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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천국의 게단☆]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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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계단]
이준관 시집 / 서정시학시선 104 / 서정시학(2014.12.20) / 값 9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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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계단
이준관
짐을 들고 가는 여자가 언제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노 하고
투덜대며 올라가는 계단이 많은 동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계단에서 하늘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한다
하늘이 이기면 한 계단 내려오고
아이들이 이기면 한 계단 올라가고
계단을 올라가면 그 계단 끝집에는 해바라기 핀다
해바라기에게
금빛 시간의 태엽을 감아주는 태양
아이들은 가을이면 손에 해바라기 씨를 받아
태양에게 돌려준다
태양은 그 꽃씨를 골고루 동네에 뿌려준다
일숫돈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의 구두에는
씹다 버린 껌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계단이지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이름을 외우며 올라가는 아이들에겐
침이 꿀떡 넘어가는 무지개떡이다
강아지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자고 간 계단에 앉아
아이들은 무릎에 턱을 괴고 머언 하늘바라기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 닳은 몽당 크레용으로
친구에게 줄 생일 카드처럼 서쪽 하늘을 빨갛게 색칠한다
아이들이 탈 썰매를 끌고 온 순록의 뿔처럼
전봇대가 서 있는 눈 오는 날에는
아이들은 계단 옆에 눈사람을 세워둔다
그러면 방울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하이얀 양초 같은 집집마다 불을 켜 주러 계단을 올라온다
아이들이 아침에서 저녁까지 신나게 불어대는
구멍이 뿅뿅 뚫린 하모니카 같은 계단
그 계단에 나도 발을 올려본다
해바라기나 강아지나 아이들만이 만질 수 있는
하늘을 만지러
저녁쌀 씻는 소리
이준관
저녁쌀 씻는 소리 들리네
쌀뜨물을 꽃밭에 주는 소리 들리네
부엌문 앞에서 파를 다듬는
눈 끝이 시큰해지는 파 냄새
마당에서도 장독대에서도
벌레들이 참 맑은 소리로 우네
아이들 밥 담아 주기 알맞게
조그만 밥그릇만한 분꽃이 피고
저녁 기도서 읽기 알맞게
저녁 불빛 비치네
어미 소가 송아지 부르는 소리
별이 별을 부르는 소리
들리네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이준관
이름 없는 마을의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나는 행복해지네
내 옆에 앉아 있는
보따리를 옆에 끼고
딸네 집에 간다는 할머니와
숙제할 그림물감을 사러
읍내에 간다는 뺨이 붉은 소년과
배고플 때 먹으라며
어머니가 싸 주던 따끈따끈한 감자알 같은
시골의 태양과
누가 써 놓았을까
의자에 삐뚤삐뚤 써 놓은
‘혜원아 어디 가든 잘 살아라 사랑한다’라는
글씨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기다린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할까
버스가 더디 온다 해도
때로는 버스가 오다 말다 한다 해도
낮닭
이준관
어느 집 농가에서 낮닭이 운다.
햇빛 묻은 달이라도 낳은 것일까
갓 낳은 달걀마냥 하늘에는
낮달이 떠 있다.
어머니는 들일 나가고
낮닭과 해바라기가 집을 보는 것일까
담장 너머 해바라기도 목을 길게 빼고
푸드득 홰를 치며 운다.
낮닭 우는 농가가 고향집 같아서
어머니 치맛자락만 어른거리려도
닭들이 꼬꼬꼬 모여들던 고향집 같아서
나도 낮닭처럼 목을 길게 빼고
울어본다.
감꽃 목걸이
이준관
감꽃 꿰어 감꽃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어주고 싶던 고 기집애
햇빛에 덧니 예쁘게 반짝이던
감꽃 같던 고 기집애
감꽃 필 때면 나는 뺨이 붉은 소년
달고 떫던 감꽃 첫사랑을 줍는다
강마을
이준관
강물이 흘러가네
강물에서 태어난
물빛 날개 잠자리가
강물 위에 물꽃무늬를 만들며
맴을 도네
누군가 그리워서
강마을 아이들처럼
강에서 주운 돌로 물수제비를 뜨면
돌은 물총새가 되어 날아가네
흐르는 강물에 손을 적시면
저무는 산 그리매
이마에 닿고
물마름풀꽃 저녁 불빛
강물에 뜨네
종점 동네
이준관
나는 종점 동네에 산다.
호박꽃이 지천으로 피고
저녁놀이 지천으로 뜨는 동네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별이 뜨면 뜨는 대로
반가워서
개들이 밤 이슥토록 짖어대는 동네다.
버스를 타고 가자 다 잠이 들면
버스의 형광등 불빛이 외투를 벗어
내 어깨를 감싸주고
종점이 가까워지면
개 짖는 소리가 잠을 깨우는,
울타리섶에 자줏빛 울타리콩꽃 피고
울타리콩 같은 사람들
오콩콩 모여 사는 동네.
가을이면 태양의 파종기에 뿌릴
벌떼처럼 잉잉거리는 꽃씨를
손에 받는 사람들.
온종일 짠 해바라기 기름으로
밤이면 집집마다 해바리기꽃이 노오란 불을 켜주는
종점 동네에 산다.
붕어빵 노점상
이준관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 버짐 같은
버즘나무 잎새 떨어지는
그 나무 아래
붕어빵 장수가 노점상을 차렸다.
찬바람에 무르팍 시려오고
길거리에 불빛이 그리울 때면
붕어빵 장수는
흰 눈 같은 밀가루 반죽에
불빛 같은 팥고물을 넣어
붕어빵을 굽는다.
호호 입으로 불어가며
붕어빵 먹는
하학길 아이들의 눈이
붕어의 선한 눈을 닮았다.
붕어빵을 팔아봤자
바구니에 쌓이는 동전 몇 푼
서품짜리 삶이지만
빵틀에서 붕어빵을 꺼낼 때면
월척에 연못만한 웃음이다.
늦은 귀가길 사람들도
붕어빵 한 봉지 사들고
식지 않게 외투 안에 품고
대문 앞에 뜬 별을
벨처럼 누른다.
용문행 전철에서
이준관
용문행* 오전 10시 전철 안은
통유리창을 단 읍내 찻집 같다
낯선 사람들도 금세 낯이 익어
서로 마주 앉아 바라보며
햇빛으로 가득 찬 찻잔을 든다
통유리창은 읍내 극장 영사기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필름이 돌아간다, 필름이 끊기면
획획 불어제끼는 휘파람 소리 들린다
전철 문을 여닫을 때마다
손으로 켜는 손풍금 소리가 난다
복사꽃빛으로 뺨이 빨갛게 물들어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얼굴들
뜨내기 장사꾼이 무릎 보호대를 팔러 온다
너도 나도 낡은 지갑을 열어
무릎 보호대를 산다
전철도 무릎 보호대를 차고
숨을 몰아쉬며 달려간다.
복사꽃빛으로 쌀을 씻고
복사꽃빛 연기 솟는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가는 전철
햇빛 맑은 날
이준관
마을 초입에 코스모스 한창이다.
아이들이 잡아온 붕어 떼 같은 햇빛이 한창이다.
어머니는 밥상에 올릴 배추를 씻고
낯선 발소리에도 반가워서 개들은
연신 짖어댄다.
군시렁군시렁거리던 할머니도
이 따뜻한 햇볕엔 어쩌지 못하고 이내 마음이 풀려
몇 개 남은 이빨로 아기처럼 웃으며
햇살에 참깨를 턴다.
빨랫줄엔 빨래가 마르고
냇가에서 놀다온 잠자리도 젖은 날개를
말리다 간다.
마을 초입에 코스모스 한창이다.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마구 칠한
코스모스가 한창인 마을.
사람들은 비록 옹기항아리처럼 가난해도
참깨 같은 행복을 턴다
햇빛 맑은 날에.
여름 별자리
이준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 가서
별을 보았다.
감자밭에서 돌아온 어머니 호미 같은
초승달이 서쪽 산자락으로 지고
감자꽃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어미곰과 아기곰이 뒹굴며 노는 큰곰 작은곰 별자리
은하수 물방울을 퉁기며 솟구치는 돌고래 별자리
직녀가 거문고를 뜯고 있는 거문고 별자리
나는 어렸을 때 배웠던 별자리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대답하듯 별들이 온 하늘 가득
뽕나무 오디 열매처럼 다닥다닥 열렸다.
별똥별 하나 저 멀리 밤나무 숲으로 떨어졌다.
저 별똥별은 가을에 밤 아람으로 여물어
밤송이 같은 아이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리라.
아내는 세상에나! 별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다 모여 있었네 하면서 별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그리고 옥수수를 따서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듯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세상에나!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아름다운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외양간이 달린 민박집 방에서
별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송아지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미 소는
가끔 깨어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고
그때마다 별들은 잠을 깨어
딸랑딸랑 워낭 소리를 내곤 했다.
구절초꽃
이준관
새가 날아간 하늘에
새하얀 새털구름
바람이 지나간 언덕에
새하얀 구절초 꽃
머흘머흘 머무는
사랑아
네 그리운 얼굴
물수제비 뜨듯
파아란 하늘에 뜬다
눈 내리는 날
이준관
잿빛 구름 낮게 드리우고
밤 짓는 연기 낮게 깔리었
굴뚝새 처마 밑에 파고들고
암탉은 제 새끼 감싸주려는 듯
바람에 한껏 깃털을 부풀렸다
소는 하얀 콧김 내뿜으며
연신 투레질을 하고
개는 부스럭거리는 지푸라기 소리에도
자꾸만 짖어대었다
참새들이 낮게 나는 걸 봉게로
눈이 올랑갑다
어미나 말씀에
눈이 내렸다
뒤란에 쌓아둔 장작가리에
김칫독 묻어둔 장독대에
두부를 삶는 가마솥 끓고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고
내리던 눈은
조무래기 아이들 마음속에서도
잘잘잘 끓었다
전등불
이준관
전등불을 켜면
나를 살붙이처럼 꼭 안아주던 환한 밤
전등불빛처럼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아 먹던 저녁밥
전등불 아래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읽던 책
그러다 잠이 들던 밤
때로는 가난한 어머니가
삯바느질 감에 엎드려
소리 없이 울던 밤에도
가장 늦게까지
어머니 등을 비춰주던 전등불
내 생의 천장에 매달린
까치밥 같던 전등불
어머니의 도시락
이준관
어머니가 싸 주던 도시락
보리 꽁보리밥에 김치 한 가지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밥,
김장김치 간간하게 간이 배이듯
김칫국물 빨갛게 배인 가방 속 책.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책.
학교 뒷산에서 주워온 솔방울 땔감
활활 타던 난로 위에 올려놓은 도시락.
밤이 타고 눌던
코끝을 간질이던 햇빛 냄새 같던 밥 냄새.
난로에 데워진 도시락 뚜껑을 열면
얼굴에 훅 끼얹던 뜨거운 밤김
어머니의 입김.
교실 창 밖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밤
함박눈이 내리고
세상은 온통 어머니가 싸 주던
도시락 같았다.
부엌문을 열고 어머니가 내다보던 마당을
이준관
부엌문을 열고 어머니가 내다보던 마당을
나는 기억합니다.
제 꼬리를 쫓아 빙빙 돌던 새끼고양이의
방울 소리를.
향긋한 소똥 냄새 풍기던 저녁,
바지가 저녁 불빛에 젖어 돌아오던 날들을
돌아오며 혼자 중얼거리던 그 많은 외로움의 날들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닮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마당가,
콩꼬투리가 터지기를 재촉하던
후끈한 땅 열기를.
낮은 울타리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던
마지막 태양.
하늘을 날아가던 아이들의 돌멩이
그 돌멩이에
짐짓 놀란 날갯짓을 하며 서쪽으로 흩어지던 새떼들.
무엇이 즐거운지
항상 허리가 휘어지게 까르르 잘 웃던 처녀들
그 웃음소리에
감나무 가지가 휘어져 마당에 닿던 날들을
나는 기억합니다.
유년의 마당 1
이준관
솔개 그림자도 얼씬거리는지
암탉은 병아리를 품고
또록또록 눈을 굴리고,
어머니는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가
행여 다칠세라
싸리꽃 빗자루로 마당을 쓸었습니다.
그러면 병아리는 꼬꼬꼬 달음질치고
강아지는 섬마섬마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밀잠자리 넘나드는 낮은 울타리 너머
풋꽃 같은 동무가 놀자고 부르러 오면
풋대추가 지레 반가워서 마당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가끔 장대비가 쏟아져
장독대며 채마밭이며 감나무며
시원스레 물목을 하고
장대비에 실려 마당에 떨어진 지렁이를 쪼으려고
암탉은 종종걸음을 쳤습니다.
장독대 햇살은
기름 먹인 장판처럼 번지르르하고
어머니는 새끼손가락으로 간장을 찍어
혀에 대보곤
금년에는 장맛이 좋다며
박꽃처럼 하얗게 웃었습니다.
저녁이면 평상을 내놓고
어머니가 봉숭아물 들여주던 곳.
실로 칭칭 동여매주던 헝겊이 풀어질까 봐
조신조신 봉숭아꽃 같은 별을 세며 잠들던
어미니 무릎 같던 마당이여,
내 어린 영혼이 섬마섬마 걸음마를 시작했던.
비
이준관
어렸을 때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비를 맞으면
해바라기 꽃처럼 쭉쭉 자랄 것 같았다
사랑을 할 때는
우산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둘이 우산을 받고 가면
우산 위에서 귓속말로 소곤소곤거리는
빗소리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집을 가졌을 때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
전망 좋은 방처럼
지붕 아래 방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가 좋다
잠이 든 딸이
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는 일이 행복하다
즐거운 시소 놀이
이준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있다.
오르락내리락 타는 시소가
명절날 쿵더쿵 쿵더쿵
떡방아 찧는 것 같다.
놀이터 화단의 꽃들도
시소를 타며 노는지
바람에 오르락내리락 피어 있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이들과 꽃들은
남을 올려주면
자기도 올라간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한 아이가 시소 끝에 시무룩이 앉아 있자
다른 아이가 맞은쪽에 앉아
그 아이를 올려준다
파아란 하늘이 머리에 닿도록.
이 세상 모든 일이 저 시소놀이 같았으면
좋겠다.
아기가 태어난 날
이준관
2012년 11월 4일 아침 7시 57분
아기가 태어난 시각
오늘의 일출 시각은 정확히
7시 57분이었다.
해님은 아기가 신을 꽃신과
아기가 입을 배냇저고리와
아기가 쓸 방울모자를
미리 준비해두었다.
아기는 이슬방울 같은
눈망울을 뜨고 세상을 내다보았다.
꽃가게의 유리창 같은
눈부신 세상을.
온몸에 묻은 생명의 피를 닦아내자
해바라기 꽃 같은 맨살이 드러났다.
그 맨살에 해바라기 씨앗 같은 햇살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기의 몸에서 해시계 가는 소리가
들리었다.
큰바늘과 작은 바늘로 세상을 곱게
뜨개질하며 가는 소리가.
아침이 온다는 것
이준관
신선한 모유 같은 우유를 배달하며
우유 배달 아줌마가 온다는 것
이팝나무 잎새 같은 학생들 태우러
초록버스가 온다는 것
꽃다지 같은 아기들 태우러
어린이집 노랑버스가 온다는 것
중풍으로 쓰러진 옆집 할머니가
보행 보조기를 밀며
아기처럼 걸음마를 다시 배운다는 것
동네 빵집에서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모닝빵을 굽는다는 것
아침 밥상에 놓은 접시처럼
접시꽃이 일찍 핀다는 것
참새들이 대추나무에
풋대추처럼 조롱조롱 매달려
노래한다는 것
내가 창문을 열고
해와 하늘과 그리운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아,
그것은
아침이 온다는 것
얼룩
이준관
아침에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갓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옷에 얼룩이 묻어 있다.
즐거운 식사 시간에도
국물은 떨어져
무릎에 얼룩을 남긴다.
아내가 새로 깐 식탁보에도
내 몸의 흉터 자국처럼
얼룩이 남는다.
사람들과 말을 할 때에도
말들이 흙탕물로 튀어
마음의 얼룩으로 남는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룩을 남겼을까.
길거리에서
만원버스에서
무심코 떨어뜨린 콧물처럼
남겼을 얼룩들.
꽃에 사뿐히 앉았다 날아간
나비처럼
얼룩을 안 남길 수는 진정 없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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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십 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보낸다.
내 시 쓰는 일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빌딩 창문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사람처럼
이 세상 모든 창문의 혼탁한 먼지를 닦아
아름다운 풍경을 찾는 일에
나는 매달렸다.
이 시집을 통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데 힘과 위로를 얻었으며
좋겠다.
2014년 12월
이 준 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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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詩集 [※천국의 계단※]
[ 해설 ] -
자기 기원을 탐색하는 심미적 서정
유 성 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이준관 신작 시집『천국의 계단(서정시학, 2014)』은, 시력詩歷 40년을 훌쩍 넘어서는 우리 시단의 한 중진 시인이 세상에 흘려보내는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감각과 기억의 일대 도록圖錄이다. 가령 시인은 “내 시 쓰는 일은/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면서 “빌딩 창문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사람처럼/이 세상 모든 창문의 혼탁한 먼지를 닦아/아름다운 풍경을 찾는 일에/나는 매달려왔다”(「시인의 말」)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러한 심미성에 대한 시인의 일관된 애착에 이번 시집 수록작들은 대체로 어울려 보인다. 그 작품들은 그야말로 어떤 것을 인용해도 의미론적 낙차가 거의 없을 만큼 경험적, 주제적 집중성을 균질적으로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번 시집을 읽는 것은 이준관 고유 브랜드인 순수 서정의 극치를 경험하는 일인 동시에, 그가 창문의 먼지를 닦으면서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origin을 찾아가는 행로를 순하게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2.
이준관 시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에는 존재론적 기원에 관한 투명하고도 순정한 사유와 회상도 있고, 시간의 결을 매만지면서 번져갔던 인상적 장면에 대한 애잔한 성찰과 반추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감상 과잉이나 격정 토로에서 벗어나 생의 보편적 이치에 가 닿으려는 이준관 시편의 높은 격을 한결 같이 보여준다. 그만큼 그는 삶의 고백이라는 서정시의 제일의적 기율을 충족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기품을 통해 서정시의 견고한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먼저 이준관 시학의 존재론적 기원 탐색은 “저녁연기 솟는 굴뚝을 보며/구정물 버리는 소리 부엌문 여닫는 소리/아이들과 강아지 부르는 소리”(「간이역을 지나며」)를 듣는 구체적인 감각에 의해 이루어진다. 일차적으로 그 감각의 대상들은 시인이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들이겠지만, 이번 시집에서 그것들은 한 차원 높아진 이른바 ‘순수 원형’의 표상으로 적극 재구축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사물과 경험의 세목적 구체성을 가장 순수한 이상적 시공간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준관 시학이 상상하고 구현하는 ‘사람의 마을’이 여기 이렇게 충실하고도 아름답게 지어지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가까이
버려진 땅을 일구어 사람들은 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촘촘히 뜨개질을 하듯
심은 옥수수와 콩과 고추들
꿀벌이 날아와 하늘로 꽁지를 치켜들고
대지의 꿀을 빨아들이고
배고픈 새들은 내려와
무언가를 쪼아먹고 간다
아파트 불빛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제 가슴의 빈터를 메우듯
호미를 들고 와 흙을 북돋워주고 풀을 뽑는다
옥수수 잎에 후드득 지는 빗방울은
사람들의 핏방울로 흐르고
저녁에는 푸른 별 같은
콩이 열린다
흙 묻은 손으로
옥수수와 콩과 고추와 나누는
말없는 따뜻한 수화
사람들의 손길 따라
흙은 선한 사람의 눈빛을 띤다
가을이면 사람들은 흙 묻은 손으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흙에서 태어난 벌레들은
밤늦게까지 식구들의 옷을 짓는
재봉틀 소리로 운다
슬프고 외로울 때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는 사람들
겨울에는 시리고 적막한 무릎을 덮는
무릎덮개처럼
눈이 쌓인다
사람들이 일군 마음의 밭에
-「흙 묻은 손」전문
모든 자연 사물 중에서 ‘흙’은 가장 구체적이고 살가운 질감을 가진 것일 터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나무’나 ‘꽃’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새소리’나 ‘냇물소리’는 귀기울여 들었을 테지만, ‘흙’은 직접 만져도 보고 밟아도 보면서 친밀한 감각의 소통을 나눈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아파트 가까이 있는 땅을 일구어서 ‘밭’으로 바꾸어버린 이들을 환하게 떠올린다. 이제 거기에는 옥수수와 콩과 고추들, 꿀벌과 새들이 자연스러운 식솔로 어울려 있다. “흙 묻은 손으로/옥수수와 콩과 고추와 나누는/말없는 따뜻한 수화”를 배운 시인은 거기서 흙이 ‘선한 사람의 눈빛’을 선사해준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발견해간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의 자연 사물들은 뜨개질을 하듯 살아가고 “흙에서 태어난 벌레들”도 재봉틀 소리를 내면서 울지 않는가. 그만큼 “슬프고 외로울 때면” 찾아갈 수 있는 ‘흙’의 심상은, 고스란히 “사람들이 일군 마음의 밭”이라는 심상으로 이어지면서, 가장 적막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공간을 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흐름은, 시인이 그리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 가 닿게 된다.
신문지 봉지를 씌운 배 열매들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마을에는
사람들이 산다
소의 등을 쓰다듬으며
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소나기를 첼로처럼 연주할 줄 하는
손을 가진 소녀가
볼기짝에 봉숭아 꽃물이 든
아기를 씻기는
저녁놀도 씻기는
귀리 이삭 같은 여자가 산다
태양의 수리공 같은
수염투성이 해바라기 피는 마을에는
땅바닥에 박힌 제 그림자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염소처럼
사랑하는 마음밖에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산다
-「사람의 마을」전문
‘사람의 마을’은, 단출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을 구현할 수 있는 순수 원형의 최적 공간이다. 열매들이 부풀어 오르고 꽃들이 피는 그 마을에는, 소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소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있고, “소나기를 첼로처럼 연주할 줄 아는/손을 가진 소녀” “볼기짝에 봉숭아 꽃물이 든/아기를 씻기는/저녁놀도 씻기는/귀리 이삭 같은 여자”도 산다. 그이들은 한결같이 “땅바닥에 박힌 제 그림자를 사랑하며/살아가는 염소처럼/사랑하는 마음밖에는 가진 것 없는//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을’은 가난과 음악과 사랑이 넘치는 동시에 “해바라기나 강아지나 아이들만이 만질 수 있는”(「천국의 계단」)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또한 그곳은 “아침이면 누이의 손거울만한/해가 뜨고/나무에는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만한/푸른 잎새 돋아”(「내가 사는 골목길」)나고, “햇살은 잔칫날 밥상이고/빨랫줄 빨래는 눈부신 꽃밭”(「나비잠」)으로 가득 찬 곳일 터이다. 그 “복사꽃빛 연기 솟는/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용문행 전철에서」)에서 우리는 “잘못 살아온 삶을 지우고 싶어”(「문구점에서」) 할 것이고, 그때 그 마을은 순수 원형으로서의 자기 기원을 탐색하려는 시인의 심미적 서정을 가득 모아놓은 곳으로 몸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3.
그런가 하면 이준관 시편의 풍경은, 어린 시절에 대한 구체적 회상에서 태어날 때가 많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향수鄕愁의 한 자락을, 그가 경험적 직접성으로 인화하고 있다는 점은 재차 강조되어야 한다. 가령 “쌀 씻는 소리/또닥또닥 도마질 소리/아이들 부르는 소리/불빛처럼 새어나”(「저녁 불빛」)오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나 “나를 업어 키우던 어머니 뒷등처럼/때로는 돌아앉아 박꽃처럼 눈물 훔치던/어머니 뒷등처럼/그렇게 그렇게”(「뒤꼍의 추억」) 존재하는 오랜 기억들은 그 순수 원형의 깊디깊은 구체적 속살들일 것이다. 단순한 심정 토로가 아닌 살아 있는 것들의 선명한 재현, 이것이 이준관 시편들이 가지는 호환할 수 없는 기억의 축도縮圖다.
찔레꽃처럼 하얀 편지지에
편지를 쓰고
꽃씨 봉지 같은 편지 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가던 길
-「아아, 스무 살」중에서
누군가는 스물 살 다음에는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만이 이어질 뿐이라고 갈파한 바 있지만, 우리의 앳된 스무 살은 그렇게 순수한 완결성으로 기억 속에 존재한다. 시를 읽을 때부터 벌써 “편지지/편지 봉투/우체국”이라는 경험적 세목에 “세상 모두에게/연애편지를 써서 부치고 싶던”(「아아, 스무 살」) 시간이 선명하게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 흐름을 따라 가 보면 우리는 “기다린다는 것/누군가와 함께 기다린다는 것은/얼마나 행복한”(「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일이었는지를 새삼 알게 된다. 그렇게 뺨이 붉은 소년이던 이준관 시인은 “달고 떫던 감꽃 첫사랑을”(「감꽃 목걸이」) 줍던 그때의 모습을 회억回憶한다. 그 기억의 흐름이 이준관 시편이 발원하는 더없는 수원水源인 셈이고, 그 한복판에는 시인 자신의 가장 구체적인 기원인 가족사적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꽃 보자기」전문
이 시편은 시인 스스로 가지게 된 깊은 경험적 자의식을 보여준다. 그 자의식의 저류低流에는 시인이 겪어온 원체험이 담겨 있는데, 시인의 무의식 속에 숨겨 있는 원체험은 그 자체로 시인이 택하는 언어와 생각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원체험을 부단히 변형하고 거기에 파생적 경험들을 부가하면서 자신만의 동일성을 점진적으로 획득해갔을 터인데, 이때 시인의 남다른 ‘기억’이 그 매개 역할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준관 시인에게 ‘어머니’는 이러한 원체험의 기억 속에 가장 직접적인 기원으로 계시다.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는 “풀무치도 방아깨비도 업어주고/산도 들도 업어주던”(「어머니의 등」) 고향에서 언제나 삶의 가장 종요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보내주시는 둘도 없는 공급처이시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보자기에는 남녘 봄 아지랑이와 꽃나무가 들어 있다. “어머니의 젖망울처럼/꽃망울”이 맺혔을 꽃나무들, 울고 있을 송아지들이 바로 그 순간 어김없이 상상적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어루만지면서, 이 보자기가 한때는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밥주발을 품고 있던 밥보자기”였으며, 한때는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였고,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이기도 했음을 선연하게 기억해낸다. 그렇게 어머니는 ‘꽃 보자기’에 수많은 시간과 기억을 봄과 함께 싸 보내신 것이다. 이처럼 이준관 시학에는 “어머니가 밟고 간 등이 굽은 길”(「옥수수밭에서」)과 “가장 늦게까지/어머니 등을 비춰주던 전등불”(「전등불」)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어머니 무릎 같던 마당에서 “어린 영혼이 섬마섬마 걸음마를 시작했던”(「유년의 마당․1」) 기억들이 차랑차랑 숨쉬고 있다.
4.
우리가 잘 알듯이, 자연은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공간이며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신성의 거소居所이다. 아마도 자연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순간이 바로 서정시가 씌어지는 순간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의 경험 속에, 이렇게 씌어지는 서정시는 자연과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내질을 얻게 되고, 시인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성찰과 신생의 노래를 들려주게 되지 않는가. 이준관 시인은 자연에서 가장 구체적인 감각을 포착하고, 근원적인 신생의 감각을 유려하게 발견한다. 이준관 시학이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재현하는 감각의 흐름에는 계절의 운행과 그에 따른 감각적 흔적들도 있는데, 거기에는 “시집간 복사꽃 같은 누이의 목소리가/들리는 듯 들리는 듯/붉은뺨멧새처럼 아이들 뺨은/붉었다”(「복사꽃빛 봄」)에서처럼, 가장 선연한 자연의 ‘빛깔’과 ‘소리’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 가서
별을 보았다
감자밭에서 돌아온 어머니 호미 같은
초승달이 서쪽 산자락으로 지고
감자꽃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어미곰과 아기곰이 뒹굴며 노른 큰곰 작은곰 별자리
은하수 물방울을 퉁기며 솟구치는 돌고래 별자리
직녀가 거문고를 뜯고 있는 거문고 별자리
나는 어렸을 때 배웠던 별자리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대답하듯 별들이 온 하늘 가득
뽕나무 오디 열매처럼 다닥다닥 열렸다
별똥별 하나 저 멀리 밤나무 숲으로 떨어졌다
저 별똥별은 가을에 밤 아람으로 여물어
밤송이 같은 아이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리라
아내는 세상에나! 별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다 모여 있었네 하면서 별처럼 눈을 빤짝거렸다
그리고 옥수수를 따서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듯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세상에나!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아름다운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외양간이 딸린 민박집 방에서
별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송아지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미 소는
가끔 깨어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고
그때마다 별들은 잠을 깨어
딸랑딸랑 워낭 소리를 내곤 했다
-「여름 별자리」전문
시인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서 한여름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가득 눈에 들어왔던 별들을 여기 다시 쏟아놓는다. 시인은 져버린 초승달은 “감자밭에서 돌아온 어머니 호미”로, 막 돋아난 별은 “감자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농경적 경험이 그 안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하나하나 돋아나 하늘을 가득 채운 별자리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어렸을 때 배웠던 별자리 이름을 다시 불러보게 하는데, 이때 별들은 “뽕나무 오디 열매처럼 다닥다닥” 하늘에 열리고, 시인의 아내는 별처럼 눈을 빤짝거리며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서 있다. 아니 어쩌면 별자리는 언제나 하늘에 가득했었는데 우리가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별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시인 부부는, 민박집 옆 외양간에서 들려오는 어미 소와 송아지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마치 별들이 깨어 워낭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의 속도 때문에 잊고 살았던 삶의 본령이나 궁극적 의미를 일깨워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이준관 시인은 낱낱 사물들이 품고 있는 고유한 의미에 대한 관찰과 표현, 그것을 자신의 정신 자세에 비유하는 염결성, 과거의 기억을 현재적 삶과 결속하면서 끌어올리는 그리움의 형상 등을 통해 자신이 이루어가는 시적 물줄기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고전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고백과 기억에 대하여 미더운 경청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이준관은 우리 문단에 소중하고도 탁월한 동시를 다수 남겨준 시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심童心’이란 이준관 시의 특별한 주제가 된다기보다는, 가장 편재적인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저녁쌀을 씻으면서 “쌀뜨물을 꽃밭에 주는 소리”(「저녁쌀 씻는 소리」)를 듣는다든지 “아이들을/저녁놀 분꽃 꽃물에 젖어 돌아오게 하고/어머니가 구구구 닭들을 불러 모아 모이를 주듯/저녁별 구구구 불러 모으던/굴뚝의/연기”(「굴뚝의 연기」)를 떠올린다든지 나아가 “온종일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머릿수건을 쓴 어머니처럼/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꽃씨”(「꽃씨」)를 통해 “삘기를 뽑아 먹던 /찔레순 꺾어 먹던/아이들의 눈빛”(「첫물의 오디」 )를 환기한다든지 하는 마음은, 모두 한결같이 가장 긍정적이고 근원적이며 화해로운 동심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한 소중한 기억을 톺아 올리는 그의 시편들은, 그 점에서 가장 이준관다운 상상과 표현의 향방을 알려준다 할 것이다.
어렸을 때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비를 맞으면
해바라기 꽃처럼 쭉쭉 자랄 것 같았다
사랑을 할 때는
우산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둘이 우산을 받고 가면
우산 위에서 귓속말로 소곤소곤고리는
빗소리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집을 가졌을 때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
전망 좋은 방처럼
지붕 아래 방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가 좋다
잠이 든 딸이
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는 일이 행복하다
-「비」전문
가칭 ‘비의 계보학’이라 명명할 수 있는 시간들이 후드득 나열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비를 맞으며 키가 쭉쭉 자랄 것 같은 상상을 하였거, 사랑할 때는 둘이 우산을 받고 갈 때 빗소리가 귓속말이 되어 끝없이 이어질 거라 생각을 하였고, 처음으로 가진 집에서는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을 생각하면서 비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시인은 그 성장과 사랑과 안도의 기억을 태胎로 삼으면서,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거기서 “잠이 든 딸이/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보는 일이 행복”임을 살가운 목소리로 고백한다. 이 소소하지만 분명한 행복의 상像이, 이준관 시학의 오롯한 발원지요 궁극의 귀속처가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박하고도 눈물겨운 삶의 성찬과 함께, 그의 시편들을 통해 “그리운 것들을/다시 볼 수 있다는 것”(「아침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근본적으로 서정시는 시간 경험의 회상 형식으로 씌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서정시와 시간이 불가피한 서로의 원질임을 새삼 확인한다. 이준관 시편의 근간은 지난 시간에 대한 섬세하고도 일관된 회상 형식에 있을 것이다. 원형적이고 훼손되지 않은 그 ‘기억’이야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깨끗하고 조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이러한 깊고도 지속적인 그의 치유와 긍정의 시쓰기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 형식에 대한 탐구작업으로 끝없이 이어져갈 것이다. 무려 10년 만에 나오는 이번 신작 시집에, 그러한 서정의 기율과 자기 기원을 탐색하려는 시인의 심미적 서정이 잔잔하게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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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근본적으로 서정시는 시간 경험의 회상 형식으로 씌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서정시와 시간이 불가피한 서로의 원질임을 새삼 확인한다. 이준관 시편의 근간은 지난 시간에 대한 섬세하고도 일관된 회상 형식에 있을 것이다. 원형적이고 훼손되지 않은 그 ‘기억’이야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깨끗하고 조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이러한 깊고도 지속적인 그의 치유와 긍정의 시 쓰기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 형식에 대한 탐구 작업으로 끝없이 이어져갈 것이다. 무려 10년 만에 나오는 이번 신작 시집에, 그러한 서정의 기율과 자기 기원을 탐색하려는 시인의 심미적 서정이 잔잔하게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내 시 쓰는 일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빌딩 창문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사람처럼
이 세상 모든 창문의 혼탁한 먼지를 닦아
아름다운 풍경을 찾는 일에
나는 매달려왔다.
이 시집을 통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데 힘과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
― 시인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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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관 시인∥
∙ 1949년 전북 정읍 출생.
∙ 1971년『서울신문』신춘문예 동시 당선
∙ 1974년 『심상』시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 전주교육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국어교육) 전공
∙ 시집 『황야』『가을 떡갈나무 숲』『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부엌의 불빛』『천국의 계단』
∙ 동시집 『크레파스화』『씀바귀꽃』『우리나라 아이들이 좋아서』『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김달진 문학상, 영랑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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