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전국교사협의회가 거창고등학교에서 열었던 겨울 임원 연수에서 노조 건설을 심각하게 논의하던 때 유상덕 선생을 처음 뵈었습니다.
지금 돌아봐도 그는 선구자였습니다. 그가 중심에 섰던 <민중교육>이라는 무크지와 표지도 없이 지하에서 발간된, 광주의 기록 <어둠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황석영)가 저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섯 식구의 가장으로서 해직되고 구속되어도 당당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얻게 한 복음서였습니다. <민중교육> 제1호를 밑줄을 그어가며 탐독했습니다. 지금 돌아봐도 그 당시가 제 일생의 황금기였습니다. '무엇'을 했거나 '무엇'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저의 인생관 세계관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엄혹한 시대를 거슬러 교육운동가로서 굽힘 없이 사신 분입니다. 이미 해직과 투옥 등 고단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중앙집행위원회의에서나 연수장에서 혹시 비난성 비판이 나와도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눈만 자주 껌벅이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라앉은 어조로 진지하게 논리로써 구성원들을 설득해 나가셨지요.
아직 법외노조로 있을 당시에 전교조에서 조직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두 사람, 김현준은 영국으로, 유상덕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유 선생이 유학을 1년간 다녀온 뒤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있는데 여러 가지 미국 유학 이야기를 들을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 당시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되어 지식인 사회가 혼란스러워하던 때였습니다. 러시아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토론을 벌인 이야기는 나에게 작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충 요약하면, 러시아 학생들은 '현실 사회주의는 망했으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련이 붕괴한 주된 이유는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나라인데 미국과 무리한 군비경쟁을 하면서 경제가 피폐해진 까닭이다'라고 하더라는 얘기였습니다.
두 분 다 마음에 멍울을 안고 사시다 암을 얻어 지금은 이승을 하직하셨지만 그 발자취는 역사 속에서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재앙에 가까운 3년 반이 지나고 다가오는 내년 4월과 12월 대선을 생각하면 유 선생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유상덕 선생은 민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안고 온몸으로 뛰었습니다. 유 선생은 대구 경북 지역을 맡아 조직적인 활동을 벌였지요. 그가 지선 스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안동, 예천, 문경 등에서 강연회를 하고 좌담회를 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척박한 토양에서 표심을 얻기란 쉽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선거 결과 애쓴 보람을 거두지 못해 상처가 컸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시던 어느 신부님은 개표 상황을 보시고는 몸져 눕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듬해 이른봄에 오송회의 이광웅 선생 장례식에 참석하러 전주에 갔더니 눈 내린 전주 시가지가 패배감에 깊이 가라앉은 느낌이었습니다.
악몽을 꾸는 듯한 고통스런 이 현실을 넘어 상식과 진실과 양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숙제를 하나씩 던져 주고 유 선생이 그렇게 앓으시다가 가신 것 같습니다. 유상덕 선생, 당신은 기골이 장대하였는데 일전에 보니 몸은 여위었어도 발도 아주 크더이다. 김진경 선생이 말씀한 대로 그 큰 발로 '길없는 길'을 내느라 힘들게 사셨으니 저승에서는 편히 좀 쉬세요.
2011. 7. 15.
안동에서 갑장 김창환이 선생을 기립니다.
첫댓글 아, 유상덕 선생께서 돌아가셨군요. 몇 번 뵌 적이 있지요.
참 부드러운 분이셨고 아직은 더 오래 사셔야 할 분인데... 우리 교육계의 큰 별 하나가 또 하늘로 올라갔네요.
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