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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씀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났고, 성령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저 받은 것이기에 수동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인 성도들은 이제 그 은혜와 사랑에 따라서 능동적으로 해야 할 것을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바로 우리의 육체, 그 정욕과 탐심에 따라 살아서는 안되고, 육체의 소욕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소욕에 따라서 살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지 않고, 세상의 것에 연연하며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언급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개역 개정)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공동번역)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새번역)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산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 번역본을 종합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자이니, 성령으로 살아야 하는데,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한 번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성령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고,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면 성령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이 질문에 아무런 꺼리김 없이 ‘그래 나는 구원 받았어. 난 괜찮아’라고 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뭐래, 난 그런거 상관 없어’ 라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면 다시 한 번 물어 보십시오. 정직하게 “나는 성령으로 행하는가”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살아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언급을 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
이 구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나아가 6장으로 넘어가서도 되풀이됩니다. ‘짐을 서로 지라’
1. 서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 말씀으로 행하는 것)에서 ‘서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실천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세상 속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를 택하여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되고, 나는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후에는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거듭난 이후,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후 내가 성령님의 능력을 사는 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살아서 그 열매는 나 혼자서 누리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이루어지는 일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맺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사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내가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셨고, 내가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령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산다면, 육체의 욕심에 사로잡혀 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 되어 자기에게 집중하고 자기만족, 자기 욕심을 최우선에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이후로 아담의 후손된 인간은 성령으로 행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철저히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자기 세계의 담장을 넘지를 못합니다. 자기 넘어의 사람과 공감이나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제일이고, 자신이 제일 불쌍하고, 자신이 제일 사랑스럽든지 자신이 제일 못났는지 간에 자기에게만 의식합니다.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어서 늘 징징거리며 우는 것입니다.
사실, 어렵다. 힘들다. 안된다. 자기가 제일 불쌍하다고 우는데, 들어보면 별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욕심을 내려 놓으면 되고, 조금 천천히 하면 되고, 우선 순위를 정하면 너무나 쉬운 것인데, 자기 자신과 자기 욕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이 보이는 형태를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26)
“잘난 체 하지 말고”(현대인의 성경)
육체의 소욕을 따라는 것, 세상의 악한 영에 따라 사는 것을 두고서 ‘헛된 영광을 구하다’고 했습니다. 잘난체 하며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무슨 말입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헛된 영광을 구하다
“헛된 영광”이라는 말은 ‘텅 빈 영광’ ‘비어있는 명예’라는 뜻입니다.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그럴 듯한데, 속 빈 강정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꿈을 꾸어보셨나요?
달리기를 하는데, 내가 아무리 애쓰고 달리는 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데도, 다른 사람을 슬슬 걸어가는데도 따라잡지 못해서 진땀을 빼는 그런 꿈,
저는 그것이 꿈이어서 다행이라며 잠에서 깨어나서 마음을 위로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남보다 앞서서 달리고 싶고, 일등해서 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도 그런 본능적인 욕구, 명예욕이 있습니다. 거기에 강한 욕망으로 인정받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저의 꿈 속에서 그렇게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영광을 구하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된 영광을 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받으려고 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할 때 사람들은 우월감에 빠집니다. 더 쉽게 말하면 교만해집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잊어버립니다. 지금 자신이 누리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수고이 열매로 생각합니다. ‘내가 그래도 이렇게 했기에, 내가 내가 ….”합니다. 자기 수고의 결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합니다.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에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잊어버립니다. 대신에 자기에게 없는 것에 마음을 두고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늘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비관적이고 하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기에 감사가 없습니다.
이렇게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에 빠지게 되는 늪은 교만의 늪, 좌절의 늪, 불평 불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영적 자유함이 없고, 감사가 없고, 세상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할례나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외적인 율법의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헛된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추구했을 때의 결과는 교회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삶 속에 분명했습니다.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
노엽게 하고, 투기하게 합니다.
공동번역에는 더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헛된 영광 구하면 (잘난체하면) 싸우고 질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드러내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이 두가지 사이를 오락가락합니다.
내가 낫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우월감에 빠지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더 낫기 때문에, 내가 더 잘 생각하고 내가 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손해 보는 일입니다. 무시해야 합니다.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 결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고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왜 이렇게 대우하냐? 내가 누군데, 이렇게 해, 내가 그렇게 대우 받아야 하나?”
이런 우월감(교만)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열등감을 빠집니다. 그 열등감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 보이면 불편하고 시기 질투하게 됩니다.
‘잘나서 정말, 지가 뭔데.’ ‘나는 왜 이래, 왜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 왜 나는 ….”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합니다. 비교하므로 비참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감추려고 거짓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허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면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월감에 빠진 사람이든, 열등감에 빠진 사람이든, 서로를 비교하면서 텅 빈 영광을 위해 가짜를 얻으려고 교묘하게 다투고 시기질투하면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왜 불화가 일어날까요? 여러분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는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헛된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고, 자신의 정과 욕망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면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인한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높은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분수에 맞게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성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존재 가치와 책임감을 깨닫아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진짜 참된 영광을 추구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미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3:26)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를 확인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건져낸 하나님의 독생자의 목숨을 주고 산 존재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로 매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헛된 영광이 아닌 진짜 영광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보이는 사람이나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존재감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참된 하늘의 영광을 구하고 맛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4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