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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중세의 고려국 스케일을 말한다.이전의 통일신라와 이후의 근세 이씨조선 규모도 비교했다.
삼국사기와 중국정사 조선전및 동이전 들을 보면,삼국의 고구려는 '요동군공 고구려왕,백제는 대방군
공 백제왕,신라는 낙랑군공 신라왕' 이라는 봉작기사들이 나온다.이는 모두 제도권의 학자들이 지정해
놓은 정사서들의 기록 이기에 하자나 오류를 말하기엔 다른 근거가 없다.문제는 이러한 3국 왕들의 거
창한 봉작의 직책들이 반도와는 어울리지 않고,대륙의 중원에 있던 직책의 자리란 것이다.동양사에서
나라의 규모이자 스케일을 말해주는 '군현제(郡縣制)' 실시는 반도의 3국이나 조선에서 출발했던 것이
아니다.군현제(통치 관할지역)는 대륙 皇朝의 중앙정부가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행됐다.종
친,정부 수립에 연대한 토호,공적을 쌓은 충신들을 지방으로 보내 자리잡게 했다.군현제는 秦나라(BC
249~207)때 시작했다고 역사는 쓰나 정착은 세월이 한참 지난뒤에 됐다.한편 열도의 역사를 말하는 일
본서기(정사서)는 지방의 군과 현을 구분하는 '지리지' 자체가 없어 스케일을 알수가 없다.
2, 그러나 이제도가 나름의 구실을 할수있을 정도로 확립된 시기는 前漢(서한:BC 206~AD 24) 시대를
지나 후한(동한:25~219)의 순제(順帝:126~144)때 이르러 정착된다고 역사는 말한다.한편 조선사의 삼
국분할 시대에는 실현된 군현제는 없었으나,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구
분하고,구체적 군현제의 확립은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을 '117郡, 293縣' 으로 나누면서 군현제가
자리를 잡는다고 역사서는 쓴다.즉 신라에는 지방에 郡公으로 구분된 王이 117명,縣의 縣侯가 293명이
나있던 통일신라를 말해 놓고있다.3국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삼국사기를 보면 왕실의 대를 잇는 왕자
를 世子가 아닌 太子로 부른다.삼국사기의 나라별 기사들도 世家가 아닌 本紀라고 쓰는 것이 바로 3국
이 별도의 황제국 임을 말해주는 것이다.통일신라의 강역을 물려받고 또 시대의 대부분(고종시대까지)
을 고구려 땅에서 출발했던 역사의 고려도 황제국의 위상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한다.
3, 중국사에서 군현제를 정착시킨 후한의 順帝시대 군현의 규모는 '105郡,1180縣' 이다.대략 1군(王)에
10여개의 현(縣侯)이 소속되어 있었다.즉 황제 아래에 105명의 王이 있었고,1180 여명의 縣侯(현령,현
장,현감)를 두었던 것이다.중국사의 9州나 13州,조선사(통일신라)의 9州는 실제로 분할된 封地나 식읍
의 영토가 있었던 지방조직이 아니라 방향별(8方+중앙의 1방= 9州,12方+중앙의 1주=13州)로 지정한
것으로 상징적이다.州는 군과 현에 대한 감찰 기능만을 가진 조직으로 중앙정부의 중신들이 주의 刺史,
州牧을 맡았었다.따라서 고려사의 지리지에 기록된 고려강역의 스케일인 ' 4京 8牧 15府 129郡 335縣
29鎭' 은 사실상 반도라는 그릇에는 담을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역(통치지역)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큰 고려를 반도의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시켜 놓고 고려사에 의한 고려를 해설하는 것은 역사서
를 빙자한 오만한 사기다.고려사를 보면 왕이 129명,제후가 335명이나 있었던 황제국으로 쓴다.
4, 역사의 기록이란 것은 일정한 강역에 살던 사람들(선조와 후손들의)의 이어 달리기(릴레이)임을 믿는
다면,고려에게 강역을 물려준 통일신라는 117명의 왕과 293명의 제후가 통치했던 스케일의 나라였고,
고려를 물려받은 근세조선은 전란과 외침으로 인해 약간의 변동이 있었기는 하지만,지방조직으로, '6府,
19牧,4대호부,45도호부,91郡,180縣' 을 두었다.이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한 기록만 보아도 근세
의 조선국은 최소한으로 축소해도 91명의 왕과 180명의 縣侯가 통치했던 皇朝(신증동국여지승람)국이
아니였든가?이처럼 광대한 조선사의 영토를 조그만한 반도에 쭈글뜨려 놓고,근세조선의 '祖와 宗' 의
종묘와 廟號를 해석,해설하면 정말로 곤란하다.고려시대의 변방 조직인 진(鎭)만 해도 대략 인구가 5만
이 넘는 군사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역사서에 쓰여져 있는 조선(고려,통일신라 등)과 반도에 입식
한 반도의 조선은 그 스케일 부터가 다르다.
5, 우선 군현제(郡縣制)의 지정을 따라 조선사의 郡과 縣의 스케일에 대한 개념과 정체를 역사서에서 살
펴보면,우선 군국(郡國:요동군공 고구려국 왕)의 국(國)은 封地名으로 '황제가 일부분의 토지를 王과 侯
(제후)에게 식읍(食邑)으로 나누어 주고(分封),그 이름을 왕국과 후국으로 불렀다.郡의 태수가 통치하던
군공의 왕국봉지는 1郡에 상당하며 '郡國' 으로 불러(요동군공 고구려왕,대방군공 백제왕,낙랑군공 신라
왕 등) 해당지역의 '國王'으로 삼았다.즉 國 이란 자체는 封地를 말하는 것이지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
다.그러나 郡 아래의 縣은 侯國의 봉지로서 1縣으로 국한했다.후한시대의 王(군공이자 태수)휘하 에는
10여명의 縣侯가 소속되어 있었다.이를 통일신라 경덕왕(9세기 중반)시대로 비교하면 신라에는 '117명
의 국왕과 293명의 제후' 를 거느렸던 황제의 싢라가 된다.신라는 1개 郡(王)에 3~4명의 縣侯를 두었던
것이 된다.주로 황제의 명을 받아 감찰 업무를 했던 주자사나 주목들은 관할봉지나 통치 군현은 없었지
만 황제의 명을 받아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라 위력은 대단했다.
6, 주자사나 州牧들이 하는 일은 황제의 명을 받고 소속의 군현을 순찰하면서 군과 현의 관리들과 지방의
强豪(토호)들을 감찰하고 불법의 탐관 오리들을 탄핵했다.이는 근세 조선조에 잠시 등장하는 암행어사의
업무를 했다고 볼수가 있다.府는 도호부사와 대도호부사들이 통치하는 큰 고을로 부사나 府尹이 다스리는
도시의 의미가 있다.京에는 京兆尹이란 종2품의 고관들이 다스렸고,대도호부사는 정3 품이란 고관이 다스
리는 도시를 말한다.그러나 통일신라의 반도해설 처럼 충청북도 충주에 '中原京(中京)' 을 지정해 놓고,근
처 100리도 안되는 동쪽의 원주에 나라의 '北原京(北京)' 을 자리 잡도록 강제해서는 곤란하다.최소한 북쪽
으로 1천리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북경이란 명칭의 체면이 설 것이다.더하여 반도에 주입한 신라의 서쪽도
아니고,단지 충주에서 서쪽으로 100여리 쯤 떨어진 같은 충북 청주에 신라의 '西原京(西京)' 을 설명함은
통일신라와 역사의 京 자체를 무시하는 허접한 사기가 된다.
7, 현(縣)의 대부분은 郡의 王國에 소속되어 있었고,縣의 侯 아래에는 '鄕,亭,村' 을 두었다.縣에는 1만 戶가
넘는 현의 장관을 '縣令' 으로 부르고,1만호 미만의 장관은 '縣長,縣監' 으로 불렀다.현이 관할하는 鄕(鄕長)
이 있고,향이 관할하는 정(亭)이 있었다.亭(亭長) 이래에 里를 두었는데,50戶~100戶(가구) 정도가 1里를 구
성했다.里에는 里長을 두었고,10리 마다 1亭을 설치했다.대체로 10정이 1향이 되었다.동국여지승람에 고
을마다 많이 등장하는 '部曲' 은 본래 군대의 편성 단위였다.대장들이 관할하는 군영을 5部로 나누고 부별
로 지휘장군을 임명했다.이어 部 아래에 曲을 두었고,또 曲 아래에 屯을 두었다.屯은 둔전제란 제도와 둔전
골(屯田谷)이란 지명까지 탄생 시켰다.부곡은 봉건제가 정착되면서 부호나 군벌(토호)들 私兵의 대명사가
되었다.봉건제 하에서 농민들이 전호(佃戶:소작인)나 農奴 였듯이,봉건제 下의 부곡의 병사들은 軍奴였다.
16세기 말 근세조선의 원균과 이순신등 무관들이 근무지에서 '萬戶' 란 직책을 수행했다는 기사들은 이들
이 1만호 이상의 현령급 지방장관을 역임했다는 뜻이다.
8, 전한과 후한을 통해 강역이 가장 넓었고 군현제가 정착되었을 때 대제국 漢나라는 105군,1180현을 두었
다고 후한서 지리지는 쓴다.즉 1개 郡에 소속된 縣은 대략 11개현 정도가 된다.그러면 한나라는 郡의 1왕에
縣의 11제후가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이러한 스케일을 삼국사기 경덕왕 16년(757년) 12월 기록과 비교
해 보면 통일 신라는 '사벌주 10군 30현,삽량주 12군 34현,청주 11군 27현,한산주 27군 46현,수약주 11군 27
현,웅천주 13군 29현,하서주 9군 25현,완산주 10군 31현,무진주 14군 44현을 관할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즉 '117명의 郡王과 293명의 縣侯' 를 거느렸던 통일신라 황제국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서가 말하는 것이 된
다.그런데 이런 통일신라는 고려와 근세조선으로 이어 달리기를 하면서 상황에 따라 규모의 부침은 있었다.
그러나 근세조선의 말기에 이르러서도 '91명의 왕이 통치하던 郡과 180명의 縣侯들이 다스렸던 縣' 이 있었
다고 정사서들이 쓰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9, 즉 270여명의 왕과 제후를 통치하에 두었던 황제국의 면모를 과시했던 것이다.그런데 이럴때의 통일신라,
고려,이씨 조선의 정치외교사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중국사를 치장하고 있는 나라들의 하부조직으로 정삭과
봉작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종속관계에 있었다고 설계가 되어 있다는 이상함이다.이는 목적을 가지고 곡필한
불충의 장난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또하나 염두에 둬야 할 것은 현재 반도(남한과 북한 모두)에 구분해 놓은
'郡과 面' 이란 행정 구역을 역사의 '郡이나 縣' 으로 이해해서는 착각의 오류가 생긴다.당시 역사서에 기록된
郡들과 縣들의 규모는 차이는 있지만,현 남한 면적보다 큰 왕국과 현후의 경우가 많았다.비교해 본다면 현 미
국의 텍사스 州의 면적은 남한의 7.1배 크기에 해당 하지만,우리의 郡으로 해석되는 텍사스 전체의 카운티는
254개 정도다.이걸 한국과 비교 한다면 한국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군과 면으로 쪼개져 있다는 것을 말할수
있다.한국의 郡을 몇개를 합치고 道 면적 보다도 큰 카운티(郡)가 있는 것이 된다.물론 아주 작은 카운티가 있
는 州도 있다.현 중국의 縣들도 한국의 몇개 郡을 합쳐 놓아야 할 면적의 縣들이 많다.
10, 역사의 백제는 고구려에서 시작을 했고 그것도 고구려 남쪽으로 내려와 대방군 公으로 발전해 백제왕이
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의 요동군공이다.군명인 요동군공은 역사의 幽州에 속했는데
이 유주는 동천왕 시대에 고구려를 침공했던 관구검의 고향이며 중심은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이라
고 했다.바로 이곳의 인근지역(산서 남부,하남북부)을 관할했던 관구검이 유주자사를 했다고 했다.역사의 유
주와 하동,요동의 중심은 약간의 이동은 있었으나 대체로 지금의 산서성 '臨汾과 襄汾' 지역과 그 이남이 된다,
이곳에서 관구검과 공손씨,고구려의 왕들은 요동태수와 유주자사,요동군공과 고구려 왕을 지냈다.魏 나라가
중원을 장악했을 때 公孫淵 일가들의 활동지역 역시 고구려의 요동군공 지역이다.공손씨들도 하동이자 황하
이북의 일부 하남의 북부에서 '요동,하동,유주,탁군,복양' 지역 일대에서 활동했다.이 지역에서 魏나라가 공손
연에게 부여했던 낙랑군공의 봉작도 바로 관구검이 자사로 있었던 유주에 속해 있었다.
11, 문제는 이럴때 신라의 왕들이 중국사를 치장하는 나라들로 부터 신라도 요동에서 '낙랑군공 신라왕' 이란
封爵을 받았다는 기사들이 있는데,이기사들을 반도에서는 놓을 곳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이를 반도로 옮겨
해설을 하면,지금의 요녕성과 길림성의 新요동지역에서 신라왕이 낙랑군공을 했었다는 엄망의 해설이 나온다.
즉 현실의 요동지역이 부여나 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의 강역도 된다는 것이다.하동의 요동태수 공손연(~236
년)은 공손강의 차남이다.공손강은 고구려와 관구검의 유주(요동)에서 낙랑군공과 요동태수(임분,양분)를 계
승했던 토호였다고 중국사는 쓰고있다.
또하나의 예를 든다면 지금의 요녕성 성도인 沈陽(선양)은 현재의 중국의 공산당이 권력을 잡기 前까지는 '봉천
성의 奉天(펑천)' 이었다.또 삼국지 연의의 제갈량의 삼고초려 전의 관직은 '武鄕侯' 였고,그를 기리는 사당은 지
금의 사천성 成都에 '武侯祠' 를 남기고 있으며,그를 기리는 사당은 현 중국의 전역에 어디든 있다.서울의 東廟가
재물 상징의 관우 사당이라면,大邱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가 있다.당시의 鄕은 작은 마을이 아니라 큰고을
이었음을 무향후가 증명한다.현대판으로 역사서에 나오는 村들을 다시 비교해 본다면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2~3
시간 쯤가면 '華西村' 이라는 곳이 있다.이곳은 모두 13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촌에서 13촌은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이 화서촌은 나라속의 또다른 나라같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