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다원 사회 고려를 만들다 - 정치, 경제, 외교 편
3장 다원적 국제 질서 속의 고려왕조
3-3. 대몽항쟁, 무신정권의 붕괴와 강화
몽골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나라입니다. 1206년 징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대칸(大汗)으로 즉위하면서 몽골이란 국명을 쓰기 시작하였고, 1271년 손자 쿠빌라이(세조)가 남송정벌이 한창이던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바꿀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 국호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제국의 대내외 정책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고려가 몽골제국과 처음 접촉한 것은 몽골 건국후 10여 년이 지난 때입니다. 금나라가 쇠망할 기미를 보이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웁니다. 그러나 몽골에 쫓기던 거란군은 고려로 쳐들어오고, 김취려장군이 이끈 고려군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1218년(고종 5) 9월 지금의 평양 인근 강동성으로 들어갑니다. 이듬해 2월에는 눈때문에 보급로가 끊긴 몽골군을 도와 강동성의 거란족을 섬멸합니다. 그 뒤 몽골과 형제맹약을 맺지요. 그러나 이 맹약 이후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 하는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협정이었습니다.
고려는 감당하기 힘들었지요. 그러다 1225년 공물을 요구하러 온 몽골 사신이 귀환하던 중 국경 근처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양국 관계가 파탄이 납니다.
몽골은 1231년(고종 18) 8월 살리타이(撒禮塔)을 앞세워 고려를 침략합니다. 이후 1259년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 땅을 짓밟았습니다. 관료 대부분이 천도에 반대했지만,
당시 집권자 최이(崔怡)의 주도로 천도에 관한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천도 이후 대몽항쟁은 최씨 무신정권이 주도하게 됩니다. 고려는 약 30년에 걸쳐 항쟁을 이어갔지만, 원 간섭기에 "고종실록" 등이 다시 편찬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많이 축소 되었고, 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귀주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항쟁의 생생한 모습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박서와 김경손이 지휘한 고려군과 몽골군의 치열한 전투는 고려군의 기상과 용맹을 보여주는 대몽항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지요. 몽골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켜낸 두 장수의 충성심과 기개는 고려가 몽골의 공세를 30년 동안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 몽골군이 귀주성을 포위했을 당시 70세에 가까운 한 몽골 장수가 있었는데, 성아래에 와서 성곽과 무기들을 둘러보고는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스무살부터 전투에 나가 천하의 무수한 성을 공격해봤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성은 본 적이 없다. 이 성에 있는 장수들은 뒷날 모두 장수나 재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 103, 박서 열전
수많은 전투를 치른 몽골의 장수조차 이처럼 칭송할 정도였지요. "고려사 절요"에 따르면, 몽골군은 1231년 9월과 10월, 11월, 12월 네차례에 걸쳐 공격을 거듭했지만,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몽골은 전쟁 종식을 명분으로 개경 환도와 국왕의 '친조(親朝)', 즉 고려 국왕이 직접 몽골에 들어와 대칸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국왕과 문신 관료 집단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무신 권력자들은 몽골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천도와 항쟁을 주도한 최고 권력자 최이가 죽고 아들 최항이 집권(1249년 고종 36)한 이후, 차차 강화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몽골은 개경 환도와 친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 7월에 여섯 번째 침략을 개시하고 이때 고려의 피해가 엄청났지요. 1257년에는 최항이 죽고 아들 최의가 집권했는데, 1년 뒤 김준 등에게 피살되고 맙니다. 이로써 최씨 정권은 막을 내리고, 형식상으로나마 국왕과 문신 관료 집단 중심의 왕정이 회복됩니다. 1259년(고종 46) 4월에는 태자(뒷날 원종)가 몽골에 가서 항복하는 것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어, 약 30년간 이어오던 전쟁도 끝이 납니다.
강화를 주도한 것은 국왕과 문신 관료 집단이지만, 강화가 가능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장기 항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이 더는 항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입니다.백성 중에는 침략에 시달리다 못해 몽골에 투항하는 사람도 생겨났고, 이들이 몽골군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태자는 몽골로 가는 도중에 몽골의 대칸(몽케칸, 재위 1251~1259)이 사망한 소식을 접하고는 죽은 대칸의 동생 쿠빌라이를 찾아갑니다. 고려 태자가 직접 쿠빌라이를 찾아와 강화를 요청한 것은 대칸 자리를 둘러싼 분쟁의 와중에 쿠빌라이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다. 옛날 당나라 태종도 정복하지 못했는데, 고려의 태자가 왔으니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반겼습니다. 이로써 남송 정벌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쿠빌라이는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이른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원종에게 약속합니다. 불개토풍은 이후 원이 고려의 내정에 간섭 하려 할 때미디 고려가 이를 막을 명분이 됩니다. 고려인의 끈질긴 대몽항쟁이 이러한 관계를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몽골이 강화의 또 다른 조건으로 내세운 개경 환도는 최씨 정권의 붕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준, 임연 등 무신 권력자들이 다시 실권을 장악하면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몽골과의 강화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임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환도를 지연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몽골은 무신 실력자들을 몽골로 소환하려 하지요. 고종의 뒤를 이은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은 이런 몽골과 결탁해 무신 실력자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합니다.
1268년 12월 김준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몽골과 밀착하려는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안경공 창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하지만 원종의 요청을 받은 몽골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종의 복위를 명하지요. 이 해 11월 쫒겨난지 5개월 만에 원종이 복위합니다.
1270년 2월 임연이 사망하고 아들 임유무가 권력을 계승하지만 이 해 5월 피살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원종은 돌아와 개경에 머물면서 마침내 환도를 선언합니다.
이 때 삼별초가 환도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1273년 4월에 제주도에서 결국 진압되고 맙니다.
삼별초의 난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합니다. 초기 삼별초 항쟁은 대몽항쟁을 명분으로 민심을 결집하고, 몽골과 결탁해 삼별초군을 해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국왕과 지배층에 반기를 든 반몽골, 반정부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민이 그들에게 호응했지요.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에 쉽게 굴하지 않은 고려인의 자존심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닙니다.
한편으로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군이지만 무신 실력자들의 사병 집단 노릇을 할 정도로 무신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만큼 몽골과의 강화를 계기로 국왕과 문신 집단이 몽골과 밀착하자 지위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기득권을 잃지않기 위해 항쟁을 일으킨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삼별초 항쟁은 무신정권이 낳은 부정적인 유산이자, 반정부적인 정치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은 삼별초군이 장차 일본-삼별초-송나라로 이어지는 반몽골 국제 전선으로 확장될 것을 우려하여 신속히 진압하였습니다. 삼별초 항쟁은 이같이 동아시아를 제패해 세계제국을 구축하려한 몽골의 전략에 일정한 타격을 입혔을 뿐 아니라, 몽골이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나서도록 촉발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몽골하면 철저하게 다른 민족을 정복, 약탈하는 장면을 연상하는데, 정복과 약탈을 특징으로 하는 몽골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은 쿠빌라이 이전 유목제국 시기에 주로 행해졌습니다. 쿠빌라이 집권을 계기로 유목계 본지파(本地派) 대신 농경계 한지파(漢地派)가 득세하면서, 정복과 약탈 대신 중국을 천하의 중심인 중화(中華), 주변 국가와 민족을 오랑캐(夷)로 간주하는 화이론에 입각한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을 수용합니다. 이들은 수도를 몽골고원에 자리한 카라코룸에서 대도(大都, 베이징)로 옮기고 정치에서도 경험 많고 유능한 이민족을 폭넓게 기용하는 등 종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제국의 통치체제를 전환합니다. 그러나 주변 나라의 군사권과 국왕 임명권을 철저하게 장악한 점에서는 이전 중국의 여러 왕조와 달랐습니다.
고려 정치사에서 몽골과의 강화는 100년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고려의 대외정책이 크게 전환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최씨 정권의 몰락이후 국왕과 문신들은 몽골과 밀착했습니다. 무신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고 왕권을 신장하려면 현실적으로 몽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몽골 공주와의 혼인을 요청하고 충렬왕이 일본 원정을 제안한 것도 그러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몽골의 고려 지배가 점차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1259년 원과 강화를 맺기 전까지 고려는 정복과 약탈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유목제국의 대외정책에 철저하게 저항했습니다. 칭기즈칸이 활발하게 이민족을 정복해나가던 시기, 몽골은 이른바 6사(六事, 여섯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고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을 감행했습니다. 여섯 가지 조건이란 왕의 자제를 몽골에 인질로 보내는 '입질(入質)', 호구조사 후 몽골에 '보고(報告)', 몽골군에 대한 '식량 지원과 납세', 몽골의 정복사업에 군사를 제공하는 '조군(助軍)', 몽골 관리인 '다루가치'의 주둔, 몽골군의 물자 보급과 연락을 위한 '역참 설치'를 말합니다. 이런 요구 조건은 화이론에 입각한 조공-책봉 체제, 즉 천자국이 제후국의 새로운 국왕을 책봉 형식으로 공인하는 대신 제후국은 천자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는 동아시아 세계의 오랜 질서와는 판이한 것이었습니다. '6사'는 뛰어난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략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전략에서 비롯된 조건들이었습니다.
밀리면서도 결코 모든 것을 양보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켜나가는 고려의 대외 전술은 오늘날의 '벼랑끝 외교' 전술을 연상케 합니다. 이 시기 고려는 대제국 몽골에 맞서 한편으로 협상하고 한편으로 저항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무려 16년 가까이 고려대장경 조성이라는 거대한 국책사업을 추진하여 국력을 결집했지요. 물론 내륙의 민이 원의 말발굽 아래 짓밣히는 고통을 외면한 채 지배층이 섬으로 옮겨간 사실은 달리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고려왕조는 실로 자존의식에 가득 찬 힘찬 자세를 견지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후 원 간섭기에도 몽골의 여섯 가지 요구 조건 가운데 제대로 관철된 것은 '입질' 뿐이었습니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단행한 1356년(공민왕 5)까지 약 80년간, 혹은 원나라가 사실상 멸망한 1368년까지를 '원 간섭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혼인하고 원나라의 승인을 받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지요. 원나라는 고려 국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원의 지배가 고려 사회 전반에 관철되지는 않았습니다. 원은 호구조사를 통해 고려의 세원(稅源)과 군사의 내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고, 고려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인 노비제 개혁에도 실패했습니다. 원 간섭기의 역사를 정치사만 놓고 보면, 고려는 원에 철저하게 종속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노비제 개혁과 호구조사에 기초한 군액(軍額, 군사 수) 파악이나 조세 부과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파악과 확보에 실패한 것을 보면, 원의 고려 지배는 제한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이 글은 "오백년 고려사"(박종기,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20)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요약자가 곁들인 글
첫댓글 장유선생님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갈고 닦으시는 젓대 소리는 거지반 잘되가고 있겠지요 .
언제쯤 쨩하고 출현 하실려우? ~~~
이 난리통에도 변함없는 열정을 보이시니 존경스럽습니다. 당분간 방콕입니다.
역사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