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 | 오성인
AI프로필 외
화질이 낮거나 너무 어두워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여덟 장에서 열 장 정도의 사진만 건네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즉석에서 만들어주겠다는 공지에 따라 나는 과거에 찍어 두었던 사진을 고른다 엄선한 사진 속의 나는 누군가와 술을 마시면서 떠들고 있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종잡을 수 없는 미래를 가늠하듯 사물과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미래는 때때로 무심코 내다 버린 물건이나 잊혀진 인연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지만 나는 무엇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지나온 과거는 지금 머무르고 있는 자리의 위아래 옆 중 어디에 있을까 시선과 얼굴의 각도는 수시로 바뀌고 바뀌는 방향을 따라 나는 웃고 운다 유쾌하고 우울하고 슬프고 울분으로 팽배했던 날들이 화면 너머로 흘러간다 얼마 후 입어보지 못한 옷을 입고 생소한 음식을 앞에 두고 지금껏 간 적 없는 나라의 번화가에서 세계가 얼마나 비옥한지, 내게 속하지 않은 것들로 얼마나 충만한지* 한번 보라고 내 모습을 본딴 사람이 나에게 낯선 이국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어떠한 걱정과 절망과 우울과 희열도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므로 그는 나의 과거도 현재도 아니고 미래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화면 너머의 세계에도, 화면을 닫아도 시시각각으로 과거를 향해 아득해져 가는 세계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나는 뜨거운 피를 지닌 사람, 비옥해서 금방 환멸이 나는 세계보다 피에 녹아있는 자유를 믿는 사람, 누구에게로 어떻게 흐르든
*루이즈 글릭(Louise Elisabeth Glück, 1943∼ )의 시, 「저녁기도: 재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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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즐겁다면
언젠가 처칠이라는 정치인이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 위에 올라가던 중 실수로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청중들이 박장대소 하는 모양을 보고는 자기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국민이 즐겁게 웃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넘어지겠다고 공언을 했다지 그 후로 그가 정말로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척 앞으로 넘어졌는지 뒤로 넘어졌는지 넘어져서 코가 깨졌는지 머리를 부딪쳤는지 다리를 다쳐 며칠 정도 절뚝거렸는지, 또 이것을 본 청중들은 과연 그때처럼 배꼽을 잡고 박수를 치면서 정신없이 웃었는지 아니면 이제 식상하니 그만하라고 만류했는지 정치하는 사람이니 체통 좀 차리라고 쓴소리를 날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이 원한다면 제 몸 아끼지 않고 들어주겠다는 말은 그가 이승을 떠난 뒤에도 귓전에 생생하고 한편으로는 서늘하게 가슴을 파고드는데 어째서 우리는 눈물 쏙 빠질 만큼 웃어보기는커녕 속 시원하게 화도 내지 못하는 걸까 돌연변이 된 자연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면 천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대지진으로 파괴된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를 흘려보내겠다는 이웃을,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는데도 바다를 위해 목소리도 제대로 보태지 못하고 왜 두고만 보아야 하는가 마셔도 아무 해가 없다 하니 그 물로 밥을 하고 양치를 하고 목욕도 하고 수영도 즐기고 원자력 발전소 앞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로 삼시 세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마음이 놓일 텐데 불안한 마음이 요동치는 식탁에서 우리는 왜 가짜가 되어야만 하는가 저 시종일관 불통으로 일관하는 검부(檢部)의 무자비함 대신에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옹졸하게 화를 내고 기름값이 말도 안 되게 올랐다고 괜한 주유소 사장에게 화풀이를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는* 우리는 언제쯤 국민이 즐겁게 웃을 수 있다면 맹세코 다시금 넘어지겠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울분을 터뜨릴 자유를 잃어버린 나라에서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일부 구절을 변용.
오성인 |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눈의 목격자』,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