(각 국가의 1인당 GDP 비율을 전형적인 소득의 대리 수치로 사용할 경우). 핑커가 승인한 '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자유주의적 약탈 잔치)' 식의 계산법에서 그것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이는 기본적인 도덕성과 자원 정의의 외관에 명백히 반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합리적' 경제학은 체계적인 반-빈곤층 편향으로 가득 차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고참 경제학자 제러미 러드(Jeremy Rudd)는 2021년 "그의 주류 경제학의 주된 역할이 범죄적일 정도로 억압적이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으며 불공정한 사회질서을 위한 변론을 제공하는 것이다" 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햇다. 그는 "이 견해가 반드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이사진이나 스탭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햇다. 수치스럽게도, 실제로 빈곤을 다루는 경제학자는 거의 없다 (국제 통화 기금 (IMF)의 연구에 따르면 상위10 개 경제 저널의 논문 중 1.4 %만이 빈곤에 촛점을 두고 잇는 것으로 나타낫다). 이런 종류의 흠잡을 데 없는(근본적으로 잘못된의 역설)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에 명시적으로 반박하지 않는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서머스 스타일의 표준 경제 '논리'를 따르면 미국인 한명의 소득 손실을 265명의 바룬디안(부루나이 국민)들의 소득 손실과 같은 것으로 본다(각 국가의 1인당 국민총생산 비율을 각 경제의 전형적인 소득의 대리숫치로 사용할경우). 핑커가 인정한 경제학자적인 사고(자유주의적 -약탈의 잔치)의 계산법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인 도덕성과 어떤 자원 의 정의에도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이다. The most seductive and super-poisonous flavor of this greed-washing is preached under liberal-beloved “win-win” rubric whereby elite-fattening market-greed is sold as lifting millions out of poverty. As Phillipe Alston, ex- UN Special Rapporteur on Poverty has written, this rhetoric has really been used to redefine “the public good as helping the rich get richer.” Far from being one of the “greatest human achievements” this “win win” narrative has been a “convenient alibi” for guilt-free greed. 이러한 탐욕 세탁(greed-washing)의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형태는 자유주의자들이 애호하는 **"윈-윈(win-win)"**이라는 표어 아래 전파됩니다. 이 논리는 엘리트들의 배를 불리는 시장의 탐욕을 마치 수백만 명을 빈곤에서 구제하는 수단인 것처럼 포장하여 판매합니다. 전 유엔 빈곤 문제 특별보고관 필립 알스턴(Philip Alston)이 썼듯이, 이러한 수사법은 실제로는 **"공공의 이익을 '부자가 더 부자가 되도록 돕는 것'으로 재정의"**하는 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윈-윈" 서사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기는커녕, 죄책감 없는 탐욕을 위한 **"편리한 알리바이"**에 불과했습니다. ++이 탐욕세탁의 가장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특징은 자유주의자들이 애호하는 '윈-윈' 표제아래 전파된다는 것이다. 이 윈-윈 원리는 엘리트들을 살찌게 하는 시장 탐욕을 수백만 명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인 것처럼 포장하여 판매한다. 필립 앨스턴 전 유엔 빈곤 특별서기관이 쓴 것처럼, 이 미사여구는 공공의 이익을 '부자들이 더 부유해지도록 돕는 것으로 재정의하는 데 실제로 사용되어 왔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 '윈-윈' 서사는 "죄의식 없는 탐욕" 에 대한 '편리한 알리바이'에 불과햇다. Why exactly should every gain for the poor require gains for the rich? I find it appalling that many greedy growth fans feel they are simply deferring to the objective facts while their data-driven Pinkering gospels hide how markets actually allocate the vast bulk of the global economy’s gains and resources to precisely the opposite of poverty-alleviation. Only 5% of global GDP growth gets to the poorest 60% of people (95% adds to the comforts of the unpoor, and even within that it’s heavily top-skewed to the Top 1-10%). Do those numbers pass a basic ethical sniff test? Should we celebrate a trickle-down pace so slow that it means 8 generations of sweatshop toil till your descendants rise above a disgustingly low poverty line? While for each of those generations the bulk of the planet’s resources are win-win-ed away into rich wallets? 도대체 왜 가난한 이들의 모든 이득이 반드시 부자들의 이득을 동반해야만 하는 걸까요? 탐욕스러운 '성장 찬양론자'들이 자신들이 그저 객관적 사실에 따르고 있다고 믿는 것이 저는 소름 끼칩니다. 그들이 데이터에 기반해 설파하는 '핑커 식 복음'은, 시장이 실제로는 글로벌 경제의 이득과 자원 대부분을 빈곤 퇴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배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전 세계 GDP 성장의 단 5%만이 하위 60%의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머지 95%는 가난하지 않은 이들의 안락함을 더해주며, 그 안에서도 상위 1~10%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습니다.) 이 수치들이 기본적인 윤리적 잣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후손들이 그 역겨울 정도로 낮은 빈곤선을 겨우 넘어서기까지 8세대에 걸친 스웨트숍(착취 공장)의 노역을 견뎌야 할 만큼 느려 터진 이 '낙수 효과'의 속도를 우리가 축하해야 합니까? 그 매 세대 동안 지구 자원의 대부분이 '윈-윈'이라는 미명 하에 부자들의 지갑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 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익이 반드시 부자들을 위한 이익을 동반해야 하는가? 탐욕스러운 '성장 찬양론자'들이 자신들이 그저 객관적 사실에 따르고 있다고 믿는 것이 나는 소름 끼칩니다. 그들의 데이터 중심의 핑커식 복음서는 시장이 세계 경제의 이익과 자원 대부분을 실제로 빈곤 완화와는 정반대되는것에 할당하고잇다는 사실을 숨기고 잇다.세계 GDP 성장의 5%만이 가난한 60%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95%는 가난하지 않는 사람들의 안락함을 더 해주며, 그 안에서도 상위 1~10%에 크게 치우쳐 있다). 이 숫자들이 기본적인 윤리적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잇는 것일까? 당신의 후손들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낮은 빈곤선을 넘어서기 까지 노동착취공장에서의 노역을 8세대동안 견뎌야 할 만큼 느려터진 낙수 효과의 속도를 축하해야 할까? 그들 매 세대 동안 지구 자원의 대부분이 윈-윈의 방식이라하며 부자들의 주머니로만 흘러들어 가는 것에 그럴수 잇을까?? By the way many misunderstand what that disgustingly low official poverty line means. It is a P.P.P $1.90 a day, which means it is adjusted for purchasing power parity. So as best as can be estimated, like living on ~$700 a year in the US now—one nineteenth the official US poverty line. And surely countless sins lurk in data built on the idea that making 10 cents more, for a total of $2 per day ($730 per year) warrants being classified as having “escaped” extreme poverty. 참고로, 많은 이들이 매우 낮은 수준으로 설정된 공식 빈곤선의 의미를 오해하곤 합니다. 이는 구매력 평가(PPP) 기준 하루 1.90달러를 의미하며, 구매력에 맞춰 조정된 수치입니다. 최선의 추정치에 따르면, 이는 현재 미국에서 연간 약 700달러로 생활하는 것과 같으며, 미국 공식 빈곤선의 19분의 1 수준입니다. 하루 총 2달러(연간 730달러)를 벌어 단 10센트를 더 벌었다는 이유로 극심한 빈곤에서 "탈출"한 것으로 분류되는 데이터 구축 방식에는 분명 수많은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역겨울 정도로 낮은 공식적인 빈곤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못 알고 잇다. 그것은 P.P.P 조정 하루 1.90달러인데, 이것은 구매력에 맞춰 조정된것을 의미한다. 최선의 추정치에 따르면 지금 미국에서 년 $ 700에 사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미국의 공식 빈곤선의 19 분의 1 이다. 10센트를 더 벌어 하루에 총 2달러(연간 730달러)을 벌게되면 극단적인 빈곤에서 해방된 것으로 분류된다는 데이터 구축 방식에는 분명히 수많은 사악함이 숨어 있다. The data-driven discourse here is dominated by a diabolically bad framing of the main moral issue. Contrary to the Pinker-preached plutocrat-pampering perspective, the key question isn’t “Are things better now than before,” but rather “Is this the best we can do?” Indeed, are we even making a minimally decent effort to minimize suffering? As economic anthropologist Jason Hickel has pointed out, viewed from that angle, global poverty has never been worse. The world is richer now than ever, but we still don’t prioritize use of enough resources to end poverty. Only a small fraction of the world’s wealth would be needed to end “extreme poverty” (Hickel calculates 3.9% of global GDP, and Max Rosner of Our World in Data, in 2013 figure estimated $160 billion from a $70 trillion pie, or under 3%). Yet we let global markets “decide” to spend more each year on ice cream and face cream than that ($90 & $100 billion). How can it make ethical sense that markets “decide” to use 80% of arable land to fatten cattle while 150,000,000 kids are stunted by malnutrition and 1,900,000,000 humans (25% of everyone alive today) are more food insecure than rich-nation pets? The deep data-dazzled dumbness here is due to how GDP mixes luxuries and survival basics in the same monetary bucket, then “rationally” and “efficiently” sends resources to whoever pays most, thereby “objectively” prioritizing the whims of the wealthy. Whatever your political or moral leanings, if they don’t help you condemn and counter this, they may need an upgrade. They are in no coherent sense humane or enlightened. 데이터에 기반한 이 담론은 주요 도덕적 쟁점에 대해 지독하게 잘못된 프레임을 씌우고 있습니다. 핑커가 설파하는 '부유층 비위 맞추기'식 관점과는 반대로, 핵심 질문은 "지금이 과거보다 나아졌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품위 있는 노력이라도 하고 있습니까? 경제 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이 지적했듯,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 빈곤은 그 어느 때보다 최악입니다.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부유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빈곤을 종식시키기 위해 충분한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정하지 않습니다. '극심한 빈곤'을 끝내는 데는 세계 부의 아주 적은 부분만이 필요할 뿐입니다(히켈은 전 세계 GDP의 3.9%로 계산했고, '아워 월드 인 데이터'의 맥스 로저(Max Rosner)는 2013년 수치를 기준으로 70조 달러라는 파이 중 1,600억 달러, 즉 3% 미만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글로벌 시장이 빈곤 퇴치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매년 아이스크림(900억 달러)과 페이스 크림(1,000억 달러)에 쓰도록 "결정"하게 내버려 둡니다. 1억 5천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성장이 지체되고, 19억 명의 인구(전 인류의 25%)가 부유한 나라의 반려동물보다 식량 안보가 취약한 상황에서, 시장이 가처분 토지의 80%를 가축을 살찌우는 데 쓰기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말이 됩니까? 이러한 데이터에 현혹된 어리석음의 심연에는 GDP가 사치품과 생존 필수품을 동일한 금전적 바구니에 섞어버리는 방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후 GDP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이에게 자원을 보냄으로써, "객관적으로" 부유층의 변덕을 우선시합니다. 당신의 정치적 또는 도덕적 성향이 무엇이든, 만약 그것이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가치관은 개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향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도주의적이거나 계몽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 데이터에 기반한 이 담론은 주요 도덕적 쟁점에 대해 지독하게 잘못된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핑커가 설파한 금권주의자들 비유 맞추기식의 관점과는 반대로, 핵심 질문은 '지금 상황이 이전보다 나아졌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여야 한다. 다시말해 우리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기울이고 있는가? 경제 인류 학자 제이슨 히켈 (Jason Hickel)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런관점에서 볼 때, 세계 빈곤은 어느때 보다 최악이다.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빈곤을 종식시키기 위한 충분한 자원의 사용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극빈"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세계 부의 극히 일부만이 필요할 것이다(히켈은 세계 GDP의 3.9%를 계산하엿고, 2013년에 "Our World in Data" 의 맥스 로즈너는 70조 달러, 총 파이에서 1,600억 달러, 즉 3% 미만으로 추산햇다). 그런데 우리는 글로벌 시장이 빈곤 퇴치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매년 아이스크림(900억 달러)과 페이스 크림(1,000억 달러)에 쓰도록 "결정"하게 내버려 둔다. 1억 5,000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성장이 지체되고, 19억명의 인간(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25%)이 부유한 나라의 반려동물보다 식품 안정이 더 불안하다 그런데 시장이 가축을 살찌우기 위해 경작가능지의 80%을 사용하게 결정하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이치에 맞을 수 있을까? 이러한 데이터에 현혹되는 어리석음의 심연에는 GDP가 사치품와 생존의 기본품을 동일한 금전적 바구니에 뒤섞은 다음, "이성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자원을 내주어 부자들의 기호에 객관적으로 우선순위를 주기때문이다....당신의 정치적 또는 도덕적 성향이 무엇이던간에, 이런것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데 도움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도 인간적이거나 계몽적이지 않다. The Pinker-preached faith that markets are in the business of maximizing flourishing often operates as fancy conscience management camouflage. As currently practiced, markets don’t distribute flourishing (or much of anything else) in an ethically sound way. Surely, the right thing to do is to always prevent avoidable suffering, before further enhancing rich lifestyles. By what logic can we square squandering resources on rich toys when so many obvious gains in basic suffering reduction are within relatively easy reach? While this isn’t quite as simple as redirecting financial resources from ice cream and face cream to poverty alleviation, it’s also not that much more difficult. Why are toys and trinkets for the world’s wealthy more important than food to prevent those 150,000,000 kids from being stunted? Surely much less flourishing arises from the incremental last 1% of billionaire bauble buying than would for example by educating the world’s hundreds of millions of kids who aren’t presently schooled. A 1% wealth tax on the $13 trillion of the world’s 3,000 billionaires (meaning they might have to make do with a smaller second superyacht) versus the vastly improved flourishing of 250,000,000 kids. Why is that a hard trade off if you really are interested in maximizing flourishing? By ignoring such noxious nightmares of distributional sins, neoliberalism operates like a nerdier form of imperialism (with extra-advanced emperor’s new-clothes tailoring courtesy of Pinkering pundits, in our era’s version of Kipling’s conscientious conquerors—“The Bright Man’s Burden”—cognitive supremacy (assessed by flimsy tests like SAT scores) grants divine rights to hugely disproportionate share of global resources, and control of how horribly slowly the not-so-bright looser-layers can gain. 시장이 번영을 극대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핑커 식의 믿음은 종종 세련된 '양심 관리'를 위한 위장막으로 작동합니다. 현재의 방식대로라면, 시장은 도덕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번영(또는 그 외의 어떤 것도)을 분배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올바른 일은 부유한 이들의 삶의 방식을 더욱 향상시키기 전에,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고통을 먼저 예방하는 것입니다. 기초적인 고통 경감이라는 명백한 성과를 비교적 쉽게 달성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을 부자들의 장난감에 탕진하는 것을 어떤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아이스크림과 페이스 크림에 들어가는 금융 자원을 빈곤 퇴치로 단순히 돌리는 것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훨씬 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왜 전 세계 부유층을 위한 장난감과 장신구가 1억 5천만 명 아이들의 발육 부진을 막기 위한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까? 억만장자들이 마지막 1%의 사치품을 사는 데서 얻는 번영의 증분은, 현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아이들을 교육함으로써 얻는 번영보다 분명 훨씬 적을 것입니다. 전 세계 3,000명의 억만장자가 보유한 13조 달러에 대해 1%의 부유세를 부과하는 것(이는 그들이 조금 더 작은 두 번째 슈퍼요트로 만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과 2억 5천만 명 아이들의 번영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 사이에서, 진정으로 번영의 극대화를 원한다면 이것이 왜 어려운 선택이어야 합니까? 이러한 유해한 분배적 죄악의 악몽을 외면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더 지적인 형태의 제국주의처럼 작동합니다. 핑커 같은 권위자들이 공들여 지어낸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 같은 이론의 도움을 받아, 우리 시대판 키플링의 양심적인 정복자들인 **"똑똑한 자의 짐(The Bright Man’s Burden)"**이 된 것입니다. (SAT 점수 같은 조잡한 시험으로 평가된) 인지적 우월성은 글로벌 자원의 거대한 불균형적 점유권과,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패배자 계층'이 얼마나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통제할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번영을 극대화한다는 핑커의 종교적인 믿음은 종종 양심 관리를 위한 세련된 위장막으로 작동한다. 현재의 방식대로라면 시장은 윤리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번영(또는 그 밖의 어떤것도)을 분배하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일은, 부유한 생활방식이 더욱 더 부유해지기 이전에, 항상 회피가능한 고통을 먼저 예방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고통 감소라는 명백한 이득에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원을 부자들의 장난감에 탕진하는 것을 어떤 논리로 정당화 할 수 잇나? 이것은 금융자원을 아이스크림과 페이스 크림에서 빈곤 퇴치로 전환하는 것만큼 간단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훨씬 더 어렵지도 않다. 왜 세계의 부유층을 위한 장난감과 장신구가 15,000,000 명의 어린이들이 발육부진을 막기 위한 음식보다 더 중요할까? 억만장자들이 마지막 1%의 사치품을 사는 데서 얻는 번영의 증분은, 현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아이들을 교육함으로써 얻는 번영보다 분명 훨씬 적을 것이다. 세계 3,000명의 억만장자의 13조 달러에 대한 1%의 재산세(그들에겐 약간은 작은 제2의 슈퍼 요트에 만족해야 하는 의미정도 될 것이다)와 2억 5천만 명의 아이들이 크게 번영하는 것을 비교해 보라. 만약 당신이 정말로 번영을 극대화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그런것이 왜 어려운 선택이어햐 하는가? 이렇게 해로운 분배적 죄악의 악몽을 무시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더 괴팍스러운 형태의 제국주의처럼 작동한다. 핑커 같은 전문가들이 공들여 지어낸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 같은 이론의 도움을 받아, 우리 시대판 키플링의 양심적인 정복자들인 **"똑똑한 자의 짐(The Bright Man’s Burden)"**이 된 것입니다. SAT 점수와 같은 허술한 시험으로 측정된 인지적 우월성은 세계 자원에 대한 엄청나게 불균형한 몫과 그렇게 똑똑하지 못한 퍠배 계층이 얼마나 끔찍하리만큼 느린 속도로 나아갈 수 잇는지를 통제할 수 잇는 신성한 권리를 부여한다. == **동인도 회사(폭력) → 사회진화론(인종) → 로렌스 서머스(경제 논리) → 현대 신자유주의(인지적 우월성)**로 이어지는 착취의 역사적 연속성에 촛점을 맞추기 바랍니다. To present a key puzzle pictorially, for the benefit of the the Pinker-reading data-driven rational optimist do-gooders: if globalization is really all about lifting billions out of poverty, why has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poor nations basically never not been growing? In the deluge of dazzling data visualizations daily paraded, like that on the left below, why hasn’t the data plotted on the right gotten any attention? The chart shows GDP per capita, with the upper line for rich nations accelerating away from the lower line for poor nations. It is almost as if there was a plot against sharing the world’s resources more equitably.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 낙천주의를 표방하는 **'핑커 식 자선가들'**을 위해 이 핵심적인 난제를 시각적으로 제시해 보겠습니다. 만약 세계화가 진정으로 수십억 명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사이의 격차는 단 한 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 벌어지기만 했을까요? 아래 왼쪽 차트처럼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데이터 시각화의 홍수 속에서, 왜 오른쪽 차트와 같은 데이터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차트는 1인당 GDP를 보여주는데, 부유한 국가를 나타내는 상단 선은 가난한 국가를 나타내는 하단 선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며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 세계의 자원을 더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막기 위한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래에 핑커의 저서를 읽고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 낙관주의자적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을 위해 핵심적인 난제를 시각적으로 제시해 보겠다. 세계화가 정말로 수십억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왜 기본적으로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가? 아래의 왼쪽 그림처럼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눈부신 데이터 시각화의 홍수 속에서, 왜 오른쪽 그림은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 이 차트는 1 인당 GDP를 보여 주고잇는데, 윗 선인 부유한 국가는 아랫선인 가난한 국가에서 가속적으로 멀어지고 잇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자원을 더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 반대하는 음모가 있었던 것 처럼 보일 지경이다. ==왼쪽그림에서도 문제점은 충분하고 쉽게 볼수 잇습니다.. 가난이 아시아 동남아 국가에서 획기적으로 줄엇음을 알 수 잇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워낙 덩치가 크고 크게 가난을 추방햇기 때문입니다.. 중국을 제외 한다면 ..세계 빈곤 추방이 그닥 크지 않음을 알수 잇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보다 더 좋은 자료 분석을 위해 중국을 제외한 분석을 합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입니다...자본주의 시장경제완 다른 체체입니다.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세계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립니까?? These lines document not a triumph, but a decades-long disgusting record of misallocation of resources that should be unacceptable and morally shocking. As Olivier De Schutter, the UN Special Rapporteur on extreme poverty and human rights has written: “Growth alone, without far more robust redistribution of wealth, would fail to effectively tackle poverty.” Indeed based on historic trends “it would take 200 years to eradicate poverty under a $5 a day line and would require a 173-fold increase in global GDP.” The current global economy is already busting biosphere boundaries—to ignore this and presume that the global economy can grow 170 times larger is plain science denial. There are remarkably twisted ironies in Pinkering rationalists choosing to ignore the basic facts of ecology and earth sciences. 이 도표의 선들은 단순히 경제 지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결코 용납될 수 없고 도덕적으로 충격적인 자원 배분 실패의 수십 년 기록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 유엔 극빈 및 인권 특별보고관 올리비에 드 슈터(Olivier De Schutter)가 썼듯이, “훨씬 더 강력한 부의 재분배가 없는 성장만으로는 빈곤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적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하루 5달러의 빈곤선을 기준으로 빈곤을 근절하는 데는 200년이 걸릴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전 세계 GDP가 173배 증가해야 합니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는 이미 지구의 생태적 한계(biosphere boundaries)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세계 경제가 170배 더 커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한 과학 부정입니다. 핑커 식의 합리주의자들이 생태학 및 지구 과학의 기초적인 사실을 무시하기로 선택한 것에는 참으로 뒤틀린 아이러니가 담겨 있습니다. ++이 도표의 선들은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일 수 없고 도덕적으로 충격적인 자원의 잘못된 할당에 대한 수십 년 동안의 역겨운 기록이다. 올리비에 드 슈터(Olivier De Schutter) 유엔 극빈 및 인권 특별서기관은 "부의 강력한 재분배 없이는 성장만으로는 빈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역사적 추세에 따르면, 하루 5달러 미만의 빈곤을 근절하는 데 200년이 걸릴 것이고 세계 GDP의 173배가 증가해야 한다" 현재의 세계의 경제는 이미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무너트리고 잇다. 이를 무시하고 세계 경제가 170배 더 성장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한 과학의 부정이다. 생태학과 지구과학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무시하기로 선택한 Pinker식 합리주의자들에겐 놀랄 만큼 뒤틀린 아이러니가 잇는 것이다. If you are sincere in your concern for the world’s poor and haven’t encountered these facts before, you might consider finding alternative sources of information. Your education and media has failed you. It is not hard to refute the rational-optimist plutocrat-pampering narrative (but that has been too much effort for far too many journalists and pundits who prefer to sell you self-flattering soothing conscience-management fairy tales). 만약 당신이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걱정에 진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들을 접해본 적이 없다면, 대안적인 정보원들을 찾아보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당신이 받은 교육과 미디어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낙관론을 표방하며 부유층의 비위를 맞추는 이 서사를 반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치켜세우며 마음을 달래주는 '양심 관리용 동화'를 팔아치우는 데 열중해 온 수많은 언론인과 전문가들에게, 그 반박은 너무나도 큰 수고였을 뿐입니다. ++당신이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엇지만 이런 사실들을 이전에 접해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다른 정보원을 찾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것이다. 당신들의 교육과 미디어는 당신을 망쳣다. 합리적이고 낙관주의적인 부유층의 비위를 맞추는 이 서사를 반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스스로를 치켜 세우며 마음을 달래주는 양심 관리용 동화나 당신에게 파는 것에 더 열중해온 수 많은 언론인들과 전문가들에게 그런 반박은 매우 큰 일이엇다. In the Global South phrases like the “liberal world order” and “free trade” evoke these evident evils. Irish diplomat Conor Cruise O’Brien discovered that people in ex-colonies were often “sickened” by the word liberalism, as Pankaj Mishra notes in a London Review of Books essay On Liberalism and Colonialism. They saw it as an “ingratiating moral mask which a toughly acquisitive society wears before the world it robs.” Mishra notes that such contradictions “haunted the rhetoric of liberalism from the beginning.” He quotes the Samuel Johnson quip, “How is it that we hear the loudest yelps for liberty among the drivers of the negroes?”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서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나 '자유 무역' 같은 문구는 이러한 명백한 악행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일랜드 외교관 코너 크루즈 오브라이언은 과거 식민지였던 지역의 사람들이 '자유주의'라는 단어에 종종 **"역겨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판카지 미슈라(Pankaj Mishra)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에세이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에 관하여」에서 이 점을 짚어냅니다. 그곳 사람들에게 자유주의는 **"강탈적인 탐욕 사회가 자신이 약탈하는 세상을 향해 내보이는, 비위를 맞추려는 도덕적 가면"**으로 보였습니다. 미슈라는 이러한 모순이 **"처음부터 자유주의의 수사학을 끈질기게 괴롭혀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사무엘 존슨의 유명한 재담을 인용합니다. "어째서 자유를 부르짖는 가장 요란한 아우성이 흑인 노예를 모는 자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까?" ++글로벌 사우스 언어에서 "자유주의 세계 질서" "자유 무역"과 같은 문구는 명백히 악질적인 것을 연상시킨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실린 판카지 미슈라(Pankaj Mishra) 의 에세이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하여"에서 지적했듯이 아일랜드 외교관 Conor Cruise O'Brien은, 전 식민지 사람들이 종종 "자유주의"라는 단어에서 역겨움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유주의를 "강인하게 탐욕스러운 사회가 자신들이 약탈하는 세상을 강탈하기 전에 쓰고 잇는 비굴한 도덕적 가면"으로 보았다." 미슈라 (Mishra)는 그러한 모순이 "처음부터 자유주의의 논법을 괴롭혔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뮤얼 존슨의 말을 인용햇다. "어떻게 우리는 흑인노예들을 모는 자(노예주)사이에서 자유를 위해 가장 큰 소리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 "남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로 부리는 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자유를 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크게 소리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사뮤얼 존슨 Two-hearted two-faced tensions have lurked in the term “liberal” from its beginnings. As historian Alexander Zevin excavates in his book Liberalism at Large: The World According to the Economist, thinkers like John Locke didn’t called themselves liberals. The first people to do so were Spanish activists focused on civil liberties in the aftermath of Napoleonic havoc. Later a uniquely British stream was added which centering economic liberties (typically deemed more important than minor details like democracy). That’s the laissez faire, “free market,” and “free trade” finance-focused ideology that The Economist magazine was founded in 1843 explicitly to promote, as it still does today (for a fast summary check out Zevin on a podcast called The Refined Sociopathy of The Economist). That British greed-driven component (aka greedocracy) has been central to both classical and neo-liberalism. But so far from universal are the norms of classical liberals that Mishra reports, Japanese and Chinese translators of Adam Smith and John Stuart Mill had difficulty finding words for phrases like ‘legitimate self-interest’ that avoided the taint of morally reprehensible selfishness and dereliction of duty. Even the most liberal forms of Indian thought were “impregnated with the ideas of sharing, generosity, and compassion… dramatized by tropes from the Indian classics” as Christopher Bayly wrote in Recovering Liberties: Indian Thought in the Age of Liberalism and Empire. The late nineteenth century Bengali thinker Bal Gangadhar Tilak saw liberalism as a ‘system of duties’ in which “ethical conduct, not rational self-interest, came first.” ‘자유주의(liberal)’라는 단어에는 그 시작부터 두 개의 심장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긴장감이 숨어 있었습니다. 역사가 알렉산더 제빈(Alexander Zevin)이 그의 저서 『거대한 자유주의(Liberalism at Large)』에서 밝혀냈듯, 존 로크 같은 사상가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의 참화 이후 시민적 자유에 집중했던 스페인의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이후 여기에 경제적 자유를 중심에 둔 독특한 영국식 흐름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흔히 민주주의 같은 '사소한' 세부 사항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잡지가 1843년 설립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명시적으로 홍보해 온 방임주의(laissez-faire),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중심의 금융 지향적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에 대한 빠른 요약은 팟캐스트 『이코노미스트의 세련된 사회병질(The Refined Sociopathy of The Economis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영국식 탐욕 지향적 요소(일명 '탐욕 정치, greedocracy')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판카지 미슈라가 말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규범은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을 번역하던 일본과 중국의 번역가들은 '정당한 사익(legitimate self-interest)' 같은 표현을 옮길 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이기심'이나 '의무 태만'의 뉘앙스를 피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yly)가 『자유의 회복(Recovering Liberties)』에서 썼듯이, 가장 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인도 사상조차 “나눔, 관대함, 자비라는 이념이 스며들어 있었으며... 이는 인도 고전의 비유들을 통해 극화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벵골의 사상가 발 강가다르 틸락(Bal Gangadhar Tilak)은 자유주의를 **“합리적 사익이 아닌 윤리적 행위가 우선시되는 '의무의 체계'”**로 보았습니다. ++'자유주의'라는 단어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마음을 가진 두 얼굴의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역사학자 알렉산더 제빈(Alexander Zevin)이 『전반적인 자유주의Liberalism at Large: The World According to the Economist,』에서 파 해친것 처럼, 존 로크(John Locke) 같은 사상가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나폴레옹시대의 대혼란의 여파 이후 시민의 자유에 초점을 맞춘 스페인 운동가들이었다. 나중에 경제적 자유를 중심으로 독특한 영국의 흐름이 추가되었다. 이는 민주주의와 같은 사소한 세부적인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졋다. 그것이 바로 자유방임주의, 자유시장, 자유무역주의라는 금융지향적 이데올로기인데, 1843년<이코노미스트>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이를 명시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창간되었다. 그 영국의 탐욕주의적 요소(탐욕정치라고도 함)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왓다. 그러나 Mishra가 전하듯, 고전적 자유 주의자들의 규범은 보편성과도 거리가 멀엇다. Adam Smith와 John Stuart Mill의 일본어와 중국어 번역가들은 "정당한 사익"과 같은 표현을 번역할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기심이나 직무유기 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단어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 (Christopher Bayly)가 자유주의와 제국 시대의 인도 사상 (Recovering Liberties : Indian Thought in the Age of Liberalism and Empire)에서 쓴 것처럼, 가장 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인도의 사상조차도 나눔, 관대함, 자비 라는 이념이 스며들어 잇쓰며 "인도 고전에서의 트로프(비유)들을 통해 극화되엇다. 19세기 후반 벵골의 사상가 발 간가다르 틸락(Bal Gangadhar Tilak)은 자유주의를 합리적 이기심이 아닌 윤리적 행위가 우선하는 '의무 체계'로 보았다. Contrast that with Hannah Arendt’s assessment in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the European imperative to ‘imperialize’ meant ‘to organize the nation for the looting of foreign territories and the permanent degradation of alien peoples” (extremely enlightening on lack on liberal enlightenment). As grand mufti Muhammad Abduh declared, “we Egyptians believed once in English liberalism and English sympathy; but we believe no longer for facts are stronger than words. Your liberalness we see plain is only for yourselves and your sympathy is that of the wolf for the lamb which he designs to eat.” 이와 대조되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전체주의의 기원』 속 평가를 보십시오. 유럽의 '제국주의화' 명령은 곧 **“해외 영토의 약탈과 타 민족의 영구적인 비하를 위해 국가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적 계몽의 결여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줍니다.)이집트의 대무프티(이슬람 법해석관)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가 선언했듯, “우리 이집트인들은 한때 영국의 자유주의와 영국의 동정심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사실이 말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당신들의 자유주의는 오직 당신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며, 당신들의 동정심이란 잡아먹으려 노리는 어린 양을 향한 늑대의 동정심일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the European imperative』에서 평가한 것과 대조해보자 아렌트는 유럽의 '제국주의화'라는 필연성"는 "외국 영토의 약탈과 이방 민족의 영구적인 비하-타락을 위해 국가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했다(문명화나 경제 발전 같은 거창한 명분이 아니다), 이는 자유주의 계몽의 결여를 극단적으로 보여준것이다.(자유주의적 계몽이란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계몽적이지 못 하고 민족차별적이며 폭력적인가) 이집트의 대무프티(이슬람 법해석관) 무하마드 압두 (Muhammad Abduh)가 선언했듯이, "우리 이집트인들은 한때,영어의 자유주의와 영어의 동정을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단어 보다 강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딴것은 믿지 않는다. 우리가 분명하게 본 당신들의 자유는 당신들의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당신의 동정은 잡아먹기위한 양을 향한 늑대의 동정심일 뿐이다." Muhammad Abduh Western psychologists have finally cottoned onto the gross anthropological and empirical errors of presuming that experiments on undergrads on an Anglosphere college campus can shed light on human nature. They’ve coined the acronym W.E.I.R.D. for western, European,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 Any economics or politics that casts gentle-commerce greed as just human nature is making a historically and anthropologically ignorant W.E.I.R.D.o sampling error (as Polanyi previously noted). 서구 심리학계는 마침내 영미권 대학 캠퍼스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인간의 본성'을 규명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인류학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심각한 오류라는 사실을 눈치챘습니다.그들은 이러한 대상을 일컬어 W.E.I.R.D.—서구적이고(Western), 교육 수준이 높으며(Educated), 산업화되고(Industrialized), 풍요롭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라는 약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온화한 상거래'라는 명목하의 탐욕을 그저 인간의 본성이라 치부하는 그 어떤 경제학이나 정치학도, (칼 폴라니가 일찍이 지적했듯) 역사적·인류학적으로 무지한 'W.E.I.R.D.o(이상한)' 표본 추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은 마침내, 영미권 대학 캠퍼스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인간 본성를 규명할 수 잇다는 가정의 인류학적, 경험적 오류을 알게 되엇다. 그들은 이런 대상을 일컬어 , 서구적이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산업화되고, 풍요롭고, 민주적인...이라는 W.E.I.R.D라는 약어를 만들엇다. 신사적인 상업적 탐욕을 단지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어떤 경제학도, 정치학도 역사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무지한 W.E.I.R.D.o 샘플링 오류를 범하고 있다(폴라니가 이전에 지적했듯이). ==폴라니는 인간은 원래 경제적 이익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유대를 중시하는 존재였으며, 시장의 논리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인위적인 현상임을 강조햇음 However glorious the glowing rhetoric of gentle-commerce growth gets, it is best understood as designed to protect and fatten the privileged. As American diplomat George Kennan put it in 1948, we have “50% of the world’s wealth, but only 6.3% of its population… Our task … is to maintain this position of disparity.” Today the proportions differ and the ideology now engorges a grotesquely self-satisfied global elite, but neoliberalism enacts the continuation of Kennan’s greed-uber-alles priority. Beware what’s behind the decorous designs of the two-hearted and two-faced beast of liberalism. '온화한 상거래를 통한 성장'이라는 수사가 아무리 화려하게 빛날지라도, 그것의 본질은 기득권층을 보호하고 그들을 살찌우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1948년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이 언급했듯, "우리는 세계 부의 50%를 가졌지만 인구는 6.3%뿐입니다. 우리의 과업은... 이 불균형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 비율은 달라졌고, 이제 그 이데올로기는 기괴할 정도로 자만심에 찬 글로벌 엘리트들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탐욕이 최우선'이라는 케넌의 우선순위를 지속적으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심장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수인 자유주의의 품격 있어 보이는 설계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경계하십시오. ++신사적인 상거래를 통한 성장이라는 미사여구가 아무리 찬란해도,그것의 본질은 특권층을 보호하고 살찌우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1948년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 은 - 우리는 전 세계 부의 50퍼센트를 가지고 있지만 인구의 6.3퍼센트만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이 불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 말햇다...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달라졋고 그 이데올로기는 기괴하게 자기만족적인 세계 엘리트들의 배를 불리고 잇다. 신자유주의는 탐욕이 최우선이다는 케년의 우선순위를 지속적으로 실현하고잇다. 두 심장와 두 얼굴을 갖은 야수인 자유주의의 품위있는 설계 뒤에 무엇이 있는지 경계하라. Let’s help free market fans and rational optimists avoid (even unwittingly) behaving as badly as those elegant imperial moral monsters of (classical or neo)liberalism. Especially those avuncular avatars of avarice who have usurped the term “rational” to mean something utterly self-serving—their almighty and savage market god of greed isn’t alleviating poverty at anything like a morally acceptable pace. Until the justice-hampering biases baked into free markets are countered by more equitable and just values, economics must not be our main guide on major moral issues (like global poverty, or the climate crisis). 자유 시장의 팬들과 합리적 낙천주의자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전적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저 우아하고 제국주의적인 도덕적 괴물들처럼 악하게 행동하는 것을 막아봅시다. 특히, '합리적'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의미로 변질시켜 찬탈해 버린 저 탐욕의 화신들—그들이 전능하고 야만적인 '탐욕의 시장신'으로 떠받드는 체제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속도로 빈곤을 완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 시장에 내재한 '정의를 가로막는 편향성'이 더욱 공평하고 정의로운 가치들에 의해 상쇄되기 전까지는, 경제학이 (세계적 빈곤이나 기후 위기와 같은) 주요 도덕적 문제의 핵심 지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 시장에 열광하는자들과 합리적인 낙관론자들이 (고전적이든 신자유주의든) 자유주의라는 우아한 제국주의적인 도덕의 괴물들처럼 나쁘게 행동하는 것을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막아보자. 특히 '이성적'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이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탐욕의 화신들-그들의 전능하고 야만적인 탐욕의 시장의 신은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속도로 빈곤을 완화시키지 못다고 잇다. 자유 시장에 내재한 '정의를 가로막는 편향성'이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가치에 의해 상쇄 될 때까지 경제학은 주요 도덕적 문제 (예 : 세계 빈곤 또는 기후 위기)에 대한 주요 지침이되어서는 안된다. We must be ever vigilant against our own time’s monsters, like those elegant conscience-clearing doctrines that equate all progress with greedocrats graciously gobbling up more of the globe’s resources (strictly for the sake of the poor, of course). If you wish to see the good parts of liberalism’s gifts rescued, you’d better grasp and make amends for its ghastly track record. And best to pay much less heed to those accomplished plutocrat-pampering pundits that our corporate-courtier press loves to parade. Having been enlightened by all this, what role should greed play in how we run the world? 우리는 우리 시대의 괴물들에 대해 늘 경계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모든 진보를 '그리도크랫(Greedocrats, 탐욕스러운 지배층)'이 지구 자원을 더 우아하게 집어삼키는 것과 동일시하는(물론, 오로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양심을 가책을 씻어내는) 저 고상한 교리들 같은 것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유주의가 준 선물들 중 좋은 부분들이 구조되길 원한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끔찍한 과거의 행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보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업의 시종 노릇을 하는 언론이 앞다투어 내세우는, 저 노련한 '부유층 비위 맞추기' 전문가들의 말에는 훨씬 적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지금, 우리가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에서 탐욕(greed)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시대의 괴물들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진보를, 더 많은 세계의 자원을(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만인 것처럼) 우아하게 걸스럽게 먹어치우는 탐욕주의자들과 동일시하는, 양심을 정화하는 격조높은 교리같은것을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진보'나 '원조'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이를 정당화하는 지적 체계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과거의 괴물이 아편 전쟁이나 식민지 기근 같은 직접적인 폭력이었다면, 현대의 괴물은 교묘한 이론과 경제 논리 뒤에 숨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총칼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경제학 이론, 개발 원조 모델, 혹은 사회 공헌 담론 따위는 겉보기에는 논리적이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부유한 국가나 기업들이 자원을 독점하면서도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면죄부를 주는 이론적 장치입니다.. 강대국이나 거대 자본이 자원을 약탈하면서 항상 내세우는 명분인 "현지 일자리 창출", "경제 발전", "빈곤 퇴치" 나 "낙수 효과","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등등의 단어가 실제로는 본인들의 "자유주의적 이익"을 위한 기만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과거 영국이 '자유 무역'을 내세워 인도를 수탈했듯, 현대에도 '자비로운 자유주의의 가면을 쓴 탐욕'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greedocrats (탐욕 관료/지배층): 'Greed(탐욕)'와 'Bureaucrat(관료)' 또는 'Aristocrat(귀족)'을 합성한 표현으로, 진보의 이름으로 자원을 독점하는 권력층을 조롱하는 단어) 자유주의의 선물 중 좋은 부분이 구원되는 것을 보고 싶다면, 자유주의의 이면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과거의 기록을 파악하고 보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업의 시종 노릇을 하는 언론들이 함계 행진하기 좋아하는 저 뛰어난 부유층 비우 맞추기 전문가들의 말에는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다. 이제 이 모든 것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우리가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에서 탐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 다른소린 이 사람 참 싫어합니다... 수구 꼴통들에 비하면 그래도 쬐금은 낳다 는 허접한 차악이론 또는 차선이론 따위가 주는 긍정적인 인상 말고는 이 사람의 모든것이 다 싫습니다.....생겨처 먹은것, 듣기싫은 갱상도 말투 따위 외형적인 것 포함.. 이자가 언젠가...나는 자유주의자 ....라고 스스로를 말 하는 것을 들은적 잇는데 또 다른소리 주변에서는 ..저 자식 기껏해야 자유주의자일 뿐이다....는 빈정거림도 꽤 들엇습니다. 항상 중요한것은 단어나 표현의 동질성이나 유사성이 아니고 그 내용과 의미라고 햇지요? 이자의 자유가 윤석열이 나발거리는 자유와 같지는 않을 것인데 이 자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자유 주의자"라고 말 햇는지는 모르겟지만---솔까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다 -이자를 기껏해야 자유주의자일 뿐이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하게 알겟지요?? 이제 이 모든것에 깨달음을 얻엇쓰니....나는 자유주의자다 ...는 표현을 감히 함부러 나발 될 수 잇을까? 다른소린 "자유 민주주의" 라는 단어 자체가 싫습니다. |

첫댓글
반다시~!!!!
기필코~!!!~
모쪼록~!!!!
하여간~!!!!
무슨복이든~!!!!
내가 모르는 아무복이라도 전부~!!!!
돌려 받으시길~~~~
이런 사람에게 복이라도 안 돌아가면
진짜 하늘은 없는거임....
믿는 신은 없지만
내가 알고 잇는 모든 신들에게 간청 하나니....꼭
그리 해 주시길~~~~~
고맙습니다....
님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념을
제 진심 전부를 담아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휴........또 이런 엄청난 축복을 주십니까??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잇다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
이제서야 정독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