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설화
박 규 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약력*
- 1960년 서울 출생.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 동국대학교 대학원(불교선학) 박사.
- 1995년 《민족예술》로 작품활동 시작.
- 시집으로 『이 환장할 봄날에』(2004)가 있음.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 시 감상
산중 깊은 암자일수록 속세와의 연이 더욱 질기게 이어져 있다.
역설이다.
세간에서 받은 상처가 깊을수록 더 깊은 산중으로 찾아들지만,
암자로 이어진 아주 작은 오솔길은 제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의 길’이다.
산중 암자의 한 일화를 그대로 옮겼을 것만 같은
이 시는 매우 산문적이면서도
절묘하게 시적 울림을 증폭시킨다.
시를 읽노라면 비에 젖은 치자꽃 향기가
온몸에 척척 달라붙는 느낌이다.
종교적 엄숙주의 혹은 그 가식에 질릴 대로 질린 이들이라면
이 시에 감동받지 않을 이 몇이겠는가.
시 속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도 비로소 스님답고,
실연에 겨워 ‘돌계단 및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는 여인도 비로소 사랑을 아는 여인다우며,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화자인 시인도 절집에 살만한 보살답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시는 ‘설화’가 아니라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한편의 영화다.
아니, 허구의 영화가 아니라 감동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그렇다.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니
이 시를 되새기며
우리 함부로 사랑의 이름으로 사기치지 말자.
- 시인/이원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