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다산초당 (순례지/성지) –강진-
주소: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전남 강진읍에서 해남 방면으로 18번 국도를 따라 2km 남짓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 다산 초당 안내 푯말이 있다. 좁은 길을 따라 7km쯤 가면 만덕리 다산 초당 입구가 된다. 여기서 가파른 길을 10여분 정도 올라야 다산 초당이다.
국토의 끝, 전라 남도 강진은 남도 문화의 일번지이다. 월출산 아래 멀리 다도해를 바라보며 남단으로 자리 잡은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서러운 유배 생활을 하곤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됐던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수많은 명저(名著)를 저술했기에 강진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의 고향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인 마재 못지 않은 중요한 사적지로 손꼽힌다.
정재원(丁載遠)의 넷째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한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미 17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한 그는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취한다.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한다. 더군다나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西學徒)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疎)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해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던 다산. 그러나 어쩌면 그런 머뭇거림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도해를 바라보며 적적하게 선강진의 외딴 초당에서 다산은 「목민 심서」「경세 유표」「흠흠 신서」 등을 저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