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니힐리즘과 영혼회귀
니힐리즘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 엄밀한 의미에서의 니힐리즘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니힐리즘의 의식은 19세기 후반 F.W.니체, M.슈티르너, F.M.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사상에 반영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급속히 퍼진 사상이다. 니힐리즘의 한 극(極)을 이루는 것은 절망적 니힐리즘으로서 일체의 주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다고 규정,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모든 것에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쪽이 있다. 다른 또 하나의 극은 무를 무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삶과 자유에의 길을 모색하는 그룹으로서, 실존주의는 원래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그리스도교 도덕이나 불교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의 전도(顚倒)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하였다. J.P.사르트르나 A.카뮈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도 역시 이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타개하려는 입장에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M.하이데거의 사상이 바로 그 선구(先驅)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 그 자체에의 순종을 강조하는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은 니힐리즘의 초극(超克)을 위한 모색이며, 또한 K.야스퍼스는 S.A.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세계(世界) 내의 무에서 반전(反轉), 세계를 초월한 초월자(超越者)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니체의 니힐리즘의 한계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는 첫째로, 존립하는 것의 비은폐된 것에로의 현전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는 플라톤에게서 선(아가톤)으로 해석됨으로서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함, 즉 가능조건을 의미한다.
존재를 가능조건, 그것도 존재자의 가능조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존재보다 존재자가 더욱 전면에 드러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곧 현전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며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망각으로서의 존재망각은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에서 백일하에 드러난다.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앞에 세워진 것으로, 그리고 인간을 앞에 세워진 것을 장악하는(percipere) 주관으로 파악함으로써 존재자에게만 주목할 뿐 존재자가 드러나는 場인 현전성,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중세에 의해서 예비 되고 그것의 시원은 존재를 선으로 해석한 플라톤에게까지 소급된다. 비록 플라톤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아니라할지도 그에게서 주관성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서양 형이상학의 근원적인 토대가 놓여 있는 것이다.
존재를 망각하는 이러한 서양 형이상학을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즉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는 무인 역사"(die Geschichte, in der es mit dem Sein selbst nichts ist)로 규정한다. 여기서 존재는 무(nihil)로 규정된다. 존재를 무로 규정하는 형이상학이 바로 Nihilismus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본래적으로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니힐리즘으로서의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 니체라면 니체의 철학 역시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일 수 밖에 없다. 니체가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이었다는 것은 그가 존재를 가치로 사유하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존립하는 것으로 사유되고 있다는 것은 존재가 존재로서 보여지지 않고 존재자로 보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존재가 무로 보여지고 있다면, 니체 역시 존재자에게만 주목하는 존재망각 속에 있는 것이다. 사실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초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도 니힐리즘을 극복하려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고의 가치들의 탈가치화로 경험하고, 지금까지의 가치들의 전도를 수행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를 제시함으로써 니체는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극복은 그의 철학 역시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이라면 진정한 극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니힐리즘에로의 "최종적인 휩쓸려 들어감"이다. 여기에서 니체의 니힐리즘의 한계가 드러난다.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를 사유하지 않았고 니체 역시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자 종말로서 존재를 가치로 사유함으로써 존재를 사유하지 않았다고 할 때, 이것은 서양 형이상학은 전적으로 존재와 같은 것을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다루기는 했으나 그것을 존재자와 연관해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임(was-sein)과 어떻게-임(wie-sein)에서 규정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무엇-임을 이데아로, 어떤 이들은 본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존재에 해당하는 본질은 존재자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은 존재를 언제나 존재자에서부터 묻는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로 사유하지 않은 이유가 드러난다. 또 형이상학은 존재를 Apriori로 규정하는데 이것 역시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자에서 사유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존재자 보다 "나중의 것"(das Aposteriori)이지만, 그것의 "본성에 있어서는" 존재자 보다 "앞선 것"(das Apriori)이다.
존재는 존재자에서부터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는 "있으며"(ist) 존재는 "현성한다"(wesen)는 사실을 형이상학은 망각하는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에서부터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결국 존재를 최고의 존재자인 신에서부터 규정하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을 존재-신-학(Onto-theo-logie)라고 명한다.
영원회귀 사상
독일의 철학자 F.W.니체가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내세운 사상. ‘영겁회귀’라고도 한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내용이다.
이 사상은 얼핏 보기에 ‘권력에의 의지’ 사상과 모순되는 결정론(決定論)처럼 생각되지만, 영겁회귀를 자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 똑같은 생(生)이 무한히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가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운명애(運命愛:아모르 파티), “이것이 생(生)이었더냐,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친 생에 대한 강력한 긍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상은 신(神)이나 도덕, 그 밖의 일체의 피안적(彼岸的) 요소를 부정한 니체에게 있어 ‘아마도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의 공식’이었을 것이다.
문> 니체의 사상에서 니힐리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