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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우리가 지난 2024년 2월 13일에 본 카페(cafe)를 통해 올린 '帝國 二百五十四: 팔전 중 첫 번째 신전 숭령전'이라는 글을 통해 숭령전(崇靈殿)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하였고, 다시 2024년 2월 22일에 '帝國 二百六十五: 팔전 중 두 번째 신전 숭인전'을 언급함으로써 영광스러운 팔전(八殿) 중 두 개의 신전을 설명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숭령전과 숭인전(崇仁殿)은 모두 북한 평양(平壤)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직접 참배(參拜)를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하루빨리 매국적인 공화주의(republicanism)를 극복하여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로 다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재건하여 남북통일(南北統一)을 이루고, 엉터리같은 대한민국 공화국(Republic of Korea)으로 인해 모든 국가적 대사(大祀)가 사라진 망국의 시련을 하루속히 극복하고 제국(帝國)의 영광을 복원, 번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일은 남아 있는 나머지 국내에 소재하고 있는 여섯 개의 신전 중 첫 번째로 숭덕전(崇德殿)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우선, 숭덕전 건축물 및 제례에 대한 설명은 현재 제례를 모시고 있는 신라오릉보존회(新羅五陵保存會)의 홈페이지(homepage)에 매우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숭덕전은 먼저 신라(新羅)를 건국하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모신 사당으로 대한민국 공화국내 모든 박씨(朴氏)들의 시조신(始祖神)으로서 본관(本貫)과 관계없이 공동 제사로 모셔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건국 중시조(建國中始祖)로 숭상되고 존숭되는 사당으로써 현재 영광스러운 경상북도 경주시(慶尙北道 慶州市)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숭덕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신라 건국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고조선(古朝鮮) 멸망으로 심각하게 혼란했던 시기에 매우 중대하고 또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실질적인 정통 왕조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역사의 큰 국통(國統)으로써 위상(位相)과 상징(象徵)하고 있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역사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공위시대(空位),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이어지는 오천년 왕조(五千年 王朝)의 역사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위대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그리고 발해(渤海)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는 사실상 2018년부터 불법 점유로 개판된 대종교(大倧敎)처럼 극심한 내분(內紛)으로 인해 스스로 망했던 국가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 국민께서는 신라가 당나라(大唐國)와 연합군(聯合軍)을 만들어 무력으로 침략하고 멸망시켰다는 점을 부각(浮刻)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이 침공(侵攻)하기 전, 고구려와 백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고구려나 백제에서 부패(腐敗)와 내부분열(內部分裂) 그리고 지도층 스스로 외세 침략에 대한 준비와 관심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외세의 침략을 이용했던 측면들을 살펴본다면 신라가 침략하지 않았다고 해도 스스로 무너졌을 것입니다.
발해 역시 중국(中國)측 사료에 봐도 거란족(契丹族)의 침략이 있기 전, 스스로 무너져 거의 나라가 없는 상태와 같았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나라 상태가 심각하게 엉망이었는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역사관에서 본다면,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우리의 주역(主役)의 조국이며 역사입니다. 하지만, 위대했던 역사에 대한 장점(長點)만 언급하는 것이 과연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역사만큼 당시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그리고 더 어두운 역사에 대한 공부와 지식을 통한 지혜(智慧)야말로 훗날 우리에게 소중한 양식과 교훈으로 남을 것이라고 저희 재건회(再建會)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역사는 계통적 역사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대목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할 부분은 바로 고조선의 후예(後裔)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삼국사기라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에서 매우 명확하고 정확하게 부여(夫餘)와 부여의 후손인 고구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부여와 고구려를 같은 역사의 국가로 보고 고구려로 통칭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평양의 숭령전에는 단군왕검(檀君王儉)과 더불어서 함께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동일하게 정식(正式)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같은 계통의 백제와 발해 역시 이러한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법통적으로나 계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실질적인 나라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하다고 할 점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부여, 고구려, 백제, 그리고 발해가 모두 기원을 부여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부여라는 나라도 고조선에서 시작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만, 이후 국가들은 모두 기원을 고조선보다 부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볼 때, 혈통적 개념보다는 법통적인 면과 계통적인 면에서 그리고 민족적인 개념으로 고조선을 시조 국가로 계승하고 있음을 우리는 추정하여 엿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삼국사기의 내용을 살펴봤을 때 혈통적 계통과 역사적인 정통 계승의 내용으로 보면, 오히려 진정으로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는 신라이며, 혈통적으로도 고조선의 직계 혈통은 유족들이 세운 신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각국마다 고유하고 고귀한 건국자들의 탄생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부여의 동명왕(東明王), 고구려의 동명성왕, 백제의 온조왕(溫祚王)과 발해의 고왕(高王) 모두 탄생설화에 조선이라는 국명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비하여 신라 박혁거세의 신화에는 분명하게 조선 유민(朝鮮遺民)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볼 때, 부여나 고구려보다는 오히려 고조선의 혈통적인 정통성은 신라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유민이라는 의미도 단순히 백성이라는 의미로만 해석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육촌 촌장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이미 진한이라는 나라를 실제로 구성하고 있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육촌 촌장들이 적어도 일반 백성으로서 갖는 의미보다는 고조선의 왕족들이거나 고조선 핵심 권력층이 적어도 위만조선 교체기에 먼저 경주 지방으로 남하하여 진한을 건국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건국 시기만 놓고 보아도 신라가 기원전 57년으로 가장 먼저 건국되었고,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백제가 기원전 18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신라는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인 만큼 역시 고구려와 백제, 발해와 결을 나란히 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고조선의 정통 계승 국가(正統繼承 國家)라고 하겠습니다. 보다 우리가 자세하고 진지하게 삼국사기의 신라 건국 과정을 살펴 보겠는데, 구체적으로 육촌(六村)은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 있었다고 확인이 되는데, 여섯 지역 모두 경주(慶州) 해당 일대의 지명임을 확인할 수 있고, 바로 위만조선이 한나라(漢國)와의 치열한 전쟁에 의해 멸망될 당시에 많은 유민들이 당시 진국으로 남하하여 정착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경주 지역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주의 육촌이 생기기전, 이미 한반도 남부 지역은 진국(辰國)이 존재하고 있었고, 후에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으로 발전하게 되며 특히, 진한은 원래 국가였던 진국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진한의 수부(首府)였던 곳이 바로 경주라는 점을 상기(想起)한다면, 신라의 모체인 서라벌(徐羅伐)은 바로 이러한 진한의 주도에 세워지게 되며, 서라벌을 세운 사람은 바로 육촌의 장들이 서로 합의를 하여 당시 나정(蘿井)에 탄강하였다고 하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모시고 건국하게 되는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혁거세의 탄강과 관련한 하나의 신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마가 나정이라는 우물 곁에서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고 하는데, 신비로운 것은 백마가 떠난 후 자리에 가보니까 자줏빛의 큰 알이 있었는데 알에서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화(神話)를 고찰(考察)해 본다면, 바로 진한의 주도를 기자조선, 위만조선 교체기에 기자조선의 유민들인 육촌이 내려오면서 진한의 핵심 지역을 차지하였고, 위만조선 멸망기에 박혁거세로 대표되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다시 내려오면서 받아들여 서라벌을 세웠다는 뜻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근거는, 바로 기자조선의 멸망기에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準王)이 한반도 남부에 진국을 세웠다는 내용이 근거로서, 훗날 진국은 위만조선보다는 한나라와 교류를 하려다 한나라와 위만조선간의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본다면, 기자조선의 후손들이 진국의 경주 지역에 진한을 이루었다는 것은 육촌의 근거로 확인할 수 있고, 다시 위만조선이 멸망되었을 때, 고조선의 나머지 후손들인 박혁거세 일가가 진한으로 내려오면서 서라벌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박혁거세 신화를 보면, 박혁거세의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에 대한 언급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화의 내용을 자세히 본다면 이미, 진한이 만들어진 이후에 백마가 나타났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백마는 바로 왕의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적어도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왕으로 등극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진국의 구성원으로 마한, 진한, 변한을 언급하고 있는데 마한할 때 마(馬)자는 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고대에는 크다(大)는 뜻을 가지고 있고 또한 백(白)자는 바로 촛불을 형성화한 글자라는 점을 상기할 때 바로 백마(白馬)는 바로 왕(王)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1973년에 발굴된 천마총(天馬冢)의 천마도(天馬圖)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천마도를 자세히 보면 바로 순백의 천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바로 백마는 신라의 왕실을 상징하는 상징물임을 우리는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예로 과거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泗泌)의 강 이름을 백마강(白馬江)이라고 명명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백마가 가지는 뜻 자체가 바로 고대에는 왕을 상징했었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주색 알을 낳았다고 할 때 자주색(紫朱色) 역시 고대에는 왕을 상징하였던 색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미 박혁거세가 등장하기 전 일가는 왕으로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육촌의 촌장들이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양육(養育)하여 왕으로 모셨다는 내용은, 이미 박혁거세가 왕이 되기 전, 왕의 아들이 아니라면 절대 성립할 수 없는 내용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슷하게, 알영(閼英)이라고 하는 부인과 이른 시기에 혼인하는 내용 역시 물론 신화라는 내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왕의 아들 즉, 세자(世子)가 아니라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부분은 바로 나정(蘿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나정이라고 하면 우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정(井)이라는 글자를 단순히 우물 정자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 및 착각일 수 있습니다. 박혁거세 신화를 보면 나정에서 탄강하여 동천(東泉)에서 목욕시켰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 나정이 우물이라면 우물에서 나온 아이를 동천이라는 샘에서 또 다시 목욕을 시켰다는 내용이 되는 것인데 내용이 기괴(奇怪)하게 중복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신화라고 해도 지극히 모순이 되는 내용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정의 정자는 우물보다는 정전제(井田制)나 시정(市井)으로 상징되는 토지적 개념, 정확하게 말하면 도성(都城)과 같은 개념으로 이미 몇 차례 유적 발굴을 통해 팔각형의 대형 건축물이 나정터에서 발굴이 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경주의 월성(月城)과 같은 작은 도성이었거나 신궁(神宮)과 같은 궁궐터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습니다만, 백마 자체가 가지는 왕이라는 의미 그리고, 백마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자주색 알이 탄생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나정은 우물이 아닌 진한시대 궁궐터였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라벌의 건국은 역사적으로 기원전 57년이라고는 합니다만, 신라의 건국은 박혁거세 이전 시기로 더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思料)됩니다.
참고로, 지금도 경주시 내남면에 보면 지백호(智伯虎)의 묘를 모신 사당이 있습니다. 바로 육촌 중 유일하게 묘소가 확인된 어른이시고 경주 정씨의 시조가 되시는데, 국내 모든 정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시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지백호는 알천 양산촌의 촌장이신 알평(謁平),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俱禮馬), 금산 가리촌의 지타(祗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虎珍)과 더불어 서라벌을 세우고 왕으로 박혁거세를 모신 것이라고 설명이 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지백호를 비롯한 육촌 촌장 모두 서라벌 건국 후, 모두 벼슬을 얻고 성씨(姓氏)를 사성(賜姓)받았다는 점으로 이것은 바로, 박혁거세의 건국에 같이 지원 협력하였다는 뜻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각각의 육촌은 지금 각각 우리나라 성씨의 시조들이 되시는데, 바로 신라의 건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즉, 지금 경주시의 양산재(楊山齋) 입덕묘(立德廟)에 보면 신라 육촌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볼 수 있습니다. 급량부 알평(及梁部 謁平)은 경주 이씨의 시조가 되시며, 사량부 소벌도리(沙梁部 蘇伐都利)는 경주 최씨와 진주 소씨, 본피부 지백호(本彼部 智伯虎)는 경주 정씨, 점량부 구례마(漸梁部 俱禮馬)는 경주 손씨, 한지부 지타(漢祗部 祗陀)는 경주 배씨, 습비부 호진(習比部 虎珍)은 경주 설씨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씨(姓氏)라고 하면 일부 성씨 족보에서 자연적으로 또는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와서 만들어진 성씨인 것처럼 기록을 한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는데,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성씨라는 것이 매우 신성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면 성씨 자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며, 성씨 자체가 바로 왕의 정통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성씨들은 모두 임금이 성씨를 하사하는 사성 제도를 통해 성씨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사례가 바로 박혁거세 신화를 통해 볼 수 있는 육촌의 사성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공화국의 주요 성씨의 분포도를 보면, 박혁거세로 상징되는 전체 성씨 중 인구 규모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박씨를 비롯하여, 경주 이씨, 경주 최씨, 진주 소씨, 경주 정씨, 경주 손씨, 경주 배씨, 경주 설씨 등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주요 성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신라가 건국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성씨들이고, 이후 왕조 국가에서도 생기게 되는 성씨들은 모두 임금이 사성을 통해 각 성을 하사하지 않는다면 성씨가 존재할 수 없고 족보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과 백성이 지금 대한제국의 복원을 바라지 않는다면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외국처럼 족보가 없는 국민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최근 법무부(法務部)에서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의 권고에 따라서 결혼의 허용범위를 팔촌에서 사촌으로 줄이는 방안에 대해 성균관(成均館)측에서 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만, 우리나라 유교(儒敎)의 총본산(總本山)인 성균관측도 딱한 것은 유교를 대표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단체에서 정작 임금이 존재해야 성씨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제국의 복원을 주장하는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각 성씨마다 족보를 만들 때, 분파(分派)라고 할 수 있는 파조(派祖)가 과거에는 왕조 국가에서 내려준 관직명을 따랐던데 비해 지금은 관직명이 없으니까 그냥 이름으로 분파를 형성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이름에서 이름으로 족보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축(家畜)들의 개량종(改良種)을 위해 만드는 가축 품종표(品種表)와 같은 개념이고 또는 마치, 과거 조직폭력배(組織暴力輩) 중 하나였던 조양은 씨의 이름을 딴 양은이파와 같은 식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얼마나 웃기고 코미디(comedy)같은 모습입니까. 성균관측에서는 사촌으로 결혼 범위를 허용하면 족보가 엉망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족보는 엉망으로 만들어진지 오래입니다.
저희 재건회에서 줄기차게 대한제국의 복원을 주장하는 이유도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이 정말 신성하게 존중받으며 가치를 인정받으며, 사람이 가축이 아닌 사람으로서 대접받는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으로 각 성씨들이 끝까지 온전하게 길이 보존되고, 더불어서 위대했던 우리의 대한제국이 일본(日本)과 영국(英國)을 넘어서 세계 어떤 국가보다 위엄(威嚴)넘치는 제국으로서 위상을 떨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부디, 성균관을 비롯한 유림(儒林)도 지금의 공화국에 안주하여 유교가 스스로 사라지는 꼴을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무엇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忠誠)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길인지 깊이 성찰하고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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