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국인을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은 저들의 "대륙기질" 을 찬양하고, 또 어떤 이는 중국인의 복잡한 계산성에 혀를 내두른다.
이제 미국의 패권에 맞설 유일한 강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깊이있게 알아가는 작업은 대륙과 인접한 한반도의 우리에겐 매우 소중한 일이다.
이제는 중국인이 보여주는 여러 행태의 역사.문화적 상관관계 등 이면적 정보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지역별 중국인의 기질적 특성, 이주(移住) 역사, 요리와 언어적 특성 등을 이해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중국 문화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베이징(北京) 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문화와 한족(漢族) 의 끊임없는 남하로 번성한 양쯔(揚子) 강 이남의 남방 문화다.
[니하오! 중국] 2. 베이징 사람들
베이징(北京) 시 둥청취(東城區) 의 작은 골목길. 베이징의 전통적인 시가지 모습을 갖춘 이곳의 골목은 현지어로 "후퉁(胡同) " 이다. 이 후퉁을 사이에 두고 전통주택 사합원(四合院) 이 이어져 있다.
"사합원" 은 자그마한 성채를 방불케 한다. 건물들이 가운데 마당(中庭) 을 향해 열려 있고 집 외부로는 창 하나 내지 않은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구조다. 유일하게 외부와의 접촉이 이뤄지는 문도 전체 네 면의 벽 한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나 있을 뿐이다.
"저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 같다" 는 소외감마저 든다. 베이징의 전통적이면서도 전형적인 이 주택은 "닫힘의 구조" 이자 중국 북방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울타리 쌓기 심리" 의 건축적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사합원은 만리장성과 닮았다. 2천여년 전 진시황(秦始皇) 이 쌓기 시작해 1천5백년 동안 증축을 거듭했고 마침내 6천㎞나 되는 울타리를 만들어낸 중국인들. 장성은 오늘날 거대 중국의 역사적.문화적 상징이자 인류 최고 건축물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인들의 자기중심적이자 "남의 것은 필요 없다.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는 자기완결성의 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中華主義) 의 상징이다.
베이징대 양중(楊忠) 교수는 "사합원은 밀폐적인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물론 북방엔 바람과 먼지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외부보다는 내부를 지향하는 심리가 상당히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가옥의 배치로 볼 때 가장이 북쪽 건물에 거주하고 동.서에 그 다음 자리의 사람이 거주하는 등 위계질서적 관념도 매우 뚜렷하다" 며 "어쨌든 사합원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경파(京派) 문화의 일대 특색을 담고 있다" 고 덧붙인다.
사합원은 결국 중국인 내면에 담긴 "닫힘" 과 "격식" 의 문화를 보여주는 틀이다. 또 안과 밖을 엄밀히 구분하는 중국식 "울타리 문화" 의 전형이다 사합원의 문화를 발전시킨 베이징 사람들은 따라서 자기 정체성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원대(元代) 이래의 중국 수도라는 점이 거기에 한몫하겠지만 황허(黃河) 유역에서 성장해 이민족과의 오랜 전란을 이겨내고 얻은 민족적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신(新) 중국 건설(1949년) 이후 베이징에 이주한 신 베이징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사합원에 거주하진 않지만 학교와 정부기구 단위별로 만든 "대원(大院) " 에 산다. 담장으로 주위를 둘러친 대원에는 학교와 병원.상점 등이 모두 들어 있어, 자기 완결적인 구조를 지닌다는 점에서는 사합원과 다를 게 없다.
기질적 특성으로 보자면 베이징인들은 상업.경제보다는 정치와 권력에 집착한다. 5.4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天安門) 사태 등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마다 가장 큰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 베이징이란 점을 상기하면 된다. 이들은 5.4운동을 통해 강력한 민족적 자부심을 표출했고,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에서는 사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바탕으로 운동의 흐름을 주도했다.
베이징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상대의 집안과 학력.배경이다. 이는 상하이(上海) 사람들이 "해.육.공(海.陸.空 : 해외친척, 생활근거 마련, 거주공간 확보) " 유무를 헤아리는 것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상하이 사람들을 겉면이 매끄러운 자기(瓷器) 라고 한다면 베이징인들은 질그릇에 비유된다.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상하이 사람들처럼 매끄럽게 처신하지는 않지만 자기 중심을 지니고 나름대로의 멋에 따라 살기 때문에 붙여진 말들이다.
1990년대 후반 중국을 로큰롤의 열기로 몰아넣었던 조선족 출신 가수 최건(崔健) 은 베이징 신세대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랑 얘기를 주로 하는 상하이나 홍콩의 연예인들과 달리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가사와 반정부적 제스처, 꾸미지 않은 무대 의상으로 유명했다. 이런 베이징 새 세대의 기질은 흔히 "광(狂 : 광기) " "비(匪 : 산적 기질) " 로 표현된다.
베이징인들은 또 말을 즐긴다. 말에 취해 거듭 그럴듯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베이징 사람들의 입담을 외지인들은 "선랴오(神聊 : 신들린 듯 말함) " 라고 말한다. 중국 전역에서 베이징 사람들의 입담에 비길 만한 것은 쓰촨(四川) 성 사람들의 "룽먼전(龍門陣:적과 대치한 뒤 벌이는 설전. 일반적으로 쓰촨인들의 입담을 일컬음) " 뿐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하지만 베이징 사람들의 입담은 대개 형식에 머물게 마련이다. 말을 하는 목적보다 말하는 형식 그 자체에 탐닉한다는 지적이다.
『중국 쌍성기(雙城記) 』의 저자 장치(張琦) 는 "베이징 사람들의 말에 담긴 유머감각과 창조성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들의 언어는 항상 표면적인 서술에 머물고 있다는 점" 이라고 지적한다. 베이징 요리가 맛 자체보다 격식에 치중하는 특성을 보이는 것도 이런 기질과 무관치 않다.
베이징에는 지난해 말, 21세기는 중화민족의 시대가 될 것임을 자부하는 "중화세기단(中華世紀壇) " 이 들어섰다. 그 단에는 "중화민족 위대 부흥" 이라는 글귀가 새겨지고 그 앞에는 중국민족 5천년의 역사가 길이 3백m 동판에 글씨와 그림으로 새겨져 사람들을 맞고 있다.
중국 지도부 또한 최근 들어 "중화민족 대부흥" 이라는 구호를 자주 내세우고 있다. 개혁.개방 이래 되찾은 민족적 자부심의 발로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런 기류가 만리장성과 사합원이란 주택구조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닫힘" 의 구조로 치달을 것인지, 아니면 개방을 기조로 한 "열림" 의 구조를 지속할 것인지, 중국을 들여다보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北京 궁중요리
베이징 요리는 궁중음식을 통해 형식과 내용이 크게 풍부해졌다. 명.청대에 발전한 궁중음식은 현재 베이징요리의 골간이다.
명대와 청대 초반까지 중국의 궁중요리는 대부분 산둥(山東) 음식을 일컫는 "노채(魯菜 : 魯는 춘추전국 시대 이래 산둥성 일부를 일컫는 단어) " 를 축으로 발전했다. 황제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따라서 산둥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할아버지(강희제) 와 아버지(옹정제) 에 이어 청대 초반 태평성세를 이어갔던 건륭(乾隆) 황제도 매끼 식사 때 먹는 음식은 10여개. 1백여개의 진수성찬을 차려 먹었다는 일반의 속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이처럼 소박했던 분위기는 19세기 후반 함풍제(咸豊帝) 의 아내로 남편 사후 50년 가까이 청 황실을 수렴청정했던 서태후(西太后) 로 인해 크게 달라진다.
황제의 음식을 챙기는 이른바 "어선방(御膳房) " 보다 서태후의 요리를 만드는 "서선방(西膳房) " 이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여기서 만드는 요리는 4천여가지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태후가 광서(光緖) 연간(1875~1908) 에 봉천(奉天.현재의 선양) 을 순시하러 갈 때의 기록. 당시 모두 16량의 열차가 대기했는데 이 가운데 4량의 열차가 그녀를 위한 주방으로 만들어졌다. 이 열차 안에는 모두 50개의 화로와 1백명의 요리사가 동원돼 1백가지의 정식 요리를 만들어 바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곰 발바닥.원숭이 골.낙타 등.호랑이 고환 등 진기하다 못해 "엽기적" 인 음식 등이 이때에 개발돼 민간에 전해졌다. 요즘도 베이징에서 구경할 수 있는 대표적 궁중음식인 "만한전석(滿漢全席) " 은 이같은 청대 황궁요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들로 요리 종류가 많게는 1백28개에 달하며 사흘에 걸쳐 먹는 게 정 코스다.
입력시간: 2001. 08.28. 18:42
[니하오! 중국] 3. 상하이 사람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섰던 상하이(上海) 시 마당루(馬當路) 의 일반 주택가. 폭이 4m 남짓 될까 말까한 작은 골목인 리눙(里弄) 을 끼고 상하이의 전통 주택인 석고문(石庫門) 이 늘어서 있다. 베이징의 전통주택 사합원이 즐비한 후퉁(胡同) 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가옥 전체가 골목을 향해 열려 있고 다세대가 모여 사는 주택 앞에는 일종의 사교마당인 "눙탕(弄堂) " 이 형성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웃과 만나 생활정보를 교환하고 때로는 돈벌이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주택의 배열도 길을 따라 옆으로 늘어선 서양방식과 유사하다.
네 면이 모두 벽으로 둘러쳐진 사합원이 닫힘과 격식, 보수성을 나타내는 베이징(北京) 식 경파(京派) 문화의 커다란 특색이라면 이 석고문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해파(海派) 문화의 상징이다. 가옥구조가 밖을 향해 열려 있듯 석고문이 대표하는 상하이의 문화는 개방지향형이다. 3백여년 전에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고대부터 북방에서 장강 이남으로 옮겨 온 한족(漢族) 이주.개척사의 총화에 해당한다.
"상하이의 가장 큰 특징은 이주(移住) 문화다. 따라서 분위기는 개방형이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혼합형이다. 상하이 문화의 이같은 면면들은 전통주택인 석고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섞여 살면서 남들과 열심히 교제하고 바깥 문물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데 열심이다. " 레저.음악.문화 등을 다루는 상하이 "가일주간(假日週刊) " 구이리(顧亦禮) 편집국장의 설명이다.
"상하이" 라는 지명 자체가 매우 시사적이다. 이 말은 "바다로 나아가자" 라는 뜻이다. 만리장성과 사합원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자신의 정체성에만 집착하는 북방의 문화와는 본질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顧주간은 이렇게 덧붙인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상하이를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는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현실적이면서 실용적인 상하이 사람들의 기질은 북방 사람들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다.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하이 사람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가장 적합하다. "
실제 상하이는 제국주의가 동점(東漸) 할 때 동양과 서양이 마주치는 교차점에 서 있었다. 영국 등의 조차지가 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 "잠든 중국" 을 일깨우는 일종의 창구였다. 따라서 상하이는 현대 중국 개혁.개방의 간판이자 구심점이다.
이런 상하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은 지금으로부터 4백년 전 사람인 서광계(徐光啓) . 명(明) 대 관리였던 그는 유명한 유럽의 전도사 마테오 리치와 만나 교우하면서 『기하원본』을 번역하는 등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상하이대 선이훙(沈益洪) 교수는 "서광계는 오늘날 상하이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역사 속의 인물이다. 당시 중국 문명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그의 행적을 통해 요즘의 개혁.개방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고 말했다.
상하이 사람들의 기질은 한 마디로 말해 실용적이다. "세상 이치에 매우 밝고(精明世故) , 처세에 매끄러우면서 여러 얼굴을 지녔으며(圓滑多面) ,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斤斤計較) " 타입이다.
베이징 사람들이 돈보다는 정치적 사안에 관심을 많이 두는 데 비해 상하이 사람들은 "귀족이 되는 꿈보다는 부자가 되는 꿈을 꾸고 싶다" 는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이해타산에 밝고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찾아다닌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이곳 저곳 기웃거리기를 좋아한다. 상하이 사람들의 길거리 행보는 "당마루(蕩馬路) " 라고 한다.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어디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웃기웃하며 다니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비해 베이징 사람들의 산보는 "류다(溜達) " 라고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피하고 호수나 공원 등 한적한 곳을 찾아 걸어다니는 게 차이다.
상하이 사람들이 이처럼 현실에 기울이는 지대한 관심은 이곳 특유의 상업문화를 낳았다.
태평천국 시기 중국 남부의 재부(財富) 를 쓸어 모으다시피 했던 호설암(胡雪巖) 과 중국 제1의 매판자본가 목병원(穆炳元) , 선대의 방직업 전통을 이어받아 1980년대 부총리 자리에 올랐던 "붉은 자본가" 룽이런(榮毅仁) 등이 이곳 출신이거나, 아니면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상하이를 포함한 장쑤(江蘇) .저장(浙江) 등 화동권의 상업은 중국 내에서 알아준다.
우선 고려시대 개성 상인들과 거래했던 닝보(寧波) 의 상인들은 아직도 중국 내에서 명망이 높다. 저장성 남부의 원저우(溫州) 사람들은 베이징의 훙차오(虹橋) 시장을 석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쓰촨(四川) 성을 비롯한 각 내륙지역의 상권을 휩쓸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상하이 무역관 양장석 차장은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고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는 점이 이곳 상업문화의 특성이다. 원래 발달한 수공업적 기반 위에서 발빠른 변화를 추구하며 중국 내에서 가장 왕성한 상업적 발전을 보이고 있다" 고 말했다.
상하이권 사람들의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보이는 과도할 정도의 현실집착은 가끔 비판대에 오르내린다. 이른바 "상하이 도시병" 이다. 우선 상하이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돈 벌기에 매달린다.
이러한 상하이 사람들에게는 "빈혈(貧血) 신사" "세리안(勢利眼 : 권세나 재물에 빌붙는 사람) " 등의 별명이 따라붙는다. 예의는 깍듯이 지키지만 작은 이익에 너무 연연하는 상하이 사람의 속성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눈 앞에 이권을 두고도 다른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상하이 사람들에게서 "당신 아무래도 상하이사람 같지 않은데" 라는 핀잔을 듣는다.
가정생활에서 나타나는 상하이 남자들을 비꼬는 말은 "마다싸오(馬大嫂 : 마씨 형수님) " 다. 아내를 대신해 "재료를 사고(買) , 쌀을 일고(淘) , 요리를 한다(燒) " 는 데에서 앞글자의 음을 비슷하게 따다 붙인 것이다. 그래서 상하이 남자들에게는 "소생(小生 : 풋나기) " "재자(才子 : 재주 있는 사람) " 라는 평이 따라다닌다. 북방의 남자다운 사내를 일컫는 "대한(大漢) " 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하이 푸둥(浦東) 의 발전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현대 중국 개혁.개방은 상하이 사람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그 배후에는 물질적으로 "석고문" 이라는 주택, 정신적으로는 4백년 전 중국 문명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민한 뒤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광계라는 두 개의 상징이 버티고 서 있다.
*** 華東의 요리
상하이를 포함한 장쑤.저장의 이른바 화둥지역은 바다와 양쯔강, 시후(西湖) .타이후(太湖) 등 대형 호수, 평원을 끼고 있어 예부터 생선과 쌀이 매우 풍부하다는 의미의 "어미지향(魚米之鄕) " 이라 불렸다.
이 곳 음식은 중국 4대 요리의 하나로 일명 "회양채(淮揚菜) " 다.
물산이 풍부하고 이 곳을 거쳐간 역사적 인물들이 다양해 요리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요즘 한국 내에도 잘 알려진 요리로 동파육(東坡肉) 이 있다. 이는 두껍게 썬 돼지삼겹살에 간장.초.술 등을 넣고 8시간 이상 삶아낸 요리로, 송대의 문인 소동파가 항저우(杭州) 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직접 만들어 후세에 남긴 음식이다.
청(淸) 대 대학자인 원매(袁枚) 는 항저우 근처에 살면서 이 곳 음식과 남북요리를 총 정리해 『수원식단(隋園食單) 』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다. 청대 건륭제는 강남지역을 순시할 때 이 곳 음식이 마음에 들어 요리사를 직접 궁중에 데려와 회양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쌀이 많이 나와 이를 재료로 만든 소흥주(紹興酒) .진강초(鎭江醋) 와 용정차(龍井茶) 가 매우 유명하고 요리에서 이들을 직접 사용한 것도 꽤 많다. 전체적으로 재료가 다양하며 요리의 색깔이 화려하다. 요리법으로는 찜과 중탕(燉) 법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발달했다.
장쑤성 쑤저우(蘇州) 요리는 재료를 우려낸 소스를 많이 쓰는데, 물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원탕(原湯) 으로 요리의 맛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식점 등에서 동냥한 닭고기를 거지들이 가져다가 흙으로 겉을 발라 구워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규화계(叫化鷄) " , 돼지 다리고기를 절여 만든 금화화퇴(金華火腿) 등도 화동지역 요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대만 거주 80%가 중국 푸젠성서 이주
"밥 짓는 연기가 나는 곳에는 화교가 있다" "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는 말은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 즉 화교가 세계 각 구석에 널리 퍼져 있음을 형용할 때 늘 쓰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화교라는 호칭은 오늘날 해외의 중국계 혈통을 지닌 사람 모두를 포괄하지 못한다. 요즘은 중국 국적을 지니지 않았지만 혈통과 문화 등의 측면에서 중국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화인(華人) " 이라고 부른다. 중국과 대만 국적을 지니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화교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자주 혼용된다.
오늘날의 화교는 대부분 동남아시아에 집중해 있다. 화교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현재 대만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중국 푸젠(福建) 성 이주민의 후손이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싱가포르 등에서 현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들 중국계 거주민이다.
대만 교무(僑務)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98년 현재 동남아 거주 화교수는 2천8백51만여명으로 전체의 80%에 달한다.
이밖에 미주 지역에 모두 4백71만여명, 유럽 지역에 5백80여만명이 살고 있다. 전체는 3천5백81만3천여명이다.
동남아 화교의 주류는 광둥(廣東) 과 푸젠계다. 화교들이 각종 혈연과 지연을 통해 서로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에 각 국가에 모여 사는 것도 이 혈연과 지연이 중심이 된다.
어느 지방 출신이 많은가는 국가별로 다르다. 예컨대 싱가포르의 경우 푸젠계가 40%, 광둥계가 42%로 비슷한 수준이지만 태국의 경우 광둥계(78%) 가 푸젠계(10%) 를 훨씬 앞선다.
그러나 필리핀은 푸젠계(80%) 가 광둥계(20%) 보다 훨씬 많다.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동남아권에서 화교의 위상이 다소 후퇴하는 듯한 인상이 있지만 아직은 이들이 동남아 경제권의 중심에 있다. 이들은 본토에 대한 귀향(歸鄕) 의식이 농후해 중국에 대한 투자를 활발히 벌이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입력시간: 2001. 09.11. 15:49
[니하오! 중국] 4. 푸젠성-이주의 문화
양쯔강 이남, 이른바 중국 강남(江南) 의 문화는 그 근간을 "이주(移住) 의 역사" 에 두고 있다.
진(秦) .한(漢) 이후 남송(南宋) 대까지 참혹한 전란과 살육, 전제왕권의 학정을 피해 중원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문화다.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움직였던 이들의 현실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다. 산간 벽지를 개간하고 원주민들과의 융합에도 적극 나섰던 이주민들의 문화는 해외로 뻗어 오늘날 세계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해외 화교권 세력을 구성했다.
강남문화의 대표격이라고 하는 상하이(上海) 와, 이같은 측면에서 다시 구별되는 푸젠(福建) 성은 광둥(廣東) 과 함께 해외 화교의 본향(本鄕) 이라 일컬어진다.
"차라리 태평성세의 강아지가 될지언정, 난세(亂世) 의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 " 푸젠성의 성도(省都) 가 있는 푸저우(福州) 사람들이 예전에 자주 하던 말이다.
그만큼 푸젠성으로 옮겨 온 사람들의 생활은 고단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오늘날의 푸젠에는 "태평면(太平麵) " 을 먹는 습속이 아직 남아 있다.
먼 곳에서 집으로 온 가족과 친구, 손님에게 대접하는 국수다. 끓는 물에서 건져 올린 면에 삶은 오리알을 얹어 내놓는 음식인데, 귀한 친척이나 친구에게는 두터운 정을 표시하기 위해 오리알 두개를 얹는다.
오리알은 중국어로 "압단(鴨蛋) " 이다. 이 압단은 푸저우말로 "압란(壓亂 : 난을 진압한다) " 과 발음이 같다. 난세에 대한 혐오감과 생존을 희구하는 푸젠 사람들의 심리가 엿보이는 음식이다. 난세를 누른다는 오리알과 말 그대로 태평성세를 바란다는 뜻의 태평면.
이 음식은 어찌 보면 푸젠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창(窓) 이다.
이들이 자리 잡았던 푸젠의 땅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푸젠성 중부를 흐르는 민(□) 강 이남(강 이북은 민베이, 이남은 민난이라고 말한다) 지역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동(華東) 에 비해 물산이 턱없이 적었고 땅은 말할 수 없이 척박했다. 따라서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살아가야 했다.
샤먼(厦門) 경제특구 "첨단과학기술연구회" 황훠취안(黃泉) 이사장은 "농업적 여건이 좋지 않아 푸젠은 예부터 화동지역에 공급하는 수공업 제품의 생산기지가 돼 왔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주에 의지해 살아가야 했다. 특히 푸저우 사람들은 요리사와 이발사, 재단사로 성장한 사람이 많았다" 고 말한다.
이 때문에 푸저우 사람들에게는 "세자루의 칼(三把刀) " 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요리.이발.재단에 쓰이는 세개의 칼이 푸저우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실제 중국의 푸젠성 인근 지역 등에는 주방장.이발사. 포목점 운영업자가 된 푸저우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7세기 세계적인 무역항이었던 푸젠성 취안저우(泉州) . 쌓이는 토사로 수심이 낮아져 지금은 샤먼 등에 자리를 내줬지만 한 때 이곳은 장저우와 함께 해외로 나가는 화교들의 출발지였다. 취안저우 항구 부근에는 지금도 거대한 불상과 웅장한 동.서탑이 서 있는 개원사(開元寺) 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우샤오(吳曉.여) 씨는 "개원사 등 거대 사찰과 도교의 절이 취안저우에 많이 발달해 있는 것은 현지 주민들의 해외진출과 관련이 있다. 바다로 나가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생명의 위협을 피하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 이라고 말했다.
푸젠성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해외로 진출한 화교들과 관련이 있는 특이한 습속들이 많다. 우선 "번객(番客) 의 예" .번객은 화교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항상 다른 나라를 "오랑캐의 나라" 라는 뜻의 번방으로 부른 데서 나온 말이다. 해외, 즉 다른 나라인 번방에 살았던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거나 다시 출국할 때면 이들은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송별연 자리는 일반적으로 "송순풍(送順風:순풍을 불어준다) " 이라고 하며 여기서는 숟가락과 생선요리를 뒤집는 게 금기다.
해외로 배를 타고 떠나는 상대방에게 불길함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한국인에게 간염을 포함한 염증에 잘 듣는 것으로 알려진 장저우의 편자황도 푸젠성 해외 이민사의 소산이다.
명대 궁중 비약(藥) 이었던 편자황은 이를 처음 만들었던 어의(御醫) 가 장저우의 한 사찰에 피란온 뒤 전했던 것인데, 후에 푸젠성의 민간에 이 약이 효험이 있다는 게 알려져 해외로 떠나는 가족들에게 각종 염증에 잘 들었던 편자황을 필수품으로 챙겨주면서 후대의 명약으로 자리잡았던 것.
이렇게 바다로 나간 푸젠인들은 우선 대만에 대거 정착했고 이어 교역을 위해 동남아에도 진출해 그곳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을 잊지 않았다.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落葉歸根) " 는 회귀에 대한 강한 본성이 화교들을 고향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샤먼시에서 샤먼대교를 건너면 오른편에 지메이(集美) 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푸젠성 출신 화교를 대표하는 천자겅(陳嘉庚) 의 묘소와 그가 직접 일군 교육촌이다.
천자겅은 싱가포르에서 재벌로 성장한 뒤 1910년대 고국으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전재산을 쏟아 부은 사람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은 생전에 천자겅에 대해 "화교를 대표하는 깃발이자 민족의 빛" 이라고 극찬했다.
뿌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화교들의 역량은 근세기까지 한낱 빈곤한 지역에 불과했던 푸젠성을 현대 중국 개혁.개방의 선두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차라리 "태평시대의 강아지" 가 되고자 했던 푸젠인들은 해양으로 나아가 가난을 이겨낸 뒤 이제는 조국의 개혁.개방에 순풍을 불어주고 있는 셈이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푸젠의 맛 …불도장
푸젠요리는 중국 8대 요리의 하나로 일명 민채다. 푸젠성은 산지와 구릉지가 성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하며 바다에 접해 있어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한(漢) 대에 이미 특유의 풍미를 갖추고 있었으나 당.송대에 푸저우.취안저우 등지가 해외무역항이 되면서 요리도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됐다.
푸젠 요리는 "탕이 없으면 안된다 (無湯不行) " "한가지 탕이 열 가지 맛을 낼 수 있다(一湯十變) " 는 말이 상징하듯 탕을 매우 중요시한다.
한국에서 고급 "보신음식" 쯤으로 잘못 알려진 불도장(佛跳牆) 은 그 중 하나다.
불도장은 청(淸) 대 광서(光緖) 2년(1876) 한 민간인이 현지의 가장 높은 행정관 주연(周蓮) 을 집으로 초대해 그 부인이 요리를 해 대접하는 과정에서 유래했다. 닭.돼지.오리와 소흥주(紹興酒) 를 넣어 만든 요리를 먹고 난 周는 향기에 감탄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周는 자신의 주방장에게 요리의 비법을 전수해 줄 것을 부탁했다. 관아로 돌아온 요리사 정춘발(鄭春發) 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해삼.삭스핀.돼지 뒷다리 근육.전복 등 20여종의 주재료와 10여종의 부재료에 육수와 소흥주를 붓고 약한 불에 서너 시간 끓여내는 요리로 발전시켰다.
1877년 鄭은 "취춘원채관(聚春園菜館) " 이라는 식당을 차렸다. 어느날 몇명의 고관대작과 문인들이 요리를 먹기 위해 뚜껑을 열고 나서 방안 가득 퍼진 향(香) 에 모두 취하고야 말았다. 손님들이 요리의 이름을 묻자 주인은 "아직 없습니다" 고 대답했다.
그 중 한 시인이 "뚜껑을 열자 사방으로 퍼지는 향(香) , 참선하던 부처도 담을 넘겠네" 라는 시를 지어냈다. 절묘한 시구가 계기가 돼 이 요리는 이후에 "부처도 담을 뛰어 넘겠어(佛跳牆) " 라 불리게 됐다.
푸젠 요리에 자주 사용되는 조미료는 홍조(紅糟) 와 하유(蝦油) 다. 홍조는 찐 찹쌀에 누룩의 일종인 홍국(紅麴) 과 백국(白麴) 을 섞어서 항아리에 담아 한달 정도 지난 다음 체로 걸러 사용하는 조미료로 장어.닭.오리.생선.돼지고기 등을 조리할 때 쓴다. 하유는 새우 액젓으로, 간을 맞추는 조미료로 사용한다.
푸젠 요리의 특징인 연피(燕皮) 는 신선한 순살 돼지고기에 녹말가루를 더하여 짓이긴 뒤 눌러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 것으로, 탕 등의 고급요리에 사용한다. 생선을 갈아서 둥글게 만든 어환(魚丸) 도 빼놓을 수 없다.
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 배화여대 교수>
입력시간: 2001. 09.11. 15:59
[니하오! 중국] 5. 남방으로 뻗어간 楚사람들
황하 근처에서 살았던 중국인들이 용(龍) 을 그려냈다면 장강 유역의 사람들은 봉(鳳) 을 만들어냈다.
북방 사람들이 스스로를 황제(黃帝) 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면, 남방 사람들은 자신들을 염제(炎帝) 의 자손이라 여겼다.
혈연 중심의 사회구조를 더욱 확대시켜 효(孝) 와 충(忠) 의 개념을 제도화한 유가의 사상이 북방문화의 소산이라면, 개인의 자유와 초현세적인 관념을 발전시킨 도가(道家) 는 남방문화의 소산이다.
황하와 장강의 문화는 이렇게 달랐다. 요즘의 남방문화는 상하이(上海) 가 주도하고 있지만 춘추전국 시대 이래 중국 옛 문명의 발전사에서는 이른바 초(楚) 문화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취재 기간 만났던 중국의 학자들 대부분은 "중국 남방 문화의 본류를 이해하려면 춘추전국 시대의 초나라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고 충고했다.
초는 지금의 경계로 이해하자면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두 성이 주축이고 여기에 안후이(安徽) .허난(河南) 성 일부가 포함된다. 장강의 중.하류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전쟁터였던 형주(荊州) 는 초나라 문화의 핵심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 문화를 이야기할 때 흔히 "형초(荊楚) " 문화라고 한다.
중국 중난(中南) 민족학원 황창링(黃長凌) 교수는 "초 문화의 핵심은 무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을 숭상하며 다양한 종교사상을 발전시켰다. 초나라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봉황은 초나라 원주민들이 섬겼던 토템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중 초문화의 상징이 됐다. 웅혼한 기상에 근엄한 성격의 북방인에 비해 초나라 사람들은 낭만적인 경향을 보인다" 고 말했다.
유가와 함께 중국 사상사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도가는 초나라 사람들의 이처럼 낭만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문화의 토양 속에서 성장했다. 출생연대가 불확실하지만 노자(老子) 는 지금의 허난성 사람이고 장자(莊子) 또한 같은 지역 출신으로 낭만과 자유라는 초나라 문화를 바탕으로 도가의 틀을 세웠다.
중국 4대 명절인 단오절(端午節) 을 있게 한 애국시인 굴원(屈原) 은 초나라 때 명신으로 회왕(懷王) 의 실정을 간언하다 "이소(離騷) " 등 명시를 남기고 멱라강에서 빠져 죽은 사람이다. 그의 시는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깔고 나라에 대한 우국충정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일부 시에다 후대 사람들의 시를 덧붙여 만들어진 『초사(楚辭) 』는 북방의 시가문학인 『시경(詩經) 』과 더불어 중국의 남북문학을 대표한다.
친구 종자기(鍾子期) 가 죽자 "세상에 아는 사람 많다지만 내 음악을 알아줄 이는 없다" 며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지음(知音) " 고사의 주인공 유백아(兪伯牙) 도 초나라 사람이다.
이들이 만들어 낸 각종 역사적 유물도 눈여겨 볼 만하다. 초나라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봉황 외에 일반 청동기 등은 북방의 그것에 비해 동적이다. 북방의 유물 등에 많이 보이는 직선보다 곡선과 호선을 많이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유연성과 상상력에 활동성이 강조된 것들이고 정태(靜態) 보다는 동태(動態) 를 앞세운 모양새다.
사람의 성정(性情) 으로 말하자면 초나라 사람들은 낭만적이며 자유방임적이다. 자고로 귀신을 숭배해 무속이 크게 발달한 점도 북방과 크게 구분지어지는 대목이다.
현세적 성공에 연연하기보다 탈속적인 가치를 우선시했으며 고정된 양식을 받아들이기보다 변형(變形) 에 치중했다. 이러한 기질들은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반골" 들을 낳았다.
이들의 기질은 한 마디로 "부드럽게 나오면 받아주고 거세게 나오면 대든다(吃軟不吃硬) " 이다. 이처럼 낭만적이며 때론 충동적이고, 심지어는 "나도 황제가 될 수 있다" 는 생각으로 황권(皇權) 마저 우습게 아는 이들의 기질은 이곳을 거듭되는 전란의 와중에 놓이게 만들기도 했다.
멀게는 당(唐) 대 말기에 일었던 농민반란인 황소(黃巢) 의 난을 비롯해 태평천국(太平天國) 의 난 등이 이곳에서 직접 발생하거나 여기서 싸움이 확대됐다. 가깝게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 을 무너뜨린 우창기의(武昌起義) 가 이곳에서 폭발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우창기의. 중국 속담에 "지식인(秀才) 이 반란을 일으키면 3년 걸려도 성공 못한다" 는 말이 있지만 1911년에 우창에서 일어난 반란은 바로 성공을 거뒀다.
실제 막전막후에서 혁명을 이끌었던 쑨원(孫文) 은 광둥(廣東) 사람으로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우한(武漢) 사람들은 "말만 앞섰던 쑨원 선생보다 행동이 앞섰던 후베이 사람들이 있었기에 혁명이 성공한 것" 이라고 자부한다.
혁명가적인 풍모에 시인의 기질을 함께 갖췄던 마오쩌둥(毛澤東) 은 이 지역 사람의 기질을 가장 잘 말해주는 인물이다.
그는 후난성 출신이고 문화대혁명 당시 그에 의해 숙청됐던 류사오치(劉少奇) , 한국전쟁에 참여했으며 나중에 毛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실각했던 펑더화이(彭德懷) 등이 동향 출신이다.
개혁.개방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인 관료형 부패 척결을 공언하면서 "관(棺) 1백개를 준비하되 내 것도 마련하라" 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바 있던 중국 총리 주룽지(朱鎔基) 도 같은 지역 사람이다.
후베이성이 낳은 사람으로는 역시 毛의 2인자 자리까지 올랐다가 모반을 꾀한 뒤 소련으로 망명하다 죽은 린뱌오(林彪) , 반(反) 군벌 투쟁에 앞장섰다 나중에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리셴녠(李先念) , 왕조의 역사가 끝난 뒤 초대 민국 총리에 오른 리위안훙(黎元洪) , 공산당 창당 멤버인 둥비우(董必武) 등이 있다.
후베이.후난 사람들은 인근의 쓰촨(四川) 성 사람들과 함께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매운 것을 좋아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있다. "쓰촨성 사람들은 매운 것을 두려워 하지 않지만 후난 사람들은 음식이 맵지 않을까 걱정한다" 고 한다. 끼니마다 붉은 고추를 곁들였다는 마오쩌둥의 음식습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상상력과 낭만에서 나오는 예측불허성, 매운맛을 즐기는 성향에서 보이는 강인함은 옛 초나라, 즉 현재 후베이.후난성 사람들의 대표적 기질이다.
중난 민족대학원 黃교수는 "형(荊) 과 초(楚) , 이 지역문화를 나타내는 두 글자 모두 가시가 붙은 관목을 일컫는 말이다. 초나라 문화권 사람들은 형과 초로 뒤덮인 지역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중국 남방문화의 개척사를 대표하고 있다. 또 이를 통해 한족(漢族) 이 광둥과 광시(廣西) 등으로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초문화는 중국 남방문화의 모태" 라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입력시간: 2001. 09.18. 17:57
[니하오! 중국] 6. 쓰촨성 사람들
"한 남자가 흐르는 코피를 멈추도록 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어 거리 가득 몰려든 사람들 모두 하늘을 쳐다봤다. 모든 거리는 하늘을 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날 전체 청두(成都) 거리에는 극심한 교통혼잡이 빚어졌다" . 쓰촨(四川) 성 청두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면 "어떻게 그걸 다 아느냐" 며 씩 웃는다.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외지와는 높은 산과 깊은 강으로 단절돼 자급자족형 분지로 유명한 쓰촨성 청두지역 사람들의 기질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화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고 때로는 쓸데없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아침 일찍 찻집으로 나가 앉아 천하대사를 논하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거대한 수리(水利) 사업이었던 도강언(都江堰) 공사로 생겨난 청두평원(1만2천㎢) 에 삶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다.
이곳은 원래 촉(蜀) 의 문명이 자리잡았던 곳. 중원지역의 한족(漢族) 문화와는 근본이 틀렸으나 진(秦) 대 이래 한족의 남하로 끊임없이 융화를 거듭하면서 중국 서남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키워냈다.
『청두사람들(成都人) 』의 작가 린원쉰(林文詢) 은 "촉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족의 문화가 유입하면서 중국의 남.북문화가 한데 엉킨 독특한 쓰촨문화가 형성됐다" 며 "청두평원 지역의 사람들은 특히 유유자적하면서도 문학적인 소양이 깊은 문화를 만들어냈다" 고 소개했다.
쓰촨성 중부지역을 남북으로 흐르는 푸강의 동쪽에는 충칭(重慶) 시를 포함한 또 다른 문화권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진시황 때 파군(巴郡) 이 세워졌던 곳인데, 서쪽의 청두평원을 중심으로 한 문화와는 또 이질적이다.
이렇게 쓰촨성 안에는 청두평원의 촉문화와 충칭시 중심의 파(巴) 문화가 양립했다. 따라서 오늘날 쓰촨의 문화를 표현할 때는 흔히들 "파촉(巴蜀) 문화" 라고 부른다.
출신 인물로 따져보면 물산이 풍부한 촉에서는 역대로 걸출한 문인들이 많이 나왔다. 우선 중국문학의 정수를 선보인 당대(唐代) 의 이태백(李太白) , 송대 문호 소동파(蘇東坡) 를 비롯해 현대에는 바진(巴金) .궈모뤄(郭沫若)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이에 비해 산지가 많고 토질이 척박한 파문화권에서는 문인보다는 뛰어난 무골(武骨) 이 양산됐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張飛) 에게 잡힌 뒤 항복할 것을 권유받자 "우리 고향에는 머리 떨어진 장수는 있어도 항복한 장군은 없었다" 며 이를 뿌리친 엄안(嚴顔) 과 중국인민해방군의 대장군인 주더(朱德) .류보청(劉伯承) .녜룽친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때문에 예부터 "파에는 장수가 나왔고 촉에서는 재상이 나왔다(巴有將, 蜀有相) " 라는 말이 전해진다.
중원지역인 한중(漢中) 으로부터 유입한 북방문화, 초(楚) 지역으로부터 서진(西進) 한 남방문화가 혼재한다는 사실은 쓰촨성 문화의 특징이다.
우선 청두평원의 촉지역 사람들에게는 만리장성을 쌓고, 배타적인 사합원(四合院) 식 가옥구조를 만들어 "울타리 문화" 를 키운 북방사람들의 기질이 엿보인다.
쓰촨문예출판사 천슝(陳雄) 편집인은 "청두지역은 모든 것을 자체 생산해내는 지역이라 예부터 "천부지국(天府之國) " 이란 별칭이 있었다" 며 "아쉬울 게 없었던 촉지역 사람들은 비교적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한다" 고 설명했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느긋한 기질을 지니고 있다. 전국에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가장 늦고, 걸음걸이가 가장 느리며 찻집의 문닫는 시간이 가장 늦은 곳은 청두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뭐든지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판단과 틀리면 일단 처음부터 사안을 다시 검토한다. 이런 기질을 "모난 머리(方腦殼) " 라고 일컫기도 한다.
파지역을 통해 들어온 남방문화는 이와는 또다른 성격이다. 남방문화는 이주 개척사에서 생겨난 개방지향형이면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응변(應變) " 에 핵심이 있다. 따라서 원활(圓滑) 함을 숭상하고 자주 변화하는 것(多變) 을 중히 여긴다.
쓰촨 출신 중국 현대작가인 리제런(李吉力人) 은 "쓰촨인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세가지 타입으로 변화한다. 먼저 야만인, 다음에는 원숭이, 그 다음에는 생쥐" 라고 설명했다. 우선 야만인처럼 무조건 남의 의견을 무시한 뒤에 통하지 않으면 원숭이처럼 온갖 재주를 피워보고, 나중에 여의치 않으면 생쥐처럼 눈치를 보면서 일을 마무리짓는다는 뜻이다.
『청두사람들』의 작가 린원쉰은 "느긋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는 북방기질에다 파지역의 강인한 근로정신, 게다가 변화에 민감한 남방문화의 영향이 겹치면서 쓰촨사람들은 타지역 사람들이 상대하기에 벅차다는 인상을 준다" 며 "남.북문화가 서로 융합된 쓰촨지역은 중국 서남지역에 자리잡은 가장 특색있는 문화지대" 라고 말했다.
자고로 쓰촨지역은 "사람이 뛰어나고 땅은 영기가 있다(人杰地靈) " 는 말로 평가받았다. 위에서 든 문인과 무인들 외에 쓰촨이 배출한 사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라는 덩샤오핑(鄧小平) 이다.
그는 중국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다. 개혁.개방의 결심은 그가 추구해 왔던 실사구시(實事求是) 이념을 토대로 생겨났다. 이는 쓰촨인들의 기질 가운데 "모난 머리" 의 "방(方) " 에서 배태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인 시장경제를 도입하겠다는 그의 담대하면서도 기이하기까지 한 실험은 원활함과 변화를 중시한 남방문화의 "원(圓) " 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북방문화의 방(方) 과 남방문화의 원(圓) 을 융합하고, 나아가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은 쓰촨문화의 총합이자 현대 중국이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는 데에 쓰촨인들의 생각은 일치하고 있다.
***쓰촨의 요리
쓰촨요리는 중국의 4대 요리로 다른 말로는 천채(川菜) 라고도 한다.
이 지역은 중국의 서남쪽 양쯔강의 상류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충칭, 남쪽으로는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 서쪽으로는 티베트(西藏) , 북쪽으로는 칭하이(靑海) 와 간쑤(甘肅) .산시(陝西) 성에 인접해 있다.
쓰촨의 문화는 이들 인접 문화권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면서 발전했다. 중원을 비롯한 북방과 후난.후베이성 등 초문화권의 문화적 요인 외에 티베트 고원과 윈난 등지의 여러 소수 민족의 문화도 유입했다.
이렇게 쓰촨에 흘러들어온 외지문화는 각자의 음식습관을 대동했고 결국 쓰촨지역의 음식 안에 자리잡게 됐다. 이러한 외지 음식의 유입과 동화는 오늘날의 다채다양한 쓰촨요리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쓰촨요리를 이야기하면 "맵다" 라는 생각을 떠올리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매우면서 아린" 맛이다. 산초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쓰촨요리의 맛을 세분하자면 달고 신맛(糖醋) , 시고 매운맛(酸辣) , 이상한 맛(怪味) 등인데 한 가지 맛에 다른 맛이 덧붙여지는 게 특징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쓰촨요리는 마파두부(麻婆豆腐) 다. 청두(成都) 현에서 "깨곰보 아주머니" (麻婆) 가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이 음식도 산초를 넣어 향을 내 맵고 아린맛이다.
돼지고기를 삶은 다음 다시 솥에 덜어 낸 뒤 볶는다고 해 이름 붙여진 회과육(回鍋肉) , 케첩소스에 튀긴 새우를 넣어 졸이는 간소(乾燒) 새우, 고추기름탕 속에다가 소 내장과 야채 등을 데쳐 먹는 화과(火鍋)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요리다.
<도움말 신계숙 중국요리 전문가.배화여대 교수>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입력시간: 2001. 09.25. 17:20
[니하오! 중국] 7. 광둥성 사람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루쉰(魯迅) 은 그의 저서 『북방인과 남방인(北人與南人) 』에서 "북방인의 장점은 중후함이며 남방인은 영리하고 약삭빠르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중후함이 지나치면 어리석음으로 발전하고,영리하고 약삭빠름이 과도하면 교활함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중국에서 흔히 "남대문(南大門) "으로 일컬어지는 광둥(廣東) 성의 사람들은 남방문화의 장단점을 두루 갖춘, 이를테면 남방문화의 총대표격이다.
루쉰의 지적대로 영리함과 약삭빠름이 지나쳐 교활함을 갖췄으며 이재(理財) 에 열심이고 관상.풍수.점복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한다. 집집마다 돈을 가져다 준다는 재신(財神) 을 모셔놓고서는 부모처럼 떠받든다.
음악과 문학 등을 거론할라치면 "그것은 역사의 유산"이라며 가볍게 제쳐놓고 돈 모으는 얘기에 다시 열심이다. 돈을 번다는 뜻인 파차이(發財) 의 파(發) 와 발음이 비슷한 숫자 "8"을 이상하리만치 중히 여긴다.
이에 관련된 우스개 한 토막. 사고로 다쳐 병원을 찾은 한 광둥 사람이 의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몇 바늘을 꿰매야 하지요?" 상처를 이리저리 살핀 의사는 "일곱 바늘을 꿰매면 되겠군요"라고 대답했다.그러자 그 광둥인은 주저하지 않고 "이왕이면 여덟바늘 꿰매주세요"라고 말했다.
북쪽에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남령(南嶺) 산맥이 지나고 있어 일명 "영남(嶺南) "이라고도 부르는 광둥성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게 해주는 일화다.
이들은 1994년 "황금연(黃金宴) "을 개발해 개혁.개방으로 한참 치닫고 있던 중국에서 커다란 화제를 뿌린 적이 있다. 일본의 첨단 기술을 이용해 1g의 24K 황금을 0.5㎡로 편 뒤 이를 직접 먹어보는 자리인데 광둥인들의 기이한 발상과 황금에 대한 열정이 겹쳐 중국인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다.
양쯔(揚子) 강 이남의 다른 남방문화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이민개척사를 배경에 두고 있다. 남령으로 가로막혀 인구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들은 진(秦) 대 이래로 북방의 각종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한 한족들의 후예다.
원래 인도차이나반도 사람들과 비슷한 월(越) 족이 살았던 땅에 한족들이 유입하면서 끊임없는 융화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광둥문화가 형성됐다.
광둥사람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광둥성 성도(省都) 인 광저우(廣州) 중심의 사람들과 성 북동부의 메이셴(梅縣) 사람,남동부의 산터우(汕頭) .차오저우(潮州) 사람이다.
인구와 언어 분포가 가장 광범위한 광저우 사람들이 광둥성 문화의 핵심이며, 메이셴 사람들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송대(宋代) 에 중원지역으로부터 광둥성으로 이주한 객가(客家) 족이다."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릴 정도로 대규모 상업행위에 능한 산터우.차오저우 사람들은 언어와 혈통이 동쪽으로 인접한 푸젠(福建) 계통이다.
홍콩 중문대 다국적문화연구소 궈사오탕(郭少棠) 교수는 "메이셴의 객가사람들은 뒤늦게 이주해와 물산이 척박한 산지(山地) 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생존을 위한 근로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며 "산터우 사람들은 근검절약 정신이 강하고 단결력이 높은 데다 기업 경영에 능해 현재 홍콩경제를 지배하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려내는 광둥의 문화는 앞에서 소개했듯이 일단은 "배금주의(拜金主義) "적 성격이 농후하다. 돈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기까지 하는 이들의 기질은 이 지역이 꽃피워낸 오래된 상업문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광저우 무역관 어성일 차장은 "광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 또한 최대인 상업무역항이었으며 1천8백여년 전인 삼국시대에 이미 동서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 역할을 했다"며 "이처럼 유구한 전통이 오늘날 금전을 숭배하는 광둥인들의 기질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이주의 역사에서 키워낸 남방 특유의 임기응변(臨機應變) 내지는 변통(變通) 식 기질도 빼놓을 수 없다. 사안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고 요령 좋게 일을 처리하는 태도다.
남방으로 새 정착지를 찾아 이주해 가면서 맞닥뜨리는 낯선 환경에 적극 대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문화다. 현재의 중국 남방문화권에서 이 변통문화가 고루 나타나지만 광둥성은 이를 더욱 발전시킨 지역에 해당한다.
황제의 권력이 자리잡았던 중원의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방의 오지라는 점과 거대 산맥인 남령으로 북방의 영향을 차단할 수 있었던 점 등이 이들에게 각종 형식에 매달리지 않고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山高皇帝遠) "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둥인들은 북방 사람들에게 이단아(異端兒) 로 비칠 때가 많다. 그래서 베이징(北京) 의 정부는 지금도 광둥을 주의관찰 대상 1호로 삼고 있다. 모든 성(省) 에 "현지인 통치원칙"을 적용하지만 유독 광둥성에만은 중앙에서 최고위 관리를 직접 파견한다.
실제 역사적인 경험을 두고 볼 때도 청(淸) 왕조가 붕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평천국의 난은 광둥 출신인 홍수전(洪秀全) 이 주도했으며, 서양의 문물이 밀물처럼 닥칠 때 "중체서용(中體西用.중국 학문으로 몸체를 삼고 서양학은 실용에 쓴다) "의 변법(變法) 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이다.
청 왕조를 뒤엎고 중국의 왕조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신해혁명의 쑨원(孫文) 이 광둥성 출신이며, 신해혁명에 이어 장제스(蔣介石) 를 중심으로 펼쳐진 북벌(北伐) 전쟁 또한 광둥에서 깃발을 올렸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근대 들어 광둥성에서 일어난 농민기의는 34건으로 전국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으며 나머지 반란성 정치적 움직임도 가장 빈번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금전을 숭상하며 독특한 기질을 형성한 광둥사람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전체적으로 광둥인들의 기질은 사변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지만 추상적 이론은 극력 회피한다.
광둥 출신의 대학자라고 치부하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도 감각주의와 경험론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과거 급제자의 숫자나 유명 문인.관료로서 역사에 기록된 사람의 수는 광둥이 전국 각지역과 비교할 때 꼴찌에서 넷째에 해당한다. 광둥인들은 이같은 현상을 두고 "경제는 오아시스, 문화는 사막"이라는 표현으로 자조(自嘲) 하기도 한다.
*** 광둥의 요리
"음식은 광저우(食在廣州) "란 말이 있듯이 광둥음식은 중국의 4대 요리 가운데 하나다. 중국 5대 하천의 하나인 주장(珠江) 강을 끼고 있으며 산지와 함께 기다란 해안선이 발달해 있고 북회귀선이 지나는 아열대 고온다습의 기후라 물산이 많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기이한 것을 찾아 이를 응용하기 좋아하는 광둥인들의 기질이 더해 온갖 요리가 발달한 게 특징이며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광둥요리는 재료의 원래 맛과 색깔을 최대한 살려내는 데 무게를 둔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뱀요리가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뱀과 줄머리사향삵을 함께 삶는 "용호투(龍虎鬪) "를 상품(上品) 으로 치는데, 줄머리사향삵이 워낙 구하기 힘든 동물이라 이를 고양이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뱀은 보신에 효과가 있다는 속설이 더해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광둥인들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 주장강 삼각주와 남중국해에서 건져내는 해산물 요리도 풍부하다. 상품으로 치는 상어지느러미 요리에서부터 전복과 자라를 비롯한 각종 생선 요리가 유명하다.
"얌차(飮茶) "라고 하는 식생활도 광둥요리를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차를 마시면서 국수와 죽을 비롯해 조그맣게 간식용으로 만든 딤섬(點心) 을 먹는 습관인데 광둥성 각 지역과 홍콩 등에 널려 있는 차루(茶樓) 를 이용하면 된다.광둥인들은 아침과 점심 등에 이 얌차를 한다.
광둥성의 죽도 매우 유명하다. 차오저우(潮州) 의 흰죽을 비롯해 돼지고기와 쇠고기, 삭힌 오리알 등을 넣고 만든 죽 등은 매우 일반적이다. 이밖에 어린돼지구이(乳猪) 는 독특한 구이방식으로 이름을 얻고 있는 음식이며 오리와 거위 바비큐, 닭.오리.거위 발바닥 요리도 자주 애용되는 음식이다.
산 원숭이를 탁자에 잡아둔 채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골을 꺼내 먹는다는 엽기적 음식은 청대(淸代) 초기 광둥으로 넘어와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吳三桂) 의 부하장수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든 음식으로 정식 광둥요리는 아니다.
<도움말=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배화여대 교수>
특별취재반=유광종 문화부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사진=조용철 기자
[니하오! 중국] 8. 상도의 고장 안후이성
중원(中原) 의 땅에서 양쯔(揚子) 강 이남으로 움직이는 길목에 안후이(安徽) 성이 자리잡고 있다.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듯 안후이성을 흐르는 화이허(淮河.회수) 는 중국 남북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이다.
지역적으로는 남방에 가깝지만 북방의 인정미를 갖춘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은 독특하다. 안후이성 운수사업에 뛰어든 한국 금호고속의 허페이(合肥) 지사 유정기(柳正琪) 차장은 "느긋한 성격이 마치 우리나라의 충청도 사람 기질"이라며 "현지인 직원들을 시켜 상하이(上海) 나 후베이(湖北)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오라고 하면 흥정 끝에 결국 손해를 보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경험을 털어놨다. 유교적 기풍이 강하기 때문인지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도덕과 예절을 따지다가 약삭빠른 이웃 지역 사람들에게 금전적으로 "당하기" 일쑤라는 말이다.
중국에서의 생활이 8년째라는 柳차장은 이어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맛을 먼저 본 다음에 사도 괜찮다"거나 잔돈을 아예 깎아주는 경우는 안후이 사람들에게서 처음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들이 한때 중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한 적이 있다. 명(明) 대와 청(淸) 대에 산시(山西) 성 상인들과 함께 중국의 상업을 주름잡은 이른바 "휘상(徽商) "은 이 지역 출신 상인들을 일컫는 단어다.
중국의 산(山) 가운데 풍광이 으뜸이라는 안후이성 남부의 황산(黃山) 일대는 명.청대에 휘주부(徽州府) 가 들어섰던 지역으로 이들 휘상의 근거지다. 평지보다 산지가 훨씬 많아 농사가 여의치 못했던 이 지역 사람들은 자고로 학문을 닦아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상업으로 돈을 버는 일을 택했다.
허페이 중국과학기술대학 자오전시(趙振西) 교수는 "지금의 안후이성 문화는 대개 옛 휘주부가 들어섰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산지가 많아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이 지역에서는 송대 정호(程顥) .정이(程) .주희(朱熹) 등 대학자 아니면 유명한 상인이 많이 나왔다"고 소개했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문을 나서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던 이들 휘상이 남긴 일화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보통 집을 떠나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데 10년 이상 걸리고, 때로는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인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예부터 생과부로 삶을 마친 여인들이 많았고 거금을 벌어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들이 이들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올린 일종의 정문(旌門:중국에서는 牌坊이라고 한다) 이 자주 세워졌다.
남편을 기다리며 매년 새해를 맞이할 때 구슬을 하나씩 사들였던 여인이 죽은 지 3년 뒤에 돌아온 남편은 서랍 속에서 20여개의 구슬을 보고 통곡했다는 내용의 "기세주(記歲珠) "일화는 지금도 간혹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또 집을 나선 남편을 기다리는 것이 무료해 저녁이 오면 동전 한 움큼을 땅바닥에 뿌렸다가 다시 줍는 일을 새벽까지 반복하다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는 여인들의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여인네들의 이같은 희생을 바탕으로 발흥한 휘상들은 소금과 차, 포목과 목재 등 생필품에서부터 서적.벼루와 먹 등 문방용구 등을 취급했다. 이 가운데 특히 소금은 휘상들이 고향에서 대량으로 배출된 고위 관료들의 비호를 받아 전매권까지 받아 내 떼돈을 벌어들였다.
허페이 과학기술대학 MBA과정의 추쉐린(儲雪林) 원장은 "휘상의 최대 특징은 관아를 끼고 발달한 일종의 관상(官商:관변 상인) 이며 또한 유교적인 질서를 매우 따졌던 유상(儒商) 이라는 점"이라며 "이들은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면서 상업적인 발전을 이룩해갔다"고 말했다.
안후이성 남쪽에 위치한 휘상들의 고향에는 당시 그들이 거대한 재산을 쌓은 뒤 올렸던 사당(祠堂) 과 호화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북방의 사합원(四合院) 식 구조에 개방성을 덧붙여 만든 안후이성 전통 주택은 구조상의 특징과 외면상의 아름다움으로 현재 건축학자들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추쉐린 교수는 "수판의 셈법이 휘상들에 의해 개발되는 등 상업적인 기술의 개발과 전승이 활발했다"며 "특히 유교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휘주 지역의 사람들은 가족에 의한 기술 전승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이뤄져 상업적인 우위를 수백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후이성이 배출한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고 하자 방문 기간 중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청백리의 상징인 포청천(包靑天) 과 명왕조를 연 주원장(朱元璋) 을 꼽았다. 황제의 사위를 벌하고 각종 탐관오리들을 단두대에 올린 포청천은 아직도 안후이성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주원장 또한 명을 개국한 황제로서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임에 틀림 없다.
춘추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재상으로서 탁월한 국가경영을 선보였던 관중(管仲) ,한(漢) 대의 군사전략가 장량(張良) , 『삼국지』로 너무 유명한 조조(曺操) 와 주유(周瑜) , 청대 문단을 주도했던 동성파(桐城派) 의 방포(方苞) , 청대 말엽 중국의 개혁.개방을 앞장서 끌고 나갔던 리훙장(李鴻章) , 중국 현대 5.4운동을 주도했던 후스(胡適) 와 공산당 창당을 이끌었던 천두슈(陳獨秀) 등이 있다.
이처럼 유명 인물을 많이 배출한 배경은 휘주 지역의 가난과 이를 이겨내기 위해 독서와 상업을 중시했던 휘주 사람들의 인문적인 전통이라는 점에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휘상들의 자랑스럽고 오래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안후이성의 경제는 연해 개방지역에 비해 몹시 낙후해 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기도 했다는 추쉐린 교수는 "현대적인 경영 개념과 비교할 때 지난날 휘상들의 경영기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유상(儒商) 으로서의 휘상들이 지닌 장점은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중국인들은 별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지 이제 23년, 숨돌릴 틈 없이 돈을 향해 뛰는 중국인들에게 이는 아직 사치스러운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특별취재반=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두부 원산지 바궁산
안후이성 화이허(淮河) 남쪽의 화이난(淮南) 시 바궁산(八公山) 이 이제 세계적인 음식으로 성장한 중국 두부의 원산지다. 바궁산 밑의 화이베이(淮北) 평원은 콩이 많이 나기로 예부터 유명한 곳.
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에 대한 설은 여럿 있지만 현재는 우리에게 『회남자』로 잘 알려진 회남왕 유안(劉安) 이 시조라는 게 정설이다.
한(漢) 고조 유방(劉邦) 의 손자인 유안(BC 179~BC 122) 은 화이난의 바궁산 일대에 거처하면서 각종 신선.의학.점성 등의 방술(方術) 에 능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하게 두부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두부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바궁산 두부는 아직도 유명하다. 특히 백옥같은 색깔과 부드러운 질감이 잘 어울려 중국 내에서 많은 찬사를 받는다. 이를 이용해 탕을 만드는 것으로 세 가지 요리가 유명한데, 두부를 탕 위에 띄우는 "표탕(漂湯) ", 탕 색깔이 젖과 같다는 "내탕", 맛이 뛰어나다는 "인조계탕(人造鷄湯) "이 바궁산 두부탕의 삼절(三絶) 이다.
이밖에 주원장이 걸승(乞僧) 으로 유랑하던 시절 즐겨 먹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된 뒤 당시 두부를 자신에게 만들어줬던 동료를 황궁요리사로 불러들여 다시 만들게 했다는 "주홍무두부(朱洪武豆腐:홍무는 주원장의 연호.사진) "가 유명하다.
<도움말 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배화여대 교수>
입력시간: 2001. 10.16. 19:05
[니하오! 중국] 9. 수호지의 무대 산둥성
중국에서 사나이를 일컫는 말 가운데 '한(漢) '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앞에 좋을 호(好) 자를 붙이면 '호한(好漢) '이 되는데, 훌륭한 남자 또는 영웅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중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 혹시라도 이 '호한'이란 단어를 꺼낼라치면 저들은 십중팔구 산둥(山東) 성을 먼저 떠올린다.
'예부터 훌륭한 사내는 산둥에서 나온다(自古山東出好漢) '라는 말이 있듯이 산둥은 영웅과 호걸의 고장이다. 다른 여러 지역도 나름대로 유명한 역사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산둥은 좀 더 특이하다. 이 지역 출신들은 이름 끝에 '자(子) '를 달고 있는 사람이 많다.
공자(孔子) 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명칭 끝에 붙는 '자'라는 글자는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높임말이다. 즉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말이 아니란 얘기다.
우선 유교의 시조인 공자가 산둥성 출신이다. 그 뒤를 이어 맹자(孟子) .순자(荀子) .묵자(墨子) .손자(孫子) 등 춘추전국시대 이름을 떨쳤고 이후의 중국 사상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던 사람들이 모두 공자와 동향이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 역대 최고 재상이라는 제갈공명, 날과 끌.톱 등을 만들어 중국 목수(木手) 의 시조로 불리는 노반(魯班) 등도 이 지역 출신이다.
이 때문에 '제로(齊魯:춘추전국시대의 산둥성을 일컫는 말) 에서는 성인(聖人) 아니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산둥성 사람들의 기질도 별나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호지』의 무대가 이곳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1백8명의 두령 하나하나가 강직하거나, 성질이 불같지 않으면 하나같이 '사고'치는 인물들이다. 자질구레한 것은 신경 쓰지 않으며 직선적이고 호방하며, 돈보다는 명분과 의리에 충실한 사람들. 산둥인들의 성격을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산둥성 성도(省都) 인 지난(濟南) 시 난먼다제(南門大街) 에서 국수와 만두탕을 파는 노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난 뒤 "얼마냐"고 물었다. 나이 50이 될까말까한 아주머니는 "1위안(약 1백60원) "이라고 대답했다. 국수와 함께 파는 만두탕은 얼마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역시 "1위안"이라고 말했다.
국수가 양이 훨씬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값이 같을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주인장은 "계산하기 좋으니까"라고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양이 그만 물어보라는 표정이다.
산둥대학 양두안즈(楊端志) 교수는 "산둥성은 중국문명의 커다란 특징인 유교문화의 발원지이자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 유가의 가르침이 성행했던 곳"이라며 "원래의 사람들 성격이 그러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전해진 유가의 가르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역의 민풍(民風) 은 인문적이며 사람들 성격 또한 정직하고 호방하며 직선적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둥성의 문화에는 춘추전국 시대 산둥성 동북쪽을 차지했던 제(齊) 나라와 서남쪽 노(魯) 나라의 두 가지 배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둥대학 중문과 텅셴후이(□咸惠) 교수는 "제는 춘추전국시대 5대 강국의 하나로 일찍이 상업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공리주의적인 문화를 꽃피웠다"며 "이에 비해 유교가 발원한 노나라는 줄곧 봉건과 종법질서를 중요시하는 완고한 유가문화가 핵심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맹자와 순자의 차이가 그렇다. 노나라 출신인 맹자에게서는 사람의 성이 근본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 '이 나왔고 제나라 출신인 순자에게서는 그 반대인 '성악설(性惡說) '이 나왔다. 두 사람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이 산둥성 사람들을 평가하는 말은 대개 일치한다."돈후하며 질박한 옛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산둥인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달리 생파와 생마늘을 즐겨 먹으며 남과 시비가 벌어지면 몇 마디 지나지 않아 주먹부터 뻗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방 연극에서도 이러한 성격은 두드러진다.
산둥대학에서 민속학을 연구하는 리완펑(李萬鵬) 교수는 "베이징(北京) 의 경극(京劇) 이 귀족적인 분위기이고 저장성 등지의 월극(越劇) 이 문인의 분위기로 부드러운 데 비해 산둥성의 지방극(山東快書) 은 매우 직선적이다.
예를 들어 『수호지』 무송(武松) 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을 보면 이런저런 반주를 모두 생략한 채 바로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 죽이는 대목부터 노래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산둥성에 남성의 문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꼽히는 송(宋) 대 이청조(李淸照) 는 산둥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요즘 사람으로는 여배우 궁리가 있는데 그녀의 강인하고 곧은 이미지는 산둥사람들의 기질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평이다.
위로는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姜太公) 과 공자.맹자.순자를 거쳐 제갈공명,양산박의 숱한 두목들, 송대 강렬한 애국시를 남겼던 신기질(辛棄疾) , 명대 용장(勇將) 척계광(戚繼光)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산둥사람들의 근원은 어디일까.
오늘날 중국학자들 대부분은 산둥이 고대 동이족(東夷族) 의 발원지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산둥의 문화, 즉 춘추전국 시대의 제로(齊魯) 문화는 기원전 2400~1900년께 지금의 산둥성 지역에서 발달한 용산(龍山) 문화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산둥대학 양두안즈 교수는 "용산문화는 서북에서 발전한 화하(華夏) 계통의 한족(漢族) 문화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며 "현재 많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종합하면 산둥성의 용산문화는 동이의 계통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산둥인들은 중국 내에서 가장 한국인과 닮은 사람들이라는 평이 많다. 기질적인 특성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또한 중국 한(漢) 대부터 '동이'라 불렸던 경험이 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 대부분도 산둥출신이다. 어쨌든 한국사람들에게는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산둥의 문화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산둥성의 요리
산둥은 북으로는 발해, 동으로는 황해에 접해 있으며 황하의 하류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부터 주요 소금 생산지였으며 요리가 크게 발달했다.
산둥요리는 '노채(魯菜) '라고 부르는데, 송(宋) 대에는 '북식(北式) '이라고 불렸다. 현재 중국 4대 요리의 하나다. 원(元) .명(明) .청(淸) 시기에는 산둥 요리사가 황제의 요리를 만드는 '어선방(御膳坊) '을 주름잡았다.
특산물은 전복.바닷게.샥스핀.해삼.새우.말린 패주(貝柱)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배추와 대파.마늘.생강 등은 북방요리의 중요한 재료다. 맛탕 종류의 시럽을 입혀 단맛이 나게 하는 요리방법은 산둥이 근원지다. 산둥요리는 짠맛에 다섯가지 맛이 더해지는 비교적 단조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조미료를 섞어 다양하고 진한 맛을 내는 방법은 발달하지 않은 게 특징이다.
노채의 대표적 요리로는 구전대장(九轉大腸) 이 있는데, 청대 광서(光緖) 연간에 지난시의 '구화루(九華樓) '라는 식당에서 팔면서 이름이 알려진 음식이다. 돼지의 대장을 삶은 다음 튀겨서 다시 조리는 방법으로 만든 요리인데, 파와 마늘.간장.술 등의 조미료를 넣고 아주 뭉근하게 조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손으로 잡아 당겨 다시 때려 치면서 면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내는 이른바 '수타면(手打麵) '도 처음 산둥에서 만들어졌다.
<도움말 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배화여대교수>
[니하오! 중국] 10. 진상의 고향 산시성
남북으로 4백㎞에 달하는 타이싱(太行) 산맥은 서북쪽에서 힘차게 달려드는 황토고원과 중국에서 가장 넓다는 화베이(華北) 평원이 갈라지는 곳이다. 험준한 이 타이싱 산맥을 중심으로 산 서쪽은 산시(山西) 성, 동쪽은 산둥(山東) 성으로 나뉜다.
중국 문화 발전사에서 산시성이 차지하는 바는 매우 크다. 우선 선사(先史) 시기의 전설쯤으로 여겨져 왔지만 고고학적 성과들로 인해 차츰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요(堯) .순(舜) .우(禹) 세 황제의 근거지가 모두 산시성에 있다.
한편으로는 흉노(匈奴) 와 돌궐(突厥) 등 북쪽의 유목민족이 중원(中原) 으로 침입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산시대학 부총장을 역임한 리단추(李旦初) 교수는 "산시는 요.순.우 시대 이후에도 북방지역의 선진문화가 지속적으로 들어섰던 곳"이라며 "중국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산시성은 최초의 '개발구'로,고대 중국의 역사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지역"이라고 소개했다.
산시성을 약칭할 때는 '진(晋) '이라는 글자를 쓴다. 춘추시대 중국을 주름잡았던 진(晋) 왕조의 발흥지가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이후인 전국시기에도 진에서 갈라져 나간 한(韓) .조(趙) .위(魏) 의 활동이 제법 활발했는데, 이들 3국을 상징해 산시성은 '삼진(三晋) '이라고도 불린다.
산시성의 문화는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유목민족과 때론 이에 항거하고, 때론 이들을 받아들였던 중원의 농경문화가 겹쳐 발달했다. 특히 북방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생겨난 한(漢) 족의 이민문화는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훙둥의 큰 홰나무(洪洞大槐樹) '는 오늘날 중국의 남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산시성 출신 이민자 후예들에게 고향을 상징하는 말이다.
훙둥은 산시 서남쪽의 지역 명칭. 이곳의 큰 홰나무 밑에서 살던 산시성 사람들은 양쯔(揚子) 강 이남으로까지 전란을 피해 남하했고, 그 후예들은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홰나무 밑'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李교수는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산시성 이민자의 후예들은 전 중국 11개 성,2백27개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명(明) 대 초기 약 50년 동안 진행된 이민행렬에서는 약 1백만명의 인구가 빠져나간 것으로 조사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산시성에는 이렇듯 북방 이족의 침입과 그에 따른 이민이 잦았다.
흉노와 돌궐 외에도 선비(鮮卑) , 거란.위구르.여진.몽골족 등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점차 한족들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한족들은 이들에게 밀려 거주지를 내주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중국 내 최대 이민 수출지역이란 말이 나오듯이 산시성은 외족의 침입으로 생활 자체가 편치 않았던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는 일찍이 도덕과 윤리, 충(忠) 과 효(孝) 등의 유가적 관념보다 법(法) 과 권세(權勢) , 그리고 술수(術數) 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산둥이 공자와 맹자를 배출한 유교의 발흥지였다면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서 발전한 산시성은 상앙과 신불해(申不害) .신도(愼到) 등 법과 술수.권세를 중시한 학자.정치가들을 배출한 지역이다.이들 세 사람이 제창한 법(法) .술(術) .세(勢) 의 나라를 다스리는 세 가지 방법은 나중에 한(韓) 나라 출신 한비자(韓非子) 에 의해 종합돼 중국 사상사에 큰 발자욱을 남긴 '법가(法家) '로 나타난다.
중국 사상사의 대가인 허우와이루(侯外廬) 는 그의 저작에서 "유가와 묵가는 노(魯:지금의 산둥) 나라가 중심이고… 도가(道家) 는 발달이 늦은 초(楚) 등지에서 기원했다.… 법가는 대부분 삼진(三晋) 에서 발원했다"고 적고 있다.
산시성 작가협회 장스산(張石山) 부주석은 "유가가 국가경략의 방법을 도덕적인 데서 찾은 반면 법가는 권력과 법치, 술수라는 보다 현실적인 여건을 갖추는 데 무게를 뒀다"며 "이는 당시 산시성의 각박했던 자연.인문적인 환경을 어느 정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쪽으로 인접한 산시(陝西) 성 사람들은 산시인들을 '주마오주(九毛九:구전에서 구푼까지 따진다) '라고 부른다. 같은 황토고원을 끼고 있는 이웃이지만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그만큼 더 현실적이며 상업적이라는 얘기다.
산시성의 상업적인 전통은 명.청대에 이르러 안후이(安徽) 의 상인들(徽商.10월 17일자 13면) 과 함께 중국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진상(晋商:산시 상인) '의 발흥으로 나타난다.
작가협회 張부주석은 "요.순.우 임금 등 중국 고대의 문명이 산시에서 발흥했던 것은 지역 남부 윈청(運城) 에 있는 거대한 소금연못(鹽池) 때문"이라며 "인류의 생활에 필요한 소금을 확보한 데다 외부의 침략이 잦은 환경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이 상업에 눈을 떴고 급기야 명.청대의 산시 상인그룹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산시성 성도(省都) 인 타이위안(太原) 으로부터 서남쪽으로 1백50여㎞쯤 떨어진 핑야오(平遙) .이곳에는 높이 12m에 둘레가 6.4㎞인 명대의 성곽이 있다.
성곽 안쪽에는 청대에 문을 열었던 표호(票號:일명 錢莊이라고도 하며 요즘 은행업무를 수행하는 중국의 옛 금융기관) 와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국제상회, 현금과 여객 운송업체인 표국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당시 산시상인들은 소금 전매업 등에 간여했지만 이들의 저력은 중국의 금융을 장악하는 데서 더욱 크게 발휘됐다.
이렇게 번성했던 산시의 상인들은 중국 상업의 으뜸이었고 서양인들에 의해 '중국의 베니스 상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산시상인들이 남긴 흔적의 총화는 핑야오 인근의 치셴(祁縣) 에 간직돼 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영화 '홍등(紅燈) '의 무대로 잘 알려진 교가대원(喬家大院) 이 있다.
청대 2백50여년 동안 절대적인 부를 누렸던 교(喬) 씨 가족이 대대로 거주한 집이다. 전체 3백13칸의 대저택으로 성채가 둘러싼 듯한 이 건축물 안에서는 진상(晋商) 의 성쇠가 함께 느껴진다.
정부투자기관에서 일을 한다는 장(張) 모씨는 진상의 몰락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산시상인들의 금융업은 청대 말엽과 민국(民國) 초기에 들어온 현대적인 은행시스템에 완전히 무너졌다. 교가대원의 가옥처럼 완고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금융체계의 폐쇄성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산시성 특산술'펀주'
중국의 술은 대부분 백주(白酒:배갈) 가 주종이다. 저장(浙江) 성 사오싱주(紹興酒) 등 빛깔이 있는 황주(黃酒) 종류도 있지만 요즘은 백주가 전 중국과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산시(山西) 성의 특산인 펀주(汾酒) 는 백주 계통에서는 가장 오래된 명주에 해당한다.
향이 맑고 깨끗한 게 특징이다. 백주 계통의 명주는 이밖에 구이저우(貴州) 성의 마오타이(茅台) , 쓰촨(四川) 성의 우량예(五糧液) .젠난춘(劍南春) , 안후이(安徽) 성의 구징궁(古井貢) , 산시(陝西) 성의 시펑(西鳳)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마오타이의 향기는 장냄새를 풍긴다 해서 '장향(醬香) '이라고 하는데, 술잔을 비우고서도 향기가 지속될 정도록 향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산시성 펀주는 정식 기록에 나타난 기간만 1천5백년이 넘는 명주다. 당(唐) 대 유명 시인 두목(杜牧) 의 "주막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목동이 멀리 행화촌을 가리키더라(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 "는 시구에 나오는 행화촌이 바로 펀주의 명산지였다.
중국의 백주는 술이 깰 때 머리가 아프지 않은 게 큰 장점이다. 술을 만들면서 깰 때를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래도 도수가 워낙 높아 술자리에서는 조심하는 게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할 때는 '문경(文敬) '이라고 하고 손님이 이에 답할 때를 '회경(回敬) '이라고 한다.
둘을 통틀어 '경주(敬酒) '라고 한다. 어쨌든 술을 권하는 형식이 매우 발달해 있다. 한국인의 경우 이를 그대로 따르다가 크게 취해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 술을 대신 마셔주는 '대음(代飮:우리식으로는 술상무다) '이 통용되므로 이를 이용하는 게 좋다.
<도움말 임승권 금호고속 상무>
[니하오! 중국] 11. 실크로드의 시작과 끝 산시성
오늘날 중국 동부의 경제 개혁.개방으로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처졌지만 산시(陝西) 는 본래 주(周) 나라가 발흥하고 이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 과 중국 문화의 최고 번성기라 일컬어지는 한(漢) .당(唐) 이 들어섰던 곳이다. 역대 9개 왕조가 모습을 나타냈다가 스러져간,중국 최고의 고도(古都) 를 둔 지역이다.
중국 민족학을 전공하는 스궁후이(史工會) 박사는 "산시지역의 문화는 서쪽의 이족(西戎) 계통인 진(秦) 과 남쪽 초(楚) 에서 북상한 한(漢) 의 왕실, 본바탕에 해당하는 주(周) 계통의 한족(漢族) 문화 등 세 개의 갈래가 합쳐 이뤄진 것"이라며 "일찍이 싹튼 문화적 융합성(融合性) 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룬 결과 한.당이라는 중국 문화의 최고 번성기를 맞이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곱슬머리에 푸른 눈의 서역 아가씨, 조용한 밤 술집에서 풍악을 울리네.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데, 밝은 달 아래 고향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있구나'-.
지금으로부터 1천3백여년 전 당(唐) 의 시인 이하(李賀) 가 읊은 악부(樂府) 시 형태의 한 구절이다. 당의 수도 장안(長安) 의 한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던 서역 아가씨, 이른바 호희(胡姬) 를 노래한 내용이다.
장안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는 호희는 당나라의 번성, 나아가 고대 산시지역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에 해당한다.
산시지역의 문화는 '관중(關中) '을 모태로 하고 있다. 사람들이 드나들기 어려웠던 관문(關門) 이 사방에 발달해 있어 관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 지역은 동서로 위수(渭水) 가 흘러 지나가는 곳으로 남북 1백여㎞, 동서 4백여㎞에 달하는 비옥한 황토평원이다.
이외에 북으로는 산베이(陝北) , 남으로는 산난(陝南) 지역이 발달해 있는데 보통 이 세 지역을 '삼진(三秦) '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산시문화를 이야기할 때 별칭으로도 사용하는 단어다.
산시전자과기대학에서 중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자오수전(趙淑珍) 교수는 "인구나 면적.물산 등으로 볼 때 삼진 가운데 관중이 으뜸이며 산시의 문화는 이곳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며 "중국 농업문화의 발상지로서 전형적인 농촌사회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중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소개한 『관중백괴(關中百怪) 』의 저자 후이환장(惠煥章) 은 산시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남자들은 노래 부를 때 울부짖는 타입이다.… 말을 할 때도 싸움을 하는 것인지 담소를 나누는 것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시끄럽다. 공활한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 이웃과 이야기할 때 큰 소리로 떠들어야 서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에는 문을 늘 열어 놓고 생활하며… 성격이 내성적이라 말을 잘 못하지만 이들을 놀리면 큰 코 다친다. 당신이 열마디 할 때 한 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주먹을 내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중의 경제는 오늘날 왜 다른 지역에 뒤떨어졌을까□ 문제는 경제가 낙후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들이 아예 남에게 뒤졌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기대학 趙교수는 관중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농촌사회의 보수적 성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솔직하면서 거칠고, 다른 문화에 대해 특별히 거부감을 지니고 있지 않다. 거듭되는 왕조의 교체, 한족과 이민족의 끊임없는 접촉 등으로 이런 문화적 기질이 형성된 듯하다."
산시지역을 거쳐갔던 수많은 왕조의 역사를 두고 보면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 '융합'에 있다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융합의 과정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당나라 때다.
신라와 일본,서역의 온갖 나라 사람들이 수도 장안에 와서 유학하거나 상품을 거래했다. 특히 당대에는 서역에서 넘어온 이른바 '호풍(胡風) '의 문화가 왕성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서역의 처녀 '호희' 또한 이 호풍의 산물이다.
당대 장안에 거주했던 외지인들은 10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안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받아들인 외지문화의 흔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즐겨 먹는 '교자(물만두) '다. 당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전통적인 국수(당시에는 湯餠이라고 불렀다) 만 있었다. 밀가루를 반죽해 그 안에 만두속을 넣어 만드는 교자는 당대 서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우리가 오늘날 즐기는 수박과 석류(石榴) 또한 이러한 문화적 교류에 힘입은 바 크다.
불교 또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 왔다. 중국 사상을 한껏 윤택하게 한 '문화수입'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불교와 들어온 산스크리트어는 중국의 음운학(音韻學) 에 상당한 보탬을 줬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이 가능했던 것은 산시지역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민족학 전공의 史박사는 "산시성 서쪽의 간쑤(甘肅) 성에서 기원해 산시로 넘어와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秦) 자체가 이족문화였다"며 "이후로 발전한 수(隋) 와 당(唐) 모두 북방의 선비(鮮卑) 족과 뚜렷한 연관성을 지니는 등 이곳은 원래 이족간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라고 말했다.
1천년 넘게 유지돼 온 장안의 전통은 송대(宋代) 이후 중국 동북 여진(女眞) 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점차 쇠락한다. 외침이 잦은 곳 부근으로 수도를 옮겨 이를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명(明) 대에 들어와 장안은 '시안(西安) '의 이름을 얻게 되면서 서북의 변방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개혁.개방을 점차 가속화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다음 개발전략의 중심을 서부에 두고 있다. 시안은 이제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서부 대개발'의 중심지다. 진.한.당대의 왕성했던 문화적 융합력이 되살아날지 매우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특별취재반=유광종 문화부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산시 요리 '양러우파오머'
산시지역 음식문화의 특징은 이슬람문화와의 교류 흔적이 깊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저녁시간 시안의 중심부인 둥다제(東大街) 나 이슬람사원이 있는 시양스제(西羊市街) 에 가면 오가는 인파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양고기 음식을 대하게 된다.
양고기 꼬치구이, 양고기 신선로, 양고기 국수, 양고기 교자 등 거리는 온통 양고기 냄새와 연기로 자욱하다. 그 중에서도 시안지역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즐겨 먹는 양러우파오머(羊肉泡.사진) 는 단연 산시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거의 1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음식점들의 주 메뉴도 역시 양러우파오머다. 이 음식은 양고기에 누린내를 없애주는 향료인 팔각(八角) , 귤 껍질을 말린 진피(陳皮) , 계피 등을 넣어 8시간 동안 푹 고아낸 탕에 밀가루 떡(餠) 을 뜯어 넣어 먹는 요리다. 탕에서 느껴지는 양고기의 맛은 진하고 구수하지만 향료를 넣은 까닭인지 양 특유의 누린내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더욱이 마늘 장아찌나 붉은 고추를 갈아 매운 맛이 나도록 만든 고추장(辣椒醬) , 고수.참기름 등을 따로 내줘 식성에 따라 조미를 해 먹을 수도 있다.
양러우파오머는 송왕조를 세운 조광윤(趙匡胤) 에서 비롯됐다. 조광윤이 어렸을 때 집이 너무 가난해 굶기를 밥먹듯 하며 먹을 것을 찾아 천하를 떠돌다가 어느 날 장안에 도착했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자루 안에 들어 있던 밀가루떡을 꺼내 입에 넣었으나 너무 딱딱해 씹기조차 어려웠다.
그 때 갑자기 말 한필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나가자 한 바탕 욕을 해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양고기를 파는 아주 초라한 양고기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마음씨 착하게 생긴 주인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날 따라 고기는 모두 팔렸고 뼈와 고기부스러기만 남은 상태였으므로 주인은 이것으로 탕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조광윤은 딱딱해서 먹기 힘들었던 떡을 뜯어 탕에 넣어 먹었다. 온몸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 맛있게 먹은 그 요리는 산해진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맛이 있었다.
<도움말 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배화여대 교수>
[니하오! 중국] '동양의 진주' 홍콩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해 할양받기 전까지 홍콩은 광둥(廣東) 성의 한적한 어촌(漁村) 에 불과했다.
영국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아편판매 등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홍콩을 찾아 들어 온 1차 이민들은 광둥과 푸젠(福建) 등의 해안에서 수상(水上) 생활을 했던 이른바 '단민(蛋民) '들이다.
요즘도 홍콩섬과 주룽(九龍) 의 해안가 선상(船上) 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 당시 홍콩에서 주택과 항구 등을 짓기 위한 노동자들도 들어왔다.여기까지는 단순한 인력 유입이다.
홍콩 중문대 에릭 마(馬傑偉) 교수는 "홍콩의 문화는 한 마디로 난민(refugee) 의 문화"라고 말한다. 馬교수는 "1949년 중국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대량의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식민지 홍콩에 새 문화현상을 가져 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홍콩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난민의 문화는 훨씬 나중에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전란을 피해 홍콩을 찾아 온 '난민'들의 출현은 사실 이보다 조금 앞선다. 1851년 중국에서 태평천국(太平天國) 의 난이 발생하면서 광둥성의 지주와 상인 등이 홍콩으로 대량 이주한 것이다.
하지만 馬교수의 주장대로 실제 홍콩의 문화는 대륙의 공산정권을 피해 찾아 든 난민들에 의해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간다. 이들은 대부분 대륙출신의 자산가들이다. 이 가운데 압도적이었던 사람들은 상하이(上海) 출신들이다.
상하이 출신자로서 홍콩에서 10년간 생활했다는 한 여성은 "우리 고향사람들은 오늘날 홍콩의 번영에 실질적인 힘이 됐다고 자부한다"며 "홍콩은 당시 상하이의 자본과 인력 유입이 없었다면 결코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5년 홍콩의 인구는 60만명에 불과했지만 공산정권을 피해 들어온 상하이 등지의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2백80만으로 크게 늘어난다. 오늘날 6백만명에 달하는 홍콩 인구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새로 유입한 이들 난민은 각자 자신의 고향사람들과 함께 특정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상하이 사람들은 오늘날 홍콩섬의 박곡(北角) 에 집중 거주했으며 광둥성 차오저우(潮州) 사람들은 홍콩섬의 서쪽인 셩완(上環) 에 터전을 잡았다.
홍콩 중문대 역사학과 궈사오탕(郭少棠) 교수는 "난민들이 홍콩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출신지별로 모여들어 지역적인 특성을 이룰 때가 있었다"며 "새로 홍콩에 들어 온 사람들은 고향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에 우선 자리를 잡은 뒤 생계 수단을 찾았다"고 말했다.
49년 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동아시아 최대 국제도시였던 상하이 사람들의 유입은 홍콩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줬다.
당시 상하이는 홍콩이 결코 함께 견줄 수 없을 만큼의 문화적 선진지대였다. 상하이의 복장이 홍콩시내에 등장한 것을 비롯해 상하이풍의 이발소.양복점.식당.점포 등이 선을 보이면서 홍콩의 중산층 문화를 형성해 간 것이다.
특히 50년대 초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중국의 대외창구를 봉쇄한 때였고, 따라서 홍콩의 경기도 자연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이 때 몰려든 상하이의 자본이 홍콩경제의 비상에 더할 나위 없는 활력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한때 '세계 해운왕'으로 꼽혔던 바오위강(包玉剛) ,현 홍콩행정특구 수반인 둥젠화(董建華) 의 부친 둥하오윈(董浩雲) 등은 모두 상하이 해운업계의 거물로 당시 홍콩의 해운업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어 쨌든 상하이의 자본과 인력 유입을 바탕으로 70년도까지 홍콩의 공장은 1천4백여개에서 1만6천5백여개로 늘었고, 노동자의 수도 8만명에서 55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식민통치국인 영국의 문화도 가세했다. 홍콩 유력지 명보(明報) 편집국장을 역임한 주하이(珠海) 대학 리구청(李谷城) 교수는 "영국의 통치가 홍콩의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라며 "특히 60.70년대 들어 홍콩인들에 대한 참정권을 부여하면서 홍콩과 영국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기층문화에 통치계층인 영국의 문화가 한 데 엉키면서 홍콩은 세계 자유무역의 중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어 세계수준의 효율성을 선보이며 '동방의 진주(東方之珠) '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는 설명이다.
2천홍콩달러(약 32만원) 만 있으면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한 제도, 손바닥만한 면적에 세계적인 교통량을 소화해 냈던 옛 카이탁(啓德) 공항, 연간 1천만명을 끌어들인 화려한 관광정책 등은 지난 날의 홍콩문화를 지칭했던 '홍콩 익스프레스(홍콩특급) '의 상징들이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상하이 사람들과 문화의 유입이 홍콩으로서 첫 충격이었다면 두번째 격변기는 97년이다. 중국이 1백50여년 만에 홍콩의 주권을 영국으로부터 회수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홍콩 진입을 두려워한 일부 홍콩사람들과 자본이 서둘러 해외로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날 홍콩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밖으로 빠져 나갔던 홍콩인들과 자본이 다시 홍콩에 들어온 것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취재기간에 만났던 교수들은 한결같이 "97년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회구조가 변했다기보다 중국대륙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구조가 변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리구청 교수는 "난민사회의 속성상 민족적인 정체성을 찾기보다 현금과 물질 등에만 집착했던 홍콩 사람들이 이제 서서히 민족과 국가라는 관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며 "예전에 지녔던 고도의 사회적 효율성이 앞으로 다소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민족적 정체성에 입각해 옛 식민지 시대의 지나치게 경박하기만 했던 상업주의적 문화토양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광종 기자
*** 홍콩 영화의 명암
영화는 홍콩의 문화와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적 장르다.
대륙으로부터의 이민 유입, 문화대혁명 등 대륙의 정치적 상황과 홍콩 사회의 문제점 등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홍콩 영화는 성숙해 왔다.
강시 시리즈를 비롯한 괴기영화, 리샤오룽(李小龍) 과 청룽(成龍) 으로 대표되는 무술영화, 1980년대 세계시장을 화려하게 누빈 '홍콩식' 폭력영화, 할리우드를 뺨치는 SF….'홍콩영화'하면 떠오르는 말들이다.
홍콩의 영화는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완연히 상하이의 지배아래 있었다.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쇼 브러더스'도 상하이 출신 소(邵) 씨 형제들이 세운 영화사다.
초기 무성영화부터 홍콩영화를 좌지우지했던 상하이 영화는 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를 피해 대량으로 유입했던 상하이 사람들을 통해 홍콩영화계를 더욱 장악한다. 대만쪽의 영향을 받는 우파와 대륙을 지지하는 좌파로 나눠지는 것은 50년대 상황이다.
하지만 대륙의 전제주의적 정권,대만의 독재에 모두 실망하면서 홍콩인들은 대륙.대만과는 무관한 홍콩인만의 정체성을 찾게된다. 이같은 분위기를 타고 70년대 이후 홍콩 특유의 영화가 대량으로 나온다. 리샤오룽의 성공, 그의 사망 이후 무술영화에 코미디를 가미해 나온 청룽식 영화 등은 이같은 기류 속에서 만들어진 대표작들이다.
이들은 70년대에 이어 80년대까지 크게 번성한다.
이런 여건 변화 속에 기존의 거대 영화제작사가 지배하던 구조가 독립 프로덕션의 제작시스템으로 대체되면서 영화는 홍콩을 상징할 만한 산업으로 발전한다. 독립프로덕션들의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제작 시스템의 융통성 등이 결합하면서 세계 영화시장에서 사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90년대 홍콩인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화두는 '홍콩의 중국 귀환'.
영국이 통치했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 조국인 대륙으로 돌아가는 홍콩인들의 심리는 복잡했다. 리롄제(李連傑) 의 '황비홍'으로 애국주의가 대두되는가 하면, 과거를 돌아보는 영화가 늘기도 했다. 요즘의 홍콩영화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기민한 상상력과 발빠른 제작시스템으로 성가는 높였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문화적 콘텐츠가 부족해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홍콩영화는 '저질'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니하오! 중국] '중화의 사각지대' 동북3성
명(明) 대에 이르러 '사람을 옮겨 변방을 채우는(移民實邊) '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기 전까지 만주(滿洲) ,이제 중국의 동북3성으로 더 잘 알려진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성은 중국역사.문화 발전사에서는 하나의 공백이었다.
그곳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혼이 떠돌고 만청(滿淸) 왕조의 뿌리인 여진이 기세를 드높이던, 중국 한족(漢族) 의 입장으로 보면 완연한 이족의 땅이었다.
'흰 산과 검은 물(白山黑水:백두산과 흑룡강을 일컬음) '이라고 일컬어졌던 이 동북3성은 구석기 이래 줄곧 인류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고 이어 예맥(濊貊) 과 동호(東胡) .숙신(肅愼) 이라는 3대 계통의 종족이 자웅을 겨루거나 때론 중원의 땅으로 시선을 옮겨 진출을 꾀하기도 했던 곳이다.
중국인들은 동북3성 지역을 이제 '관동(關東) '이라 부른다. 만리장성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 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명.청대에 이어 1900년대가 시작된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 안에서는 이 동북3성을 '관외(關外) '라고 불렀으며,이에 대칭해 스스로를 '관내(關裏) '라고 하는 등 구별을 두기도 했다.
중국문화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 지역은 예전에 중국문화가 멈춰 선 '정체(停滯) 지대'였음이 분명하고,비록 중원의 왕조가 줄곧 이 지역에 행정체제를 건설했다고 하나 거센 현지인들을 통제하지 못했던 중국 정치권력의 공백지대에 다름 아니다.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만청의 기틀을 세운 여진족이 중원에 들어가 청왕조를 세우면서 만주는 흔들릴 수 없는 중국의 땅으로 들어간다. 이곳을 청왕조의 고향이라 내세워 청 건륭제(乾隆帝) 는 봉금(封禁:한족의 이주 금지) 정책을 펴지만 1880년대에 들어와 풀리면서 산해관 동남쪽에 자리잡은 산둥(山東) 사람들의 대 이주가 시작된다.
다롄(大連) 시 시립도서관 장번이(張本義) 관장은 "일례를 들어 다롄시의 인구 5백만 가운데 80% 이상을 산둥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역사를 전공했다는 張관장은 이어 "산둥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은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는 볼 수 없으며 청대 초반인 옹정(雍正) 연간부터 왕조의 감시를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瀋陽) 시의 한 고위 관계자는 "원래 만주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오늘날 여러 종류의 소수민족으로 정착해 나름대로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며 "그러나 이 지역의 상당수 사람들은 명.청 시기 산해관을 넘어 들어온 산둥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중국 동북3성의 문화는 산둥의 아류(亞流) 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중국문화의 도도한 물결에 밀려 소수민족의 문화로 전락한 듯싶지만 동북의 문화는 나름대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거칠면서도 비옥한 만주평원,'흰 산과 검은 물'로 표현하는 이 지역 특유의 북방성, 혹한이라고 할 만큼 추운 기온 등이 동북인의 기질을 키워냈기 때문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중국 내에서 성정(性情) 이 가장 거칠다는 평을 듣는다. 백두산 호랑이를 일컫는 '동북호(東北虎) '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격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사납고 직선적이며,물과 불을 제대로 가릴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두지 않는 조급성 등도 특징이다.
수틀리면 주먹을 내뻗는 점이 전 회에 소개한 산시(陝西) 성 사람들의 성격과 유사한 듯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한 수 더 뜬다.
'싸움을 하다 나무막대기와 쇠몽둥이가 눈에 띄면 절대 나무를 집어들지 않으며, 총을 쏠 때도 직접 상대의 얼굴을 향하지 엉덩이나 다리 등을 쏘지 않는다. 사람을 칠 때도 바로 주먹을 휘두른다. 손바닥으로 뺨을 갈기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
랴오닝성 작가협회 덩강(鄧剛) 부주석은 "동북지역에 원래 거주했던 사람들은 유목과 수렵을 위주로 생활해 왔다"며 "비록 상당수 한족들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했지만 이들도 본래의 문화적 토양에 오히려 물들어 직선적이면서도 호방하며 싸움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동북인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동북인들의 기질을 설명할 때 예전에 이곳세서 유행했던 '토비(土匪:우리는 흔히 마적이라고 불렀다) '의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공자(孔子) 는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항상 내게 귀감이 되는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三人行,必有我師) "고 가르침을 내렸는데, 동북에서는 이를 패러디 해 "(동북에는)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꼭 한 사람의 마적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三人行,必有一匪) "는 말이 나왔다.
물론 19세기 말엽과 20세 초의 얘기다. 만주 지역의 토비들은 청 왕조가 무너진 다음에도 머리를 길게 뒤로 땋아 내리는 '변자(□子) '를 끝까지 고집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변자를 둔 비적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이들은 대개 무소불위의 악당으로 치부되기는 하지만 때론 전제왕권의 압박 속에서 백성들의 편을 들어 토호나 부패 관료를 징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만주지역에는 '토비가 오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보내주고, 관병(官兵) 이 오면 네거리에서 엉뚱한 길을 가리킨다'는 속언(俗諺) 이 전해져 온다.
동북3성은 어쨌든 중국문화에서 볼 때 변방에 해당한다. 장쭤린(張作霖) 등 비적질을 통해 이름을 얻은 군벌(軍閥) 의 이름은 있지만 중국 역사나 정계에서 긍정적인 역할로 이름을 얻은 사람은 거의 없다.
중국 중앙정치의 최고 무대인 공산당 중앙상임위에 이름이 오른 동북지역 출신 인물은 문화혁명 당시 '4인방'으로 유명한 왕훙원(王洪文) 이 드문 예다. 그마저도 문혁의 격류에 휩쓸려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받지 못한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은 동북인들의 잠재력을 크게 인정하는 편이다. 대담한 성격에 '동북 호랑이'로 이야기되는 용맹성이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있지만 개혁.개방 전에 일찍이 들어섰던 중공업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한 차례 웅비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광종 기자
*** 남아있는 동북문화
동북의 문화는 흔히 한족(漢族) 의 문화에 의해 '거세됐다'고 말해진다. 한족의 대량 유입으로 만주의 원주민들은 정작 소수민족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족에 대해 동북문화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우선 송(宋) 대 만주지역에서 발흥한 요(遼) 나라의 음악은 송나라에 흘러 들어가 산곡(散曲) 이란 형태로 자리잡았으며,이는 다시 원(元) 대의 희곡으로 발전해 오늘날 베이징(北京) 의 경극(京劇) ,광둥 등지의 월극(越劇) 등 민간 예술로 정착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후한(後漢) 시기의 거란족 장식예술도 중원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말 안장과 고삐, 쇠로 된 기기 등에 들어가는 장식예술들은 모두 이 시기 거란족의 장식을 모방한 것들이다.
중국을 여행할 때 눈에 자주 띄는 옷이 있다. 옆을 길게 잘라 다리 일부분이 드러나도록 만든 여자들의 치마, 즉 치파오(旗袍) 도 청대 만주족 여인들이 입던 옷이다. 호텔과 음식점의 여종업원들이 주로 입지만 영화제 등에서 중국의 여주인공들이 즐겨 입는 일종의 예복이기도 하다.
겨울철이 오면 양고기 등을 끓는 물에 데쳐 먹는 '솬양러우(羊肉: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신선로) '도 동북 특유의 음식으로 이제 전 중국 어디에서나 유행하는 음식이 됐다. 여권(女權) 유린의 상징인 전족(纏足) 은 송대부터 내려온 중국의 악습이다. 이 전족은 청대에 들어와 줄어들게 됐다. 당시 권력을 잡았던 청의 만주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거북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활달한 기상을 지닌 동북의 문화는 한족의 문화에 자극제로 작용했다.
[니하오! 중국] 14. 중화 개척정신의 산 기록 대만
“실의에 빠져 원망과 한탄을 했고 한 때는 낙담을 했었죠.희망을 잃고 매일 술로 지새는 막막한 인생,영혼을 잃은 내 인생은 마치 허수아비 같았죠.인생은 바다의 파도 같은 것,올라갈 때도 있지만 내려갈 때도 있는 법…운명의 3할은 하늘이 정하지만 나머지는 내가 노력해 얻는 것,결국 싸워야 이길 수 있는 것이랍니다…”.
타이베이시 가라오케에서 술에 취한 대만인들이 즐겨 부르는 ‘싸워야 이길 수 있다(愛▶변▶才會▶영▶) ’라는 제목의 노래가사다.약 10년 전에 처음 불려진 뒤 이제는 대만인 누구나 부르는,일종의 국민가요다.
한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집권할 당시인 1990년대 초반 무렵 대륙에 대한 정치적인 반감의 표현으로 이 노래가 이용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4백년이나 되는 대만 이민개척사의 애환을 말해 주는 노래다.
중국 대륙의 동남해안으로부터 2백㎞ 거리에 있는 3만6천㎢ 넓이의 중국 최대 섬인 대만은 강력한 해금(海禁:바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함) 정책이 펼쳐졌던 명(明) 대 말까지 말레이.인도네시아계 원주민들만이 살던 미개척의 땅이었다. 대만(중국어로 타이완) 이라는 이름도 당시 대만 남부에 도착한 한족들이 원주민 마을이었던 '타이오완'의 이름을 섬 전체의 명칭으로 받아들이면서 생겨났다.
그 무렵 전제왕권의 폐해와 그로 인한 일상적인 굶주림을 피해 대륙의 푸젠(福建) 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한족들은 가시밭길을 헤치며 이 곳을 비옥한 농토로 개척했다. 이어 네덜란드의 점령을 거쳤고, 청(淸) 대에 들어와 다시 중국 대륙의 왕조가 처음 행정관서를 두기까지 이곳은 중국 대륙으로서 볼 때는 버려진 땅이었다.
열대의 잡초와 독충들을 물리쳐가며 농토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강인함은 대만식의 개척정신을 낳았다. 하지만 오늘날 대만의 문화 한 구석에는 일종의 비애감도 담겨 있다.포르투갈 사람들에게 '포모사(아름다운 섬) '라고 불렸던 이 지역에 외세와 대륙 정권이 들어오면서 적잖은 소용돌이가 일었기 때문이다.
대만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는 바람에 일본에 할양돼 50년의 식민지를 거치고,이어 대륙에서 패배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들어오면서 수천명의 인명이 희생당한 '2.28 사건'을 맞이한다.
국민당군의 진주 과정에서 벌어진 현지인들과의 마찰은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현지 지식인 체포.투옥.학살로 이어졌고, 이는 국민당 철권통치 당시 정식으로 제기되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거론되기 시작했다.
대만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허우샤오셴(侯孝賢) 의 '비정성시(悲情城市) '는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났던 대만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일본의 통치 기간도 대만인들에게는 질곡의 삶이었지만 대륙으로부터 패주해온 국민당의 통치는 대만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요즘 국제사회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대만독립'의 정서적 뿌리는 여기에 있다.왕조의 수탈과 기아를 피해 도망쳐 나와 대만을 훌륭하게 가꿔놓았지만 항상 그 과실은 대륙인들이 따먹는다는 반감 때문이다.
대만 국립대학 민족학과 린슈처(林修澈) 교수는 "대만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은 내 손으로 직접 개척한다(自己打天下) '는 것이다.명.청 왕조에 버림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농토를 개척했고 이어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내야 했기 때문에 대륙계 정부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정착민 스스로 알아서 생업을 꾸려가는 문화가 일찌감치 발달했다. 대륙에 대해 갖는 의구심은 항상 이런 심리에서 출발한다"고 소개했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대만은 중국인들의 이민 습속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사회다. 중국의 북방에서 남방으로 이주한 한족의 후예들이 약 4백년 전에 다시 옮겨오기 시작해 근세기까지 이민 행렬을 멈추지 않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만에서는 이민사회만이 지닐 수 있는 즉흥성과 현실성,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한 파벌의 형성,폭력조직의 발호, 개척정신을 떠받쳐 주는 근면함 등이 골고루 관찰된다.
타이베이(臺北) 와 가오슝(高雄) 등 대도시를 제외한 대만의 향촌 사회에선 아직도 혈연과 연고지 중심의 지방조직이 눈에 띈다. 예를 들자면 각 혈연조직은 대륙의 조상을 '당산조(唐山祖) '라고 부르며 이 공동 조상의 후예들이 모여 돈을 낸 뒤 공동의 밭을 일궈 조상의 제사에 쓰이는 경비를 마련하는 식의 '공업(公業) '이 활발하다.
지금도 대만의 지방 곳곳에 '린춰랴오''장춰'등 사람의 성(姓) 을 따서 지은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만 이민 초기 각각의 성씨 집단들이 정착한 곳으로 보면 된다. 이들 혈연집단은 때로 대륙의 동향 출신들과 한 사회를 이루기도 하며 씨족과 씨족집단이 서로 뭉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만에서 13년째 생활하고 있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김헌홍(金憲洪) 상무는 "대만의 중소기업이 특히 발달한 것도 그 배경을 따져 보면 이민으로 인해 사회구조가 혈연 중심으로 짜였기 때문"이라며 "대만 중소기업의 80% 가량이 가족 중심 경영이란 점을 두고 볼 때 이러한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가족기업이 발달해 타이베이시 인근의 싼충(三重) 을 중심으로 한 싼충방(三重幇) 과 가오슝의 가오슝방(高雄幇) 등 거대 지방세력으로 성장, 90년대 대만 경제를 좌지우지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라고 金상무는 말했다.
대만의 사회에서 또 다른 특징을 형성하고 있는 폭력조직도 이와 무관치 않다. 80년대 이전에 악명을 떨쳤고 이제는 국제적인 폭력조직으로 성장한 주롄방(竹聯幇) , 대만 현지 폭력조직으로는 최대 파벌을 형성하고 있는 톈다오멍(天道盟) 등은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성장한 각 지방조직이 확대된 형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립 정치대학 외교학과 리밍(李明) 교수는 "대만은 이민문화의 전통에 대륙계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데다 미국과 일본 등의 해양문화를 접목해 오늘날의 번영을 이룩했다"며 "대만 독립의 목소리도 있지만 아직은 소수에 머물고 있으며, 현재 번영하는 대륙을 '기회'로 삼아 특유의 개척정신으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광종 기자
*** 대만의 요리
대만 음식에는 초기 이민 정착의 역사에서 보이는 고단함, 1960년대 이후 불붙기 시작한 경제성장기를 거쳐 온 대만인들의 근면정신이 드러난다.
지도 상에서의 대만은 마치 고구마의 모습.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대륙의 푸젠(福建) 과 함께 대만에서는 고구마가 많이 나온다. 초기 대륙계 이민들은 쌀이 모자라 고구마를 실처럼 썰어 말린 것으로 밥을 지어 쌀을 대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대만 말로 '한지치암(地瓜簽) '이라고 하는 고구마 말린 것으로 쌀과 같이 죽을 끓여 밥을 대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주식으로는 밥과 국수가 널리 쓰인다.
국민당 정부가 1949년 들어오면서 유행한 음식은 '쇠고기 탕면(牛肉湯麵) '이다. 대만의 수입토착형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쇠고기탕면은 중국 내 간쑤(甘肅) 성 란저우(蘭州) 의 것과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 계통의 두 종류가 있는데, 대만에서 발전한 쇠고기탕면은 대만 이주 전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南京) 계통의 것이다.
아침에 주로 먹는 음식으로는 더우장(豆醬:한국의 두유격으로 일종의 콩국, 단 것과 짠 것, 뜨거운 것과 찬 것 등이 있음) , 사오빙(燒餠: 밀가루 빵을 넓적하고 얇게 만들어 화로의 약한 불로 구워 내온 것) , 유탸오(油條:기름에 튀겨낸 속이 비고 바삭바삭한 꽈배기) , 단빙(蛋餠:계란에 파를 넣고 얇게 만든 밀가루 떡에 붙여 같이 기름에 부친 것) 이 있다.
점심에는 루러우판(魯肉飯:잘게 썬 돼지고기로 만든 뜨거운 장조림의 일종으로 밥 위에 얹어먹는 음식.사진) 과, 돼지갈비 또는 닭다리 튀김을 얹은 도시락을 애용한다. 모두 간편하고 실용적인 점이 특징이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푸젠계 사투리(민남어) 를 주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대만 내성인(內省人:대륙에서 국민당과 들어온 사람들은 외성인이라 부른다) 들이 주로 자신의 전통음식이라고 주장하며 특별히 애정을 갖는 음식이다.
이러한 음식들은 부귀빈천을 떠난 모든 대만 사람들, 즉 공무원과 시민, 고용주와 노동자, 스승과 제자 등이 모두 즐기는 것들이다. 조그만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얼굴을 맞대고 먹어왔던, 대만 경제발전의 '원기소'쯤 되는 음식이다.
<도움말 김진호 LG건설 타이베이 지사장>
[니하오! 중국] 15. 시리즈를 마치며
같은 장쑤(江蘇) 성 안에 있지만 난징(南京) 사람들은 상하이(上海) 사람들을 꽤나 못마땅해 한다. 심지어 "(딸을) 상하이 사람에게 절대 시집보내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다. 저장(浙江) 성 항저우(杭州) 사람들이 상하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베이징(北京) 과 상하이 사람들의 관계도 좋지 않다. 상하이 사람들은 베이징 사람들을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는 부류"라고 욕하기 일쑤다. 베이징 사람들도 상하이 사람들을 "시시하고 돈만 아는 사람들"이라며 깔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뿐 아니다. 인접한 푸젠(福建) 성과 광둥(廣東) 성 사람들은 서로 "소가 닭 쳐다보듯"한다. 산시(陝西) 와 산시(山西) , 후베이(湖北) 와 후난(湖南) 의 이질감도 깊고 넓다.
시리즈를 위해 다녀 본 중국의 여러 곳은 이처럼 문화적 이질감이 다양했다. 각기 지내온 역사적 과정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본바닥에서 키워내고 가꿔온 문화적 토양도 마치 다른 국가의 그것처럼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한족(漢族) 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하는 중국인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문화는 다면복합체다. 단일한 선과 점으로 짜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문화와 혈통이 한데 뭉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비치는 면모는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오늘날 중국을 말할 때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쏟아내는 배경은 이런 점에서 비롯한다. 중국의 학술계는 요즘 들어 한족의 정의에 대해 "다원복합적이며 여러 민족이 융합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개념"이라고 말들 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 최초로 등장한 통일정부 진(秦) 왕조도 진시황을 비롯한 서방 융(戎) 계통의 왕실과 산시(陝西) 관중(關中) 지역의 한족, 중원과 기타 지역의 여러 혈통들이 한데 뭉쳐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황제(黃帝) 의 자손으로 서북 황허(黃河) 유역에서 발원한 용(龍) 의 계승자(傳人) "라며 한족의 단일성을 강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것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민족간의 융합이라는 과정에서 찾고 있는 추세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의 문화는 남.북을 중심으로 크게 차이를 드러낸다. 베이징의 "경파(京派) "와 상하이의 "해파(海派) "는 각각 중국의 남.북문화를 대표한다. 언어와 생활 습관, 사람들의 기질, 경제와 정치를 대하는 시각 등에서도 남.북의 중국인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푸젠성 샤먼(厦門) 대학 린치취안(林其泉) 교수는 "참혹한 전란과 전제왕권의 압박을 피해 한족들이 끊임없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양쯔(揚子) 강을 중심으로 갈라지는 중국의 남방문화는 이민문화의 속성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특히 남으로 이주한 한족들이 원래 이 바닥에서 거주했던 백월(百越:여러 갈래의 비에트족) 등 소수민족들과 융합하면서 언어와 혈통이 세분화하고 이는 다시 북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남방만의 특징으로 발전한다.
서남에 자리한 쓰촨(四川) 성의 경우 지금으로부터 약 5천여년 전의 싼싱두이(三星堆) 문명을 기반으로 발달했던 촉(蜀) 문화에 산시(陝西) 와 인근 후베이로부터 이주해 간 한족의 문화가 합쳐지면서 파촉(巴蜀) 의 문화가 생겨났다.
광둥은 월족의 문화를 모태로 하고 진대 이후 남하한 한족의 문화, 푸젠계에 해당하는 조산(潮汕:차오저우와 산터우) 문화가 융합했다. 장쑤와 저장 등도 각각 오(吳) 와 월(越) 족의 문화에 이주족인 한족의 문화가 유입해 이 지방 특유의 언어와 풍속, 기질 등을 낳았다.
남방의 이민 문화는 현실적이며 즉흥적이다. 중국의 여러 학자들은 남방 문화의 특징을 "변화에 능하다(善變) "고 말한다.
새로운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양태라는 분석이다. 금전적인 이익에 민감하고 주위의 시선이나 지적에 훨씬 조심스레 대응한다. 체면을 중시하고 "실용"이라는 입장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나아가 집단과 집단 간의 관계를 조율한다.
이에 비해 북방인들은 호방하고 자질구레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경제보다 정치적인 사안에 관심이 많으며 자신의 금전적인 이익보다 정체성의 문제에 더 매달리는 성향을 보인다. 술 먹는 버릇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남방보다 직선적이며 호방하다.
남방은 "이주(移住) "에서 비롯한 문화고 북방은 오랜 기간의 "정주(定住) "에서 생겨난 문화다. 요즘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남.북방 사람의 기질을 표현하자면 남방인은 변화에 민감하고 처세에 뛰어난 "원(圓:둥금) "에 해당하며, 북방인은 고지식하고 격식에 집착하는 "방(方:네모) "을 대표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따져 보면 중국문화의 남.북 차이는 사소하다. 크게 보아 중국의 문화는 "관시(關係) "의 문화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의 전통사회는 유교적 전통에 혈연을 중심으로 한 종법(宗法) 적 질서가 지배했던 곳이다.
게다가 우리가 간과해서 안되는 것은 중국에 전란이 매우 잦았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한족의 대거 남하도 사실은 외족의 빈번했던 침입, 왕권과 지방 권력간의 지속적인 전쟁 등이 배경이다.
아울러 중국 사회에서는 혈족과 혈족, 동향 집단과 집단 사이의 싸움도 잦았다. 이른바 "계투(械鬪:무기로 벌이는 싸움) "도 중국인 사회에서는 일상사였다. 중국사회의 관시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성장했던 듯 싶다. 전란의 와중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혈연과 동향끼리의 연대가 필요했고, 이는 나아가 좀 더 큰 집단간의 유대로 이어져야 했다.
이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관시다. 배타적 개념인 "쯔지런(自己人:우리편) "이라는 말이 요즘도 널리 쓰이고, 좀 더 확대돼 중국사회 특유의 폭력조직의 발호로 이어지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시리즈 막바지에서 다룬 홍콩과 대만은 중국 이민사회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곳이다.
중국문화에는 이렇듯 전란과 왕권의 수탈로 인해 벌어졌던 한족과 이족간의 "융합", 그 과정에서 빈발했던 작은 집단끼리의 "경쟁"이 공존한다. 전자는 여러 민족과 문화를 한 곳에 녹여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생산하는 데 일조했다.
후자는 누구와의 싸움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생명력을 중국문화에 가져다 줬다. 오늘날 개혁.개방의 중국이 풍기는 강한 면모들은 이러한 융합력과 사회 각 단위에 스며들어 있는 경쟁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유광종 기자
**** 광둥.민난어 25% 한자 표기 안돼
중국에 사투리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푸젠(福建) 성의 민난어나 광둥(廣東) 성의 광둥어 상당 부분이 한자(漢字) 로 표기가 안된다는 점은 잘 알지 못한다.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민족학과 린슈처(林修澈) 교수는 "민난어나 광둥어는 지속적으로 한족 언어의 영향을 받아 왔으나 현재까지 한자로 표기가 불가능한 부분이 전체 단어의 25% 가량 된다"며 "이는 민난어와 광둥어 등이 원래의 한족 언어와는 다른 계통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林교수는 양쯔강 이남 지역이 본래 비에트족인 백월(百越) 족이 살았던 지역으로, 이곳에 북방의 한족이 이주하면서 현지의 언어와 한족의 언어가 한데 엉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양쯔강 이남의 언어 분포는 매우 복잡하다.
예전(특히 삼국시대) 오(吳) 에 속했던 상하이와 장쑤.저장 등지의 언어는 "오방언(吳方言) "이라고 부르며 크게는 장쑤 남부지역 언어를 포함하는 상하이어와 우시(無錫) 어로 나뉜다. 푸젠의 민난어와 광둥어도 큰 어족(語族) 으로 분류되는 언어로, 광둥어는 지난 세기 초반인 민국 정부 당시 표준어를 정할 때 현재의 베이징어와 막판까지 경합했을 정도로 세력이 대단하다.
이밖에 인구가 1억이 넘는 쓰촨성의 언어도 큰 어족에 속하며 광둥과 푸젠.쓰촨에 분산해 거주하고 있는 객가(客家) 언어도 사용 범위가 작지 않다. 남방의 언어 분포는 크게 이처럼 분류하지만 실제는 더욱 세분된다.
예를 들어 난징의 언어는 지리적으로 상하이에 가깝지만 북방 어계(語系) 에 속하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도 관화(官話:정부 사용 언어) 의 영향을 받아 상하이어와는 차이가 있다. 북방 언어는 남방에 비해 갈래가 많지 않다. 지리적으로 평원이 발달해 인적.물적 교류가 잦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표준어는 베이징어다. 영어로 베이징 표준말을 "만다린(mandarin)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만주족 대인을 일컫는 "만다렌(滿大人) "이 변형된 것으로 베이징어가 청대 만주족의 언어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말해주는 흔적이다.
남북의 차이는 어디서든 나타난다. 악기의 경우 북쪽이 "소리치는" 형(쒀나 : 태평소) 이라면, 남쪽은 "읊조리는" 타입(피리) 이다. 무술에서도 북쪽은 다리를 주로 사용하는 데 비해 남쪽에선 주먹이 주무기다.
"남권북퇴(南拳北腿) " 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홍콩의 1세대 쿵후스타 리샤오룽(李小龍) 은 남방의 영춘권(詠春拳) 에 북쪽의 다리기술을 접목했다. 남북의 특장을 한데 섞었다는 점에서 그는 강자로 평가받았다.
먹고 마시는 데서의 차이도 눈여겨 볼 만하다. 북방인은 큰 고깃덩어리에 큰 그릇으로 술을 마시지만, 남방인은 얇게 썬 고기에다 작은 잔의 술을 홀짝거리기 좋아한다.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 뒤 그들을 보낼 시간이 됐을 때 북방인은 "오늘 제대로 한번 통쾌하게 먹었구먼" 하고 자족하지만, 남방인은 "설거지하는 게 걱정이군" 이라고 뇌까린다.
인사말도 다르다. 남방에선 사람이 서로 만날 때 "돈 많이 벌었느냐" 가 인사다. 하지만 북방에선 "어디에서 지내느냐" 라고 한다. 남방인이 북방에 올라와 장사할 때 "혹시 잘못돼 얻어터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북방인이 남방에 가서 장사할 때는 "혹시 속지나 않을까" 하는 고민에 젖는다. 북방인의 성격이 호방하다면, 남방인은 영리하며 잽싸다.
이렇듯 장강(양쯔강) 유역의 이남과 이북은 문화적 이질감이 매우 두드러진다. 중국인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문화의 특성을 "경파(京派) " 또는 "경미(京味) 문화" 라고 부른다. 남방의 문화는 상하이(上海) 가 대표하고 있다고 해서 "해파(海派) " 라고 통칭한다.
베이징대 중문과 양중(楊忠) 교수는 "경파와 해파의 구별은 역사가 꽤 오래된 것이지만 요즘도 중국의 남.북방 문화를 구분하는 데 자주 쓰이고 있다" 며 "경파 문화가 보수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데 비해 해파 문화는 개방지향형이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고 정리했다.
남방 문화는 북방 문화보다 잘게 쪼개진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화둥(華東) 문화권, 푸젠(福建) 에서 대만까지 아우르는 민난(□南) 문화권, 홍콩을 포함한 광둥(廣東) 문화권,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한족과 대항했던 유서 깊은 초(楚:현재의 후난.후베이성) , 삼국시대 천하삼분(天下三分) 설을 앞세우며 자존심을 드높였던 유비(劉備) 의 파촉(巴蜀 : 현재의 쓰촨성) 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푸젠성 샤먼(厦門) 대 역사학과의 린치취안(林其泉) 교수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북방은 화북평원을 끼고 있으며 특별히 높은 산맥이 없어 문화적 갈래가 비교적 단순하다. 이에 비해 장강 이남은 산맥이 발달해 있어 문화 개체간의 교류가 뜸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방언의 차이가 심하고 문화적 특성도 매우 다양하게 분포할 수밖에 없었다. "
"붉은 자본가" 라는 별명을 얻으며 부총리를 역임한 룽이런(榮毅仁) 을 비롯해 역대 유명한 상인들이 화둥 출신이며, 장제스(蔣介石) 시절에는 "상하이 상인들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들이 놀란다" 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로 재력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에 비해 홍콩을 포함한 광둥지역 사람들은 경제에 전력투구하는 타입이다. 일찌감치 "위에서 정책을 세우면 아래에서는 대책을 세운다(上有政策, 下有對策) " 라는 말을 유행시켰을 정도로 기민한 두뇌회전에 오로지 "파차이(發財 : 돈을 벌다) " 에만 매진하는 특성을 지녔다. 이런 특성이 홍콩을 세계적인 금융.중개무역 중심지로 끌어올린 문화적 모태가 됐다. 리카싱(李嘉誠) 을 비롯한 세계적 거상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현재도 중국 개혁.개방의 견인차로서 상하이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
후베이(湖北) 와 후난(湖南) 성은 중간에 유명한 동정호(洞庭湖) 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초(楚) " 문화권에 들어가는 지역이다. 후베이성 사람들은 "하늘에는 머리 아홉 달린 새(매우 간교하다는 전설상의 새) , 땅에는 후베이 사람" 이라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만큼 머리가 좋고 간지(奸智) 가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후베이 사람에게는 "작은 총명(小聰明) " 이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붙는다.
***정통서 퓨전까지…
중국 요리 또한 남북으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북은 밀, 남은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맛에 있어서도 북은 짠맛이 우위를 차지했고 남은 단맛이 주를 이뤘다. 동.서의 특징을 덧붙일 때는 "동쪽 요리는 매운맛, 서쪽은 신맛이 위주" 라고 한다.
북쪽의 음식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 대종을 이룬다. 유명한 간쑤(甘肅) 성 란저우(蘭州) 의 "쇠고기 탕면(牛肉麵) " 을 비롯해 교자(물만두) 와 찐만두, 속없는 만두, 훈툰(만두피가 부드럽게 늘어진 교자의 일종) 등이 모두 북방에서 퍼져 나간 음식들이다.
이에 비해 화둥(華東)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 요리는 전체적으로 단맛을 위주로 하되 모양 등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쓴다. 상하이나 홍콩 등은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음식을 발전시켰는데 대외 개방이 빨랐던 지역이라 외국의 입맛을 고려한 "퓨전식 중국요리" 가 발달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쓰촨(四川) 과 후난성 요리는 독특하게 발전한 음식으로 중국 주요 요리에 꼽힌다.
두 지역 모두 매운맛 요리의 정통이라고 자부하는데 쓰촨은 강력한 향신료를 사용한 "마라(麻辣) " 가 유명하고 후난은 고추를 사용해 매운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