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8일...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의 결정적 전투 1592년 7월 8일,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또는 견내량 대첩(見乃梁大捷)은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둔 해전이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수군의 수륙병진을 완전히 저지하였다.
조선 수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일본 수군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쳐 포위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총통과 화살,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랐고, 잔여 일본군 400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인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양성에 눌러앉게 되었고, 전라도를 공격하는 왜군의 움직임도 둔화되었다.
한산도 대첩의 배경
전초전과 초기 대응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조선 수군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여러 차례 일본 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등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일본군의 해상 진격을 저지했다.
한산도 대첩 : 일본군의 계획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1592년 6월 23일,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용인에서 해안으로 급파하고,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에게 조선 수군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 수군은 견내량에 집결하여 조선 수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한산도 대첩 : 조선 수군의 준비
1592년 7월 6일,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파선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정박하고 있었다. 7월 8일, 조선 수군은 일본군이 영등포에서 견내량으로 옮겨 정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했다. 이순신은 총 55척의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맞섰다.
조선 수군은 바다 가운데에서 일본군을 발견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내양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조선 수군이 강력한 전력을 보여주자 노를 재촉해 퇴각을 시도했다. 이순신은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한산도 대첩 : 학익진과 총통 공격
조선 수군은 학익진을 형성하고, 총통과 화살, 탄환을 연속적으로 발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 먼저 적선 3척을 격침시키고, 일본군의 사기를 꺾은 후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적을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63척을 불태웠고, 잔여 일본군 400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 한산도 대첩의 승리와 전략적 의미
한산도 대첩은 조선 수군의 전략적 승리로, 일본 수군의 공세를 완전히 분쇄시켰다.
일본군은 한산도 대첩에서 큰 패배를 당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명령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일본군은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전략적으로 조선 점령이 좌절되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이순신의 전략적 식견과 전술적 능력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가덕도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일본 전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이순신은 즉시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며 안골포로 진격했다.
일본 전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의 주력대였습니다.
하지만 포구의 지세가 얕아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었고, 일본군은 지형이 험하고 수비가 단단한 곳에 의지한 채 응전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작전을 변경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번갈아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일본 전선을 공격하도록 했고, 마침내 일본군도 응전하기 시작했는데 이억기의 함대가 달려와 합세하면서 부터 전투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일본군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가며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대다수의 배를 잃고 25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뭍으로 도망쳤다. 이순신은 도망친 일본군이 밤중에 바다로 나올 것을 예측하여 일부 전선을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날의 전투로 평양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일본 수군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고립되었으며, 이 해전은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해전과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중요한 해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골포 해전의 의의
안골포 해전은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중요한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고 조선 수군의 우세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투는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과 조선 수군의 전투 능력을 입증한 사례로, 임진왜란 중 조선의 해상 방어에 큰 역할을 한 곳이다.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으로 일본 수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 수군은 부산포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전라도로의 일본군 진격도 저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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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위종, 헤이그 만국 기자 협회에서 연설
| 1907년 7월8일. 이위종, 헤이그 만국 기자 협회에서 연설
헤이그 밀사 3인 중의 한 명으로만 알려져 있는 이위종은 미국공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10세에 도미하여 그곳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프랑스로 건너가 나폴레옹이 세운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에 한국인 최초로 입교했다.
그리고 17세부터 러시아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헤이그 특사로 발탁되어 21세의 젊은 나이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기간 각국 기자들을 상대로 일본의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비합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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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중앙정보부, 동베를린 대남 공작단 사건 발표 : 동백림 사건. 104명 구속, 윤이상등 34명 유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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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8일...중앙정보부, 동백림거점 북한 대남공작단사건 발표
1967년 7월 유럽, 특히 서독에 있던 한국인 교수·유학생들이 동베를린(동백림)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통해 평양을 방문하고 그 중 일부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구 동독의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 대남적화공작단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관련자인 임석진 명지대 조교수가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