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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순례는 제주에서 인천으로 차를 싣고 배를 타고 가려하였지만
배 수리와 점검 관계로 승객은 탈 수 없다 했다.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내려 차를 찾으로 인천여객터미널로 가는 불편함 때문에
렌트를 하려고 하였는데, 사위 차를 일주일 간 빌려준다고 하여
사위차로 순례를 하기로 하였다.
제주에서 8시 45분 비행기를 타기위해 차를 면사무소 주차장에 주차하고
제주공항가는 직행버스 첫차 (6시 34분)를 막 타려는 순간
도장을 받아야하는 성지순례 책자를 집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나서 타지않음.
시간을 보니(공항까지 1시간 걸림) 다음 직행버스는 7시 8분이었음.
아내는 우리 차를 공항근처에 주차하자고 했으나
부칠 짐도 없었기에 위태롭지만 다음 직행버스를 타자고 우겼다.
정상으로 도착하면 8시 8분 도착이기에 25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가 밀려서 10분 늦은 8시 18분에 도착했다.
서둘러 탑승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하니 우리 비행기가
15분 늦게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한 자매를 만났는데 아내에게 필요한 병원정보를 알려주었다.
유용한 정보였다. 지나고보니 마음은 졸였지만 집에 물건을 두고와
다음 차를 탄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처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그분을 찬미하는 순간이었다.
김포공항 → 행주성당 → 김포성당 →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 → 갑곶순교 성지
7.1Km 12.6Km 36.1Km 12.8Km
1. 행주성당
행주 성당은 1899년 약현(현 중림동약현) 본당 관할로 설립된
행주 공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행주 포구는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가 제법 많은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899년 당시 약현 본당 주임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곳에
행주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52명이었으나
공소 설립 1년 만에 10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교세 성장과 더불어 이 지역은 또한 약현 본당 관할의 경기도 서부 지역,
즉 김포군·통진군·고양군·양천군·양주군·파주군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공소들을 관할하기에도 적격이었다.
그러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909년 5월 21일 행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김원영 신부는 이듬해 8월 17일, 성모 승천 대축일 직후에
뮈텔 주교를 모시고 고양군 주도면 행주외리 197번지에 마련한 성당의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성모 승천으로 정하였으며, 1922년에는 성당을 증축하면서 사제관도 신축하였다.
그 후 행주 본당은 일제 말기에 선교사 추방 등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질 무렵인
1942년 1월, 8대 주임이었던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대전 목동 본당으로 전임된 후
신부가 파견되지 않음으로써 한때 공소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광복이 된 후 1948년 2월에 9대 주임으로
김성환(金成煥) 빅토리노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본당으로 부활된 후 공동체는 활기를 되찾았으나, 얼마 못 가 도시화 현상으로
신자수가 감소하자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는 그 보완책으로
1957년에 수색동 205번지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현 수색 본당)으로 바꾸면서 행주 본당은 재차 공소가 되었다.
2004년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설립되면서
행주 공소는 그 해 11월 18일 능곡 본당에서 분리되어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행주 본당은 2007년 5월 27일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을 열고
‘행주 공소 설정 110주년 ·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이 자랑인 행주대첩의 고장이며 교회사적으로 100년이 넘는
고양 지역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본당의 위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기념사업에 들어갔다.
그 일환으로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식돼 가고 있는 성당을 복원하고,
신자 재교육을 위한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한편 학술대회, 100년사 편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행주 성당은 1928년 인근의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상량 목부재를 포함한 기존 기초 부재를 대부분 재활용했고,
1949년에 증축하면서 기록한 자료 등 변천 과정의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어
성공회 강화 성당(사적 제424호)과 함께 대표적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행주 성당은 2010년 2월 1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 12권에서
발췌 및 내용 일부 추가(최종수정 2013년 5월 9일)]
특별 전대사 성모 순례지
성모승천을 주보로 모신 행주 성당은 2016년 1월 25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를 맺고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 같은 해 10월 26일 대구 대교구 성모당을 모델로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동굴과 같은 모양의 성모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행주 성당은 또한 근현대 순교자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포함된
하느님의 종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와 윤의병 바오로 신부가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곳으로 순교자들의 손길과 땀이 배어 있는 순례지이다.
한강 이북 최초의 한옥 성당
110년의 뿌리 깊은 역사를 간직한 행주 본당의 복음화 여정은
행주 공소에서 시작됐다.
1899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두세 신부가 공소를 세웠다.
1909년 5월 약현 본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해
김원영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행주 성당은 서울 명동. 약현 성당에 이어
서울과 경기 북부권에서 세 번째로 세워졌다.
2010년 2월 등록문화재 제 455호로 지정됐다.
성당 건물은 근대 초기의 목조 한옥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화산성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2. 김포성당
1946년 11월 서울대교구 행주 본당(현 의정부교구)에서 분리되어
매괴(로사리오)의 성모를 주보로 설립된 김포 성당은 현 인천교구에서는
답동 주교좌성당과 소사 성당에 이은 세 번째 본당이다.
김포 지역의 전교는 1900년경 약현(현 중림동약현) 본당 전교회장
유공현(劉公鉉)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0년 김포읍 걸포리 34번지에 행주 본당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공소의 발전과 신자 수 증가로 1946년 11월 22일 걸포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병호 베네딕토 신부는
장차 발전이 기대되는 김포읍에 새 성당 부지를 마련하고,
1949년 본당명을 김포 본당으로 개칭한 후 1950년 초 사제관을 김포읍으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6 · 25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본당 공동체의 내실화와 활성화를 위해 1995년 교육관을 건립하고,
활발한 전교활동으로 신자 수가 증가하자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기존의 석조 성당 아래에 붉은 벽돌조로 마감한 웅장한 새 성당을 건립하여
1999년 11월 18일 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성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의 새 성당과 오른쪽 언덕 위의
옛 석조 성당이 함께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 새 성당 내부는
완만한 굴곡으로 천장은 세련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준다.
단순한 구조이면서도 형형색색의 색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당 뒤쪽에 앉아 양쪽 벽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 속에
제대 뒷벽에 걸린 십자가와 그 아래 감실을 바라보노라면
양쪽 벽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마치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처럼 와 닿는다.
새 성당을 지으면서 옛 석조 성당에 있던 종을 그대로 새 성당 종탑에 옮겨와
옛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김포 성당만이 지닌 특별한 매력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전야미사 때와 새로운 한해를 맞는 12월 31일 자정에는
신자들이 직접 종을 울린다.
새 성당 건립 후 주일학교 교리실 등으로 사용하던 옛 석조 성당은
본당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2005년 10월부터 대수선 공사를 시작해 피정 공간으로 꾸미고,
옛 수녀원 자리에 교육관을 신축하여
이듬해 5월 10일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집전으로
교육관 및 옛 성당(강당)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야외동산에 십자가의 길도 새로 조성하였다.
문화재청은 2013년 4월 18일
옛 석조 성당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하였다.
옛 석조 성당이 김포 · 강화 지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 의장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화강석을 쌓아 올리는 건축 방식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그 건축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결과였다.
[출처 : 윤선자,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평화신문, 2004년 3월 7일,
백강희 기자의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5년 3월 3일)]
6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김포성당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석조건물이 눈에 띈다.
1956년에 건축된 김포성당의 구성전이다.
김포성당은 1946년 서울교구 걸포리성당으로 설립되어
1950년 김포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62년 인천교구 관할이 되었다.
1953년 나무로 지어 축성한 임시 성당에서 불편을 느껴오던 신자들은
전쟁후 배당되는 구호물자의 일부를 팔아 성당을 신축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이렇게 신자들의 정성을 모아 완공한 99평 규모의 아름다운 석조성당은
김포 지역 신자수 증가로 이어져,
실제로 성당 건축 후 1년 9개월동안 신자수가 50%나 증가했다.
성당에서는 1999년 새 성전을 지어 축성하면서도
구성전을 그대로 보존하여 강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한 구성전 돌제대는 야외 제대로, 종탑의 종은 새 성전으로 옮겨
지금도 특별한 미사때 사용하며 성당의 60년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사진속에서 신원식 신부가 지고 가는 상량보는 지금까지 잘 보관되어 있고,
이밖에도 성당 제대에 성 빅토리노와 성 넥다리오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 성체 성지 선포에 즈음하여 ◆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에서 교황님은
하느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목자들인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지속적인 성체 조배를 할 것을 호소하심으로써
성체 조배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라는 교회의 유구한 가르침을 구체화하셨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성체 조배를 실천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습니다.
교황님의 호소에 도움이 되고자
교황청 성직자성은 몇 가지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성체 조배를 장려하기 위해 전담 사제를 임명할 것을 바라며,
거룩한 성체에 대해 특별한 사랑을 빛나게 하고 육성하는
‘성체 성지’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사제들은 그들의 성화(聖化)의 비밀이
바로 성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사제는 성체를 관상하는 조배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교황청 성직자성은 성체 전담 사제와 성체 성지에 대해 알려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성체는 “날마다 짓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고 죽을 죄에서 보호해 주는 해독제”
(트리엔트공의회, 제13회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체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신묘한 방법으로 감실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인천교구는 김포 (구)성당이 적절한 ‘성체 성지’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곳을 성체 성지로 선포함으로써, 그곳을 방문하는 모든 믿는 이들이
성체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관상함으로써
영적으로 더욱 정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체 성지’는 담당사제가 임명됨으로써 미사 성제가 이루어지고,
세계 성체 기적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성체 성지’로 인천교구민뿐만 아니라
그 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 안에서 깊이 숨쉬며,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보여지는 행동이 중요시 되는 오늘이지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 조용히 머물며 드리는
성체께 대한 지극한 신심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성체 성지’ 선포로 각 본당에서도
성체께 대한 깊은 신심이 더욱 북돋아지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천주교 인천교구장
3.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우리 교회에는 적게는 만 명, 많게는 삼만 명의 순교자가 계시지만
우리가 이름 정도라도 알고 있는 순교자는 약 1,000여 명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많은 신앙 선조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에 인천교구에서는 2002년 강화도에 '한국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께 봉헌하였다.
이곳에는 전국의 유명 성지의 상징물들이 있는 '순교자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순교자 현양당과 무명 순교자상, '일만 위 순교자 현양탑' 등이 있다.
또 '성모당'과 연못을 돌며 묵주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묵주 연못'이 있다.
또한 '개인 성체조배실'도 마련되어 있으며 '위로의 주님상'을 모시고 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 성심을 현양하며 '위로의 주님상'을 모셨고,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배우며 기도하는 '슨교자의 십자가 길'을 봉헌하였다.
또 1866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 치명한
성 남종삼 요한의 유해가 모셔져있는 '남종삼 기념관'도 마련되어 있어,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길'을 찾고 배우게 될 것이다.
순교 성지는 아니나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삶의 성지이다.
동산으로 올라가면서 순교자의 길, 해미 성지의 호야나무, 물고기 모양 제대 돌,
묵주 연못, 다락골의 줄 무덤, 옹기, 배론 성지의 토굴, 순교자 현양당,
성모당, 무명 순교자 현양탑 등 전국 각지의 순교자 관련 조형물을 볼 수 있다.
동산이 넓고 조용한 데다 경치가 빼어나 휴식 장소로도 제격이다.
김종성 신부가 4년 동안 포크레인을 직접 조작해 가면서
하나하나 완성한 땀의 결정체다.
현양 동산을 ‘삶의 성지’라고 말한다.
“순교 성지는 아니다. 엄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찾아와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성지를 만들고 싶었다.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오르다 보면 무명 순교자들의 위로와 격려를 느낄 것이다.
그들은 신앙 불모지를 복음의 밭으로 일구느라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는가.”
김 신부는 볼거리 많은 탁 트인 분위기에 대해
“관광 명소가 아니라 기도 명소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기도와 쉼의 장소이므로 야유회나 등산을 목적으로 한 방문은 허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음주 가무와 취사는 불가능하다.
강화 터미널에서 국화리-고부 방면 버스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한다.
첫댓글
참 평화로우신 여행일지
세잎 클로버 님
고양군...
고양시입니다 ㅎ
늘 행복 하셔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