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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 치는 여자
신 경 숙
그녀는 의자 위에서 몸을 약간 기울어지게 해본다.
처음엔 그녀 혼자 창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빗소리와 함께 차차 그가 느껴졌다. 아니다. 그렇게 늦게는 아니다. 그녀는 새벽녘이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었다. 그 잠을 아침까지 잇지 못하고 동이 트기도 전에 다시 눈이 떠졌을 때, 그때도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그녀를 그윽이 내려다보았다. 이제 일어났니? 그는 가만 웃는 것도 같았다. 마치 그녀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그 환영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고, 그래서 그는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사라진 게 아니라 그가 먼저 창가의 의자로 가 앉아 있었을까? 맨 먼저 눈을 뜨자마자 그의 얼굴을 생각해내고 말았다는 것이 그녀를 다시 잠 못 들게 해서, 그녀가 아예 일어나 의자로
몸을 옮겨 갔을 때, 그녀는 의자가 아닌 그의 무릎에 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는구나. 괜히 무안해서 그저 말이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는데, 그녀 뺨이 입술보다 더욱 실룩거렸다. 비라든가 바람이라든가 하늘 같은 것에 너무나 예민한 자신이 순간 못마땅해서였다. 방금 그런 자신을 못마땅해했던 그 순간만, 잠 깨고 난 뒤 처음으로 그녀는 그를 잊었다. 그래서 설령 그가 의자에 먼저 앉아 있었다고 해도 그때 그는 그녀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저기 멀어진 곳에서 조금씩 가까이 오더니, 다 와서는 창 쪽을 향해 물끄러미 앉아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그녀 속으로 쏙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그녀는 확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창피해서 눈물까지 글썽여졌다. 열이 가라앉으라고 붉어진 얼굴을 찬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열은 오히려 이마까지 확 퍼졌다. 그래서 그녀는 방금, 그를 어떻게 해서든 그녀 밖으로 내몰아 보려고 몸을 기울어지게 해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가지 않고 그녀 몸속에서 함께 기울어진다. 기울어지면서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아 그녀 뺨을 기타 줄처럼 퉁긴다. 팅팅팅. 그녀 뺨이 그의 뜻대로 퉁겨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의자 위에서 일어서다가 넘어진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듯 넘어진 의자를 잠깐 물끄러미 보더니, 냉장고를 씌워놓은 덧씌우개 주머니 속을 뒤적거린다. 덧씌우개 위에 얹혀 있던 신문이 툭 떨어진다.
오토바이 납치범 극성, 최근 들어 떼를 지어 다니는 오토바이족들 주택가에까지 침입. 어젯밤 아홉 시경 퇴근하던 타이피스트 홍 모 양을 집 앞 오십 미터 앞에서 납치해 어린이 놀이터에서 폭행하고 도주. 뒤늦게 발견당한 홍 모 양 급히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사망.
그녀는 신문을 집어 방금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던져놓는다. 그녀는 냉장고 덧씌우개 주머니 속에서 수영장 티켓과 사물함 열쇠를 찾아내자, 그걸 들고 거리의 빗속으로 뛰어든다. 확 열을 받았던 그녀의 이마와 눈씹과 뺨, 그리고 목과 어깨와 팔뚝, 허리와 엉덩이와 종아리와 복사뼈에 빗방울이 속속 파고든다. 차가운 빗방울에 열은 씻겨 내려갔지만, 그녀는 이제 간지러운 빗방울 때문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내 속으로 들어와 버렸지? 그녀는 자신의 살갗을 통과해 비까지도 함께 맞고 있는 그녀 속의 그를 다시 느낀다. 불안이 와아, 하고 솟아난다. 빗속을 찰박찰박 뛸 때마다 불안도 자꾸만 와아와아 와아, 솟아나서 잔 올챙이들처 럼 와글와글거 린다.
어제, 그녀는 문방구에서 사 온 새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여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오로지 뜨거운 태양 속으로 어떤 영상이 한 컷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영상은 화원의 어떤 여름 꽃들보다도 바로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그걸 글로 옮겨보고 싶었다가도 더위에 지쳐 그만둬 버리곤 했다. 그 영상 앞에 ‘오로지’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생각해보면 그 영상이 다른 무엇들보다 좀 더 선명했을 뿐, 더위를 핑계 삼아 내가 그만둬 버린 일들은 수두룩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난여름 동안 무엇이든 하려고 마음먹 었다가 그만둬 버리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이든 포기를 얼마나 잘하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그런 전시회 같은 생(生). 그런 여름.
그녀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글 속으로 그녀 자신이 숨는
일이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럴 기희가 그녀에게 온다면 감사하게 여길 것이었다. 그녀는 가끔씩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설렘을 갖곤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나은 환경이란 이런 것이다. 그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널찍한 방이 있고, 그 방에 널찍한 탁자가 있는 것. 탁자는 넓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탁자가 넓다면 읽던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놓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한쪽에서 밥을 먹어도 될 것이고, 때때로 나는 그 위에 누워 잠도 자리라…… 그녀는 그런 널찍한 방과 널찍한 탁자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생각할 때, 그때만큼은 어쩌면 인생은 살만한 것인지도 무른다는 느낌을 가지곤 했다. 그러나 지난여름 동안은 글을 쓴다는 것, 그런 열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팽개쳐 둔 것같이 세상은 돌아간다고 생각해서이다. 모든 일에 거의 별 주장이 없이 사는 그녀였는데도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다. 글을 쓸 수 있다면, 갈망했던 것이 지난여름 동안은 남의 마음속 같았다. 어느 구석도 더 이상 가로막는 것 없이 터져 있는데, 내 펜 끝이 어디로 가서 숨을 것이며, 무엇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녀는 갑자기 뭔가를 적어보는 일에 싫증을 느꼈고, 그래서 그녀는 지난여름 동안 노트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제 간신히 위와 같은 몇 줄을 적어봤던 것이다.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는 그의 환영을 피하기 위해 숨을 곳이 그 노트 속이어서.
까만 수영 모자 위에 걸쳐두었던 물안경을 끄집어 내려 눈을 덮자, 수영장 안은 한 꺼풀 어두워진다. 비가 와서일까? 이른 새벽이라고 해도 다른 날엔 몇 사람씩 첨벙 다이빙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쪽 풀에 한 남자, 그리고 이쪽 풀에 그녀, 헤엄을 치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물속에 온몸을 담갔다가 팔짝 일어서는 시늉을 서너 번 해본다. 저쪽 풀에서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접영울 하고 있는 남자의 큰 몸짓은 눈앞의 닭을 채 가려는 솔개처럼 활달해서, 그 남자가 있는 주변 물살은 여러 각도로 활기차게 갈라지다가 튀어 오른다.
살갗은 물의 차가움을 분명하게 받아들인다. 그녀는 조용히 물 위에 몸을 대고 두 발끝을 찰박거리며 팔을 내저어 간다. 지금 이 순간은 이 차가움보다 더 확실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이제 물 위에 엎드렸던 자세를 뒤집어 물 위에 눕는다. 누워서 팔을 휘저어 간다. 수영장 천장 가까이에 보자기만 한 창문들과 그 사이 커다란 정사각형 환기통으로 바깥 하늘이 내다보인다. 여전히 빗방울. 빗속을 달음박질해 수영장에 도착해서, 여자 라커룸이라구 쓰인 문을 그녀가 드르륵 밀었을 때, 차마 여자 라커룸까지는 따라 들어올 수 없었는지,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간 듯했던 그가, 물 위에 누워 규칙적으로 팔로 물을 가르는 그녀를, 빗방울이 섞인 바깥 하늘에 달라붙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당황
해서 들숨을 쉬어야 할 차례에 날숨을 쉬어, 코에 물방울이 쭈르륵 딸려 들어간다. 그녀는 누웠던 몸을 다시 뒤집어 개구리가 되어 그로부터 펄쩍 도망친다. 코로 들어간 물이 망치로 때린 것처럼 머릿속을 찡하게 한다. 괴로워서 풀 벽에 올챙이처럼 달라붙어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는데, 저쪽 풀에서 펄쩍 튀어나온 남자가 그녀 숨을 가로질러 남자 라커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멀어질수록 물이 흐르는 남자의 머리가 안 보이더니, 허리가 안 보이더니, 이제는 다리만 보인다. 하얀 남자. 남자의 종아리와 허벅지는 근육질이면서도 하얘서 털만이 까맣다. 어쩐지 얼굴은 없이 그 다리만 다시 확 돌아설 것만 같은 환영에 그녀는 재빨리 남자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물속에 납작하게 엎드린다.
그를 만난 건 나흘 전이다. 거리,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거리, 거리에서였다. 그를 그날 처음 본 건 아니다. 이미 그들은 기억할 수 없는 어느 날인가 한 번의 만남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겐 나흘 전만이 살아 있다. 나흘 전, 그날, 그녀는, 팔소매가 짧은 자줏빛 실크 블라우스에 흰 물방울이 그려진 연둣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흘이 지난 오늘은 이렇게 가을이지만, 나흘 전은 가을은 아니었다. 분명 여름과 가을 초입 사이였다. 그녀는 나흘 전과 오늘에 분명히 금을 그을 수 있다. 그건 분명히 서로 다른 날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팔소매가 없는 블라우스와 흰 물방울이 그려진 연둣빛 치마는 어정쩡한 차림이랄 수 있었다. 그래서 생긴 팔뚝의 그 좁쌀 같은 소름.
그가, 그 좁쌀같이 수두룩이 난 소름을 매만졌던 것이다.
사진기자인 그. 그가 어떤 사진들을 찍는지 그녀는 모른다. 화원 주인은 어느 날 그를, 그녀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주라고 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몰라서, 그녀는 처음엔 그가 무슨 지시를 내려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키가 볼품없이 작아서 나란히 서 있던 그녀가 그 카메라를 바라보려면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그는 잠깐만, 하면서 눈을 내리깐 그녀를 그대로 서 있게 했고, 그러고는 셔터를 눌렀다. 그 행위는 즉흥적이었을 뿐, 화원 주인이 말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어떤 것이오? 그녀가 바이올렛 화분 중에서 꽃이 서너 개 핀 화분을 구석에서 끌어와 그 앞에 내려놓았을 때 그는 인상을 썼다. 이게 바이올렛이란 말이오? 그는 마치 바이올렛은 다른 것인데 그녀가 잘못 가져오기라도 한 듯이 소리까지 쳤다. 그는 그 바이올렛을 화원 탁자 위에 놓고 계속 셔터를 늘러댔다. 그러면서 뭔가 불만인 듯 계속 중얼거렸다. 이 꽃이 뭐가 예쁘다는 것이지? 이런 순 엉터리. 중얼거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가씨도 이 꽃이 좋소? 아, 글쎄 국민학교 여선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을 조사했는데 이 바이올렛이라지 뭐요? 보기나 했는지? 이름만 듣고 그러는 건 아닌지? 아니 이 꽃을 어떻게 표지로 하지? 꽃 생긴 건 생각도 않고 내 사진 탓만 할 거 아냐? 그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나서 못 견디겠는지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바이올렛을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봤다. 당신 사진 받고 싶으면 여기로 연락해요. 아무래도 만족이 안 되는지 셔터를 눌러대는 동안 계속 바이올렛에 대한 실망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던 그가 필름을 두 통이나 소비하고 나서 내민 명함에는 월간 원예지 『꽃세상』 사진기자 ‘이세호’라고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그러나 나흘 전의 만남이 그 명함 때문에 이루어진 건 아니다. 바이올렛을 찍어 가던 그날의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 명함은 다른 명함들처럼 고객들이 놓고 간 명함통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명함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못 되고 명함통 속에서 뒹굴고 있을 동안 여름은 지나갔다. 그녀는 틈만 나면 화원 유리창을 물걸레질했고, 거의 삼십 분마다 한 번씩은 화원 앞 길목에 물을 뿌렸다. 여름 햇살은 재빨리도 유리창과 길목에서 물기를 빨아들였다. 금세 메말라 버린 길목을 내다보고 있으면, 그녀는 그녀 살갗이 터지는 듯했고, 유리창에 물방울이 서려 있지 않으면 물통 속의 여름 꽃들은 헉헉. 숨을 몰아쉬는 듯이 보였다. 길목에 물을 뿌리거나 화원 유리창에 물걸레질을 하는 동안은 그녀의 얼굴에서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없지? 하는 표정이 풀리는 듯도 해서 어쩌면 그녀는 지난여름 동안 삼십 분마다 한 번씩은 금방 가라앉을 듯한 그녀 내부를 향해 힘껏 물을 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고, 나흘 전에 그녀는 그 명함통 속에 섞여 있던 그의 명함을 애써 찾아 그녀 수첩에 끼워 넣었다. 그녀로 하여금 명함통을 뒤져 그의 명함을 찾게 만든 상황은 거리, 거리에서 생겼다. 그녀가 화원 일을 마치고 화원의 동료와 함께 팔짱을 끼고 광화문에서 종로 쪽으로 걸어갈 때 동료를 아는 남자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남자는 같이 차를 한잔 마실 것을 제의했는데, 그녀들도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는 자신의 단골 찻집이 있는 듯 그녀들을 뒤따르게 하고 성큼성큼 큰 걸음을 걸었다. 찻집 입구에는 이미 고인이 된 카라얀*이 지휘봉을 이마 위로 막 쳐드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에 걸맞게 찻집 이름은 ‘라뮤즈’였다. 눈을 감고 입술을 얄브스름히 다물고 있는 카라얀. 사진은 제법 생생해서 카라얀이 쳐들고 있는 지휘봉에서는 금방 피아노의 폭풍이 휘말려 나오는 것 같았다. 중앙에 넓은 테이블 하나, 그리고 벽을 향해 붙여진 사 인용 테이블 네 개가 그 찻집의 전부였다. 찻집의 구조는, 어디에 앉으나 주방에서 찻잔 씻는 모습을 환히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카라얀을 지나서 찻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 남자와 그녀들이 주문을 채 하기도 전에, 다시 찻집 문이 열렸는데 아아, 바로 그가 들어왔던 것이다. 혼자는 아니었다. 그에게도 두 사람의 동행이 있었다. 분명히 그때 그 남자의 눈은 반가움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그를 동료와 남자에게 인사시키고, 그가 남자와 그녀들에게 그의 일행들을 인사시키고 이렇게 그들은 중앙의 넓은 테이블에 합석을 했다. 그ι대까지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공적으로 만난 아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불과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그는 그녀의 단조로움을 깨워놓았다. 차 대신 맥주가 날라져 오고 나서였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만남을 위하여! 축배를 한 잔씩 들고 나서였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나, 할 말이 있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난여름에 그놈의 바이올렛 때문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당신 내 카메라 바라보느라고 눈 내리깔고 있을 때, 아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내내 생각했지. 내 마음 몰랐지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좌중은 물속 같아졌다. 무엇보다도 당황한 것은 그녀였다. 누군가가 농담을 한마디 던져서 그의 말을 회화시켜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그녀에게, 저저, 얼굴 붉어지는 것 좀 봐. 놀려대었다. 그 놀림을 피해보려고 그녀는 하아, 웃었지만 갑자기 모든 것이 서먹해지더니 이전엔 바라보기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의 얼굴을 맞바라보기가 창피해졌던 것이다. 창피하고 서먹해서 겨우 한다는 말이, 남자들은, 남자들은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였다.
여자는 그럴 수 없나?
좌중의 누군가가 되물었을 때 그녀는 어물어물, 여자들은, 여자들은, 글쎄 여자들은…… 그러다가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곧 화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으나 휘둥그레진 그녀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가 화장실을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동행 중의 대머리가 그녀 얼굴에 입김이 닿을 정도로 몸을 기울이고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놈 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놈 집엔 당신보다 훨씬 더 예쁜 마누라가 있죠, 저놈은 누구에게나 다 그래요. 여자 킬러라니까요. 혜어질 때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에 내려놓았다. 그때 그도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팔 위에 돋아난 오소소한 소름들을. 추운가 보군, 그는 그녀의 팔을 쓸어내렸고, 소름들은 그의 손바닥에 쓸려 내려갔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울 뻔했다. 그 울 뻔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그 밤을 지내고 난 새벽에 나타났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는데, 다른 날 같으면 하나 둘 셋…… 마흔쯤은 세어야 보일 천장이 눈을 뜨자마자 보였다. 그리고 그 천장에 얼굴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의 얼굴이었다. 잠자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나? 그녀는 이불을 당겨 목까지 덮었다. 와아, 슬픔이 솟구치더니, 그 솟구침이 가라앉는 데 한참이 걸리더니, 아아 어쩌는가, 그때부터 그는 계속 그녀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차를 마셔도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어도 함께 밥을 먹고, 그녀가 화원에서 주문받은 화환을 만들면서 장미를 꽂을 자리에 국화를 꽂고 있으면, 그게 아니야, 속삭이며 장미를 집어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꽃을 떨어뜨리며 그만 울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내 아무렇지 않다가 이토록 마음을 내주다니. 아, 나란 여자는 웬 틈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러나 그로부터 그녀는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난 나흘 동안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그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과 사투를 벌이듯이 지냈다. 그에게 전화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설사 그의 말이 유효하다고 해도 둘이 마주 앉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너 자신이 지금 끌려 다니는 것이 무엇이지? 그의 고백이냐? 아니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냐? 두 질문을 놓고 그녀는 지난 나흘 동안 자주 소철에 이마를 대고 서 있어야 했다. 권태로웠던 여름은 그녀에게 공허한
함정 을 파놓고 떠났던 것 이다. 갑자기 사랑이라니?
수영장에서 나와 그녀가 다시 빗속으로 나서려고 할 때, 비 맞지 마, 그가 나직이 속삭인다. 찬비야, 감기 들 거야. 그녀는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내 그녀 속에서 일렁이던 관능은 이제 차가워져 있다. 그녀 속의 그가 그녀의 뺨을 만지려고 하거나, 그녀의 이마에 쏟아져내려와 있는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물끄러미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비는 맞아서는 안 된다고, 샤워를 끝낸 뒤라 찬비를 맞으면 감기에 들 거라고 걱정해주고 있다. 그녀는 가판대의 차양 밑으로 뛰어든다. 그녀가 숨차 하며 비닐우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신문을 만지작거리던 가판대 주인은 많은 비닐우산 중의 한 개를 꺼내주며 그녀 손의 돈을 가져간다. 그녀가 펼
쳐 든 파란 비닐우산 위로 빗방울이 투닥투닥 떨어진다. 새벽에 거리로 뛰어나올 때의 여자와 지금 차분히 비닐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고 있는 이 여자가, 분명히 한 여자인가? 두 얼굴은 너무나 다르다.
정오가 될 무렵에, 다시 생각난 듯이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소나기 속을 뚫고 처녀 서넛이 몰려와 부케를 맞추고 간 것 이외에는 화원의 문턱을 넘어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처녀들은 꽃들 앞에서 와와와거렸다. 비가 와서 어떡하니? 설마 내일까지 오려구. 비 오는 날 시집가면 더 잘산다던데? 명혜 걔, 여기에서 더 잘살아 어디에 쓰니. 걔, 오디오 못 봤니? 시어머니 될 분이 특별히 결혼 선물로 준 거라는데, 그게 글쎄 별것 아닌 것같이 보이 잖니.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내 방 전셋돈하고 같더라니까. 그래서 질투 났니? 질투? 그래 솔직히 질투 나더라. 걔가 우리하고 비교해서 나은 게 뭐 있니? 공불 잘했니? 노랠 잘했니? 운동을 잘했니? 걔가 잘하는 거라곤 눈썹 뽑고서 거기다가 제멋대로 그리는 거 그것밖에 더 있었니. 너 모르는 소리 말어. 그게 바로 진짜 잘하는 거다, 걔 신랑 그 애의 그 눈썹에 반했대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일찌감치 눈썹 뽑고 새로 그리는 일이나 열심히 해둘걸. 명혜 들으면 좋아하겠다, 너 알고 보니 명혜의 무서운 라이벌이었구나. 이런 눈썹 때문에 도전도 못 해 보고 케이오 패 당한 셈이로구나. 비에 젖은 처녀들은 빗방울과 웃음을 함빡 떨궈놓고는 갔다. 그녀들이 부케로 선택한 꽃은 백합이었다. 백합의 노란 꽃술을 툭툭 건드리며 그 무리 중의 한 처녀가 말했다. 이 부케는 내가 받을 거야.
그녀가 오전에 한 일이라곤 그 처녀가 건드리고 간 백합을 오래 바라다본 것뿐이었다. 너무 오래 들여다봐서 백합의 흰색이 그녀의 눈을 되찔러 올 때는, 바로 눈앞이 한없이 멀어지면서, 텅 빈 상태가 되곤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눈을 감았다. 어느 하얀 공동(空洞)*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나른함을 이겨볼 양으로.
그녀에겐 타자 학원을 열 달이나 다녀서 딴 6급 자격증이 있다. 그녀는 공식적인 것으로는 3급이었지만, 지금도 눈을 감고 오자 하나 안 내고 책 한 권은 쳐낼 자신이 있다. 타자 학원을 다닐 때에 그녀는 얼마나 타자 치는 일에 몰두했는지, 뭐든 손에 짚이기만 하면 그 손에 짚인 자판을 생각하며 손가락을 움직여보곤 했다. 버스를 기다릴 때는 정류장의 나무에 열 손가락을 대고, 나는 버스를 기다린다, 라고 쳐보았고, 버스 안에서는 무릎 위에 손을 얹고, 나는 버스를 타고 달린다, 라고치곤 했다. 그녀는 그렇게 열심이었지만, 회사에서 모집하는 타이피스트 모집에는 번번이 떨어졌다. 그녀가 이 꽃집을 발견한 날도 바로 그런 낙망의 날 어느 한편이었을 것이다. 이 큰 꽃집 유리문에 ‘꽃을 돌 볼 종업원 구함’ 이라고 씌어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꽃집으로 들어설 때는 길어야 한두 달만 있으리라, 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타이피스트가 되어야 했다. 그게 꿈은 아니었지만 일 년여 동안 타자 학원을 다녔고, 마음 놓고 잘하는 일은 타자 치는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꽃집은 거리에 있지 않은가. 직장에 나와 있으면서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 기분을 그녀는 갖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의 기한인 한두 달이 지나도 그녀에겐 별일이 있어주지 않았다. 거기다가 꽃 가꾸는 일이 손에 익어지면서 식물이 주는 위로가 있었다. 꽃집 주인은 도시 근교에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그 땅에서 뿌리를 키운 식물들을 트럭에 실어서 이 도시로 가져오곤 했는데, 그녀가 할 일 중의 하나는 그 뿌리들을 분에 심어주고 비료를 주어 땅
에서처럼 분 속에서도 잘 자라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 일은 즐거웠다. 식물들의 초록빛은, 그녀에게서 이미 희미해진 꿈 조각이나 실타래같이 엉킨 기억들까지 일깨워 주려는 양으로, 늘 푸르게 웃자라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뿌리를 분에 심어주고 돌아온 날 밤에 다시 화원으로 돌아가 불을 켜고 앉아 있는 날도 있었다. 손톱 속에 끼여 있는 흙을 파내고 금방 허리가 짜부라들 것 같은 피로에 휘말려 자리에 누우면, 방금 분에 옮겨 심어준 식물의 뿌리들이 후, 후,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그 숨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그녀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피붙이에게서나 느낌 직한 본능적인 친밀감이 결국 그녀를 다시 화원으로 들어서게 했다. 밤이 깊은 화원에 혹은 새벽이 오고 있는 화원에, 그녀는 환하게 불을 켜놓고서, 천장까지 들어찬 이중 삼중의 식물들 속에 미소를 띠고 앉아 있곤 했다. 어쩌다 지나가던 밤 술꾼이 윈도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녀의 미소가 조금은 요기롭게도* 보여서, 황급히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소문을 냈을 것이다. 간밤에 꽃 귀신을 보았노라고.
좁다란 통로에까지 들여다 놓았던 벤저민, 소철, 고무, 난 화분들을 바깥으로 다시 내놓다가 그녀는 넘어져서 무릎이 깨진다. 어디에 숨어있던 햇살인가? 하늘에서 쏟아진 부신 햇살이 그녀 무릎에 맺힌 핏방울 위까지 넘실거린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
무릎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다가 말고 다시 우두커니 백합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그날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동료가 툭툭 두드린다. 떼를 쓰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투.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으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데 뇌 속의 모든 것이 출렁거리며 한쪽으로 쓸려가는 듯한 편두통이 느껴진다. 그녀는 잔뜩 이마를 찌푸린다.
그렇지 않아. 너 그제 어제 오늘 다 이상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지? 요즘 너를 보고 있으면 꼭 어다 아픈 것 같단 말야. 너 육신만 여기 앉아 있고 정신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구.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너 지금 얼굴이 얼마나 하얗게 질려 있는 줄 알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비밀인 거지?
“……”
이 애! 정신 차리라니깐?
머리가 좀 아파 그래.
머리가?
응…… 너무나 아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공중에 붕붕 떠 있는 것만 같아. 나 좀 쉴게. 부케 혼자 만들 수 있겠니? 이 정신으론 백합을 다 이겨놓겠어. 나 바깥 좀 걸어 다니다 올게.
걸어 다니는 걸로 되겠니? 약을 먹든지? 아님 병원엘 가보든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찬바람을 쐬면 괜찮아질 것 같아.
순하게, 그럼 그렇게 하라는 동료의 꽃그늘 진 목덜미를 잠깐 바라보다가 그녀는 화원을 나온다. 아아아. 맞은편 빵집 유리창에 쏟아지는 햇볕이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할 만큼 눈부시다. 엄마, 무지개야. 단발머리 소녀가 앞서 가는 엄마 손을 끌어당겨 하늘을 보게 한다. 새로 빵을 구워서 배달 나온 청년까지 어깨에 빵통을 짊어진 채로 하아, 진짜 무지개네, 탄성을 질러서 그녀도 이마에 손을 짚고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이 그대로 쏟아져서, 푸른 물이 확, 그녀 얼굴을 덮어씌우는 것 같다. 정말 무지개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여진다. 가슴이 싸르륵 쓰라려온다. 따라갈 수 없는 서러움. 닮아볼 수 없는 안타까움. 먼, 멀디먼 그리움. 그녀는 방향도 없이 공허하게 앞을 향해 걷는다.
거리, 어느 고등학교가 있던 자리, 지금은 미술관이 들어선 자리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미술관 뜰을 넘겨다본다. 석조 계단이 끝나는 공터에서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다. 땅을 파먹은 포클레인이 입 벌린 공룡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그녀는 그 공룡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힘없이 미술관 뜰로 걸음을 옮기다가 주저앉는다. 괴어 있던 빗물이 금방 그녀 치마를 적셔온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 저만큼, 붉은 모자를 쓴 지하철 공사 인부들이 노란색 철책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담배를 피우면서 미술관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여자 둘을 바라보고 있다. 배드민턴 채를 여기까지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일까? 무릎 위까지 올라간, 그리고 아주 타이트한, 짧은 진 치마 아래로 두 여자의 다리는 미끈하다. 그 여자들의 미끈함만 없으면 근처의 모든 것, 심지어는 미술관까지 한 장의 그림 속 풍경 같았을 것이다. 그 풍경 속으로 스스로 끼어든 그녀는 힘껏 몸을 일으켜서 나무 밑으로 가 쪼그리고 앉는다. 경쾌한 하얀 다리들. 그녀는 거기 무릎을 싸안고 앉아서 붉은 모자를 쓴 인부들처럼 배드민턴 치는 여자들을 바라본다. 공중에서, 참새처럼 날아다니는 하얀 공이나, 그녀들의 머릿결이나 얼굴이나 가슴은 보지 않고, 미끈한 다리들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다 바라본다. 울지 마. 어느새 그녀 곁에 와 앉아 있는 그가 나직이 속삭였을 때에야, 그녀는 자신이 울면서 배드민턴 치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저리 가세요. 그녀는 그를 밀어내는 시늉으로 몸을 옆으로 비키려다, 내가 왜 이러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울지 마, 속삭였던 그 목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되돌아봤지만, 그는 없다. 나뭇잎들만 출렁거리면서 저희들 몸 위에 쌓인 빗물을 털어내고 있다. 배드민턴 치는 여자들의 미끈한 다리는, 물고기들이 물살을 차내듯이 미술관 뜰의 잔모래들을 사삭, 차내며 명랑하게 움직인다.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울 때 짧은 진 치마는 더욱 아슬히 올라간다. 어쩌면 엉덩이가 보일 듯하다. 그녀는 지레 가슴이 설레어서 얼른 지하철 공사장의 인부들을 바라본다.
저년, 여우 같은 년들!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더 그러는 거야!
귀엽잖아, 놔둬! 우리 같은 처지에 돈 안 내고 어디 가서 공짜로 저런 구경을 하겠나? 아, 나는 피로가 다 풀리네그래!
밝히 기는!
뭐,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그녀는 더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일어선다. 인부 중의 한 사람이 담배를 땅바닥에 내꽂으며 그녀 쪽을 쳐다본다. 그녀는 그 눈길에 황황해져 잔 꽃무늬가 퍼져 있는 플레어* 치맛자락을 여미며 성큼 인도로 내려선다.
여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었던 그녀의 심금에, 그로 인한 슬픔은 한순간에 시작되었다. 아무 연대감을 갖고 있지 못한 그 남자에게로의 이끌림은, 가끔 한밤중에 잠이 깨었을 때, 그녀 가슴을 훑고 지나가던 참담함, 그 불안을 막아주던 식물들의 위로, 지금 이 칠흑 같은 밤중에도 뿌리들은 흙 속에서 키를 키우겠지 싶어, 눈물을 삼키던, 그 위로까지도 뛰어넘어 그녀를 길게 울게 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로의 이끌림이 나흘 전부터가 아니라, 수천 년 묵은 슬픔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을, 이제 풀어낸다는 듯이 길게 울었다.
그는 사진기자다.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을 내리깔면서 살포시 웃는다.
그는 사진기자다.
그녀는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목을 젖혀보기도 한다.
그는 사진기자다.
그녀는 엉덩이를 뒤로 빼며 수족관을 들여다본다.
그는 사진기자다.
그녀는 영화관 앞에 멈춰 서서 예쁜 여배우가 정수리에 총부리를 대고 있는 스틸을 구경 한다.
그녀는 자신이 멈 출 때마다 그가 사진을 찍는 듯했고, 그래서 그녀의 산보는 다소 포즈를 취하는 듯해 부자연스럽다.
그녀가 지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자리는 그의 명함 속에 적힌 빌딩 맞은편이다. 그녀 속에서 그녀와 함께 숨을 쉬던 그가, 정작 진짜 그가 있는 빌딩 앞에서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재빠르게 달아난다. 그가 빠져나가 버리고 혼자 남아 그녀는 오랫동안 빌딩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녀는 거기 서 있으면서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싶은지를 알아냈지만, 곧 포기한다. 전화를 한다면 그는 나를 멸시할 것이야. 그 생각 속으로 다시 복받쳐 오르는 불안 때문에,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커피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금방 쓰러질 듯 맥이 빠져 있다. 바깥에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빌딩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녀는 폭삭 무너진다. 커피가 날라져 올 때, 유선방송 음악이 바뀌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무너져 처음으로 빌딩만 바라보던 눈길을 찻집 구석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로 옮긴다.
당신의 눈썹처럼 여윈 초승달 숲 사이로 지고
높은 벽 밑동아리에 붙어서 밤새워 울고 난 새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아래
밤새 울고 난 새벽
그녀는 팔소매로 눈자위를 꾹꾹, 늘러줘야 할 만큼 금세 눈물이 고인다. 그녀는 찻잔을 밀어내고 햇살이 소복한 그 자리에 엎드린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지금 그녀를 관찰하고 있음을 느낀다. 관찰하고 있는 그녀는 엎드려 있는 그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엎드려 있는 그녀가 지금 탁자 위에 눈물을 쏟고 있는 그녀가 나흘 전부터 무언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한 가지 것에 휩싸인 그녀는 다른 모든 것에 태만해졌다는 것을. 그녀는 바보같이 군다. 걷다가도 아무것하고나 부딪친다. 말투는 평소보다 더 느릿느릿해졌고, 눈초리는 방심해 있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뭔가를 슬펴하는 것 같은데도 곧잘 웃는다. 그녀는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자신이 싫은지 고개를 쳐든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는, 지금까지 관찰하고 있던 그녀가 전혀 보지 못했던 불안이 넘치도록 담겨 있어서, 관찰하던 그녀는 놀라 사라져버린다. 고개를 든 그녀는 노트를 꺼내고 거기에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지난여름, 그 무위* 속에서도 비교적 선명하게 영상으로 떠올랐던 그것은 미나리 밭이었다. 어쩌면 그곳은 밭이 아니라 저절로 생긴 야생 미나리 군락지였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 등장하는 여자아이 둘의 나이가 아홉 살이나 열 살 어쩌면I 여덟 살이었다는 짐작으로 미루어보아, 그리고 그 두 여자아이 중의 한 아이는 내 어린 시절이었으니 이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때에, 더구나 그 지방의 농사짓는 사람들의 농작물 선호도로 보아, 일부러 미나리를 가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영상 속의 그곳이 미나리 야생지였을 거란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하지만 야생지라고만 보기에는 영상 속의 미나리지는 너무 넓었다. 끝도 없는 초원 지대 같은 그런 미나리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기억. 어쩌면, 그래 어쩌면 진짜로는 몇 평 안 되는데 내 영상이 그 땅을 끝도 없이 넓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는 골똘히 그 미나리지를 생각하곤 했으니까. 그곳에 파란 미나리들의 허리가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삼월이거나 사월이거나 오월. 포근한 햇살이 또 거기에 있었다. 여자아이 둘은 파란 미나리지를 바라보며 뭘 하고 있었을까? 도대체 뮐 하고 있었기에 옷을 벗기 시작했을까? 그 미나리지 둑 밑으로 도랑이 흐르고 있었으니, 그 여자아이들은 장난을 치다가 혹시 그 물 속으로 빠졌던 건 아닌지.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옷을 벗었던 건 아닌지. 왜 옷을 벗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애 등의 푸른 점은 선명하다. 둑의 돋아 오른 풀 위에 엎드려 있던 터라, 처음에 나는 풀물이 묻어있는 줄 알았다. 파란 풀에 휩싸여 하얗게 엎드려 있던 그 애의 작은 몸. 내 기억 속에선 그 애의 몸만 있다. 그 애에겐 어쩌면 ’내 몸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여름 무위 속에서, 용케도 그 미나리지를 사진으로 찍어내면서, 나는 내가 봤던 그 애의 몸과 그 애가 봤을 내 몸을 동시에 만들어 넣었다. 아름다운 쪽은 그 애다. 나는 그 앨 사랑했으니까. 훗날엔 어땠을지라도 그 순간엔 그 애도 나를 사랑했기를. 만약 그렇다면 내 지난 여름날처럼, 그 애가 혹시 그 미나리지를 생각해낸다면, 그 애의 영상 속에선 내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 여자아이들은 그 파란 미나리지를 바라보며 팔은 괘서 턱을 받치고, 엎드린 채로 발을 허공에 뻗어대며 흔들었다. 공중에서 둘의 복사뼈가 부딪치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일어나 앉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나 앉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애의 어리고 부드러운 몸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앤 그대로 엎드린 채로 팔을 뻗어 자신의 발을 동그랗게 끌어당겨 복사뼈를 매만졌는데, 나는 끌어당기는 대로 타원형으로 구부러지는 그 애의 몸이 신기해서 내 아픈 곳을 만지다 말고 그 앨 바라봤다. 그 애 하얀 등의 푸른 점도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었다. 내 손바닥이 그 점으로 뻗어 갔으나 그 푸른 점을 다 덮지는 못했다. 내 손바닥은 작았고 그 애의 푸른 점은 ˙넓었다. 지난여름, 그 무위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준 건 바로 이 푸른 영상이다. 나 혼자만 간직한 이 영상을 그 침묵의 무더위 속에서 생각하고 있으면, 어떤 희열이 시원하게 나를 감싸오곤 했다. 하지만 내게 이 영상을 글로 옮겨보게 만든 것은 그 보드라운 희열이 아니다. 영상 속에서 그 애의 푸른 점을 덮었던 내 손바닥은 그 점 위에서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내 손바닥은 ――그대로 그 애의 목덜미 쪽으로 올라갔고, 엎드려 있던 그 애는 간지러운지 돌아누웠다. 그 애의 눈, 잉크 빛 하늘이 담겨 있던 눈동자, 하얀 목, 밋밋한 가슴, 도드라져 있던 분홍색 젖꼭지. 그 애가 눈을 찡긋거리면서 내 뺨에 입술을 댔다. 나는 떨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애의 메마른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을 것이다. 영상은 여기에서 끝난다. 영상이 끝난 자리엔 야생 미나리 군락지도, 벗은 여자아이 둘의 몸도 없다. 그 자리엔 내 쓰라린 상처와 그 애의 차가운 멸시가 남아 있다. 풀밭에 벗어놓은 옷을 입으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너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거야. 하지만 그 앤 나와 반대였었나 보았다. 그 앤 다시는 나와 함께 그 미나리지에 가주지 않았고, 내가 부르거나 찾아가면, 엄마한테 다 일러줄 거야, 소리를 쳐서 겁을 주었다. 봄이 가고 초여름이 다 되었을 무렵에야 그 야생 미나리 군락지가 바라다보이는 다리 위에서 나는 그 앨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 앤 도망쳤었다. 그러다가 되돌아 달려와서 주먹을 꽉 쥐고 내 뺨을 제 힘껏 때렸다. 그 영상의 희열 뒤에 남는 이 아픔……
그녀의 글은 군데군데 눈물에 얼룩이 져서 글씨가 번진다. ‘야생 미나리 군락지’ ‘나 혼자만 간직한 푸른 영상’ ‘메마른 입술’ ‘어떤 희열’ ‘그 애의 푸른 섬’ ‘너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거야’ ‘성상이 끝난 자리’ 등등에.
놀랍게도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노트에 떨어진 눈물자국이 다 말라가고 있을 무렵, 빌딩 안에서 그가 걸어 나왔던 것이다. 그의 옆에는 한 여자가 서 있다. 그의 어깨에는 카메라가 메어져 있다. 꿈인가? 그녀는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만져본다. 그는 분명 찻집 유리창 건너, 빨간 불이 켜져 있는 신호등 건너에 서 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그 남자와 여자는 사람들 속에 섞여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건너온다. 여자를 바래다주러 온 것일까? 그는 그녀가 앉아 있는 유리문 바로 앞에서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여자는 쌩긋 웃으며 내민 그의 손을 가볍게 잡고 흔들더니 길 저편으로 뛰어간다. 이제 혼자 남은 그 남자. 그녀는 마치 화면을 바라보듯이 유리문 안에서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방금 헤어져서 저쪽으로 뛰어간 여자를 뒤돌아볼 때, 그도 그녀를 바라본 듯했다. 다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무심히 찻집 쪽을 돌아봤을 때도, 그는 그녀를 바라본 듯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씩이나 그녀 얼굴을 보면서도, 그녀를 지나쳐 다시 신호등을 건너가고 빌딩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녀는 다시 거리에 있다. 탁자에 엎드려서 눈물을 글썽 이며 그 애에 대한 영상을 새 노트에 적어놓고 나니, 나흘 전부터 그에게 품었던 슬픔이 어느 정도 사라진 듯하다. 아니다. 어쩌면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녀를 못 알아보는 그 남자에게서 받은 놀라움이 아직도 그녀 마음속에 풀기*를 세우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날, 소매가 없는 자주색 실크 블라우스 아래 좁쌀만 한 소름이 돋은 채로 얌전하게 놓여 있던 그녀의 팔은, 추운가 보군, 무심한 그의 한마디로, 무심한 그의 쓰다듬음으로, 그랬다, 욕망을 품게 된 것이다. 아직 추억이 되지 못한 욕망은 파릇파릇하다. 그것이 격렬하게 불타올라 그녀는 방심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가, 그녀 내부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불안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알아주기를 바라다니?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에게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지금 벅차다. 슬픔에 사로잡힌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기만으로도. 그런데도 그가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지나쳐 가자, 그녀는 지금 야릇해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전화를 건다. :사진기자인 그에게가 아니다. 화원 단골 최에게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최는, 언제나 그녀가 예뻐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녀는 수화기에 매달려 자신이 있는 위치를 그가 혼동하지 않도록 설명하고 나서, 잊지 않고 덧붙인다.
일 때문에 지나가다 보니 이 앞이잖아요. 그래서 차나 한잔 할까 하구요.
전화를 끊고 자리로 되돌아온 그녀는, 최에게 전화를 건 것에 대해 후회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 마음의 이중. 그녀는 우울해져 손깍지를 깊게 낀다.
잊었을까, 그는? 그날 밤, 내 팔을, 소매 없는 자주색 실크 블라우스 밑에서 찬 밤바람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채로 떨고 있던 내 팔을?
그녀는, 최가 들어와 맞은편에 앉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깊게 낀 제 손깍지만 보고 있다. 최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짚는다. 가만히 짚었을 뿐인데 그녀는 거의 무너졌다가 일어난다. 최의 흰 와이셔츠 주머니에 잉크가 한 방울 묻어 있다. 자신의 얼굴에서 곧 시선을 돌려 잉크 떨어진 자국을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최도 새삼스럽게 자신의 와이셔츠 주머니를 내려다본다.
이거? 글씨가 잘 안 써져서 만년필을 흔드는데 잉크가 튀었어. 하필이면 여기에 튀었담.
그녀가 하아 웃자, 최는 곧 명랑해진다.
웃으니까 더 이쁜데, 우리 뽀뽀 한번 할까?
흥!
흥이라니! 코 나올라!
그녀는 정말 코라도 나오는 듯이 자신의 코를 손바닥으로 쓱 문지른다. 최는 예의 그 예뻐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담배를 꺼내 문다.
그런데 웬일? 이런 적이 없었잖아. 저녁 한번 함께하자고 그렇게 보채도 사미승*이더니…… 오늘 저녁은 어때?
배드민턴 치러 가야 돼요!
그녀의 입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배드민턴이라니? 자신이 말해놓고, 그녀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배드민턴?
최가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지 않고 배드민턴? 이라고 반문을 하는 통에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가 탁자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더니 바닥에 팽개쳐져 버린다. 최가 담배를 주우려고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는데 흰 주머니에 튄 잉크 방울이 형편없이 구겨진다. 그녀는 갑자기 참을 수가 없어져서 발딱 일어나 재빠르게 최에게서 달아난다. 하지만 곧 뒤따라 나온 최에게 그녀는 팔목을 억세게 붙들린다. 최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이 없는 사나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잘못했어요!
뮐?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정신이 번쩍 든다. 최가 뿜어내는 사나움을 그녀는 용케도 알아낸다.
네가 뭘 원하는지 나는 알아!
아니에요, 틀렸어요.
최는 그녀를 끌고 지하 계단으로 내려간다. 그녀는 버둥거리지만 최의 힘은 완강하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야 한다고, 최로 하여금 노여움을 풀게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지만, 숨소리만 높아질 뿐 그녀는 버등거리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제발…… 나를 놔줘요, 제발.
왜 나를 찾아왔지? 그런 나태한 표정을 짓고서 말이야. 그리구선 지금은 놔달라고? 사람을 잘못 봤군. 내가 그래줄 것 같은가? 자자, 긴장을 풀라고. 너무 긴장하면 재미없어. 여긴 비상구야.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여기에 오지 않아. 또 한두 사람쯤은 어때? 관객이 있으면 더 재밌지 않겠어?
최는 그녀를 계단 모서리로 몰아붙이고 그녀의 치마를 확 들춰 올린다. 그녀가 놀라 최의 어깨를 물어뜯자, 최는 주먹을 꽉 쥐고 그녀의 귀뺨을 내리친다.
제발 이러지 마!
그녀도 있는 힘껏 그의 귀뺨을 내리쳤지만, 최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붙잡아 등 뒤로 억세게 돌려놓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지하계단의 천장과 벽이 괴로운 숨을 몰아쉬며 좁혀 든다. 힘이 빠진 그녀를 최는 조금 느슨하게 풀어준 뒤 그녀의 입술을 더듬는다.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문다.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 그녀의 입술에 화가 난 최는 다시 힘을 가해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인다. 그녀의 치마는 이미 벗겨져 바닥에 흘러내려 있다.
여기서 이러지 말아요…… 방으로라도…… 나를 방으로라도 데려다줘…… 네가 달아나지만 않았다면 그럴 양이었지. 우선 향기로운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 곁들이고,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춤을 추러 가고, 그렇게 부드럽게 순서를 밟을 양이었지. 하지만 네가 급해 보여서 말야, 이렇게 거칠게 바뀌어버렸구나. 이것도 괜찮잖니. 조금만 협조해 준다면 더 좋겠는데…… 오늘은 이렇게 반항해도 내일은 너 스스로 전화할걸.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말야…… 니 얼굴에 씌어져 있어. 나 죄 없어. 다만 니가 말 못 하는 걸 내가 알아서 해주는 것뿐이야…… 자, 그러니 좀 얌전히 굴어.
다시 거리에, 그녀는 놓아졌다. 정신을 온통 무엇인가에 내맡기고 있어서, 그녀는 헛껍데기다. 거리의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외로이 그들 속에 섞여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보는 것 같지가 않다. 다만 어떤 여자가, 뒤로 묶어놓은 방울 달린 머리끈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도 모르고 가는구나, 하였을 것이다. 조금 더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최에게서 얻어맞았을 때 터진 그녀의 귀가 뺨 쪽으로 퉁퉁 부어올라서 갸름한 그녀의 얼굴형이 야릇해진 것쯤은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또 어느 누구 하나쯤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빛을 보고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파리해질 수도 있다니…… 어디쯤에서 쓰러지나, 싶어 호기심으로 한번쯤 그녀를 돌아다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녀에 대해 관심 없이 사람들은 그녀를 앞질러 가거나 마주쳐 지나간다. 그녀의 머리를 겨우 한곳에 모아놓고 있는 방울 달린 머리끈은 곧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그걸 모르고 걸어갈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그 방울 달린 머리끈 때문에 그녀의 검은 머리는 그녀의 목덜미 뒤에 모아져 있다. 그녀가 걷는 대로 그 머리끈은 따라 움직이면서 그녀의 감춰진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녀가 건물 사이사이를 걸을 때 그 머리끈은 때때로 햇빛을 받아 황금색이 되기도 한다. 넋이 나간 듯했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웠던 그녀의 걸음걸이가 어느 순간 뻣뻣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녀는 몹시 오한이 나는 듯 멈춰 서서
오들오들 떨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그녀가 화원으로 영원히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미술관 앞이다. 어둠이 내려 있는 미술관 앞의 공터는 괴괴하다.* 노란 철책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인부들도 가고 없다. 다만 땅을 깊게 파먹은 포클레인이 여전히 공룡의 형상을 하고, 공터로 내려서는 허깨비 같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지난 오후에 그녀가 앉아 있던 나무 그늘 밑을 지나, 인부들이 피로한 목소리로 음담을 늘어놓던 노란 철책 밑으로 쓸리듯 걸어가고 있다. 철책 밑에 서 그녀는 담배꽁초 하날 줍는다. 이걸로 뭘 하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그녀는 잠시 후 꽁초를 입에 물고 피로한 듯 철책에 기대어 담배 연기 내뿜는 시늉을 해본다. 저기였지. 그녀는, 한낮에, 짧은 진 치마를 입고, 햇살 아래서, 인부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여자들이 힘껏 배드민턴을 치던 자리를 슬픈 눈으로 더듬는다.
슬픔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또렷한 기억이 그녀에겐 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다가온 그 애의 돌연한 멸시를 갚아주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내 죽음만이 그 애의 마음을 돌이켜놓을 것이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여기서 죽으리라. 그녀는 그 푸른 영상 속의 야생 미나리 군락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여기서 어느 날이든 죽으리라, 너의 마음을 돌이켜놓기 위해서라면 난 죽으리, 그 매일매일을 그 생각으로 버티었다.
그녀가 담배꽁초를 버리고 가만히 일어선다. 그녀가 포클레인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그녀가 힘껏 손톱으로 포클레인 몸체를 긁어본다. 포클레인은 긁히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굵어대니, 그녀 손톱이 부서져 달아난다. 그녀가 이제 포클레인 아무 곳이나 몸으로 밀어보고 있다. 미는 게 아니라 부딪쳐보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몇 발짝 떨어져서 힘껏 달려들어도 포클레인은 꿈쩍도 안 한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곳을 쳐다보는 양, 포클레인 아가리를 오래 쳐다보더니, 신발을 팽개치고 낑낑대며 포클레인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정강이가 쇠붙이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났고, 기어가느라고 엎드린 몸을 펼 때는 포클레인 모서리에 그녀의 가슴살이 패어 찢어진다. 그런데도 그녀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위험스럽게 포클레인 몸체에 매달려서 아가리 쪽으로 한 땀씩 바느질하듯, 한 뼘씩 좁혀가고 있다. 최가 사납게 다루어 실밥이 뜯겨 있던 치마의 호크가, 어디쯤에서 마저 뜯겨, 치마가 주루룩 흘러내린다. 그동안 간신히 그녀 목덜미에서 대롱거리던 방울 달린 머리끈도 풀어져 나가, 그녀의 검은 머리채는 산발이 되어 있다. 포클레인 아가리 속엔 지하에서 떠낸 흙이 반쯤 차 있다. 그녀는 후욱, 숨을 몰아쉬며 그 흙 속에 두 발을 꼬옥 묻는다. 뭔가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다. 자꾸만 흙을 펴 올려 자신의 무릎을 묻고 허벅지를 묻고 엉덩이를 묻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호오, 웃기까지 한다.
당신은 잊었지? 그날 밤 내 소매 없는 자줏빛 실크 블라우스 밑의 팔뚝에 돋아 있던 좁쌀만 한 소름들, 그걸 쓰다듬어주었던 일을, 당신은 잊었어,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기억할까.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매장할 흙이 없어 손짓을 멈추고 밤 별들을 눈으로 올려다본다. 그의 얼굴이 잠시, 별들 속에 섞여 피어났을 때 그녀 눈 속의 공허함이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곧 다시 초점이 없어진다. 너무 짧은 공허한 빛남. 지금 그녀는 넋을 잃었을까? 공허한 빛남이 사라지고 난 뒤 그녀는 아무 짓도 안 하고 끄덕끄덕 졸고만 있다. 가슴살이 찢겨 나갈 때 스며든 피, 그 피비린내가 바싹 말라갔을 때쯤이었을까? 꼭 한 번 힘껏 눈을 떠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밤 별이 질 무렵, 그녀가 겨우 한 일은, 꾸물꾸물 윗옷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아무 장이나 펼치고서, 해사하게 웃기까지 하며, 뭔가 꾹꾹, 눌러 적어 넣을 양을 하다가는, 힘이 팽기는지* 눈물 젖은 얼굴을 푹, 수그리는 일이었다.
『한국문학」 (1992년 3~4윌 합병호); 『풍금이 있던 자리』 (문학과지성사 2003)
신경숙(申京淑)
196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 「겨울 우화」 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내면, 욕망, 일살, 여성 등의 문제를 잡요하게 파고들었다.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 자신의 존재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는 미세한 존재들에 대한 애정, 그들의 흔들리는 내면에 대한 섬세한 성잘 등을 답은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집 『겨울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전 집을 떠낱 때』 『딸기밭』 『종소리』, 장편소설 『깊은 슬픔ㄻ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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