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애로 충주에 온 큰아들이 자전거 뒤에 앉아서 내 옷자락을 잡을 만큼 자랐을 때부터 나는 가끔씩 그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탄금대를 한 바퀴 돌기를 즐겼다. 충주에는 호암호라는 꽤 큰 저수지가 있는데 민물낚시하기에 아주 좋았다. 끈기를 가지고 한 여름 줄기차게 낚시를 한다면 길이30cm짜리 잉어 한 마리는 낚을 수 있는 낚시터였다. 나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여러 잡기에 한가지 한가지씩 돌아가면서 몰두했었다. 어느 한 여름 내내는 낚시에 미쳐서 새벽4시에 자전거를 타고 호암호로 낚시를 다녔다. 집에서 호암호까지는 자전거로 약 20분 거리였고 그 때 출근시간은 9시였기에 아침낚시가 가능했었다.
그리고 한 때는 바둑에 온 정신을 뺏겼었다. 나와 충비 입사동기인 정(鄭)형은 나보다 두 살 위였고 거의 프로수준의 1급 바둑이었다. 나 역시 춘천기원에서 하수와 상대해주는 조건으로 무료 출입을 하며 하루 종일 기원에서 세월을 보냈던 때가 있었던 자칭 강 3급 바둑 아닌가(그 때 하루 기료가 20원으로 기억된다). 우리 둘은 참 잘 만났다. 물론 내가 두 점을 깔고 두는 접바둑이었지만 승률은 서로 50%로 팽팽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 재미는 바둑 모르는 사람은 정말 모른다. 정형은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 축산학과를 2년 다니다 말고 충비 기원양성소에 입소한 아주 과묵하고 나와는 죽이 잘 맞았던 친구였다. 언젠가 영택이가 지금은 고인이 된 상훈이와 같이 나를 찾아 충주로 놀러 왔던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지형 친구는 자기 친구나 매 한가지라며 같이 어울리며 술값을 자기가 냈던 좋은 친구였다. 정형은 충비에 다니면서 꽤 늦은 나이에 가정을 이뤘는데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지금까지 결혼식사회를 한 번 그리고 주례를 한 번 서 봤는데 사회 한번은 정형 결혼식이었고 주례 한번은 내 둘째 아들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그때의 결혼식주례사는 예전에 여기 36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기억이 있다. 근데 이 결혼식주례가 한번 해볼 만 해서 내 개인명함에도 ‘결혼주례봉사’라고 올려놓고 뿌려도 봤지만 그 뒤로 더는 주례를 서보지는 못했다. 요즘 내 명함이다.
지 병 석(BS CHI) / Walking Travel Writer
+82 19 319 8741 / bschi@naver.com
1946춘천출생. 도보여행작가/결혼주례봉사
“카미노 데 산티아고”순례여행(봄. 가을2회)
건설회사 국내외 플랜트건설현장소장역임
배낭여행: 카자흐스탄, 베트남, 미국서부5개주, 스페인
멕시코, 카메룬, 인도네시아, 호주
한참 후 내가 중동 노가다로 진출했다 돌아와보니 정형은 여천의 호남에틸렌공장 공작과 계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가 있었다. 이 밖에도 나는 충주에 사는 동안 고스톱, 등산, 테니스, 자전거여행 등등 참 여러 분야에 골고루 미쳤었다.
충주 하면 떠 오르는 명소 중 한 곳이 수안보온천이다. 그런데 수안보온천을 행정구역으로 충주에 묶어 놓기에는 거리상 무리가 있어 보였다. 요새는 도로가 좋아져서 얼마 안 걸리겠지만 그 당시는 거의 한 시간은 걸렸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온천목욕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충주에서 4년 반을 살면서도 한 두 번밖에는 간 기억이 없다. 달천강에서 오리그물로 물고기 잡아 강가에서 매운탕 끓여먹던 장면도 한 장의 추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 때 즉 1970년대는 중동건설 붐으로 노가다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 이기도 했다. 중동 한번 다녀오지 않으면 어디 가서 대화에 끼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중동 노가다들의 손목에는 오메가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집에서는 소니580이라는 스테레오 카세트 라디오가 쾅쾅 울렸던 시절. 이름도 고약한 ‘개부랄티’라는 영양제가 흘러 들어왔고 사우디 노가다 2년 만에 집 샀다는 얘기는 그 당시 흔했다. 현대건설이 똑 같은 작업 유니폼을 근로자들에게 입혀서 전세비행기에 태워 사우디 공항에 내려 놓았더니 사우디정부가 무슨 침략군들이 들어온 줄 알고 놀래서 입국을 불허했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들리던 때이기도 했다.
충비에서 암모니아센터 공장 짓는 건설현장에 얼마간 몸 담갔다고 내 스스로를 노가다라고 치부하기엔 그 후의 충비 생활이 이렇게 너무 노가다 답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게도 중동 붐 시류에 힘입어 정말 노가다 길로 들어서게 되는 기회가 이 때 찾아왔다.
- 이란 동광산 건설현장에서 일할 철골 및 보일러설치감독.
- 플랜트건설 유 경험자. 영어로 의사소통 가능한 자.
암모니아센터를 건설 시 미국인 공사감독 뒤 바라지해주면서 몇 마디 주어들은 하우스보이보다도 못한 헬로 오케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용기를 내서 응모했다. 큰 플랜트현장에서 미국사람과 같이 일한 경력을 인정해 줬는지 나는 1977년5월8일 약관 32세에 국제 노가다 반열에 오르기 위해 이란행 에어 프랑스에 몸을 실었다.
어느 회사나 다 입사동기가 있다. 그리고 그들간에는 서로의 동정에 대해서 꽤나 민감하다. 내 입사동기는 약60명쯤 됐는데 그 중 몇 명은 그 때도 아주 좋은 회사로 알려져 있었던 주택공사나 또는 울산 등지의 신생 유망회사로 자릴 옮겼지만 해외로의 진출(?)은 내가 처음이었다. 입사한지 4년5개월 만에 나는 충비 근무를 접었다. 출국 전날 만삭인 집사람과 5살 3살 된 두 아들은 진도 처가 집으로 내려 보내고 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울 막내고모 댁으로 올라갔다.
내게는 고모가 세분 있는데 평소 호칭이 큰고모, 가운데고모 그리고 막내고모 이랬다. 큰고모는 지금 온의동에 사시는데 올해 구십 일세가 되셨는데도 미들 힐(middle heel) 을 신고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작년 늦가을 내가 찾아 뵙고 오늘 점심에 영선이하고 막국수 먹기로 약속이 돼있어 내려왔다고 말씀 드렸더니 잠깐 있거라, 하시더니 돈3만원을 쥐어주신다. 영선이 막국수 사주라고 주시는 돈이다. 우리 고모님들이 기억하는 내 친구는 영선이, 길남이, 상용이, 호범이 그랬다. 그 중에 두 친구를 잃어버렸다. 길남이 어머니는 내 가운데고모와 어릴 때 친구이시다. 대인관계에서 사근사근하고 예의 바른 영선이는 우리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그저 ‘영선이, 영선이’ 하셨을 정도로 우리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그날 나와 영선이는 우리 큰고모께서 주신 돈으로 수육 한 접시 시켜서 막국수 위에 얹어 김치로 싸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이게 낼 모래 70을 바라보는 노객이 할 짓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2011-07-02
첫댓글 병석이 ! 자넬 만나러 지금은 고인이된 상훈이와 충주에 갔다온지도 어언 40 년이란 세월이 흘렀네그려, 아직도 잊지않고 있으니 자넨 정말로 천재네그려.....
지난 정초 동기모임에서 참 오랜만에 만났지만 별로 얘길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져서 많이 미안했다. 이번 8.15에 다시 만나길 기대하며 그 때 종길인가(?)왜 할머니하고 같이 살던 후배 얘기도 좀 하고 회포를풀자.
젊은 시절 열심히 살어온 우리세대의 일면을 보는거 같습니다.
이런 좋은 장을 잘 운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끔 자신의 살아 온 족적을 돌아보게 되지요. 이번 참에 그걸 생각에서 모자라는 표현 일지라도 글로 적어서 남기고 싶어서 시작을 했는데 잘 부탁합니다^^ 동수형의 건투를 빕니다.
친구들 중 해외생활을 비롯하여 남다른 생활경험을 하고있는 병석형의 그 옛날의추억들을 세세히 생생하게 전해줌에 대해 그지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번번히 격려의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글은 참 쓰기가 어렵네요. 논 픽션이다 보니 많이 조심이 됩니다. 그래도 설혹 좀 실수를 한다 해서 뭐 크게 잘못 될 일이야 있겠습니까, 하는 생각입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사를 뛰어 넘어 우리의 사회 경제 변화사를 펼쳐 주시는 좋은 글을 읽으며 감사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올 여름 춘천 정기총회에서 꼭 만나볼 작정입니다.
see you in chun ch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