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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난수(난하)설-김경선
박지원의 패수 요동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는 『연원직지』를 쓴 김경선(1788 정조 12년~1853 철종 2년)이다. 그는 패수를 국내로 고정시키는 연구경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면서 패수의 위치를 난수(灤水)로 추적하였다.
“아!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망녕되이 한사군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하였다. 사실에 억지로 끌어다가 합하여 구차하게 나누어 배치하고 나서 그리고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았다. 더러는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더러는 청천강을 패수라고 하고, 더러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였다. 이는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조선의 옛 강토를 축소하는 일이다. 이렇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고정시키고 패수는 앞뒤로 당겼다 물렸다 하여 항상 사적을 붙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을 유독 요동만 여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 현도·낙랑만 있고, 진번·임둔은 나타나 있지 않다. …(중략)…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가 확정된 후에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진 후에 고금의 사실이 맞아질 것이다. …(중략)…『요사』에 ‘발해 현덕부가 본래 조선 땅으로서 기자를 봉한 평양성인데, 요가 발해를 치고 동경이라 고치니, 곧 지금의 요양현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이 하나의 평양이 되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사람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고 하고, 평안·함경 두 도계 사이의 산을 가리켜 이것이 개마대산이라 한다. 요양을 평양이라 하는 사람은 헌우(蓒芋)난수(灤水)를 가리켜 패수라 하고, 개평현의 산을 가리켜 이것이 개마대산이라 한다. 비록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지금의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강토를 작게 만드는 의논일 뿐이다. …(중략)… 즉 평양은 본래부터 요동에 있었는데 더러 이름을 붙여 패수와 더불어 때로 앞뒤로 당겼다가 밀었다가 한 것뿐이다. 한의 낙랑군 치소가 요동에 있는 것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바로 요양의 평양이다.”
이처럼 김경선은 박지원의 주장을 보다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논증하여 평양(낙랑군, 왕험성)을 요양으로 보고서 패수를 난수 즉 난하라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 김경선의 연구는 패수 한사군 연구의 1차 사료인 『사기』·『한서』의 기록을 역사 논리적으로 충족시킨 대표적 조선시대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패수와 한사군 연구의 ‘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요수하(혼하)설-성해응
패수 요동설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해응(1760~1839)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기왕의 패수에 대한 여러 설을 섭렵하여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이제 살펴보니 『위략』에 연의 장수 진개가 조선의 서쪽 땅 사방 2천리를 취하여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안사고가 『한서』「지리지」에 번한은 패수(沛水)가 요새 밖에서 나와 서남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며, 또한 서남으로 낙랑현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들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살펴보니, 『위략』에 조선과 연의 경계는 격수(湨水)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저 『사기』『한서』『위략』과 안사고·응소·장수절의 설이 비록 틀린 것인데, 만번한은 즉 번한이다. 번한은 곧 진번이다. 진번에 패수가 있다. 혹 패수라고도 하고, 격수라도 하는 것은 밝혀졌다.
지금의 소요수는 일명 혼하(小遼水一名渾河)라고 하는데 한(漢)이 이를 패수라고 하였다. 수원은 장령에서 나와 영액변문으로 들어가 요양주(遼陽州)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흘러 태자하와 만나, 요주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장령은 즉 요새 밖으로 진번의 옛 경계이다. 요주 지경은 즉 낙랑군의 서쪽으로 요동계 안이다. 안사고는 주에 ‘섭하(涉何)가 요새로 달아나 들어갔다는 곳은 평주의 유림관’이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도리에 맞는 말이다. 곧 지금의 마자수 상류이다. 개원철령을 나와 요서에 이른다. 대개 옛날에 조선으로 통하는 길이 그러하다. 오늘날에 의주를 지나 연경으로 가는 길과 다르다. 또한 연과 진의 요새는 요동의 서쪽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요수를 경계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즉 한(漢)이 수리한 곳과 위만이 건넌 곳, 섭하가 임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하지만 패수의 위치를 요동으로 못 박은 성해응도 현도군을 옥저성 함흥부로, 임둔군을 강릉부로, 낙랑군을 평양부로 비정함으로써 역사 지리적 한계성을 드러냈다.
8) 대릉하설-리지린
대릉하설은 1960년대 이후 북한학계의 정설이다. 처음으로 대릉하설을 주장한 학자는 임건상과 리지린이다. 리지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하지』 56권(대릉하)조에는 “白狼水(백랑수) 즉 大凌河(대릉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로써 대릉하의 고명이 백랑수였음을 알 수 있다. 『수경주』의 대요수에 대한 주를 보면 력도원이 설명하고 있는 백랑수는 오늘의 대릉하와 일치한다. 그는 대릉하(백랑수)를 요하의 지류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대릉하를 패수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백랑수와 패수를 동일한 명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白(빠이)과 浿(파, 뻬이)는 음이 상통되며, 狼과 水(라, 혹은 la)도 음이 상통한다. 다시 말하자면, 백랑수는 패수를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패수와 관련하여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1963)에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사실도 논증했다. 남한에서도 문정창 선생이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를 통해, 그리고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이상을 통해 패수는 어느 한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학설이 많으면 많을수록 혼란도 가중된다, 이제 패수의 본래적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필자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정하를 중심으로 한 ‘3수’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곧 영정하, 역수, 대청하, 호타하, 당하 등을 중심으로 패수를 추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곳이 중국인들이 본 최초의 조선의 모습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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