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인들 특히 야당 정치인들이 일련의 실언파동을 일으켜 세상이 시끌시끌합니다.
“침묵의 기술”에 나오는 침묵의 14가지 원칙을 읽어보면 말 실수로부터 나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유익한 지혜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1.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2.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듯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있다.
3.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 서는 결코 말을 잘 할 수 없다.
4.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5.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닫는 것이 덜 위험하다.
6. 사람은 침묵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7. 중요한 말일수록 후회할 가능성은 없는지 다시 한번 되뇌어보아야 한다.
8. 지켜야 할 비밀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입을 닫고 있어도 지나치지 않다.
9.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10. 침묵은 편협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무지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대신한다.
11. 말을 많이 하고픈 욕구에 휘둘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 받느니, 침묵속에 머물러 별 재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편이 낮다.
12. 용감한 사람의 본성은 과묵함과 행동에 있다. 양식 있는 사람은 항상 말을 적게 하되 상식을 갖춘 발언을 한다.
13. 무언가를 말하고 픈 욕구에 걷잡을 수 없이 시달리고 있다면, 그 것만으로도 결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 고 결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14. 침묵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솔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을 지언 정 그 무엇도 가장해서는 안된다.
- 조세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아르테 간) 성귀수 번역 중에서
잠언 13장 3절에도 “입을 조심하는 자는 제 목숨을 보존하지만 입술을 열어 젖히는 자에게는 파멸이 온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채근담(菜根譚)에서도 말을 신중하게 하라고 아래와 같이 주문하고 있습니다:
十語九中 未必稱奇 一語不中則愆尤騈集
十謀九成未必歸功一謀不成則訾議叢興
君子所以寧默毋躁寧拙毋巧
열 마디 말가운데 아홉이 옳아도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자칫 단 한마디만 틀려도 사방에서 온갖 비난이 들 끓는다.
열 가지 일가운데 아홉을 성공해도 알아주지 않고, 단 한번만 실패해도 이곳저곳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 때문에 군자는 차라리 침묵을 할 지언 정 알아도 아는 체하지 않는다.
무릇 인간관계에서 공감을 갈구하는 현대인이라면 이청득심(以聽得心) 즉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생활수칙을 마땅히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침묵을 뜻하는 영어단어 silent라는 말속에 경청 즉 listen이라는 말이 무순으로 혼재해 있음을 눈 여겨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침묵은 경청을 전제로 하는 선한 행위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살아가면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 라는 속담은 변치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장자(莊子) 달생(達生))편에 보면 싸우지 않고 덕(德)으로 이기는 우화가 나옵니다. 아래에 우화 전문을 인용합니다:
“기성자(纪省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키웠다. 열흘이 되어 왕이 물었다. ‘닭이 이제 싸울 수 있겠나?’ ‘아직 안됩니다. 지금은 공연히 허세를 부리며 제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하고 기성자가 대답했다. 열흘이 지나 또 왕이 물었다. ‘아직 안됩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모습을 보면 당장 덤벼들려고 합니다’고 대답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 안됩니다. 상대를 노려보며 성을 냅니다’고 대답했다. 열흘후에 또 물었다. ‘이젠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도 태도에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해진 겁니다. 다른 닭이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하고 기성자 가 대답했다.”
이 우화에서 왕은 서로 붙어 힘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만 알았지 싸우지 않고 덕(德)으로 이기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덕은 만물을 하나로 봅니다. 만물을 하나로 본다 함은 만물을 싸울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울릴 벗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덕은 모든 것을 껴안습니다. 싸울 일이 없으니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보다 더한 승리는 없습니다.
왕은 승패의 늪이 수렁인 것을 몰라 그 늪에 빠지려 하지 만, 기성자는 그 늪에서 왕을 구합니다.
이 우화와 일맥 상통하는 관점을 서양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어단어 apatheia(아파테이아)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apatheia는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심경 즉 ‘부동심(不動心)을 의미합니다. 좀더 정확한 뜻은 “외부의 사물에 의하여 촉발된 감정들에 수동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평온한 심리상태”입니다. webster 사전에 의하면 apathy는 lack of interest, enthusiasm, or concern 즉 관심이나 열의 그리고 염려 등이 빠진 순수한 이성적인 상태입니다. 단어 apathy는 apatheia에서 파생된 말로 사촌쯤 되는 것 같습니다.
발레리나나 운동선수들이 연습을 많이 하면 특정부위에 무감각한 굳은 살이 돋아나 마모의 상처를 견디게 하는 보호막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심리적상태도 반복된 훈련을 통하여 외부의 사물에 의하여 촉발된 감정들에 휩쓸리지 않는 의연한 심리적인 보호막이 생겨 평소 본성만이 지닌 평온 상태를 지켜줍니다. 이를 두고 apatheia라고 합니다.
장자(莊子)의 달생(達生) 편에서 기성자가 키운 싸움닭의 덕전(德全)즉 덕이 온전한 상태와 부동심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apatheia는 그 의미가 아주 유사합니다.
부동심(apatheia)를 좀더 확대 해석하면 특정 분야에 무감각한 굳은 살이 박히면 마모의 상처를 견디게 하는 보호막이 생기고 이 보호막이 특정분야에 노련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작용을 한다고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야당의 집중 공격으로 촉발된 사태 즉 야당 국회의원 다수와 한동훈 법무장관사이에 오고 가는 불꽃이 튀는 설전이 ‘야당이 되로 주고 한동훈 장관이 말로 갚는 패턴’으로 진행되어 세간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일견해서 도전과 응전의 피장 파장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판단의 기준을 장자 우화에 나오는 기성자의 싸움 닭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덕전(德全)즉 온전한 덕의 관점 혹은 외부의 사물에 의하여 촉발된 감정들에 수동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누리는 의연한 개인적인 자유라는 개념의 apatheia 라는 기준으로 보면 한동훈 장관의 응전은 좀 작위적이고 성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침묵으로 대체하면 더 좋은 일을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스피드로 응전한 일종의 감정의 과소비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올법한 일입니다. 목계(木鷄)와 apatheia에서 관점에서 국한해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작가 이기주 선생님은 장기간 베스트셀러인 그의 저서 “말의 품격”에서 장자의 우화 목계(木鷄)의 교훈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논평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적이 덤벼도 함부로 버둥거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적절히 둔감(鈍感)하고 의연한 닭 이야기가 ‘목계(木鷄)의 교훈이다’ … 상대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언어적 순발력을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기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난 적절한 의연함을 유지하면서 남보다 유연하게 말하는 ‘목계’와 같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 무협영화를 보면, 고수는 소리 없이 강하지만 하수는 소란스럽다. 하수는 적을 발견하는 순간 주저없이 칼을 내두른다. … 무릇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엄이 있다. 무작정 꺼내 들면 칼의 위력은 줄어 든다. 칼의 크기와 날카로움이 뻔히 드러나는 탓이다. 아마 말도 그러 할 것이다. 적절한 둔감력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휘두를 때 말의 품격은 더해지며 언력(言力)은 배가 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지만 삶은 매번 계속되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사소한 일로 마음이 틀어진 이들과 다시 말을 섞고 몸을 부대끼려면 우린 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계속 달릴 수 만은 없다. 어쩌면, 어떤 순간에는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반응해야 하는지 모든다. 좋은 의미의 둔감 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작가 이기주 선생님은 ‘목계’의 교훈을 둔감 력(鈍感力)과 의연(毅然)함 이라는 관점에서 일종의 처세술로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둔감력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되지 않으며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 력”이다.
특정분야의 둔감력 내지 굳은 살은 외부의 사물에 의해 촉발된 감정에 수동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특정분야의 노련한 능력의 상징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필자의 가설을 매듭 지으며 오늘 글을 마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조세프 앙투안 투생디누아르 저 “침묵의 기술”, 윤재근 저 “우화로 즐기는 장자”,심의용 저 “마흔의 단어들” 그리고 이기주 저 “말의 품격”을 참고하고 부분적으로 인용 하였음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