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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고는 자기 한 몸의 잘됨을 얻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중국 무협영화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영화가 천녀유혼 다음으로 동방불패일 것이다. 동방불패는 중국작가 김용의 소설 <<소오강호>>를 원작으로 하고 있고 소오강호의 뒷이야기이다. 나도 영화를 볼때 제목을 소호강호로 알고 있었는데 <<소오강호>>가 맞다.
김용의 무협 소설 중에서 진실하고 광활한 역사적 배경은 종종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된다. '강호(江湖)'와 '강산(江山)', '녹림(綠林)'과 '묘당(廟堂)'이 결합되고 싸움터(무예 시합이나 격투술 시합)와 전쟁터, 관장(官場)과 정장(情場)이 결합되고, 진실한 역사적 인물의 허구적인 고사와 허구적인 전기적 인물의 진실한 인성이 결합된다.
이것이 바로 '김용 소설'의 특징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김용의 15부나 되는 소설 중에서 극소수의 작품에서만 진실한 역사적 인물이나, 명확한 역사적 시대 배경, 관부(官府)의 인물이 출현하지 않는다. <<협객행(俠客行)>>이나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연성결(連城訣)>> 등이 그러한데, 그 중 <<연성결>>에서는 그래도 강릉지부(江陵知府)인 능퇴사(凌退思)가 등장한다.
보기에 이 책에는 진실한 역사적 인물도 없고, 명확한 시대적 배경도 없어서, 이 이야기가 대체 어느 왕조의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나는 이 점이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 이름이 <<소오강호>>인데다가, 책 속의 인물과 고사 역시 순수한 무림의 인물과 강호에서의 일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소설을 아주 순수한 '무협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실제로는 더욱 정치적 역사 혹은 역사적 정치적 교훈을 담고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의 <<후기>>에서 밝힌 얘기를 보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결코 의도적으로 중공의 문화혁명(文革)을 모델로 하고 있지 않고, 책 속의 인물들을 통해 중국 삼천여 년 동안에 있어 왔던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을 그려내고자 시도했을 뿐이다. 무엇을 모델로 삼는 소설은 큰 의의가 있을 수 없다. 정치적 현상은 금새 변하곤 하는 것이다. 인성(人性)을 묘사해 내야 비교적 오랜 동안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외국이나, 정치적 활동의 기본적인 현상이었다. 과거 몇천 년 동안 그래 왔고, 앞으로 몇천 년 역시 아마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임아행(任我行), 동방불패(東方不敗), 악불군(岳不群), 좌랭선(左冷禪) 같은 인물들은 주로 무림의 고수들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인물들이다.
임평지(林平之), 상문천(向問天), 방증대사(方證大師), 충허도인(忠虛道人), 정한사태(定閑師太), 막대선생(莫大先生), 여창해(余滄海) 등도 역시 모두 정치적 인물들이다. 이러한 가지 각색의 인물들은 어느 시대, 어느 왕조에나 모두 있었으며, 다른 나라에도 역시 있었을 것이다. 보편적 성격을 지닌 정치 활동 중의 흔한 현상을 쓰고자 했기 때문에 이 책에는 역사적 배경이 없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어느 시대에나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소설이 무언가를 모델로 삼는 소설(또는 암시성의 소설)이 아니라고 하지만, 소설의 창작시기가 '문화대혁명'의 투쟁이 기세 등등하게 일어나던 시기였고, 작자는 매일 <명보(明報)>에 냉정하고 객관적이면서 격렬한 필치로 사회 평을 쓰던 시기였다.
이 때의 소설은 정치적 우언 소설이 많았다고 하니, 암시를 받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은 누구 누구다'라든지, '이것은 어떠어떠한 사건이다'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교훈 소설에 있어 아주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로, 이 소설은 정치적 인물과 정치적 사건을 간략화하고 개념화하고 공식화하여 쓴 소설이 아니라, 그저 광의적이면서 아주 깊은 의미를 지닌 우언(寓言)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설 속의 정치적 인물과 그들의 행동거지는 그저 보편적인 현상이요, 보편적 인성의 필연적이면서 독특한 반영이자 표현일 뿐이다. 이것은 소설에 있어서, 특히 정치적 소설 혹은 우언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아주 곤란한 점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와 전기, 강호의 풍파와 정치적 투쟁이라는 이 두가지 사이의 차이점은 아주 명확하며,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 두가지 사이(영원한 인성의 묘사와 특정한 환경 속의 필연적인 표현을 통해)에 견고하면서도 은폐된 다리를 놓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마 이 점이 가장 중요할 것인데, 독자는 이미 이 소설을 정치적 투쟁을 그린 우언(寓言) 소설이라고 느낄 수도 있고, 여전히 이것을 한 권의 다채롭고 순수하고 오락적이면서 긴장된 무협 전기 고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그 중의 '오락'적인 면을 볼 수도 있고(책 속에는 볼만한 구경거리가 많이 있으니까), 혹은 그 안에 담긴 '도리'를 볼 수도(책 속에는 볼만한 도리 역시 많으니까) 있다. 순수하게 소일거리만을 목적으로 이 책을 본다면 이 책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며, 또 한편, 엄숙한 연구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 책을 본다면 이 책을 '볼만한' 것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적지 않은 독자들은 아마도 이 책이 정치적 투쟁을 그린 우언 소설이면서 구경거리도 있고 의미심장하면서도 재미있고 한편으론 문장도 뛰어난 소설이라는 것을 느끼지(혹은 인정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三. 강호에 있으면 몸도 제 것이 아니다.(人在江湖,身不由己)
중국의 유학자들은 개인의 인생에 대해 아주 우렁찬 이상적인 구호를 제기했으니 바로 '통하면 천하를 다스리고, 궁하면 자기 한 몸이 잘 되기를 꾀하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천 백 년 동안 이것에 아주 익숙해져 왔으며, 또 그를 위해 힘쓰곤 했다. 이것은 분명 이상적인 인생의 목표라 하겠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이상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현실'과의 괴리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현실적인 정치 활동이나 투쟁과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현실적인 정치 활동과 투쟁 속에서는 종종 '통해도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궁하면 자기 한 몸의 잘되는 것 조차 꾀하기 어려운' 식이 되고, 더 나아가면 '천하를 다스리지 않으면 자기 한 몸의 잘됨을 얻기 어려운' 식이 되는 것이다.
소설 <<소오강호>>는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제 몸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이 점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천하를 다스리고 자기 한 몸의 잘됨을 꾀하는' 것은 모두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말장난이거나 혹은 자아도취에 빠진 아름다운 꿈에 불과할 뿐이다.
이 <<소오강호>> 속에서, 정권을 잡으려고 정치 투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비록 '기검의 구분'이 있고 '병파와 비병파의 구분'이 있고 심지어 '정사의 구분'까지 있지만, 실제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봉불평은 악불군보다 나을 게 없고, 악불군은 좌랭선보다 '군자'다울 게 없으며, 좌랭선은 동방불패나 임아행같은 '사마외도'보다 '정의'롭거나 '정파(正派)'다운 점도 없다.
'정의' 혹은 '천하를 다스림'이라는 것은 그저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말이요, 구호요,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체면에 불과할 뿐, 그들의 목적은 사실 전부 권력 다툼이라는 '천추만재, 일통강호'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권력 쟁탈을 위해 모든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였고, 인간성의 더럽고 비열한 부분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사람들을 공포에 떨도록 하였다. '실권파'이든 '반역파'이든 '개혁파'이든 그들의 구호와 그들의 실제적인 수단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목적과 최초의 지향점이 비록 좋은 것이었다 해도 실제적인 투쟁 속에서 점점 오염되고 더럽혀졌다.
소설 속의 임아행의 경우를 일례로 들어 보자. 그가 권력을 빼앗기고 철장 속에 넣어져 서호의 강물 속에서 고초를 겪었던 점은 동정받을 만하다.
동방불패라는 실권파로 말하자면, 그는 '권력을 빼앗은 사람'이자 '반역파'였다.
동방불패가 저지른 온갖 악행, 제멋대로의 행동, 연극같은 온갖 언행,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구호와 의식에 대해 임아행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으며 우습고 슬프다는 생각도 했었으니, 그는 '개혁파'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주 빠르게 동방불패의 의식에 익숙해졌으며, 실권을 잡자 '개혁'은 끝나고 말았다. '일통강호'를 위한 행동도 동방불패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좌랭선과 악불군은 '정파'와 '정의'의 대표로 '사파'와 대립하면서, '천하의 백성들'과 무림인들의 희망처럼 보였으나, 그들이 저지른 일들은 사람들을 공포에 젖게 했고, 어느 것 하나 정의롭고 정직한 '정파의 사람'의 '이상(理想)적인' 행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오직 음모와 함정을 꾸며 잔인하고 흉악한 방법으로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비열하고 천박한 행동을 저질렀으니, 동방불패나 임아행 등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막대선생, 정한사태, 방증대사, 충허도장 같은 정인 군자(正人君子)들은 비록 대악 무도하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역시 '정권에 종속적'이었으며, 종종 '도의'를 생각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든 했고,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곤 했다. '통하면 천하를 다스린다'는 '이상'은 철저하게 깨지고 사라져버린 셈이다!
마찬가지로, '궁하면 자기 한 몸의 잘됨을 꾀한다'는 것 역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복주 '복위표국'의 주인인 임진남이 바로 좋은 예가 된다. 강호에서 임진남은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는' 표국의 주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강호의 일은 이름이 2할을, 실력이 2할을 차지하고, 나머지 6할은 흑백 양도의 친구들의 체면에 의존해야 한다. 생각해 보아라. 북위표국의 표사들이 10개 성(省)을 다니는데 만약 한번 다녀올 때마다 싸움이 난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다치겠느냐?
설사 매번 이긴다 해도 흔히 말하길 '적을 천명 죽이면, 자기 편도 팔백은 다친다'고 하질 않느냐. 표사가 만약 불행하게 다치면 우리가 그 가족을 도와줘야 하고, 거둬들인 표은은 쓸 수도 없으니 우리 집안에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그러니까 말이다. 우리들이 이 표국업을 하는데 있어서 첫째로 중시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고 사귀어 두는데 있다. 이 '교분'이라는 두 글자는 진짜 칼이나 창을 쓰는 실력보다도 더욱 중요하단다."
나아가, 책 속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임진남은 다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면서 말했다.
"이 아버지의 무예는 너의 증조부보다는 뒤떨어지고, 또 너의 할아버지에게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표국을 경영하는 일은 내가 너의 증조부님이나 할아버님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복건(福建)에서 남쪽으로는 광동(廣東)까지, 북쪽으로는 절강(浙江), 강소(江蘇)에 이르기까지, 이 네 성의 기업은 너의 증조부께서 이룩하신 것이다.
산동(山東), 하북(河北), 양호(兩湖), 강서(江西)와 광서(廣西)의 여섯 성은 내가 이룩한 것이다. 거기에는 비결이 있는데, 까놓고 말하자면, '친구는 많이 사귀고 원한은 적게 맺는다'는 것이다. 복위(福威)라는 이름에서 '복' 자가 위에 있고, '위'자가 아래에 있는 것은 복기가 위풍보다 더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복기(福氣)라는 것은 '친구는 많이 사귀고 원한은 적게 맺는다'는 비결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위엄을 놓고 본다면, '위복(威福)'이라고 고치면 위엄조차 복이 될지도 모르지, 하하하! 하하하!"
임진남의 이러한 사고 방식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한 몸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첫 부분에서, 바로 그가 이 말을 할 때, 이미 큰 화가 닥쳐오고 있었고, 결국 멸문(滅門)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바로 '사람은 죄가 없지만, 그 재능은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것이다.
임진남은 무슨 벽사검법이니 하는 것을 연마한 적이 없었고, 그저 '친구를 많이 사귀고 원한은 적게 맺는' 이런 방침으로 가정을 보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호에는 줄곧 법도가 없었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했기 때문에 임진남은 비급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연마하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자기 한 몸이 잘 되기를' 바라기조차 어렵게 되었고, 반대로 가정과 표국 모두가 멸망당하고 말았다.
임평지라는 이 소표국주는 비록 덕행을 쌓은 바도 없었고, '천하를 다스릴 만한' 장점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무슨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우연히 약한 자를 도와주고 곤란한 사람을 도와준 적도 있었다. 원래 '선조의 음덕'에 의거해 자기 한 몸이 잘 되기에는 충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정하고 잔인한 여창해가 집안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이로 인해 강호의 끝없는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가고 만다.
그는 원래 '일통강호'니 뭐니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일통강호'를 꾀하는 무리에 이용당해 계속 그 사람들의 도구로 사용된다. 우선 목고봉이 그랬고, 그 다음으로는 악불군이 그랬으며, 좌랭선도 그랬다.
그들은 그에게 마치 호의가 있는 듯, 은혜를 배푸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각기 계략이 있어서 나온 행동에 불과했다. 따라서 복수하여 원한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지고 사람들에게 동정받을 만한 이 임평지라는 소년 공자 역시 점점 음독하고 잔인하게 변해 갔으며 어느새 새로운 '군자검'이자 '위군자'인 악불군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진심을 보이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악영산은 도리어 그의 손에 죽고 만다! 그의 복수는 원래 동정받을 만한 일이었으나, 이 '복수의 신'이 실제로 이미 '복수의 악마'로, 괴물로, 이성을 상실한 미친 마두(魔頭)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임진남과 임평지 부자의 인생 역정은 아마도 대표성을 지니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형산파의 유정풍이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고, 막역하고 진심어린 우정을 중시하여 금분세수하고 무림에서 물러나고자 한 것은 어떠한가.
이것은 원래 누구에게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정도(正道)'에서 허락받지 못해, 이로 인해 결국 집안이 망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항주 서호의 고산매장(孤山梅莊)의 '매장사우(梅莊四友)'인 황종공(黃鍾公), 흑백자(黑白子), 독필옹(禿筆翁), 단청생(丹靑生) 네 사람은 각기 거문고, 바둑, 서책, 그림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이 네 사람의 이름과 이들이 각자 사랑하는 사물은 대단한 상징성을 지님) 성명을 감추고 거문고와 바둑과 서책과 그림의 재미만을 만끽하고자 했으나, 권력 투쟁(정치)의 어떤 곳에서도 허락받을 수가 없어, 그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죽음을 맞고 만다. 소설 속에 매장사우의 첫째인 황종공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을 살펴 보자.
황종공은 몸을 돌려 벽에 기대 서서 말했다.
"우리 네 형제가 일월신교(日月神敎)에 들어간 것은 강호에서 의로움을 행하고 좋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교주의 성격이 포악하고 사리사욕만 채워 우리 네 형제는 벌써부터 물러나가고 싶었습니다.
동방 교주가 교주에 오른 다음 간신을 옆에 두고, 교 중의 원로들을 모두 제거해 버려 우리 네 사람은 너무나 낙담하고 실망하여 이런 임무를 자청한 것입니다. 이런 임무를 자청한 것은, 첫째로는 흑목애(黑木崖)에서 멀리 떨어지면 사람들과 다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이 서호의 한가(閑家)에 머물면서 글과 서예를 즐기고자 함이었습니다. 십이 년 동안 이런 풍류를 즐길 만큼 즐겼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 때에는 근심이 많고 즐거움이 원래 적은 게 당연한 이치이지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황종공은 자살했다. 이 말은 '궁하면 자기 한 몸이 잘 되는 것 조차 꾀하기 어렵다'는 말과 '통해도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을 잘 드러낸다 하겠다.
동시에 강호에서 권력을 다투는 정치적 투쟁의 더러운 내막과 은사가 되고자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는 고충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탄식을 폭로하고 있기도 하다!
임진남, 임평지, 유정풍, 매장사우 등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한 몸의 잘됨을 꾀했으나' 뜻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로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제 몸도 제 것이 아니'라는 비극의 주인공 들이다.
역사상 계강 등의 인물들의 비극과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권력 투쟁의 근본적 성질과 그 대단한 면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동방불패, 임아행, 좌랭선, 악불군, 여창해는 물론 천문도인, 정한사태, 막대선생, 방증대사, 충허도장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또한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제 몸도 제 것이 아니'라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작가가 이 소설의 후기에서 '정치와 권력에 열중한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권력욕에 구속받게 되고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니게 되어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행동을 수도 없이 저지르게 되니 정말 불쌍한 일'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라. 좌랭선, 악불군, 동방불패, 임아행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권력욕의 노예로, 이 때문에 남을 해하고 자신도 해하여 결국 좋지 않은 종말을 맞지 않았는가.
소설 속에서 이러한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결말을 맞은 자가 없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자멸하고 만다'는 오래 된 이상주의의 관념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물들의 비극적인 성질은 확실히 책에 쓰여 있는대로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제 몸도 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권력 쟁탈이라는 정치적 투쟁의 희생이라 할 수도 있다.
일단 이러한 정치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면 '제 몸의 잘됨만을 꾀하고자 해도' 이룰 수 없고,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생각할 틈도 없이, 오직 용감하게 앞으로만 나가면서 '이기고자 경쟁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을 매장하게 되고, 자기 자신도 매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막대선생의 <소상야우곡>이 이처럼 쓸쓸하고 애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한편으론 '경계가 높지 못해 세속의 기운을 떨치지 못한' 탓에 '오로지 애상(哀想)'만을 노래하지 '슬프나 상하지 않는(哀而不傷)'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강호의 권력 쟁탈이라든가,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이러한 비극적 생애에 대한 깊은 관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악곡은 사실 <<소오강호>>의 주제곡으로도 삼을 수 있을만 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소설 <<소오강호>>는 철두철미한 대비극이다. 정(正)이든 사(邪)든, '일통강호'이든 '소오강호'이든, 모두가 비극적 결말을 맞고 있다.
이 소설은 정치, 특히 중국 정치의 대비극에 대한 심각한 우언이다. 그것의 심각한 면은 바로 정치 체제의 비극과 인성 속에 내재한 권력욕의 비극이라는 양면을 함께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인성은 극도로 왜곡되고, 인성 속의 더러운 부분이 극도로 팽창되어 결국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제 몸도 제 것이 아니게' 되고 마는 것이다. 천하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 한 몸의 잘됨을 얻기도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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