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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비무장
펄 시스터 특선집(님아/커피 한잔) 1968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신중현이 추구했던 ‘한국적 록’은 상업적, 대중적인 면에서 실패였다.
그는 연주자로서는 유명했지만, 애드 포나 블루즈 테트 등의 음반의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때마침 그때는 미 8군 쇼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고,
그 대신 베트남에 가서 위문 공연을 하는 ‘월남 군예대’라는 호재가 있었다.
그는 그래서 월남 군예대로 일단 출국해서 프랑스나 다른 국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군예대에 신청했다.
아마 신대철이 태어난 무렵인 듯하다.
1967년 출국을 기다리던 신중현에게 여고생 듀엣 펄 시스터즈가 찾아왔다.
그 후 펄 시스터즈는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스타일의 가창’을 지도받았고,
신중현이 떠나기 전 기념 음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신중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편하게, 눈치 볼 것 없이’ 녹음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역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음반은 몇 달 뒤 ‘대박’을 터뜨렸다. 라디오마다 “님아….”라는 후렴구가 흘러나왔고,
거리에서 이걸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1969년 말 한 주간지에는 1960년대 10년을 통틀어 10곡의 곡을 뽑았는데 “님아”는 당당히 5위를 차지한다.
발표된 지 1년 남짓 된 곡이 말이다.
음반이 대성공을 거둔 후 다른 주간지에는 초기 미 8군 무대부터 펄 시스터즈와의 작업에 이르는
신중현의 경력을 상세하게 취재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기사가 나간 뒤 음반업계 사람들, 음악 지망생들이 신중현을 찾아오기 시작하고, 며칠 연속된 공연도 매진이 되었다.
이렇게 음반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신중현은 ‘마음이 변한다’.
즉, 한국에 계속 살기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이로 인해 음반으로 번 돈을 위약금으로 날렸다는 전해진다.
그렇지만 신중현은 이른바 ‘신중현 사단’을 구성하여 히트 제조기가 된다.
음반의 백미는 첫 세곡 “님아”, “커피 한잔”, “떠나야할 그 사람”이다.
느린 템포와 여백이 많은 연주에 펄 시스터즈의 노래가 합쳐져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상실감, 아득함, 쓸쓸함 등의 정서가 나온다.
“님아”는 한 마디에 코드가 두 개 나오는 화려한 코드 진행의 기타 스트리밍으로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마지막에서 조성이 바뀌면서 외쳐대는 후렴구의 훅(hook)이 인상적인 곡이다.
한편 “커피 한 잔”은 애드 훠의 데뷔 음반에 수록된 “내 속을 태우는구려”와 제목만 다르고 나머지는 같은 곡이지만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블루지한 퍼즈 기타가 서스테인이 긴 라인을 전개하는 것은 신중현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특징이다.
뒤에 김선(덩키스), 트윈 폴리오 등이 리코딩했던 “떠나야 할 그 사람”도 이 음반에 수록된 버전이 가장 맛깔난다.
네 번째 곡 “두 그림자”에서는 분위기를 바꿔서 밤에 몰래 데이트하는 연인을 앙증맞게 들춰내고 있다.
신중현의 이후의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업템포의 흥겨운 ’ 12마디 로큰롤’이다.
뒷면은 1960년대에 ‘빽판’으로 발매되었던 팝송 히트곡들의 번안곡을 들을 수 있다.
“가고 싶은 샌프란시스코 머리엔 꽃을 달고 가세요/님 찾아가는 샌프란시스코 멋진 사람 만나겠지요/
찾아서 오는 많은 사람들 여름엔 사랑 속삭이지요/거리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 거리엔 꽃을 달고 다니지/
먼 곳에서나 설레이는 가슴 말할 수 없네”(“샌프란시스코에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는 가사는
히피 문화에 대한 동경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어 가사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시베리보다는 개발되고
번화해지는 서울 도심의 풍경이 떠오르지만…
펄 시스터즈 - 커피 한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팔분이 지나고 구분이 오네
일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내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아 그대여 왜 안 오시나
아 내 사랑아 오 기다려요
불덩이 같은 이 가슴
엽차 한잔을 시켜 봐도
보고 싶은 그대 얼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커피 한잔“이 출시되던 1969년은 우리 가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한 해였다.
우선 신중현사단이 주도한 “소울, 싸이키델릭싸운드”의 약진이 그 하나요,
그다음으로 여성 소울싱어의 대거 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중현 휘하에서 이정화, 김추자, 펄 시스터즈가 맹활약을 펼쳤다.
심지어 김상희 마저 소울싱어로 전향을 할 정도로 소울의 인기가 하늘에 닿았다.
정민섭과 손잡은 양미란, 김희갑과 콤비를 이룬 임희숙 등이 모두 그해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여성소울싱어들이다.
특히 펄 시스터즈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져 “69 MBC 가수왕”에 등극하며 절정의 인기를 과시하였다.
신중현은 자신의 곡이 히트를 하지 못하면 다른 가수를 통해 재 취입시키기를 즐겼는데
‘커피 한 잔“역시 1964년에 에드 포에 의해 발표되었던 곡이었다.
윤복희가 이 땅에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켰다면 펄 시스터즈는 핫 팬티 열풍을 몰고 왔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핫 팬티에 롱부츠를 신은 패션은 가위 뇌쇄적이었다.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펄 시스터즈의 등장에 팬들은 환호했고 펄 자매는 데뷔 첫해에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그 여세로 ‘준과 숙’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진출하였으나 준 히트 정도에 그쳤고,
미국에도 진출하였으나 마음처럼 녹록치 않았다.
언니인 배인순은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으며 화제를 뿌렸으나 해로를 다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동생 배인숙은 79년에 솔로가수로 다시 돌아왔으나 곧 재미동포 의사와 결혼하며 자연인으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 가요계에 비디오 시대를 활짝 열었던 펄 시스터즈!
그 시대를 살았던 팬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진주로 박혀 빛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9oZQMB2j14&t=18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