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클라이맥스는, 용서입니다"
*흐.르.는.곡.여.호.와.나.목.자
"용서하는 일이.. 왜, 그리도 어려울까?"
그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용서는, 인생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용서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무슨 나무인가를 열매로 알듯이, 우리의 신앙은 용서로 검증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돈 버는 일도, 공부하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용서하기 시작하면(용서가 되면)
그 현장에는 기적의 꽃이 피고, 회복의 잎이 무성해지고, 치유의 광선이 발하며,
닫힌 문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용서를 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용서에는 갈등이 많고, 우리의 용서는 골라서 하는 용서 입니다.
누구는 용서를 하고, 누구는 용서를 못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용서는 내 중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용서는, 여름 날씨와 같습니다.
용서했다가 그 사람을 보거나 생각하면, 다시 미워하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내 맘에 들어야 용서하고, 내게 득이 되어야 용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고도, 상처가 남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용서는, 조건없는 용서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용서가 되는 용서입니다.
용서 받을만 하기때문에, 형들을 용서한것도 아니며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한 것도 아니며,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때문에, 사랑한것도 아닙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이 특별한 의미의 형들입니다.
자신의 청춘을 망가뜨린 장본인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죽이고 싶은 형들입니다.
죽여도 죄없다할 형들입니다.
형들을 생각만하면, 억울하여 분하여 피가 역류하는 형들입니다.
그런 형들을 얼마든지 벌을 주고 죄값을 물어
행한대로 갚아도 될,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는 요셉이었으나
요셉은 형들을 통곡으로, 용서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용서에는 갈등과 계산이 없습니다.
개운한 용서를 합니다.
우리는 요셉의 큰 용서에, 한없이 작아짐을 느낍니다.
우리의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은, 나한테 잘해주면 잘해주고
용서할 가치가 있으면, 용서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그냥 용서하고, 그냥 사랑합니다.
요셉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타락한 우리 본성안에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 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은만큼, 사랑합니다.
용서 받은만큼, 용서합니다.
요셉의 조건없는 사랑과, 갈등없는 용서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잊어버리는 용서였습니다.
용서하고도 생각난다면,
그 용서의 뿌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그 사람을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용서 못하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지옥되지 않고는, 남을 미워할수가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마귀의 놀이터입니다.
우리가 진흙을 남의 얼굴에 바르려면, 먼저 내 손에 진흙이 묻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려면, 누구를 용서못하면
먼저 내 영혼에 진흙이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둠으로, 질병으로, 그늘로, 상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질병중에 상당수의 질병의 뿌리가,
용서못한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미워하는 마음때문이라는 말이지요.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드는 일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라는 증거겠지요.
용서못하는 마음은, 병이 걸릴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큰 나무가 시름 시름 마르고 죽어가는데,
물만주고, 비료만 준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무 속에서 벌레가 먹어, 썩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비료주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을 중단하고,속히 벌레를 잡아 내야 합니다.
벌레는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인생도 서서히 말라가고, 영혼은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만 한다고.. 위로 부터 주어지는 은혜만 받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갈등없는 용서, 조건없는 사랑만이,
말라가고 죽어가는, 우리의 심령과 영혼을 치유할수 있는 특효약입니다.
인간의 질병가운데 50퍼센트는, 용서하면 낫는 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고칠수 있는, 병이랍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DNA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DNA를 지니고 태어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을 닮은 DNA가, 우리의 세포속에 내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라는 DNA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명해야 합니다.
미움은, 마귀의 DNA입니다.
주님의 심장, 하나님의 DNA를 회복하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나도 내가 싫은데, 어떻게 남을 사랑하고 용서할수 있겠습니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
나도, 내가 싫은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남도,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용서할수 있습니다.
그 숭고한 용서의 원천과 사랑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남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사모함은 있을수 있지만
그럴 능력은 1퍼센트도 없음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이러스나 곰팡이가, 아무데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청결치 못하고 습한 곳에 서식하듯이,마귀도 동일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
틈을 타고, 집을 짖고,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활동이 시작되는 곳에, 온갖 질병과 나쁜일들과
평생을 그늘속에 살게 할, 어둠이 역사하는것입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님의 DNA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일은 총력을 기울여, 마귀를 무장해제 시키는 일입니다.
마귀는 용서의 백신 앞에서, 어둠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농장을 허무는 것은, 맹수가 아닙니다.
작은 여우 한마리가, 허무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오래묶은, 증오의 바이러스를 찾아내어
조건없는 용서의 백신으로,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의 농장은, 언제 허물어 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죄인되었을 때에..자격없을 때에,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성령의 나타남으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이 나타납니까?
기도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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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주님 앞에만 저를 두기 원합니다. 여전히 제 삶 속에서 부족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저를 볼 때 제 스스로의 무력감에 빠집니다. 그러함에도 또 그러할지라도 주님 앞으로 갑니다. 조금은 뻔뻔(?)하더라도 그러하더라도....
내 중심의 용서로 나의 의를 나타내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품으며 사랑하는 목회의 현장이 임하게 하소서!
아, 괴롭습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몸에 생체기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프면 차라리 괜찮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 - - -
인간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는 것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성령충만으로 늘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며 영을 좇아 살아간 것을 기억합니다.
힘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아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