廬山煙雨
소동파(AD1036-1101)
廬山煙雨浙江潮/여산의 비안개와 절강의 조수를
未到千般恨不消 /천하의 절경을 가보지 못했을 때는 천만 가지 한이 남더니만
到得還來無別事/실제로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거 없더라.
廬山煙雨浙江潮/여산의 비안개와 절강의 조수일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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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
여산의 연우는 소동파 선시의 최고 결정체이다.
고수의 곡예를 보는 듯 대가의 예술성을 나타내고 있다.
여산의 연우는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성 항주시 전단강의 조수의 풍광을 선의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선이론에 입각하여 읊은 완벽한 선시이며 철리시이다.
여산연우는 앞에서 살펴본 여산 동림사 상총 조각선사에게 여산 서림사벽에쓰다와 함께 여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읊은 소동파 선시의 최고결정체 이다.
소동파의 인생은 귀양살이로 고달팠다.
왕인석의 신법에 대항하여 싸우느라 목숨을 부지 한것이 천행이였다.
소동파 스스로 자신의 시에서 그대가 평생 한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황주이고, 혜주이고, 담주라고 하겠네, 라고 했듯이 남해고도 오랑케땅 해남섬을 떠돌면서 만년을 지독스럽게 살았다.
소동파가 44세에 지은 시가 조정을 비방 했다고 탄핵을 받아 감옥에 갇히었다.
황주에 안치되는 유배령을 받고 49세에 풀려나 황주를 떠나 여산을 유람 하면서 읊은 시가 여산연우등 3수이다.
소동파는 황주에서 직접 동쪽 언덕에서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다. 동파설당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라고 칭하였다.
이때 그의 최고 절창인 풀후의 명품 "적벽부"를 지었다. 소동파 시의 절정기 였다.
소동파는 유배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불교사상 특히 선수행에 심취하여 마음의 안정을 이루고 낙천적으로 생활하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사찰을 찾아 불법에 귀의 했고, 고승들과 교류하며 선수행에 일가를 이루었다.
여산은 중국 강소성 성자현에 있는 천하 명산이다.
연평균 안개낀날이 190일이고 연중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이다.
여산의 연우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연우는 안개처럼 보이면서 이슬비 보다 가늘게 내리는 비이다.
여산의 비온후 물안개는 몽롱한 미와 미리적 체식을 표현한 것이고 절강의 전단강의 조수는 천군만마와 같은 용용팽배한 장엄미를 표현하고 있다. 이 두곳은 천변만화의 경관으로 전형적인 자연의 풍광이다.
절강은 중국 절강성의 성도 항주에 있는 양자강 하류 전단강을 말한다. 절강은 수나라때 황하와 양자강을 남북으로 연결한 대운하의 마지막 종점이고, 항주는 이렇게 도시로 형성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양자강 물은 항주를 통해 바다로 흘러 간다. 절강성 항주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고 소동파가 관리로 통관, 지주를 역임 했던 곳이다. 중국 4대 호수 중의 하나인 서호에는 소동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절강의 조수는 강물과 바다물이 교차하면서 바다물이 역류하는 풍광이 웅장하고 기세가 절묘하여 세계 최고다.
여산연우는 송나라 청원유신(1117년) 선사가 자기가 수행한 선의 경지를 세단계로 말하고 있는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나중에 직접 선지식을 만나 공의 이치를 깨치고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참선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산을 보니 다만 산이요,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라고한 내용을 가져다 시화 하였다. 성철스님의 종정 취임법어로 유명했던 내용이다.
1구 "여산의 안개비, 절강의 용출하는 조수"는 아직 보지 못했을 때의 경치이다. 참선하기 전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경치를 나타낸 것이다.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이다. 그러나 4구의 "여산의 안개비, 절강의 용출하는 조수는 직접가서 본 풍경이다. 2구와 3구는 보지 못했을 때는 온갖 한으로 남았는데 와서 보고나니 별것 아니다는 깨닫고 보니 중생은 그대로 중생이면서 부처는 부처이다의 경지이다. 깨닫고 보면 별것 아니다. 그러나 처음 1구와 "여산연우 절강수"는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경치이고, 4구의 "여산연우 절강수"는 직접 체험해 본 경치이다. 글자는 같으나 내용이 전혀 다른 뜻이다. 이는 대가의 고도의 예술성을 나타낸 고수의 곡예이다.
한시 역사에서 소동파는 당나라 왕유, 이백, 두보를 능가하는 최고의 철리시를 구가 하였다. 소동파는 산문, 시, 사 등 문학과 그림, 서도의 모든 분야에서 높은 성과를 이룩한 천재작가이다. 풍부한 사상과 내용과 독특한 예술수법 및 호매로운 품격과 멋진 비유는 북송 문학의 최고 성과 였다.
중국 역사상 과거시험에서 최고득점을 했던 천재이고 시서화, 그리고 음악, 음식요리, 건축, 토목, 수리공사, 의학에 이르기 까지 전천후적 능력의 소유자 였다. 유교, 불교(선), 도교, 신선술까지 모든 영역을 망라 하였다.
소동파가 고려, 조선 시학에 미친영향은 두보나 이백에 뒤지지 않는다. 소동파가 생존하고 있을때 이미 그를 사모하여 김부식 형제가 소식, 소철 형제의 명자를 따서 그들의 이름으로 삼았다, 문병을 쥐고 있다 김부식의 소동파 시풍은 조선조 초까지 세에서 확소의 밑바침이 됬다.
19세기 중반 조선조에서 소동파의 열풍이 불었다. 소동파 열풍의 진원지는 청나라 대학자이며, 서도가인 옹방강이다. 그는 서재 이름을 보소당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 이라고 짓는등 소동파의 시와 서도에 열광하였다. 조선 문인으로 옹방강과 최초로 만난 인물은 박재가와 추사 김정희이다. 헌종 임금은 자신의 처소에 보소당이란 당호를 붙인 못말리는 팬이 였다.
첫댓글 역시 한시의 깊은뜻은 헤아릴 수 없구려,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