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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까(요6:26-33)-2017.9.24
병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는 항상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아마 그때 예수님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15절).
그럴수록 예수님은 고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를 식혀줄 냉각기가 필요하셨다고 생각하셨는지 몰라도 예수님은 제자들도 내버려둔 채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15절). 우리는 참으로 고독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이 되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무리들이 다시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자기들이 직접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가버나움 건너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무척 반가운 어투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제한해 버린 미련한 질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의 정곡을 찔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도대체 썩는 양식은 무엇이고, 영생하는 양식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육신의 생명 안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영생하는 양식은 인자가 주는 양식이고, 그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라고 착한 설명까지 덧붙여주십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명 안에 있는 그 무리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무리들이 예수님께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말입니다(28절). 여러분은 그들이 질문하는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일하라는 말씀만 집중한 것입니다. 인자가 주시는 양식이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일하라는 말씀만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사고입니다. 율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들이 무엇인가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율법의 질문입니다.
(1) 율법적 사고에 갇힌 유대인의 무리들
무리들의 질문이 언뜻 들어보면 아주 착한 인상을 줍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도 은연중에 이런 기질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이들의 마음이 아주 착한 모범생들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믿음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면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빠집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공력을 쌓아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 잘못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가의 여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한 일은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는지의 여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과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믿음의 확신이 있는 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고후13:5). 우리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에 집착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에 집중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집착한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일’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온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을 물어 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표적을 통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교훈을 보지 못하고, 표적을 통해 보리떡과 물고기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7절).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마치 자신들의 수고나 공력으로 얻어지는 줄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으로 굳어진 유대인들의 생각이 대부분 그러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율법적 사고요, 기질입니다. 그들은 영생을 자기들이 율법을 잘 준수함으로 얻어진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율법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대가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만 듣고 자기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영생은 인간의 수고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율법에 갇힌 유대인들의 한계요, 말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의 무지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만 집착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만 집착합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전혀 모르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열심을 내다가 스스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 없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보다 원색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의 일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내안에 계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내안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안에 계셔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방법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주체가 되어서 말입니다. 28절의 말씀은 전형적으로 율법에 갇힌 사람들의 생각이요, 그들만의 질문입니다.
그것이 율법적인 사고라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율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더 집착을 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주도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방법을 찾습니다. 본문 28절은 이 세 가지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내안에 안계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29절).
(2)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도 일하십니다(요5:17).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시121:4). 그런데 하나님의 일의 최고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창조가 하나님의 일의 최고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냥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십니다. 통치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최고의 일로 여기십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다시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의 가장 우선되는 일로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가장 큰 일이고 우선되는 일입니다. 가장 시급하고 다급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일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40절).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4:12). 그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새 언약의 중보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십니다(38-3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29절). 물론 율법도 하나님의 일이고, 복음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요, 복음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율법은 내가 주체가 되어 지키고 행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이르는 일이요, 복음은 내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이르는 일입니다. 율법은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고, 복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일이요, 복음은 자기를 대신한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과 복음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인지 쉽게 분별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은 쉽고도 가볍습니다. 내안에서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내가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얼마나 무겁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마태복음11장28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서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율법은 마치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를 만들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직접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모시러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혹은 그리스도를 모시러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롬10:6-7). 한마디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질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믿어지십니까? 이 복음이 이해되고 믿어져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29절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사실 뭔가 좀 찜찜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뭔가 무거운 마음의 짐이 남아 있는 느낌은 없습니까? 아직까지 벗겨지지 않는 율법적인 기질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가장 먼저 율법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안에 누룩같이 퍼져있는 율법의 때를 벗겨야 합니다. 이른바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새 사람을 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가장 먼저 율법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뭔가 눈에 보이는 작품이 만들어지고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야 하는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주의 종들과 백성들이 오직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율법에 매인 사람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평가받으려고 하고 평가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눌리기도 합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주의 종들도 많고 주의 백성들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심령의 자유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 믿는 것이 노동이 되고 짐만 될 뿐입니다.
그런 자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깁니다. 물론 일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죄악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잘 믿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예수를 잘 믿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내 성전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해야 하며, 예수님의 마음 되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수천가지의 일보다 예수님이 결재하시고 인정하시는 한 가지의 일이 진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발상은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특하다고 무조건 지지를 받는다거나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고생하는 자기 엄마를 생각해서 시장을 봐서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을 거든다면 기특하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지지받고 칭찬받을 일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지지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반칙이고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위하여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일이 가장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요,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렘33:2).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지요(엡2:8).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제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것이요,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롬10:17).
그러므로 잘 듣는 것이 믿음을 위해 가장 큰 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내안에 있는 믿음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데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다만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롬14:23). 그렇다면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요,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는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일중에 어느 것이 우선일까요? 하나님의 일은 구원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구원받는 일이 먼저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하는 일이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본질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29절).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믿음이 좋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사고를 칩니다.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냥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교회직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포만감으로 충만합니다. 심지어 그것으로 자신들의 믿음의 수준을 평가하고 평가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믿음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아십니까?
마태복음7장21절 이하에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일할 때는 모두 아버지의 이름을 차용합니다. 정작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할 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만 도용하여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일하지 않았기에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과 상관없이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책망하십니다(마7:21-23). 한마디로 열심히 일하고서 책망을 받고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는 것은 가상하지만, 먼저 내가 주님 안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라야 주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질문은 분명히 어패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 인처럼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속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무서운 착각입니다. 제가 설교 때에 자주 사용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구원의 사각지대가 교회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를 가르치면 나름대로 호기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상당기간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를 가르치면 의외로 무덤덤하고 오히려 불쾌하게 반응하는 자들도 상당합니다. 자기들이 여태껏 신앙생활한 지가 얼마인데 그런 초보적인 문제를 다루냐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확신은 자신만의 확신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에 인격적으로 내주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확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기 확신에 불과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동안 어설프게 들어왔던 기독교의 교리와 지식과 정보들로 인해 자신들의 영혼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를 출석한다는 한 가지 조건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마치 부적을 붙이고 다니는 정도로 착각합니다. 한마디로 종교인에 불과한 것이지요. 물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는 성도라면 괜찮지만 단순하게 자신이 교회를 출석한다는 한가지 조건과 신앙의 경륜을 자기 구원의 증거로 믿고 있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되어지는 모든 일도 사실상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사단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에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주체에 따라 구분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구제는 주님의 마음이고 성경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하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만일 그 일을 흑암의 세력에 붙잡힌 영혼이 주도하여 추진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구제를 받는 사람의 영혼까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지요. 이런 유사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행하는 상당수의 일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재가 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되어지는 많은 일들을 사단이 마치 자기의 일인 것처럼 입맛에 맞는 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통해서 하는 일일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일들이 부지기수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보기에는 아무리 좋은 일처럼 보일지라도 사단이 주관하면 악한 일이요, 불법입니다. 하지만 우리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개입하시면 가장 선한 일이요, 합법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행하셨고, 이제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일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내가 주도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이 행하신 일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주님을 내 심령 성전의 주인으로, 왕으로, 머리로 모시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귀한 일이요, 그 일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 안에서 행하는 일체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고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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