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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님수세주일)
물 속에 잠김, 물 위로 올라옴
사42:1~9; 행10:34~43; 마태3:13~17
우리는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인성에 감싸여(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구유에 누워있는 성탄절을 지나, 마침내 지난 금요일인 1월 6일 주현절을 맞았습니다. 주현절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고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축하하는 교회절기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빛은 요한복음이 말한 대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는,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의 비참하고 어두운 현실 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탄절에 비해 주현절은 비중 없이 지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기독교 역사에서 주현절은 성탄절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고 더 뜻깊은 절기였습니다.
우리는 주현절이 되면 3가지 장면을 기억합니다. 이 세 가지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신 안에서 육신을 통해 당신의 신적 본질(신성)을 나타내 보인(에피파니) 장면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동방박사 이야기가 전해주는 대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별을 따라오다가 마침내 아기를 발견하고 아기의 신성을 분명히 알아본 장면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알아본 장면입니다.(그래서 우리 개혁교회 교회력에서는 매년 주현절 첫째 주일을 “주님수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요한복음이 전하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의 신성을 알아본 장면입니다.
우리가 주현시기에 그리스도가 신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묵상하고 경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는 우리가 성탄과 주현을 경축하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그분의 신성을 지각하고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빛이 어둠을 비추고 있고,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신비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을 지각하고 깨닫는 중에, 또한 그 빛으로 인도함을 받는 중에, 우리도 하나님처럼 되라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이 어렵지요? 어쩌면 불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에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때 뱀은 여자에게 말하기를,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매우 불경스럽고 교만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 타락 이야기에서 뱀이 유혹하면서 했던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과 우리가 주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중에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 가령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같이 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말대로,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입니다. 완전히 반대의 의미지요.
뱀이 유혹했던,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을 무한정 만족시킴으로써 행복해질 것이라는 소위 “행복프로그램”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 내 욕구를 내 마음대로 내 원하는 대로 충족함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자기중심의 “행복프로그램”은 소위 안전, 인정, 힘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누림으로써 내가 마치 신이 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려는 뱀의 유혹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에서 뱀이 말한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초월심리학자 켄 윌버는 이런 프로그램을 “아트만 프로젝트”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진정한 아트만 즉 참자기를 찾아가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전능감을 누려보려는, 혹은 아트만 즉 신이 되려는 프로젝트에 말려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같이 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라고 할 때,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우리 안의 선성, 고결함, 순결함을 알아보고 성장시켜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깊게 인식하는 것입니다.(이것이 신성을 발견하는 요체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분 안에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 그리고 팔복의 은총을 깊게 누리는 경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참 사람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모델이고 대표이시지요.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보고 따라가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멀리서 별을 보고 따라와서 구유에 누이신 아기 안에서 진정한 신성을 알아보고 경배했습니다. 이는 아기예수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실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길이지요.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했다”(마2:10)고 했습니다.(헬라어에서는, 이 구절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엑사레산 카란 메갈렌 스포드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여러분, 이 과정과 이 경로, 이 길이 우리의 길입니다. 우리는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정말 큰 기쁨이 있다는 거지요. 우리를 인도하는 빛은 무엇입니까? 보일 듯 말 듯한 그 빛을 따라 인도함을 받으려면 어떤 태도와 자세가 요구되겠습니까? 주현시기에 그리고 새해 벽두에, 우리가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올해는 빛을 받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결심하고, “주님, 올해는 빛의 인도를 받게 하소서”, 기도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정말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의 신성,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우리에게 엄청난 수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지난 성탄주일에 말했던 것처럼), 어둡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마구간 같다고 느껴집니다. 또 지긋지긋하게 지루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우리의 삶이지요. 우리는 자주 우리의 비참함을 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뭔가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돌고 있는 “행복프로그램”이지요. 눈앞에 보이는 현란한 것, 애착거리들을 찾아서 이리저리 우리의 “비천함”을 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함을 아십니다. 우리 마음속 마구간을 아십니다. 우리의 지루한 삶을 아시지요. 그것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보내주신 것 아닙니까? “너희들의 구원은 너희들의 행복프로그램에 있지 않고, 너희들의 아트만 프로젝트에 있지 않다! 너희들의 구원은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성이 사륵스(육, 썩어질 살덩이) 안에서, 아기예수가 누인 마구간 안에서, 아주 평범한 목자들에게서, 그리고 비천함 안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의 신성도 바로 우리의 가장 비천하고 평범한 일상, 우리의 마구간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우리 안의 신성을 발견한다는 말은, 우리의 평범하고 혹은 비천한 현실 속에서, 기죽지 않고, 좌절만 하지 않고, 거기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빛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주님의 빛을 받기 위해 잠시 잠시 마음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칠 듯한 욕망의 질주를 하다가도 잠시 손을 놓고 고요 속에 머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주님의 현존과 활동을 기다리는 것! 분노와 온갖 마음의 동요로 출렁거리다 제정신이 들어, 잠시 손을 멈추고 이런 출렁거림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 것을 예상하면서, 고요 속에서 내 안에서 나를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상상하는 것!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되다가도 제정신이 들어 자신의 비천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고, 자신을 스스로 내리치지 않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
예,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손을 멈추고” “제정신이 드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빛을 받도록 평소에 기도해야 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달라붙어 있던 것들로부터 조금씩 분리되는 경험, 내가 동일시하던 것들로부터 조금씩 떨어지는 경험들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 연습은 결정적으로 우리가 죽을 때 하는 일인데, 평소에 조금씩 연습하지 않으면, 우리의 남은 시간들은 많은 시간낭비로 채워질 것입니다. 어떤 궂은일을 만날 때, “지금은 이런 경험을 하는 순간인가 보다, 오늘은 뭐가 안되는 날인가 보다, 이런 날도 있겠지, 그 사람도 그럴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이렇게 안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야!” 이런 여유를 가지고 현실 속에서 주님의 은총을 빛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일이고, 우리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제가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3주 전에 어머니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지켜보았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한 것처럼, 어머니의 육신은 한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쩌면 매우 허망한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의 시신이 화구로 들어가 한 줌의 재로 나오는데, 역설적으로 뭔지 모를 삶의 숭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 우리는 흙이지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 “이제 어머니가 큰 짐을 내려놓고 먼지처럼 가벼워졌구나, 저 장면을 잘 기억하자.” 생각했습니다. 한줌 흙으로 겸손하게 돌아가는 우리 인생이 이 세상을 영원히 살 것처럼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라틴어에서 흙과 겸손이 같은 어원인 거 아시지요. humus/ humilitas)
키팅 신부님이 이런 말도 하지요? “영적인 삶이란 우리가 죽을 때 해야 할 일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하는 일이 뭐겠어요? 손 내려놓고, 모든 것 멈추고,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오늘 주현절 첫째 주일은 “주님수세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신 날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입니다. 이것도 주현의 빛을 드러낸 한 장면입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물에 잠기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분 위로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여기서 헬라어 “유도케오”를 번역한 “좋아한다”는 말의 본디 의미는 “선택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기뻐한다, 마음에 든다, 좋아한다” 등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갔다 물 위로 나오는 의식입니다.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죄와 한계, 약함과 비천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죄와 약함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우리 육신의 원시적, 원형적인 모습도 발견합니다. 그것은 모태 안에 있는 벌거숭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시작이고,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벌거숭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기 위해서 물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죄와 약함을 자신의 것으로 떠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죄악을 스스로 담당시면서 요단강에 잠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사야에 나오는 “나의 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의 이미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입니다.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로 하면, 케노시스(비움)입니다. 본디 하나님의 모습이었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물속에 잠김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물에서 올라오셨습니다. 이것은 승귀하는 것이고 영광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에 나오는 “나의 영”이고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이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로 하면, “지극히 높이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는 것”이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올라오심입니다.
이 물속에 잠김과 물에서 올라옴 가운데 하늘의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육을 가졌지만, 신성한 아들임을 확인받은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인성 안에 있던 모든 신성이 살아났습니다. 즉, 온전한 십자가와 부활을 보여 주심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참사람이며 참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좀 추상적인 상징이나 교리적인 상징처럼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상징은 우리 삶을 가장 깊이 들여다 본 이야기입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우리가 경험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음은 우리의 세례 받음의 모범이요 지표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고 우리의 세례는 그와는 한참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할 경험의 절정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세례의 상징으로 물속에 들어가 잠기는 것은 일종의 작은 죽음입니다. 이것은, 뱀이 말한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의 전능감을 위해서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소위 말해서 동일시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내고 비동일시하는 일입니다. 나의 신념과 생각이 나고, 나의 감정이 나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물위로 올라오는 부활과 영광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기, 지식과 경외 그리고 믿음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실 때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이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를 변형으로 안내하는 씨앗들입니다. 이 안내를 받아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고 팔복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신성이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반복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너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네가 가진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준 존재 자체에서 나온 것이다! 안심해라! 두려워말라!”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런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올 일 년, 진정 주님의 빛을 받읍시다! 주님의 세례가 우리의 세례가 되게 합시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생겼다 사라지는 생각의 폭풍우 속에서 잠시 틈을 주어 주님의 빛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톱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떠받치고 여러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소유한 것으로 여러분 스스로 만든 전능감이 아니라, 여러분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감정들로부터 좀 쉬십시오.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상념들, 생각들, 염려들, 계획들로부터 조금만 거리를 두십시오. 고요에 머무십시오. 숨을 한번 돌리십시오. 주님께 맡기십시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쓸데없는 기억에서 벗어나, 진정 기억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신성을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새겨 놓으신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라는 말씀이 조금씩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의 활동을 알아보고 성령의 열매와 팔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고, 폭풍 속에서도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