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한편 '평강'(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희락' 또는 '기쁨'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
[롬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본절은 19절과 함께 17절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삽입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그보다는 17절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고 확인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이로써(엔 투토) -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구절로서 여러 견해가 있으니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령 안에서를 의미한다. (2)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리킨다.
(3) '이로써'를 가리키는 헬라어 본문 '엔 투토'는 '따라서', '이렇게 하여'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17절에서 표현한 진리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4) '이 방법들로써'를 의미한다. (5) 바울은 오직 교회 안에 평화를 진작시키고저 하는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엔 투토'라는 단수를 사용했다. 여기서 (4)은 매우 약하고 (5)은 무리이며 (1)과 (3)은 문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2)보다 덜 자연스럽고 덜 만족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2)가 가장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서 볼 때도 그러하고 또 다른 사본에 '이로써'가 단수가 아닌 복수로 쓰여졌다는 데서 더욱 확인된다. 이 복수는 분명히 필사자가 17절 하반절에서 말한 3가자 열매,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복수로 쓴 듯하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경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 열매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갈 5:22, 23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도 '열매'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단수인 '카르포스'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별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가 성령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기쁜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서로 비방하는 자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말은 16절의 '비방을 받다'(블라스페메이스도)와 대조적인 의미로 보아야 옳다.
즉,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람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칭찬을 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사람에게 인정, 혹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바울 역시 그의 서신 딤후 3: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과 그 결과를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