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원 교수 | nikaya@naver.com
승인 2014.01.20 16:49:34
늙고 죽음을 안다면
욕망은 어리석은 것
이기적 욕심 버리고
만족하는 삶 배워야
들판에 목동이 소를 모는 모습은 목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의 소 모는 목동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목동과 소에 집중해 보면, 목가적 분위기는 일순 변하고 만다. 목동의 손에는 어김없이 막대기가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는 그림과 같은 풍경에서 의미가 없었던 막대기가 문득 눈에 들어오면, 경우에 따라서는 비극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의 입장에서 보면 목동은 친근한 벗이 아닌, 두려운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소가 목동의 말을 듣는 것은 아마도 막대기의 의미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폭력을 가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막대기가 주는 상징적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것이다.
‘법구비유경’에는 목동이 소를 모는 것을 늙음과 죽음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막대기를 들고 목동이 소를 몰아 풀을 뜯게 하듯, 늙음과 죽음도 또한 그러하여 생명을 기르며 몰고 가네.
막대기(杖)를 들고 소를 몰고 가는 것을 늙음과 죽음이 생명을 재촉하여 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참 절묘한 비유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이런 저런 굴곡이 있어도 아름다워 보인다. 목가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참으로 서글프며 무상하기 그지없다. 멀리서 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남의 일을 본다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는 것은 바로 내일인 것이다. 나의 일이라고 해도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은 멀리 보는 것이기에, 때로는 아름답게도, 때로는 아쉽게도 느껴지지만 어디까지나 추억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늙고 죽어간다는 사실은 가까이 보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데 의학과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늙음과 죽음이 가까운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내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면, 삶의 모습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처럼. 그러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기적 욕심과 투쟁심을 많이 내려놓게 될 것이다. 설령 늙음과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이며, 어리석음일 것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두려움은 없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두려움을 모른 채,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천년만년 살 것인 냥,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산다. 그러니 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어도 나만 잘 살만 된다는 그런 천박한 이기심을 내는 것이리라. 아무리 이득을 쫓는 삶이라고 해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요즘의 세태는 그런 정도를 가볍게 무시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온 땅이며, 나의 자손들이 살아갈 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처럼 파괴적인 욕심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키운 나라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갈 나라라는 생각이 있다면, 당장의 이득에 나라를 불행하게 할 욕심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욕심을 부린다고 해도 어차피 늙고 병들어 죽게 될 몸이, 영화를 누리면 얼마나 더한 영화를 누리겠는가. 두려움을 알고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덕목일 것이다.
욕심을 부리는 것은 쉬워도, 만족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족을 배우고, 가리키는 사회가 건강하고 복된 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선 늙음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필원 동국대 연구교수 nikaya@naver.com
출처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0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