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5월 31일 주일예배 설교
사도행전 2:1-13
차별을 넘어, 온 이웃의 언어로 다가오시는 성령
지난 주는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성령강림의 계절은 교회력 상 가장 긴 절기로, 대림절 전까지입니다. 대림절이 교회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첫 절기이니, 앞으로 교회력 끝까지 성령의 계절인 셈입니다. 무려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요.
이것은 성서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절묘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시고 올라가신 후 제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와 직접 동행하며 살아가던 삶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비록 이제 예수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며 삶의 자리에서 계속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 예수와 그 정신을 알게 하시는 성령으로요.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속한 장로교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을 조심스러워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주의 성령 운동’, 이른바 ‘은사 운동’의 부작용 때문입니다. 그중에는 ‘방언’이 있습니다. 방언을 특별한 사람만이 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 이 땅의 언어와는 다른 천상의 언어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방언하는 사람들을 그 천상의 언어로 하나님과 직접, 그리고 훨씬 더 깊이 소통하는 사람들로 공공연히 여겼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계급주의, 신앙 엘리트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를 믿는 것과 별개로 ‘성령 세례’를 따로 받아야 하며, 그 증거는 반드시 ‘방언(초자연적 언어)’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방언을 받은 사람은 ‘영적으로 우월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받지 못한 사람은 ‘아직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나누면서 영적 계급이 생겨나고 그 풍토가 퍼졌습니다. 이것을 경계하다 보니 성령 자체에 대한 언급마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행전이 증언하는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 모두 성령으로 채워졌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와서 거주하던(κατοικέω)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것을 듣고는 놀랍니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각자 태어난 곳의 우리들의 언어로 듣고 있는가? 파르티아 사람들과 메디아 사람들과 엘람 사람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카파도키아, 폰토스와 아시아, 프리기아와 팜필리아, 이집트와 키레네 근처 리비아 여러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 그리고 여기에 체류하는 로마 사람들 곧 유대인들과 개종자들, 크레타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인 우리들이, 그들이 우리의 언어들로 하나님의 큰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본문의 ‘방언’(ἑτέραις γλώσσαις)은 직역하면 ‘다른 혀들’, ‘다른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 지방 말(τῇ ἰδίᾳ διαλέκτῳ)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기서 쓰인 헬라어 디알렉토스(διάλεκτος)는 특정 민족이나 지역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각 사람의 고향 말이었습니다. 방언, 사투리를 뜻하는 영어 dialect가 여기서 유래됐고, 독일어 역시 Dialekt입니다. 우리말 방언(方言) 역시 말 그대로 ‘특정 지방의 말’이고요.
즉, 본문이 말하는 “방언”이란 다른 지방의 말, 곧 외국어인데요. 그 의미와 내용은 “소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누가에 따르면 성령이 임재하셨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이웃과의 소통이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언어가 아니라, 듣는 사람 각각이 태어나고 자란 곳의 언어로 하는 소통이었습니다. 그 의미와 내용 역시, 내 중심의 내 언어가 아니라 이웃이 알아듣기 쉽고 편한 이웃 중심의 언어로 대화하는 소통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아닙니다. 유대의 변방인 갈릴리 사람들로, 예루살렘의 정통 교육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고급 히브리어 대신 투박하고 억센 갈릴리 사투리가 섞인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은근히 무시당하던 무학자들입니다. 무식하다고 조롱받던 그 촌부들이, 평생 배운 적도 없을 자신들의 고향 언어로 유창하게 말하니 기이한 것이 당연합니다.
훈민정음이 생각납니다. 1446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면서 그 까닭을 서문에 남겼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여겨...”
당시 공식적인 글은 한문이었고, 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양반 사대부 같은 소수의 지배층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고 싶지만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종은 그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소리에 맞는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자 발명이 아닙니다. ‘통치자와 학자의 언어’가 아닌 ‘백성의 언어’로 말하기로 한 위대하고 아름다운 결단이었습니다. ‘백성(百姓)’,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언어로요. 그러한 방향 전환의 결과물이 한글이며 우리는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하신 일이 바로 이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국의 공용어는 헬라어와 라틴어였습니다. 만약 오순절 사건이 제국의 언어로만 진행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달리하셨습니다.
9-11절에 지명들이 많이 언급됩니다. 동쪽으로는 파르티아, 메디아, 엘람, 메소포타미아. 북쪽으로는 아시아, 프리기아, 갑바도기아, 폰토스. 남쪽으로는 이집트, 리비아, 아라비아. 서쪽으로는 크레타와 로마까지. 당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온 세계를 아우르는 지명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지 않은 비주류의 언어는 없었습니다. 소외된 곳, 소외된 사람의 말로도 임재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변두리에 있는 사람의 언어라도 소통되지 않는 일은 없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와 헬라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래 모든 민족들과 함께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로마 제국은 정복한 땅에 라틴어를 이식했습니다. 제국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시민권도, 법의 보호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방식은 그 반대였습니다. 성령은 온 이웃의 언어로 다가와 임재하셔서 온 이웃과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파르티아가 눈에 들어옵니다. 파르티아는 이 당시 로마 제국의 적국이었습니다. 두 제국은 오랫동안 유프라테스 강 너머를 두고 전쟁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파르티아 사람들의 언어로도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또한 그 파르티아 제국의 속주인 메디아와 속국인 엘람 사람들의 언어로도 임재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민족의 언어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만큼 성령의 소통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출신을 따지지도, 차별하지도 않으십니다. 성령은 뿌리 깊은 원한을 가진 적대국의 언어로도 임재하여 생명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차별의 벽을 뛰어넘는 위대한 임재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듯, 당시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동포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분열이 심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본토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에 젖어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2등 국민’ 취급하며 은근히 멸시했습니다. 같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안에서도 헬라 철학에 능통하고 부유한 자들과 뒷골목의 빈민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동방의 파르티아에서 온 이들과 서방의 로마에서 온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더 순수하다며 문화적 우월감을 다투었습니다. 겹겹이 쌓인 차별과 혐오의 벽, 계급과 서열로 갈라진 마음들, 그것이 바로 그날 모인 군중들의 숨겨진 실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가장 무식하다고 조롱받던 갈릴리 촌부들 위에 임재하셔서, 본토인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나, 엘리트나 빈민이나, 날 때부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나 차별 없이 똑같이 ‘자신들의 고향 사투리’로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낯선 자들의 입에서 쏟아진 가장 친숙한 이웃의 언어. 이것이 차별의 벽을 뚫고 찾아오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령께서 먼저 낯선 이들의 언어로도, 심지어는 철천지원수들의 언어 한가운데로도 임재하셔서 말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본문을 창세기 11장 바벨 사건의 역전으로 읽는 학자들이 상당합니다. 물론, 본문이 창세기 11장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러워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행전, 나아가 신약 전체에서 증언되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서로 하나 되게 하고 한 몸으로 지어져 가게 하고 서로 교통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일관된 역사라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따라서 그 흐름 안에서 이 오순절 사건을 바벨의 역전으로 읽는 것은 독자로서 충분히 가능하며 개연성 있는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바벨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로 한 일은 자기 자신들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자,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창 11:4) 전형적인 자기중심의 언어입니다. 그 결과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들은 흩어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하신 일은 단순히 다시 하나의 언어로 통합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또 다른 언어 패권이 생겼을 것입니다. 성령은 다양한 언어들 안에서, 각 사람의 일상적인 언어로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자기중심의 언어가 이웃 중심의 언어로, 단절이 소통으로, 흩어짐이 모임으로, 예수의 삶과 그 정신으로 소통하며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통의 내용에 대해 11절이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τὰ μεγαλεῖα τοῦ θεοῦ)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큰 일들이란, 14절 이하에서 베드로의 입으로 풀어내듯, 나사렛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그 예수의 삶, 십자가의 길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그 의미와 내용, 곧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 정의와 공의, 진리와 자비입니다. 성령이 각 사람의 언어로 말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소통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들고 있습니다. 형식은 이웃의 언어로 말하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들을 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의 언어로 말하는 것, 그러려고 애쓰고 간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 정의와 공의, 진리와 자비를 담아내는 하나님의 큰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통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통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소통입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령이 임재하실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치 불과 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났고, 그들 각 사람 위에 하나씩 내려앉았다.”(3절)
이 “내려앉았다(ἐκάθισεν)”는 표현이 바로 깊은 ‘임재’를 뜻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사도행전 1장의 그 공동체, 120명의 다양한 무리입니다. 열두 사도만이 아닙니다. 남자들만이 아닙니다. 기존 이너서클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어머니, 형제들, 함께 다니며 섬겼던 이름 없는 여인들에게도 모두 임재하셨습니다. 성령은 소수 리더들에게만 임하신 뒤 나머지를 구경꾼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모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려앉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이것을 요엘의 예언 성취로 이해합니다.(행 2:16-21)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때에 나는 남종과 여종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겠다.”(욜 2:28-29)
남자도 여자도, 연장자도 연소자도, 종에게도, 이너서클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변두리나 바깥의 사람들 모두에게 성령은 차별 없이 임재하셨습니다. 달리 말해, 성령의 계급화가 아니라 성령의 민주화입니다. 신앙의 서열화가 아니라 신앙의 평등화입니다. 물론 그 안에 질서와 역할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임재하셨습니다.
한편, 본문은 이 성령의 임재를 지나치게 개별적으로만 보는 위험성도 보완합니다. 2절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로부터 마치 맹렬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같은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을 가득 채웠다.”
성령께서는 그곳에 모인 120명의 공동체 전체를 품으시고 그 안에 가득 채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것이 분명해집니다. 성령을 계급화하는 것, 성령을 빌미로 신앙의 서열을 만드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받은 사람이 받지 못한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성령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개인 안에서도 역사하시지만, 공동체 전체를 품으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개인 간에도 소통하게 하시지만,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도 소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역사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성령이 그들에게 선포할 것을 계속 주시는 대로”(4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개인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 모두가 온 이웃과 소통하는 역사입니다.
‘주셨다’(ἐδίδου, δίδωμι의 미완료)는 헬라어 표현은 과거에 단 한 번 주신 것이 아니라,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순간마다 ‘계속해서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셜 B. 로젠버그는 〈비폭력 대화〉에서 인류의 많은 단절이 내 중심의 언어에서 온다고 지적합니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먼저 듣지 않고 내 생각과 내 틀로만 말하는 것을 ‘폭력적 언어’라고 부릅니다.
비폭력 대화란 바로 이러한 소통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일방적인 소통에서 완전히 돌이켜, 타인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에서 상대가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내 언어에서 이웃의 언어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내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곳에서 상대의 언어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 방향 전환입니다. “성령이 계속 주심을 따라” 말하고 대화하는 소통으로의 위대한 전환입니다. 성별과 세대와 신분, 나아가 민족과 인종, 종파와 사상의 차이, 심지어 종교를 초월하여 그 사람과 공동체를 예수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의 삶을 바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곧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 정의와 자비를 담아내는 언어로, 차별 없이 모두와 서로 대화하며 소통하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참된 성령의 임재이자 역사입니다.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온 인류와 피조세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큰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성령의 계절’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긴 계절 동안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거대한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각자의 능력과 스펙을 증명해야만 살아남는 비정한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기방어와 이기심이라는 제국의 언어에 갇혀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 사이에서도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오해하고, 상처받고, 끝내 흩어지는 단절의 비극을 매일 마주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내 뜻대로 능히 펴고자 하는 소통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억압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령은 이 완고한 바벨의 세계를 역전하십니다. 참된 성령 충만은 나 홀로 신비한 체험을 하고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 짓는 영적 엘리트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령 충만은 차별을 넘어 모든 이웃의 언어로 임재하시는 그 성령의 정신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내 언어가 차별 없이 온 이웃의 언어로 사용되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온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고 화려한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온 이웃이 가장 알아듣기 쉽고 위로받을 수 있는 ‘따뜻한 삶의 사투리’로 예수의 삶과 그 사랑의 정신을 번역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공동체가 잘나고 특별한 사람들만 모인 서열화된 집단이 아니라,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민족과 국가의 차별을 뛰어넘어 각 사람과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소통을 풍성히 나누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을 힘입어, 팍팍하고 메마른 우리의 일상에 참된 소통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이 계속 주심을 따라, 하늘의 뜻을 차별 없이 모든 이웃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사랑과 평화의 은혜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