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묵이 좋다.
이십여 년 간 꾸준히 먹어왔다.
자주 가는 어묵 가게 아주머니가 이렇게 매일 어묵을 먹으면 질리지 않느냐고 질렸다는 듯 내게 물은 적도 있으니 지켜보기에도 정말 질리도록 꾸준하게 먹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로 꾸준히 먹고 보니 남모르게 어묵 포인트로 여기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화곡동 남부시장에 한 군데, 종로 인사동에 한 군데, 일산 라페스타에 한 군데, 최근엔 온수역에서도 한 군데를 알아내서 총 네 군데가 되었다. 일부러 먹으러 가진 않아도(거짓말이다)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들러 어묵을 먹는다. 이미 사라져버린 어묵 포인트도 몇 군데 있는데 그 가게들에 관해서는 언제나 유감이다. 어쨌든 질리지도 않고 어묵을 먹어왔다. 질릴 때까지 질리지도 않고 먹겠다는 심보다. 질리지도 않으니까 질릴 때, 라는 것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질릴 때가 좀처럼 오지 않으니까 여전히 질리지 않은 채로 어묵을 먹고 있다. 언제 질릴까, 가끔은 그런 걸 궁금하게 여기며 사람들 틈에 서서 어묵을 우물우물 먹는다.
때문에 내 동생들과 친구들은 어묵을 싫어한다. 보통으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질색(窒塞)이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일까, 라고 묻고 어, 너 때문, 이라는 대답을 들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내게도 할 말은 있다.
문학적인 계기가 있는 것이다.
열다섯인지 열여섯인지, 나는 산수를 잘 못하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중학교 시절에, 교과서에 실린 염상섭의 삼대를 읽다가 어묵을 알아버렸다. 이런 내용이었다. 두 남자가 술상을 앞에 두고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이었는데 그 술상에 세상에, 노란 술과 어묵 국물이 놓였다는 문장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 문장에서 김이 오르는 어묵의 냄새와 맛을 느껴버린 이후로 나는 어묵을 먹으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로 염상섭이 나쁘다.
그가 그 정도로 선명하게 어묵을 어필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 정도로 어묵을 먹는 인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항변을 해도 동생들과 친구들은 너그럽게 들어주지 않는다. 함께 있을 때 내가 어묵을 먹으려고 하면 그들은 어묵을 먹으려는 나를 말린다. 어제 먹었으니 오늘과 내일은 건너뛰고 모레쯤 먹으라고 달래거나(그때 꼭 같이 먹어주겠다는 말로 설득하지만 대개는 거짓말이다) 아예 말도 없이 빨리빨리 걸어서 어묵 가게 앞을 지나가버린다. 사람이 정도를 알아야지 이 정도로 먹어서 자신들로 하여금 어묵을 싫어하게 만든 대가는 어떻게 치를 것이냐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어마어마하게 먹자는 것도 아니고 한 꼬치나 두 꼬치쯤 먹자는데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은 들어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본적으로, 미안하다.
요즘 내 동생들과 친구들은 새로운 언어로 어묵 먹기를 말리고 있다.
방사능, 세슘, 스트론튬, 후쿠시마. 바다가 오염되고 있으니 어묵의 재료가 되는 조기나 도미나 갈치도 멀쩡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물론 바다를 떠올리게 된다. 깊고 어두운 바다. 태평양이겠지. 조기가 있고 도미가 있고 갈치와 쥐치가 있는.
인간이 그걸 먹지.
바다 생물도 먹겠지. 조기나 도미나 갈치나 쥐치를.
누가 먹나.
고래가 먹나.
고래가 먹는다 치고, 이제 막 조그만 조기 한 마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린 고래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야, 방사능이니까 조심해, 라는 조언은 해주지 않겠지.
바다 속에선 일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겠지.
그런 면에서 인간은,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 덕분에 부쩍 늘었다.
인간은 참 염치없구나, 하고.
말하자면 어묵을 이 정도로 먹는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읽은 누군가는 질려버리겠다, 상상만으로도 짜증난다, 그만 먹으라고 말 할지도 모르겠다. 유감이다. 나는요 앞으로도 어묵을 먹을 생각입니다.
여전히 맛있으니까.
떡볶이도 좋아합니다.
이십여 년 간 꾸준하게 먹어왔어요.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百의 그림자』, 『파씨의 입문』, 『야만적인 앨리스씨』 등의 소설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