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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연중 제14주일) 에제 2,2-5; 2코린 12,7ㄴ-10; 마르 6,1-6
신학교 입학하고 첫 수업이 철학입문이라는 과목이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전까지 그저 지식들을 외우고 시험 치는 것에 익숙했던 신입생들에게 철학이라는 과목은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첫 시간에 담당 교수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철학의 시작은 바로 의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왜?’라는 질문에 도출된 답에 다시 한번 ‘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르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라는 말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계속해서 의심해 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저서 "철학원리"에서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에 무게를 둔 것이지요. 그 후에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레오나르 토마는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살아가면서 가지는 건강한 의심들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러한 건강한 의심 외에도 참 의심할 것들이 많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의심할 것들이 늘어만 갑니다.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혹시 원산지나 그 과정에서 속임이 있지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인지, 내가 듣는 것이 거짓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아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SNS의 가짜뉴스들, 유튜브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 올라오는 근거 없는 주장들은 세상을 끊임없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재미와 흥미를 위해 어느 정도 꾸며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꾸밈을 넘어 속임이 판치는 세상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만 같습니다. ‘착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이야기가 삶의 교훈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심만 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의심만 하며 살아가다 보면 진리를 제대로 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측면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 의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계실까?’ 하는 의심부터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하는 질문들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고향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시자 많은 이가 듣고는 놀랐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마르 6,2) 그러나 그 놀라움은 긍정적인 놀라움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임을 뒤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의심할 수 있지만 그저 의심로만 끝난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은 진리이신 주님을 제대로 마주할 기회를 놓치게끔 합니다.
제대로 된 의심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생각에 갇힌 의심은 진리를 마주할 기회를 놓치게 만듭니다. 세상을 혼돈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상처를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진리를 앞에 두고도 의심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나에게 생겨서는 안되겠습니다. 거짓과 불의를 거부할 수 있는 건강한 의심과 참 진리를 두고 의심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함께 청하는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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