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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11)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11일] 4월 14일(목) 단양향교→ 죽령(竹嶺)→ 풍기관아(풍기초교) (22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4일 퇴계 선생]
◎ 1569년 음력 3월 14일, 이날 퇴계 선생은 단양을 출발하여 죽령(竹嶺)을 거쳐 풍기로 향하였다. 죽령으로 접어들기 직전에 있는 단양군 대강(면)에는 역참인 장림역이 있었다. 선생이 말을 갈아타기 위해 이곳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집》에는 ‘장림역’에서 맏손자인 이만도와 기대승, 김취려 두 제자에게 보내는 선생의 안부편지가 실려 있다. 노정 중에 여주강에서 비바람 때문에 고생하였으며 충주에서 내리자 편안해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기록을 통하여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의 경로와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 선생이 지나갔던 죽령은 지금 ‘죽령옛길’로 불리는 그 길이다. 이를 통해서 선생은 경상도 풍기를 거쳐 영주로 향하였다.
○ … 형님[온계(溫溪) 이해(李瀣)]이 충청감사로 계시면서 잠시 말미를 얻어 고향에 오셨다. 나는 당시 외람되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형님을 맞이하고 전송하기를 모두 죽령에서 하였다. 당시 요원 아래 빼어난 곳을 얻어 두 개의 대를 세웠다. … 작별에 앞서 형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벼슬을 그만두지 말게. 내년에 내 꼭 다시 올 것이니, 저 대 위에서 술잔을 드세나.”고 하셨다. 다음날 내리 두 절구를 써서 붙였다. …
爲破天荒作一臺 위파천황작일대 험한 땅을 다듬어서 돈대 하나 지었으니
鴒原棠茇送迎來 여원당발송영래 감사 형님 오가실 때 마중 배웅 위함일세.
泠泠恰似懽情溢 영령흡사환정일 영령한 물소리는 정 넘치는 듯 흘러가고
矗矗眞如別恨堆 촉척진여별한퇴 우뚝 솟은 봉우리는 이별의 한 말하는 듯.
雁影峽中分影日 안영협중분영일 안영협에서 형제 서로 헤어지던 날이요
消魂橋上斷魂時 소혼교상단혼시 소혼교 다리 위에서 넋 나간 듯할 때라네.
好登嶺路千盤險 호등영로천반험 구절양장 죽령고개 무탈하게 오르셨다
莫負明年再到期 막부명년재도기 내년 다시 오실 기약 저버리지 마옵소서.
… 이 시에 형님[李瀣]이 운(韻)을 따라 지으셨다.
神輸鬼役築層臺 신수혼역축층대 귀신들의 한 일인 듯 층층대가 우뚝하니
一夜能成待我來 일야능성대아래 하루 밤새 날 기다려 쌓아놓은 것이라네.
眼力只應天隩覰 안력지응천오처 시야가 아마도 하늘 끝까지 열리겠기에
暫時斸破白雲堆 잠시촉파백운퇴 흰 구름 낀 비탈길을 잠깐 사이 올라보네.
西日晻晻若不遲 서일엄엄약부지 지는 해가 어둑어둑 괴롭게도 빨리 지니
躊躇橋畔酒闌時 주저교반주란시 술자리 파할 무렵 다리 가에서 서성이네.
雲山聽我丁寧說 운산청아정녕설 구름 산아 정녕한 이 내 말 들어 보소
好待明年來有期 호대명년래유기 무탈하게 지내다가 내년에 또 찾아오리.
—《온계유고(溫溪遺稿)》〈次舍弟景浩矗冷臺韻 二首 및 原韻〉(아우 경호(景浩)의 촉령대시의 운을 빌려 두 수를 짓다) * 경호(景浩)는 퇴계의 자(字)이다.
* [2022년 4월 14일 목요일 귀향길 재현단]
▶ 단양(丹陽),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오전 8시, 귀향길 재현단은 단양향교 옆, 단성면사무소 마당에서 집결했다. 어제의 청풍호 물길 여정에 이어 오늘도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의(雨衣)를 갖추어 입은 재현단은 단성면사무소 마당에서 출행식을 가졌다. 먼저 김병일 원장이 오늘의 일정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도산십이곡〉제10곡(후6곡 중 제4곡)을 스마트폰 반주음에 맞추어 다함께 노래 부르고 … 간단히 준비운동을 했다.
당시예 녀든 길흘 몃 해를 바려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졔아 도라온고
이졔야 도라오나니 년 듸 마음 마로리.
— 그 동안, 참다운 학문에 뜻을 세우고 행하던 길을 몇 해나 버려두고서, 어디 가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시는 다른 곳에 마음 두지 않으리라. … 생각해 보면, 나라의 정치(政治), 우여곡절이 많았던 벼슬길에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른네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퇴계 선생은 50세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학문(學問)에 뜻을 두고 도산(陶山)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기를 마음먹는다. 이때의 심경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 생각해 보면, 선생의 이 노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절실하게 다가오는 가르침이다. 직접 훈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신의 심경과 다짐을 노래함으로써, 우리에게 학문 정진(精進)의 마음을 넌지시 깨닫게 한다. 곡진하게 다가오는 따뜻하고 진솔한 말씀이다. 다사다난한 세상 속에서 생활과 명예를 위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인격을 수양하고 참다운 사람이 되는 학문이 더없이 중요하다. 그야말로 위인지학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길’이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죽령옛길’
▶ 비가 내린다. 453년 전 퇴계 선생은 여주강에서 비바람을 만나 몹시 고생을 하셨다고 했는데, 귀향길 재현단은, 어제 청풍호의 물길과 장회나루에서부터 단성에 오기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고, 오늘도 비를 맞으며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긴 여정에 이렇게 궂은 날이 있는 것도 인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은 귀향길 노정 가운데 가장 높은 죽령을 넘는 날이다. … 퇴계 선생에게는 도산과 한양을 수없이 오가며 수없이 넘어본 죽령이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이 고개를 넘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단양에서 풍기로 가는 모든 자동차들은 5번 국도나 긴 터널로 단숨에 통과하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퇴계 선생이 가신 ‘죽령옛길’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노정과는 달리,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큰 고개를 두 발로 걸어서 넘어가는 길이니, 매우 힘든 여정이다. 제법 가파르고 힘든 구간도 있지만 신록이 초록초록 숨을 쉬기 시작하는 산길은 여간 쾌적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1569년 음력 3월 14일 오늘, 퇴계선생은 가까워지는 고향을 그리며 흔쾌한 마음으로 죽령을 오르셨을 것이다. 오늘은 빗속에서 선생이 가시는 길을 따라서 걷는다.
오늘의 출행
단성에서 죽령으로 가는 길
▶ 단양향교에서 대강(면)을 지나, 용부원의 죽령 산길의 초입에 이르기까지 지방도로와 5번 국도변을 따라 간다. 재현단의 행렬 가까이에 많은 차량들이 쌩쌩 지나가지만 일행은 인도(人道)를 따라 열을 지어 걷는다. 오늘도 선두에는 도포와 갓을 갖춘 이한방 교수가 앞장을 섰다. 이어서 의관을 갖춘 김병일 단장, 동양대 강구율 교수, 《온계 이해평전》을 쓴 전 KBS 이동식 작가, 도산서원 별유사 이원봉 님 등이 대열을 이루고 성함(姓銜)을 확인할 수 없는 유림들이 의관을 갖추고 뒤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평상복을 입은 전 영남대 이장우 박사, 전 경상국립대 김덕현 박사, 금계 황준량의 후손인 성균관대 황연섭 박사 그리고 이상천·오상봉·송상철·진병구·진현천 님등 재현단과 그 외 많은 분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오늘은 특히 서울에서 한국경영인협회 박병원 명예회장이 부인과 함께 참석하였다. 필자는 대열의 향도를 맡아서 동행했다.
▶ 단성면사무소에 36번 지방도로로 단성면 북하리에서 죽령천을 따라 올라간다. … 죽령천은 그야말로 죽령의 산곡에서 발원에서 북쪽으로 흘러 내려오다가, 대강면 두음리에서 백두대간 도솔봉과 문복대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한 여려 물줄기가 합류한 남조천을 받아들여 단양읍 현천리에서 남한강에 유입된다. 우리 일행은 북하리 한국호텔관광고등학교—단천초등학교 앞을 지나서 북상교를 건넜다. 그리고 5번 국도을 따라 걷다가 대강(면)에서 다시 다리(장림교)를 건넜다. 북하리에서 3.1km 올라온 지점이다. 이곳 장림교 아래에서 죽령천과 남조천이 합류한다. 어제부터 내린 비로 인해 길목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연분홍 도화도 비에 젖고 있었다.
▶ 오전 9시 30분, 장림교 다리를 건너고 나서는 죽령천을 왼쪽에 끼고 오솔길을 따라간다. 머리 위에는 중앙고속도로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가 지나간다. 바위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세차다. 길은 마사포를 깔아놓아 내딛는 발걸음이 감촉이 좋다. 성글게 내리는 비는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산으로 가는 길
용부원 마을
▶ 한지역사전시관이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바로 용부원(1리)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너른 마당이 있고 개울가 가장자리 대추나무 아래 사각정이 있으며 길가에 간이화장실도 있다. 재현단 일행이 잠시 다리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 산중 마을에 웬 한지역사전시관인가. ― 휴식을 취하고 나서 마을 앞 다리를 건너는데, 길가에 담대한 서체로 ‘美德’이라고 쓴 자연석 비(碑)가 있고 그 아래 ‘여기 오심은 우연이지만 마음을 나눔은 영원입니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 ‘마을자랑비’ 제목으로 마을의 내력을 새겨 놓았다.
◎ 용부원은 약 1780년 경주김씨와 안동권씨가 마을 한 가운데 자연수인 맑은 샘물을 보고 다래넝쿨을 베어내고 자리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단양군 동면 지역으로 조선조 때 장림역(長林驛)에 달린 용부원(用富院)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 기동, 용암을 병합하여 용부원(龍夫院)으로 금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다시 대강면에 편입되었다.
… 마을 중심에 솟아나는 샘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로 1820년경부터 ‘문창호지’ 가내공업을 시작하여 많은 발전과 기술로 일본에 수출하므로 주민소득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마을 북쪽 사우실 뒷산 봉우리가 매우 높아, 일조시간이 너무 짧아서 옷을 빨아서 3일 동안 햇볕에 말린 후 화로불에 다시 말린다 하여 음지마을이라고도 하지만, 평균수명이 85~100세에 이르는 장수마을이라고 한다. 맑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인심이 좋은 마을로 소문이 나 있다.
▶ ‘마을자랑비’ 가운데 부분에 새겨져 있는 ‘여기 오심은 우연이지만 마음을 나눔은 영원입니다’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여운으로 남는다. 문득 퇴계선생이 떠오른다! 퇴계 선생은 오직 ‘경(敬)’으로 생활하고 ‘경(敬)’으로 세상(사람)과 마음을 나누셨다. …
‘한지역사전시관’이 있는 대강면 용부원1리를 지나서, 죽령천 위에 높다랗게 걸린 출렁다리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저 아래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산야에는 이제 막 새 순을 틔운 연둣빛 신록(新綠)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4월의 생명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똬리굴’ 입구 안내판 그리고 죽령폭포
▶ 다행히 비는 그쳤다. 산길은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간다. 우의(雨衣) 안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이다. 음지마을[용부원]에서 2,9km 올라온 지점, ‘똬리굴’ 안내판이 있다. ‘똬리굴’은 1942년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중앙선 철로(鐵路)가 고도가 높은 소백산을 넘어가기 위해 산 속의 굴을 뚫었는데, 뱀이 똬리를 틀듯 한 바퀴 감아 올라가는 구조이다. 지금은 폐철로가 되었지만 일제가 강원도의 목재와 광물 등을 수탈을 하기 위해 건설한 서글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앙선은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원주-단양을 경유하여, 영주에서 낙동정맥의 철암-도계를 지나 동해안에 이르는 영동선과 연결된다.
▶ 가파른 나무테크 계단을 오른다. 높은 산길의 아래에 폭포가 있다. 죽령폭포이다. 비가 적게 내리는 봄에는 수량이 그리 많지 않지만 그 높이가 장관이다. 1569년 오늘, 퇴계 선생도 여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폭포를 감상하며 시원한 물소리로 피로를 푸셨을 것이다.
굽이굽이 역사가 깃든 ‘죽령옛길’
▶ 죽령옛길 출렁다리에서 3km, 죽령폭포에서 0.8km 올라온 지점에 이정표가 있다. 그리고 죽령옛길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 ‘죽령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로,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과 충청도를 잇은 3대 관로(官路) 중의 하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 (서기 158년) 죽령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옛길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깃든 죽령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는 국경지역이었다. 삼국의 군사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격전장이었습니다. …
그 동안 ‘죽령(竹嶺)’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궁금했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처음 ‘대재’라고 한 것이 한자로 ‘竹嶺’(죽령)이 되었다고 하는데. 과문한 필자는 소백산 죽령 부근에서 대나무를 보지 못했다. ‘죽령옛길’의 안내문을 읽고 보니, 죽령은 신라시대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고개[嶺]를 개척하다가 순사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죽죽이’가 바로 ‘보국사지미륵불’ 해설판에 나오는 ‘죽지랑’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죽령 옛고개마을’
▶ 용부사 인근의 이정표에서부터는 포장된 산간도로가 이어진다.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고도를 높이는데 길 주변에 배나무 과수원이 있다. 가지에는 여린 새순이 나오고 있을 뿐, 아직 배꽃은 피지 않았다. 그리고 제법 깔끔하게 단장된 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나온다.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2리 ‘죽령옛고개마을’(일명 샛골)이다. 조선시대에는 장림역(단양군 대강면 장림리)에 속한 원(院)이 있어 ‘용부원’이라고 했다. 본디 용부원은 하나의 마을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부원2리로 분구되었다. 옛날 퇴계선생도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다가 이곳 용부원에서 다리를 펴고 잠시 쉬었을 것이다.
여기 ‘죽령옛고개마을’ 안내판에 ‘죽령’의 유래를 적어 놓았다. ‘옛날 어느 고승이 이 고개를 넘는데 하도 힘이 들어서 짚고 가던 대나무 지팡이를 꽃은 것이 살았다 하여 대재라고 불리었다.’고 적고 있다. 죽령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밝히는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보국사지(輔國寺址)
▶ 이 마을 길가의 산록에 머리가 없는 직립불상이 하나가 서 있다. 신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보국사지여래입상(輔國寺址如來立像))’이다. 안내판에 적힌 내용은 이러하다. 신라의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주인공인 ‘죽지랑(竹旨郞)’의 이름이 나온다.
… ‘보국사지(輔國寺址)는 죽령 마루턱 용부원리 옛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좌측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현재 절터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효소왕대(孝昭王代, 692~702) ‘죽지랑조(竹旨郞條’에 ‘술종공(述宗公)이 죽지령(竹旨嶺, 지금의 죽령)의 고갯길을 닦은 거사(居士)에 감응하여 그가 죽은 뒤 고갯마루 북쪽에 장사를 지낸 후, 돌로 미륵 한 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는 내용 역시 보국사지가 위치한 곳과 관련되어 불교문화의 유입을 시사한다.
보국사지가 위치한 죽령(竹嶺)은 신라의 북진정책에 있어 영남에서 원주와 한강 이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러한 중요한 거점에 세워진 보국사지는 당시 교통과 관계되는 사찰로 문경에서 충주시 상모면으로 넘어가는 하늘재의 ‘미륵리사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지표조사 때 발견된 원형석주(圓形石柱), 죽절형(竹節形) 석주(石柱), 벽석(壁石) 등은 미륵사지와 같은 석실구조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은 현재 머리와 상체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의 길이는 4m로, 죽령 이북의 유일한 장육불상(丈六佛像)이다. 상체의 파손으로 대의(大衣)의 착의방식은 알 수 없으나 양다리 위의 주름은 U자 모양의 타원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배 위에 올리고 왼손은 몸에 밀착하여 아래로 내려 대의 자락을 쥐고 있다. 이 불상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과 같은 형식을 보여주나 수인(手印)의 위치가 반대이며 양식상 다소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옛길의 정점, 죽령(竹嶺)
백두대간 소백산(小白山)
소백산은 강원도 태백산(1,568m)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내려오는 백두대간 중에 솟은 산으로, 북동쪽에 국망봉(國望峰, 1,421m), 남서쪽에 민배기재와 연화봉(蓮花峰, 1,394m)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남서쪽의 연화봉에서 약 4㎞ 정도 내려가면 제2연화봉(1,357m)에 이른다. 그리고 소백산 줄기는 안부 죽령(竹嶺)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도솔봉((1,314m))으로 이어진다.
― 필자는 2020년 5월 31일 일요일, 죽령에서 시작하여 소백산 연화봉―비로봉―국망봉을 종주하는 산행을 한 바 있다.
소백산은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비교적 평탄한 고원(高原)을 이루고 있으며, 그 북쪽으로 국망천(國望川)이 흘러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며, 낙동강 상류의 지천인 죽계천(竹溪川)이 금계천(錦溪川), 남원천 등이 발원한다. 그리하여 백두대간 소백산은 남한강과 낙동강의 분수 산맥이다.
소백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제2연화봉의 동남쪽 기슭에는 내륙지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높이 28m의 희방폭포(喜方瀑布)와 신라시대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한 희방사(喜方寺)가 있다.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소백산국립공원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경내에는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부석사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국보 제19호)·부석사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부석사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부석사3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보물 제249호)·부석사당간지주(浮石寺幢竿支柱:보물 제255호) 등 많은 유물이 있다.
신라시대의 사찰인 초암사(草菴寺)에는 초암사3층석탑, 초암사동부도, 초암사서부도 등이 있고 성혈사에는 성혈사나한전(聖穴寺羅漢殿, 보물 제832호) 등이 있으며, 그밖에 비로사·보국사(輔國寺)·죽령산신당(충청북도 민속자료 제3호) 등이 있다. 죽령은 제2연화봉 남쪽 약 4km에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천체관측소인 국립천문대가 있다.
죽령(竹嶺)
▶ 낮 12시 20분, 드디어 재현단 일행은 죽령에 올라섰다. 백두대간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고개마루이다. 동쪽의 소백산 제2연화봉(蓮花峰:1,394m)과 서쪽의 도솔봉(1,314m) 사이의 해발 689m 안부(鞍部)이다. 죽령의 백두대간은 경상북도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의 경계를 이루고 낙동강과 남한강의 분수령이다. 죽령을 경계로 기후와 풍토 그리고 언어와 풍속 문화 등이 그 차이를 보인다.
죽령(竹嶺)은 문경새재[鳥嶺]와 추풍령(秋風嶺) 등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으로 통하는 삼대 관문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영남 내륙의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이 길을 거쳐서 서울 왕래를 했다.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나 나라의 관리들은 물론, 온갖 물산이 보부상들의 등에 업혀 이 고갯길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고갯길 양쪽의 단양과 청풍, 영주와 풍기 등지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들어섰고, 이들 장터는 늘 성시를 이루곤 했다.
줄잡아 2천여 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영남 내륙을 잇는 동맥의 역할을 해온 이 길이 2001년 중앙고속도로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 다시 호젓한 옛길의 모습을 되찾았다. 더욱이 그동안 숲 덩굴에 묻혀있던 그 옛날 오솔길을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자는 뜻에서 1999년 5월 이 길(2.5km)을 다시 정비하여, 안내판과 함께 단장을 마쳤다. 바로 퇴계선생이 다니시던 ‘죽령옛길’이다.
죽령주막의 산채비빔밥
▶ 죽령에 올라선 재현단 일행은 단양 쪽에 시설인 테크전망대 위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용부원 옛길마을을 지나면서 비는 거쳤지만, 죽령의 마루에는 싸늘한 바람이 엄습해 왔다. 비와 땀에 젖은 몸에 한기(寒氣)가 들기 시작했다. 온몸이 추워서 진저리를 쳤다. 죽령루(교남제일관)에서 옛날 이 길을 넘은 퇴계선생을 추모하며 남기신 시(詩)를 음미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바람이 너무 차갑고 날씨가 음산하여 온몸이 오한(惡寒)이 들어 재현단 일행은 우선 ‘죽령옛주막’ 식당 실내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따뜻한 산채비빔밥으로 식사를 한 후, 지원단 버스를 바람막이로 하여 자리를 만들어 죽령루(竹嶺樓) 앞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풍기에서 고개로 올라가는 쪽에는 ‘竹嶺樓’ 현판이 걸려있지만, 충청도 단양 쪽에는 ‘嶠南第一關’(교남제일관) 현판이 걸려있다. ‘교남(嶠南)’은 영남의 다른 이름이다. 한양이나 충청도에서 고개를 넘어오면 만나게 되는 영남(경상도) 관문으로 그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죽령루(교남제일관) 앞에서의 강담회
온계 선생과 퇴계 선생의 석별(惜別)
단양군수과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선생에게는 이곳 죽령옛길에 많은 사연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특히 1549년 충청도 감사였던 중형 온계 이해 선생과 풍기군수로 임직하던 퇴계선생이 만나서 회포를 풀고 송별하던 고개였다. 그 사연이 참으로 애틋하고 극적이다. 김병일 단장이 저간의 내용을 소개했다.
그리고 죽령에서 두 분이 주고받은 시(詩)는 동양대 강구율 교수가 장중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창수하고 시를 내용을 해석하였다. 이어서 2,000수에 가까운 퇴계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한 전 영남대 이장우 박사가 퇴계 선생의 시와 한시의 기본 형식, 압운법, 평측법에 대한 특강을 하기도 했다. 1986년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퇴계의 시 1,986수를 완역한 《퇴계 시 풀이》(영남대학교 언론출판문화원)는 9권 9책으로, 방대한 역작이다. — 이장우(李章佑) 박사는 경북 영해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에서 석사,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국의 국립중앙연구원, 프랑스 파리 제7대학,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하바드대학 등지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부 명예교수이다. 주요 역저로 『한유 시 이야기』(1988), 『중국문화통론』(1993), 『중국문학을 찾아서』(1994), 『중국시학』(1994), 『중국의 문학이론』(1994), 『고문진보 전·후집』(공역, 2001, 2003) 외 다수가 있다.
◎ 1549년 10월 온계(溫溪) 이해(李瀣m 1496~1550) 선생이 충청도관찰사에 재직할 때 당시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있을 때였다. 온계 선생은 아우 퇴계와 풍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던 곳이 바로 이곳 죽령이다. 퇴계 선생은 온계 선생이 오고가는 길에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형님’을 맞이하고 전송하기를 모두 죽령(竹嶺)에서 하였다. 아쉬운 이별을 나누는 장소로 당시 요원 아래 빼어난 곳을 얻어 잔운대(棧雲臺)와 촉령대(矗怜臺)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온계 선생이 충주감영으로 귀임할 때 … 작별에 앞서 퇴계 선생에게 말하기를 “벼슬을 그만두지 말게. 내년에 내 꼭 다시 올 것이니, 그때 저 대 위에서 술잔을 드세나.”고 하였다. 다음날 퇴계 선생은 내리 두 편의 칠언절구를 써서 붙였다.
爲破天荒作一臺 위파천황작일대 험한 땅을 다듬어서 돈대 하나 지었으니
鴒原棠茇送迎來 여원당발송영래 감사 형님 오가실 때 마중 배웅 위함일세.
泠泠恰似懽情溢 영령흡사환정일 영령한 물소리는 정 넘치는 듯 흘러가고
矗矗眞如別恨堆 촉척진여별한퇴 우뚝 솟은 봉우리는 이별의 한 말하는 듯.
雁影峽中分影日 안영협중분영일 안영협에서 형제 서로 헤어지던 날이요
消魂橋上斷魂時 소혼교상단혼시 소혼교 다리 위에서 넋 나간 듯할 때라네.
好登嶺路千盤險 호등영로천반험 구절양장 죽령고개 무탈하게 오르셨다
莫負明年再到期 막부명년재도기 내년 다시 오실 기약 저버리지 마옵소서.
이 시에 온계 선생이 운(韻)을 따라 화답시를 지었다.
神輸鬼役築層臺 신수혼역축층대 귀신들의 한 일인 듯 층층대가 우뚝하니
一夜能成待我來 일야능성대아래 하루 밤새 날 기다려 쌓아놓은 것이라네.
眼力只應天隩覰 안력지응천오처 시야가 아마도 하늘 끝까지 열리겠기에
暫時斸破白雲堆 잠시촉파백운퇴 흰 구름 낀 비탈길을 잠깐 사이 올라보네.
西日晻晻若不遲 서일엄엄약부지 지는 해가 어둑어둑 괴롭게도 빨리 지니
躊躇橋畔酒闌時 주저교반주란시 술자리 파할 무렵 다리 가에서 서성이네.
雲山聽我丁寧說 운산청아정녕설 구름 산아 정녕한 이 내 말 들어 보소
好待明年來有期 호대명년래유기 무탈하게 지내다가 내년에 또 찾아오리.
— 위의 송별시와 화답시는《溫溪遺稿(온계유고)》에 실려 있다.〈次舍弟景浩矗冷臺韻 二首 및 原韻〉
다음해에 다시 만나기로 시(詩)로써 기약했지만 그것이 두 분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형제간에 석별의 정을 나누며 내년에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지만 그것이 두 분의 만남은 마지막이었다. 1550년 온계는 충청도관찰사 재임 때의 일로 간신 이기(李芑)의 모함을 받아서 혹독한 고문과 장형을 받고 갑산으로 유배된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양주의 객점에서 장독으로 돌아가시니… 두 분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20년 후인 선생은 마지막 귀향길에서, 형님과 마지막 이별을 했던 죽령을 넘으면서 가장 절친했던 형님을 생각하며 아픈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시에 나오는 잔운대(殘雲臺)와 촉령대(矗冷臺), 그리고 안영협(雁影峽)과 소흔교(消魂橋)가 어디쯤에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죽령시비(竹嶺詩碑)
퇴계와 온계가 주고받은 시가 새겨진 —
5번 국도가 지나가는 죽령 고개 중턱에 시비(詩碑)가 있다. 비록 죽령고개에서 지은 시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하지 못하는 온계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작품을 소개해 본다. 이 시에는 간단한 서문이 있으므로 작품과 아울러 소개한다. … 옛날 형님을 따라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던 길에 죽령에 이르니 가을 경치가 무르익었다. 형님이 말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읊으셨는데, “단풍 숲 푸른 숲 채색 병풍 펴놓은 듯, 그 가운데 맑은 시냇물 돌층대를 끼고 흐르네. 바쁜 벼슬 길 잘못 가까이하였음을 불행하게 아노니, 푸른 이끼에 노니는 자취 전혀 없었네.” 라고 하셨다. 나는 단풍과 푸른 산골짜기 물을 볼 때마다 문득 이 시를 외운다. 이에 화답하는 시를 적어 회포를 풀어본다. 형님은 지금 승정원에 승지로 계신다.
산골짜기 물과 단풍 숲 서로 비추고 있는데
채색 병풍 같다는 형님의 말씀이 생각나네
아우는 지금 벼슬살이 매인 몸이 되었으니
아름다운 곳 돌이끼를 언제 밟아 보겠습니까.
퇴계는 온계와 함께 죽령고개를 넘던 1536년에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542년 공무로 홍천의 삼마치고개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고는 불현듯 그 옛날 형님을 모시고 죽령고개를 넘던 일이 생각났고 형님이 지은 그 시에 비로소 화답한 것이다. … 이 작품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따뜻한 형제애를 느낄수 있다. ☞ 강구율 집필,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푸른역사, 2021) pp. 231~233
죽령(루)에서 풍기로 향하다
▶ 오후 2시 15분, ‘죽령루’를 출발하여 하산에 돌입했다. 죽령루는 2011년에 새로 세운 누각이다. 풍기 방향의 죽령옛길을 내려다보는 전면에는 ‘竹嶺樓’ 현판을, 5번 국도로 쪽에는 ‘嶠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길 건너 맞은편에 우리 재현단 일행이 점심식사를 한 ‘죽령주막’이 있다. 죽령에서 희방사역까지 내려가는 산길은 그리 경사가 급하지 않고 비교적 쾌적했다.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453년전 퇴계 선생이 내려갔을 길을 따라 내려간다.
죽령옛길! 산길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긴 흔적이다. 경사가 급하면 갈 지(之) 자로 길이 만들어지고 때로는 돌계단을 만들거나 돌을 깔아 놓기도 하였지만, 수많은 세월 속에서 스스로 길은 파이고 다져지고 곳곳에 여기저기 돌부리가 그대로 솟아있으면서도 발을 디딜 수 있는, 인간의 역동적인 세월이 거기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을까. 기록에 의하면 죽령옛길은 삼국시대부터 영남 내륙지방과 중원지방을 연결하는 요로(要路)였다. 신라와 고구려가 다투던 국경이었다. 그리하여 한양으로 가는 중원과 경상좌도를 오고가는 관료들, 청운의 꿈을 안고 넘나들었던 수많은 선비들, 무거운 물품을 지고 넘나들던 보부상들 … 험준한 죽령의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스며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 길은 453년 전 오늘, 퇴계 선생이 지나간 길이다. ‘아, 죽령을 넘었으니 이제 고향 땅이 멀지 않았구나!’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순백의 도포와 우아한 갓을 갖추어 쓰고 선뜻선뜻 발걸음을 내딛는 선비들의 풍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선생의 풍모가 떠오른 것이다. 죽령 고갯마루에서 음미하고 감상한 온계 선생과 퇴계 선생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하니 이곳 어딘가에 두 분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 내려가는 길목, 소백산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설치한 해설판이 곳곳에 있다. 소백산에 자생하는 식물이나 동물, 조류 등에 관한 자상한 해설이다. 그리고 온계와 퇴계 선생의 송별시도 소개해 놓았다. 특히 ‘신라의 명신’이라는 제목으로 ‘죽지랑’에 관한 해설판이 있다. 용부원2리 옛길마을에서 보았던 해설을 통해 ‘죽령’의 지명이 ‘죽지랑’과 관련이 있는 듯하여 찬찬히 읽어보았다. 더욱 자상하다.
죽령과 신라의 명신 죽지랑(竹旨郞) 이야기
… ‘신라 중기의 명신 술종(術宗)은 삭주도독사(강원도 영서지방의 행정관)가 되어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부임하는 길에 이곳 ‘죽지령’[지금의 죽령]을 넘다가, 고갯마루에서 길을 닦고 있는 한 거사(居士)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뜻이 맞아 서로 친구가 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 술종은 부임하고 나서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밤 그 거사가 자신으로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부인도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해, 이를 이상히 여려 죽지령에 사람을 보내 그 거사의 안부를 확인해 보니 그 꿈을 꾸던 날 그 거사가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종(術宗)은 성의를 다해 죽지령에서 그 거사의 장례를 치루고, 이후 부인이 아들을 낳자 그 거사를 기려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지었다. 그 후 죽지(竹旨)는 화랑으로 성장하여 김유신 장군과 함께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고 진덕왕에서부터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신라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오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당시 화랑이었던 득오곡(得烏谷, 혹은 得烏)이 악덕 관료에게 끌려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죽지랑(竹旨郞)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자 그 후 죽지랑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향가(鄕歌)이다.’
[삼국유사 원문] [양주동 박사의 해독]
(15세기 국어 표기)
1942년 간행된 양주동 박사의 《朝鮮古歌硏究》(조선고가연구, 박문서관)의 해독은 신라시대의 말과 가장 가까운 15세기 국어로 표기했다. 15세기 국어표기는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1446년) 당시의 표기를 말한다. 이를 현대국어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며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이 지려 하는구나.
눈 깜박할 동안에
만나 뵙기를 짓고져.
郞(랑)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
이 노래는 화랑의 장(長) 죽지랑(竹旨郞)의 무리[郎徒] 가운데 득오(得烏)라는 인물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향가(鄕歌)는 순수한 우리글이 없었을 때에 우리말로 된 노래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한자의 음(音)과 뜻을 빌려서 쓰는 향찰(鄕札)로 표기되어 전한다. 〈서동요〉의 첫 구절 '善花公主主隱'은 '선화공주님은'으로 해독하는데, '님 주(主)'는 뜻을 빌린 것이고 '숨을 은(隱)'은 음을 빌린 것이다. 향가는 향찰로 표기된 고대시가이다.
진성여왕 때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이 편찬되었으나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14수, 《균여전》에 〈보현십원가〉 11수 총 25수가 전한다. 350여 년간 창작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했다.
향가의 해독(解讀)은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만 일찍이 양주동(梁柱東) 박사의 해독이 있은 후 문학적 연구 분야에서는 대체로 그의 해독본을 정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학자의 해독 노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향가는 모두 설화 속에 삽입되어 전한다. 그 설화를 '배경설화(背景說話)'라고 하는데, 각 작품의 어학적 해독 및 문학적 해석은 배경설화의 문맥 안에서 이해될 때 완성된다.
중앙선 희방사역—작은 카페
▶ 죽령에서 내려오는 산길의 막바지, 완강하고 거대한 중앙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지났다. 그리고 곧 희방사역에 도착했다. ‘희방사역’은 연화봉 아래의 고찰 희방사를 통하여 연화봉—소백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중앙선 역이지만 지금은 폐역이 되었다. 역사 건물의 한 칸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중앙선(中央線) 열차는 서울의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원주—영주—안동을 경유하여 부산까지 이어지는, 내륙지방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로인데, 2021년 청량리역—안동역 구간에 새로운 철로를 개설하여 KTX 운행이 개통하면서 구 철로는 열차가 운행되지 않는다. 희방사역도 자연스럽게 폐역이 되었는데, 남겨진 그 역사를 활용하여 ‘낭만의 작은 카페’를 연 것이다. 희방사역에서는 소백사 연화봉이 올려다 보이고, 이곳은 희방사, 희방폭포를 찾는 길목으로 소백산 둘레길의 한 쉼터가 되고 있다.
▶— 죽령의 고된 산길을 넘어온 우리 재현단 일행은 카페에 들어가 다리를 풀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어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단양—죽령—풍기 구간은 귀향길 여정 가운데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가장 힘든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이 구간에서 강구율 교수가 직접 답사하고 이 구간에 대해 글을 썼다. 국문학을 전공한 강구율 박사는 영주의 동양대 교수로, 특히 퇴계학 연구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2019년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부터 해마다 직접 활동하신 분이다. 단양—풍기 구간에서 퇴계 선생이 몸소 넘으신 죽령옛길을 복원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남원천(제방)을 따라 가는 길
죽령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죽령옛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연화봉 희방폭포에서 내려오는 물과 만나서 ‘남원천’을 이룬다. 남원천은 영주에서는 서천(西川)이 되어 봉화에서 내려오는 내성천(乃城川)에 합류하여 예천군 풍양면 삼강에서 낙동강(洛東江)에 유입된다. — 희방사역을 지난 재현단 일행은 남원천을 따라 계속 걸어 내려갔다.
▶ 희방사역을 출발한 재현단 일행은 남원천이 흐르는 길목, 느티나무 고목의 큰 그늘 아래에서 잠시 다리를 풀었다. 김병일 단장이 창락역에 관해 내력을 설명했다.
◎ 조선시대 풍기의 죽령 입구에 창락역(昌樂驛)이 있었다. 경상도 북부 각 지역의 10개 역을 거느리는 중요한 역참(驛站)이었다. 퇴계선생이 67세이던 1567년 3월 16일 한양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잠시 머물면서 시를 지었다. 〈十六日 抵昌樂驛(십육일 저창락역)〉(16일 창락역에 이르러)이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옛날 퇴계 선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향하며 창락역에 유숙할 때 남긴 시 한 수가 있다. ☞ 강구율 집필,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푸른역사, 2021) pp. 236~237
서늘한 새벽 즈음 창락역으로 향하니
죽령은 우뚝우뚝, 공관(公館)은 그윽하네.
땅 쓸고 향 태우니 병든 잠자리 외롭고
바람 막으며 우는 가을매미 많기도 하다.
옛날에는 탄식하였네, 두려운 길 정말 가기 어려웠노라고
지금은 한탄하네, 쓸모없는 재목 잘못 거두어짐을.
임금님 관대하게 어여삐 여겨 은혜 베풀어 허락하신다면
울긋불긋 단풍잎 가을 따라 고향으로 가겠네.
드디어 풍기에 들다
▶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한 재현단 일행은 남원천 제방의 길을 따라 걸었다. 제방 길 오른쪽은 남원천 냇물이요 왼쪽은 영주사과의 본산지인 풍기의 사과밭이 계속 이어졌다. 제방 길을 길고 멀었다. … 걷고 걸어서 제방 길은 풍기읍 지방도로에 진입했다. 풍기읍 천변의 도로, 가로수 벚꽃은 이미 한철을 보내고 분분한 꽃잎은 떨어지고 있었다. 읍내의 거리로 들어섰다. 풍기는 인삼의 고장이다. 인삼향기가 은은히 풍겨왔다. 풍기관아로 가는 길목 ‘풍기인삼시장’을 중심으로 인삼가게가 즐비했다.
풍기(豊基)
백두대간 소백산이 품은 십승지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었는데 고려 초에 기주(基州)로 바꾸었다가 1018년(현종 9) 길주[吉州, 지금의 안동(安東)]에 예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안동으로 예속시켰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기천(基川)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1451년(문종 1) 은풍현(殷豊縣)과 합쳐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시켰다. 1973년 풍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시ㆍ군 통합으로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영주시가 되었다.
현재 풍기는 경상북도 영주시 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높고 장엄하게 뻗어 있는 백두대간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500~1,000m의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읍의 남쪽을 제외한 삼면에는 원적봉(961m)—소백산(1,440m)—제2연화봉(1,357m)—죽령—도솔봉(1,314m)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죽령과 희방사의 서부 산곡에서 발원한 남원천이 읍의 남부를 가로지르며, 동부리에서 비로봉 산곡에서 발원한 금계천이 합류하는데, 이들 유역에 농경지와 시가지가 발달했다. 특산물로 예로부터 풍기인삼·사과 등이 유명하다. 성내리에는 인견을 생산하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유물·유적으로 소백산 비로사 경내에 석조아미타불 및 석조비로사나불좌상(보물 제996호)과 진공대사보법탑비, 영주 삼가동 석조당간지주, 희방사 동종 등이 있으며, 경승지로는 희방계곡이 있다. 중앙고속도로와 안동-단양을 잇는 5번 국도, 중앙선이 각각 죽령이 긴 터널을 통하여 험준한 백두대간을 통과한다. 행정구역은 법정리 기준 성내리·동부리·서부리·창락리·금계리·백리·교촌리·백신리·미곡리·삼가리·수철리·산법리·욱금리·전구리 등 14개리가 있다. 읍사무소 소재지는 풍기읍 남원로 80이다.
풍기군수 퇴계 이황
퇴계 이황 선생은 1548년 10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앞서 단양군수로 있다가, 형님인 온계 선생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상피(相避)하여 옮겨온 것이다. 상피는 친족 또는 관계가 있는 사람이 같은 곳에 벼슬하거나 재판, 시관(시험관) 등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온계가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오자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충청도 관내인 단양군수에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겨온 것이다. 두 고을은 높은 소백산을 경계로 하여 각각 북쪽과 남쪽에 자리한 고장이다. 20여 년 전 그 때에도 퇴계선생은 죽령을 넘어서 임지로 왔다.
퇴계가 풍기군수 시절인 1549년(명종 4년) 12월에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의 운영이 부실함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심통원(沈通源)에게 사액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관찰사가 이 청원을 예조에 올려 조정에서 논의한 결과 명종의 친필로 ‘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렸으며, 당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인 기재 신광한(申光漢)이 〈소수서원기〉를 지었다. 신광한은 신숙주의 손자이다. 그 글에서 이름 짓기를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紹修'(소수)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서적을 하사하면서 '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다.
이후 소수서원은 본격적이 인재양성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입원록(入院錄)만 봐도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가 무려 4,000명에 이를 정도니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의 인재 배출 요람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정작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사액(賜額)’을 받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서원 밖 죽계천 바위에 선생이 새긴 ‘白雲洞 敬’ 자는 그대로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백두대간의 정기가 서린 소백산 영귀봉(靈龜峰)아래 위치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주세붕은 ‘사묘(祠廟)을 세워서 덕 있는 분을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서 학문을 돈독히 한다.(立廟而尙德 立院而敦學)’는 취지였다. 평소 고려 말 안향(安珦)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安珦) 선생의 고향에 사묘(祠廟, 祠堂)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 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는 소수서원부터 시작되었다.
소수서원의 풍경과 구조
소수서원은 초입부터 다르다. 서원 경내에 소나무 수백 그루가 주변을 덮고 있다. 수령이 300~500년에 이르는 노거송이다. 그 자태 또한 근엄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진다. ‘소나무처럼 삶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 올곧은 선비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서원은 맑은 물이 흐르는 죽계 천변에 있다. 죽계 건너편에는 그림 같은 정자가 있다. 취한대(翠寒臺)이다. 퇴계 선생이 대(臺)를 세웠지만 세월이 흐르는 사이 허물어져 그 자리에 터를 닦아 정자를 세웠다.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옛시 ‘松翠寒溪’(송취한계)에서 ‘취’(翠) 자와 ‘한’(寒) 자를 따와 지었다고 전해온다.
서원 입구 오른편에 있는 정자 ‘景濂亭’(경렴정)이 수려하다. 1543년 주세붕이 건립했으며 우리나라 서원 정자 중에서는 가장 오래됐다. 중국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인 ‘염계(濂溪)’의 ‘렴’(濂) 자를 땄고, 높인다는 의미에서 ‘경’(景) 자를 취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 등이 있고, 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등이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明倫堂)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원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숙사인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각각 서원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도 기숙사 건물이다.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는 명륜당의 서북쪽 따로 쌓은 담장 안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의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 ‘회헌안향영정(晦軒安珦影幀)’, 보물 제485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 보물 14003호 ‘강학당(講學堂)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오늘의 종착지, 풍기관아(豊基官衙)터 은행나무
▶ 오후 6시 15분, 재현단 일행은 오늘의 도착 포인트인 풍기읍 성내리, 옛 풍기관아터인 풍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1908년 관아 자리에 학교가 세워진 후 지금까지 풍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관아터에는 수령 7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다. 1548년 선생은 군수로 부임하여 1년 남짓 이곳에서 재임하였다. 1569년 마지막 귀향길에서 이곳 풍기에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내처 영주까지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 귀향길 재현단이 영주까지 도보로 가기에는 일정상 무리가 되므로 이곳 풍기초등학교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인근의 풍기향교에도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은행나무가 있는 가장자리에 비석들이 즐비하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힘들고 마음 아프게 넘은 죽령옛길
오늘은 백두대간 죽령(竹嶺)을 넘었다. 서울 경복궁을 출발한지 11일째인 오늘 아주 큰 고개를 넘은 것이다. 22km를 걸었다. 지형상 죽령은 귀향길 노정 가운데 절정(絶頂)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아침 단성(면)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내렸다. 우의를 입고 죽령천을 따라 걸었다. 계곡 길의 머리 위에는 중앙고속도로 거대한 교각이 지나가고, 용부원1리에서부터 죽령천의 숨은 동천(洞天)으로 옛길이 이어졌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산길의 고도는 높아만 갔다.
다행히 중간에 비는 그쳤다. 산마을 주변 과수원에, 이제 겨우 봄의 새순이 피어나고 있었다. 용부원2리 ‘죽령옛마을’은 죽령의 가장 높은 산록에 위치한 마을이다. 거기 황폐하게 버려진 절터에 머리 없는 부처님이 홀로 서서, 천 년 전 역사를 전해 주고 있었다. 절터의 해설판은 죽령(竹嶺)이라는 이름의 연원을 짐작하게 하는 죽지랑(竹旨郞)의 이야기와 죽령과 관련된 당시의 시대배경까지 알려주었다. 죽지랑은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에 활약했던 화랑(花郞)이었다. 죽령을 넘어오니 죽지랑의 인품과 활약상이 소개되고 그를 사모하는 향가까지 들려주었다.
충정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죽령, 그 절정의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 차가운 바람이 엄습하여 극심한 오한으로 온몸이 전율했다. 다행히 주막에 들어가 따뜻한 산채비빔밤과 동동주 한 잔으로 가슴을 덥힐 수 있었다. 그리고 ‘죽령루’ 앞에서 퇴계 선생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강담회(講談會)를 가졌다. … 충청도관찰사 온계 선생과 풍기군수 퇴계 선생의 만남과 떠남의 사연을 상기하며, 두 형제분이 나눈 송별시를 강구율 교수가 분위기를 살려 창수했다. 20년 후, 퇴계선생은 마지막 귀향길에서 이미 불귀(不歸)의 객이 되신 형님을 생각하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 무엇보다 풍기(豊基)는 선생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을 통하여 필생의 업으로 여긴 교육 사업에 이정표를 세운 고장이다. 남한강 물길을 따라 중원을 지나고 높은 산을 넘었다. 이제 고향 예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부터 낙동강 수계의 물길이다. 아, 내일이면 선생의 인생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영주(榮州)에 들어가게 된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