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모스크바 북서쪽에 있는 고급 아파트 '알르예 파루사' (алые паруса, Scarlet Sails, '붉은 돛대'라는 뜻,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백야' 축제 명칭) 1층 로비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12월 주상복합식 아파트 입구에 있던 전동 킥보드(전기 스쿠터)가 폭발하면서 러시아 화생방전 방어사령관(소장)이 사망한 폭발 사건과 달리, 현지 한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모스크바 주재 우리 기업들의 주재원들과 외교관들도 거주하는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교민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 폭발 사건으로 2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구소련의 아르메니아계 범죄조직을 이끌면서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내전 발발 시 러시아편을 든 아르멘 사르키샨(46)과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자폭한 테러 용의자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사르키샨/사진출처:DAN
러시아에서 자폭 테러는 '체첸 내전'(체첸 자치공화국의 러시아 연방 탈퇴 시도를 막기 위한 전쟁)과 그 이후, 러시아인들을 위협해온 이슬람(체첸) 전사들의 트레이드 마크다. 체첸 자치공은 현재 푸틴 대통령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적극 지원하는 친러 정권(대통령 람잔 카디로프)이니 그들의 소행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러시아 수사 당국은 이번 사건을 "치밀하게 계획된 암살"로 규정하고 배후 세력을 추적 중이다. 특히 자폭한 남성의 신원과 살해 동기 등을 파악하고 있다.
사건 발생 직후. 현지 주요 언론들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보안국, SBU)이 지난해 12월 사르키샨을 수배자 명단에 올렸다는 점을 근거로 우크라이나측 소행으로 지목했다. 이튿날(4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과 가진 인터뷰에서 "SBU가 돈바스와 유로마이단(2014년 친러 정권을 무너뜨린 우크라이나 대규모 시위)에서 자행된 살인및 폭력 사건에 연루된 인물을 제거했다"며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잘 모른다"고 언급했다. 사르키샨 암살을 지목한 것이나 다름 없는 발언이었다. 사르키샨은 유로마이단 당시, 휘하의 폭력 조직을 '티투슈키'(Титушки, 시위 진압 자경단)로 편성해 강압적으로 시위 해산에 나섰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을 조사하는 러시아 수사관들/사진출처:현지 TV 첸트르
재미있는 것은, 사르키샨의 암살이 우크라이나 돈바스와 접경 러시아 지역의 범죄 조직 판도에 미칠 영향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6일 사르키샨의 죽음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범죄 조직 판도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Как поменяет криминальные расклады в Украине и в РФ гибель Армена Саркисяна)는 기사에서 "암살 배후 조직이 우크라이나 SBU가 아니라, 그의 거대한 '지하 사업'을 재편하려는 세력이거나,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의 축출 움모와 관련된 보복 사건일 수도 있다"고 짚었다. 기존에 나온 분석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알고 보면 설득력이 꽤 있다.
우선, 샤르키샨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범죄 조직 뿐만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도 지역내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 중 하나였다. 돈바스 지역을 통제했던 소수 집단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州) 고를로프카로 이주했으며 도네츠크주 복싱연맹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특히 유로마이단 사건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고를로프카 출신의 친러 성향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도 직접 연결될 정도로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는 유로마이단 사건 이후 돈바스에 국한된 인사가 아니라 전국구 인물로 부상했다. 유로마이단 시위 진압을 위해 휘하의 '티투슈키'를 동원했고, 또 시위 지휘부를 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전국에 수배됐기 때문이다. 그는 또 반정부 성향의 기자 뱌체슬라프 베레미를 살해한 용의자로도 지목됐다.
그러나 사르키샨과 그의 '티투슈키'는 돈바스의 탈(脫)우크라이나 분리및 독립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2014년 고를로프카 내무부 점거를 주도하면서 오히려 세력을 키워갔다.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은 그를 고를로프카 지역의 모든 사업을 총괄하는 '그림자 감독'으로, 일부 언론 매체는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범죄 조직의 총수로 부르기도 했다.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아르메니아인 위주로 편성된 친러시아 '아르바트'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이듬해(2023년) 군사 용병 그룹인 '바그너 그룹(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6.24 군사 반란을 계기로 러시아 정규군에 편입됐다.
내전과 같은 정치·사회적 혼란기에는 지하 범죄 조직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사르키샨도 겉으로는 친러 도네츠크 분리주의 세력을 적극 지원했지만, 실제로는 지하 범죄 조직를 이끄는 핵심 인물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돈바스 지역을 관할하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과 우크라이나 범죄 조직을 잇는 소통 역할을 도맡았다. 그가 러시아 특수 군사작전 개시 직후, 러시아군 특수부대의 메시지를 우크라이나 당국에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이 시도는 실패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사르키샨은 DPR(도네츠크주)에서 러시아 정보기관(FSB)의 후원 아래, 준범죄 사업 영역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고철및 석탄 무역, 담배 사업 분야를 장악했다. 담배는 그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동시에 도네츠크에서 러시아 유명 예술가들의 초청 공연을 성사시켰고, 레스토랑 체인점을 열었으며, 지역(도네츠크) 복싱연맹의 대표를 맡았다.
사르키샨은 범죄조직 보스답게 십여명의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녔다. 그가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승용차에 탑승하는 모습/러시아 TV 채널 5 캡처
러시아 점령지에 사업처를 둔 우크라이나 기업인들과 전직 고위 공무원, 범죄조직 등도 사르키샨을 통해 DPR내 사업상 문제를 해결할 정도였다.
물론, 사르키샨은 돈바스 지역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접경 러시아 로스토프주 범죄 조직과 손잡고 조직을 확장했다. 2020년 로스토프주 최대 범죄 조직의 두목이 터키에서 암살당한 것도 그의 소행으로 알려졌다.
부패한 우크라이나 권력과 연결된 끈은 담배사업이었다. 그는 2017년부터 우크라이나 자포로제(자포리자)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하르코우(하르키우), 니콜라예프, 오데사 등에 담배 공장을 세우고, 우크라이나 정보기관(SBU)과도 결탁하는 등 우크라이나 권력기관에 줄을 대기도 했다.
하지만, 특수 군사작전이 진행되면서 사르키샨의 운명은 확연히 달라졌다. 우크라이나 영토내 사업은 일단 접어야 했다. 대신 '바그너 그룹'과 같은 군사기업(PMC)를 만들기 위해 '아르바트 부대'를 창설했다. 우크라이나 GUR는 그가 2022년 말 프리고진 '바그너 그룹' 수장을 제치고 러시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동원하는 새로운 감독관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트라나.ua는 "사르키샨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러시아 정보기관과의 인맥을 동원해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4개 주(도네츠크 루간스크 자포로제 헤르손주) 범죄 조직의 중심 인물이었다"며 "그의 암살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하 조직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매체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사르키샨 암살을 배후 조종한 것처럼 나서지만, 유사한 다른 사건과 비교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개입된 이전의 암살 사건은, 대개 경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 개인이 그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극우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 블로거 블라들렌 타타르스키, 작가 자하르 프릴레핀, 화생방전 사령관 키릴로프 장군 등은 아마추어급 킬러가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0여명의 경호원을 거느렸던 사르키샨의 경우, '자폭 테러'라는 프로급 킬러가 나서야 했다.
달리던 자동차가 폭발하면서 러시아 극우 철학자 두긴의 딸 두기나가 폭사한 고속도로 상에서 러시아 수사관들이 현장을 조사하는 모습/러시아 수사위원회 영상 캡처
러시아 렌(REN) TV에 따르면 자폭 용의자는 사르키샨이 나타났을 때 MON-50 대인지뢰(TNT 약 300그램)를 터뜨렸다. 그는 범죄 전과가 있는 아르메니아인이며, 특수 부대에도 근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암살 이유로 범죄 조직들간의 세력 다툼이나 아르메니아 정권 전복 사건과 관련된 보복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지난해 파시냔 총리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발각됐는데, 사르키샨의 '아르바트' 부대 구성원들이 주도했다는 혐의가 짙었다. 파시냔 정권으로서는 그가 계속 러시아 점령지 돈바스에서 활개치고 다니도록 두고볼 수만은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암살 테러범이 자폭한 만큼, 사건의 진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궁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