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3
유자미(柳自湄) 묘표(墓表) - 이재(李縡)
국조(國朝)의 절의(節義)로는 오직 장릉(莊陵, 단종) 때에 융성하였다. 세상에서 말하는 바 여섯 선생은 진정 환히 일월과 같이 그 빛을 다투고, 그 나머지 산림에 종적을 감춘 이 또한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간혹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드러난 이도 있다. 나는 여기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였으니 감찰(監察) 유자미(柳自湄)공이다.
그 가승(家乘)에 이르기를, “공은 경태(景泰) 신미년(辛未年, 1451, 문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5년만인 을해년(乙亥年, 1455, 세조 즉위년)에 선위(禪位)가 있었을 때 곧장 불문(佛門)으로 달려가 그 몸을 마치었다. 공의 아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유지(柳輊)가 공을 따르려 하니 공은 불가하다고 억지로 벼슬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근친(覲親)을 청할 때마다 곧 이르기를 ‘신의 아비는 마음의 병이 있어 산수간(山水間)에 방랑하고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 수양(首陽)의 신광사(神光寺)에 있다가 나중에 서산(西山)으로 옮겼는데 유언하기를 ‘장사를 치르되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말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나는 임금을 위해 죽지 못하였으니 선인(先人)의 곁에 장사지내지 말고, 묘도(墓道)에 너희들의 추은 관직(推恩官職)을 쓰지 말라.’ 하였다.”고 하였다.
졸(卒)하자 여러 아들들이 감히 이를 어기지 못하였다. 해주(海州)에 사는 종이 지금도 종손집에 개암ㆍ밤ㆍ서속ㆍ쌀ㆍ해채(海菜)ㆍ키ㆍ비 등의 공물(貢物)이 있으니 대체로 이는 공이 수양에 있을 때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공은 문화(文化) 사람이다. 정승(政丞) 유만수(柳曼殊), 상의중추(商議中樞) 유원지(柳原之), 현령(縣令) 유함(柳浛)은 공의 3세(世)이고, 사성(司成) 유성원(柳誠源)은 곧 공의 12제(弟)이다. 공의 아들 7인에 유윤(柳輪)은 현령(縣令)이고, 유지(柳輊)는 찬성(贊成)이며, 유진(柳軫)과 유헌(柳軒)은 대사헌(大司憲)이고, 유원(柳轅)은 현감(縣監)이며, 유보(柳輔)는 직장(直長)이고, 유집(柳輯)은 정랑(正郞)이며 유집의 아내는 성삼문(成三問)의 손녀이다.
공의 묘는 양주(楊州)의 한동(漢洞)에 있다. 오래되어 그곳을 알 수 없었는데 숙종(肅宗)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후손 유세정(柳世鼎)이 조각난 돌을 묘 앞에서 발견하였는데 쓰여 있기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유자미(柳自湄)라고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자손들에게 알려 선후해서 찾아가 참배하도록 하고 봉분을 다시 쌓았다. 유관(柳祼)과 유세현(柳世顯) 및 유세정(柳世鼎)은 모두 유지(柳輊)의 후손이고, 유진방(柳震芳)은 유헌(柳軒)의 후손이며, 유배형(柳培亨)은 유원(柳轅)의 후손이다. 이로부터 묘에는 주인이 있게 되었고 유관의 아들 유세무(柳世茂)가 또 비석을 세워 그 일을 표(表)하기 위하여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가만히 공의 대절(大節)을 추적해보면 실은 청한옹(淸寒翁, 김시습(金時習))과 같은 부류이다. 청한옹은 드러났으나 공의 경우는 숨겨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동협(東峽, 경기 동부와 강원도를 일컬음)에 우거(寓居)한 바 있었는데 그곳에는 청한옹의 옛 자취가 많아 나무하고 짐승 기르는 아이들까지도 그 명성을 알아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였으나 고사리를 채취하던 곳을 모르니 역시 이와 같은가보다.
내가 서산(西山)에 올라 공의 사적(事蹟)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안개 짙고 풀은 무성하여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의 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이는 공의 대절이 끝내 묻혀질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더디고 빠름이 때가 있어 그런 것이겠는가?
율곡 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이 지은 청한옹전(淸寒翁傳)에 그 명성과 교화를 포기한 점을 병통으로 여겼으나, 그 절의(節義)를 논함에 있어서는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더라도 역시 가깝다 하였으니 공도 일시에 드러나게 되었더라면 곧 함께 전(傳)을 지었을 것이다.
어찌 고쳐 평할 수 있었겠는가? 우선 이와 같이 기록하고 뒤의 상론자(尙論者, 옛사람의 일을 평론하는 사람)를 기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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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朝人物考四十三 / 莊光禪代時立節人
유자미柳自湄 墓表[李縡]
國朝節義, 惟莊陵爲盛。 世所稱六先生者, 固焯然與日月爭光矣, 其餘晦跡山林者, 又不其幾, 而乃或歷數百年始顯。 余得一人焉, 曰監察柳公自湄。 其家乘云: 公景泰辛未文科。 越五載乙亥, 爲禪受之際, 公卽走入空門, 以歿其身。 公子集賢校理輊欲從公, 公不可, 强之仕。 每請覲, 輒曰“臣父得心疾, 放浪山水間”云。 始寓首陽之神光, 晩移西山。 遺戒治喪勿用浮屠法, 且曰: “吾不能死於君, 毋葬先人側, 墓道毋書汝曹推恩官職。” 及卒, 諸子不敢違。 臧獲之在海州者, 歸于宗子家, 至今有榛、栗、粟、米、海菜、箕、帚之貢, 蓋自公在首陽始。
公文化人。 政丞曼殊、商議中樞原之、縣令浛爲公三世, 司成誠源寔公十二弟。 公子七人: 輪, 縣令; 輊, 贊成: 軫、軒, 大司憲: 轅, 縣監: 輔, 直長: 輯, 正郞。 輯之婦, 成先生三問之孫也。
公墓在楊州之漢洞, 久而失其處。 肅宗辛酉, 後孫世鼎得片石於墓前, 書曰“司憲監察柳自湄”, 宛然可讀。 遂走相告, 子孫後先來謁而封築之。 曰祼、曰世顯與世鼎, 皆輊之後: 曰震芳, 軒之後: 曰培亨, 轅之後。 自是墓有主, 祼之子世茂, 又樹碣以表其事, 屬余文。
竊跡公大節, 實與淸寒翁一流耳。 淸寒顯, 公則晦, 此曷故焉? 余嘗寓東峽, 其地多淸寒故棲, 樵童、牧豎能識其名, 躑躅不能去, 不知採薇遺墟, 亦有是也否? 余登西山, 欲訪公事蹟, 而煙雲草莽, 杳然不可識矣。 然公之墓旣失而復顯, 則是公大節終不可得而晦也, 豈遲速有時而然與? 栗谷先生傳淸寒翁, 雖病其抛棄名敎, 而至論其節義, 則曰: “雖謂之百世之師, 亦近之。” 使公顯於一時, 卽當同傳, 豈容改評? 姑記此以俟後之尙論者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