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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마 13:44)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태백에서 사역하던 때, 강원랜드의 카지노 근처에 가 보면, 전당포가 많이 있었는데, 그 앞길에는 먼지로 뒤덮인 값비싼 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카지노에서 도박을 즐기기 위하여, 타고 왔던 고급차들을 전당 잡히고, 그 빌린 돈을 모두 다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찾아갈 수 없는 그런 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고급차들을 탈 수 있을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왜 카지노에서, 도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청주의 한 호텔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왜 사람들은 도박에 빠지는 것일까요?
고려 말, 최영 장군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견금여석(見金如石)”이란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견금여석”이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재물에 관한 지나친 욕심을 버려라.”라는 말입니다.
욥기 22:24절을 보면,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보화와 보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지나친 욕심을 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탐욕에 이르면, 절대 아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게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라고 말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있다가 없어질, 영원하지 않을 재물과 권력, 명예 등을 얻기 위하여, 지나친 욕심을 내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느 정도의 욕심이 있어야, 원하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욕심이 지나쳐 탐욕이 되면, 가진 것들마저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절제라는 것이 쉽지가 않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에 불이 붙으면, 그 스스로를 완전히 태우고 나서야 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대한 욕심과 탐욕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해놓으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거룩한 욕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선포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예수님의 공생애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것”(마 4:23)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말하고, 그 중에, 5장에 기록된 여덟 가지 복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그 팔복의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은 천국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이 땅에서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마무리가 되어집니다.
천국과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천국의 삶이어야 합니다.
찬송가 438장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 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바로 그곳이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천국이어야만 합니다.
지금껏 살아왔던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의 마지막 소망은 무엇일까요? 지옥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천국을 가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 그 옆에 있던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비록 죄를 지은 강도였다 할지라도,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주님의 나라, 낙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가리켜, 믿는 사람들은 “천국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비밀을 7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천국에 대한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천국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에 대하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볼 수 있습니다. 보고 있습니다. 들을 수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음으로, 천국의 보화를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하시면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마 13: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네,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을까요? 시편 72:2-3절을 보면,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유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쉬운 이야기로 풀어 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생 동안 귀하고 귀한 보화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보화를 발견하셨습니까? 언제쯤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발견한 보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언젠가, 속리산의 맥문동 솔밭이 사진 찍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하는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실려있는 사진을 보니,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 피어있는 보라색 꽃대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그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 맥문동 꽃은 많이 심어져 있었지만, 꽃이 피어 있지 않아, 원하는 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크게 실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후에, 사창 사거리에서 최병원을 지나, 가로수 길을 가는 동안, 도로 한복판에 있는 꽃밭을 보니, 온통 맥문동 꽃이 활짝 피어져 있었습니다. 전에 살던 아파트 화단에도 맥문동 꽃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왜 그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일까요? 왜 몰랐던 것일까요?
도로 한 가운데 심겨져 있어서, 아파트 화단에 심겨져 있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속리산까지 갔지만,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맥문동 꽃을 늘 다니는 도로 한복판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는 집 바로 앞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맥문동 꽃은 속리산 솔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벚꽃이 다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멀리 가서, 활짝 핀 벚꽃을 볼 수 있기도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거실 커튼을 열면, 바로 벚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3층인지라, 벚꽃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가 있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아름다운 벚꽃을 감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천국은 멀리 가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천국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벨기에의 작가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는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인 틸틸과 미틸 남매가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남매는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상의 나라, 행복의 정원, 미래의 나라, 추억의 나라 등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꿈을 깨고 보니, 파랑새는 바로 머리맡 새장 속에 있었습니다.
이 동화를 계기로, 파랑새는 행복을 상징하는 새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까이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동화입니다.
여러분의 파랑새는 어디에 있습니까?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가까이에 있기에, 귀하고 소중한 것을 귀하고 소중하다고 여기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행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 곳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에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바로 옆에 있는 행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날마다 반복되어지는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일 똑같이 되풀이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참된 행복이 있고, 주님이 함께 하시는 천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45: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화는 우리가 찾아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보화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볼 수 있을 때, 보아야 하고, 들을 수 있을 때, 들어야 합니다.
누릴 수 있을 때, 맘껏 누려야 합니다.
방탕한 살을 살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들어서 읽어라”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성경 말씀을 펴서 읽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가장 귀하고 소중한 보화를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44절 말씀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가 있었습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는 들판에서 낮잠을 자다가, “밭을 파라”라는 그런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지 전, 봄이 오기 전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꽁꽁 언 묵은 땅을 파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땅을 파다가,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 보화는 지금 그 땅의 소유자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밭에 엄청난 보화를 숨겨놓고, 그 밭을 남에게 빌려 줄 사람이 있을까요? 밭에 감추어져 있던 보화는 오래 전, 그, 밭을 소유했던 누군가가 그곳에 숨겨놓았던 것입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보화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 땅의 소유자가 그 보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파던 그 사람은 그 보화를 그대로 땅 속에 묻어 두고, 집에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이제 그 보화는 자기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땅을 파야 합니다. 땅을 파지 않으면,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잠언 2:4-5절을 보면,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모하고, 갈급해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7-8절을 보면,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받게 될 것이요, 찾게 될 것이요,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조건없이 주고 싶다고 할지라도, 가만히 있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열심을 다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밭을 빌려 가지고, 그것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해서, 저절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밭이든, 내 밭이든, 가장 기본적으로는 땅을 파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땅을 파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싹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잡초를 뽑기도 하고, 물을 주기도 해야 합니다.
주말 농장 비슷하게 할 때, 겨울 동안, 딱딱하게 굳어버린 땅을 뒤집어 엎을 때, 그리고, 그 모든 밭의 땅을 다 뒤집어 엎으면, 뭔가 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땅만 뒤집어 엎은 것인데, 다 한 것처럼 행복합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땅에 씨앗을 뿌리고,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바로 이 맛에 농사를 지는구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직 싹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단계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과정 하나 하나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밭에서 돈다발이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땅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물을 주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화여, 감추인 보화를 캐내는 그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포기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그 밭을 사야 합니다.
밭을 사려고 하면, “한 달에 얼마, 일 년에 얼마”, 그렇게 남의 밭을 빌리는 것보다는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그가 가진 것들 중에는 지금껏 소중하게 여겨온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애지중지 아껴온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팔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보화가 있는 밭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면, 지금껏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시해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달라고 해도, 전혀 내어주지 않았던 것도,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아무 미련없이 “저것 달라고 했지, 너 가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보화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후 4: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보배가 되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6-7)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보배로운 모퉁잇돌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보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보배입니다. 보배이신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바로 천국입니다. 보배이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의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때로는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는 것들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투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천국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포기와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포기와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보배이신 주님과 항상 함께 함으로 천국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배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소유하고,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