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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겸손한 것이 미덕일까요?
질문
현대사회에서 겸손한 것이 과연 미덕이 될까요? 주위에서 흔히 보면 자기 자랑을 하고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잘난 척하는 것이 오히려 더 사회생활 하기에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숨기는 것은 더 이상 현대사회에서 미덕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나 또는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에서는 겸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어떤 것이 맞는지요?
답변
상담을 하다 보면 만나는 내담자들 중에 성격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성격 장애를 가진 분들이 간혹 오시는 데, 이들은 성격적인 특성 자체가 특이하여 부적응적 삶이 지속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성격 장애는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발전하여 성인기에 개인의 성격으로 굳어진 심리적 특성이 부적응 양상을 나타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 장애 중에서 자기애적인 성격 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진 분들을 보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겪은 경험들이 무의식 속에 잠재돼 성인이 된 후 행동과 성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주로 부모나 타인과 애정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경험하면서 이차적 자기애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부모 양육 태도에서 적절한 좌절이나 실패 경험 없이 제멋대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받지 못하거나 냉정하고 차가운 양육을 받게 되면 애정결핍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칭찬받거나 특별한 대우를 해 주면, 아이는 이를 매우 중요시하게 되고 스스로 인정받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점점 엄마의 칭찬과 거절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이상적인 자기상에 점점 집착하게 됩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외현적 자기애와 내현적 자기애로 구분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외현적 자기애를 가진 분들은 타인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내현적 자기애는 타인이 자신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주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그런데 뭐가 됐든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가진 분들의 공통점은 부적절한 ‘자만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만심으로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잘난 척하는 경우와 ‘겸손함’을 갖고 있는 경우에 만약 문제를 일으킨다면 어느 쪽이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까요? 우리가 살면서 자기 과시적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경우만 볼 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할듯합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 평가를 올바르게 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평가를 잘못해서 부적절한 ‘자만심’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자만심’을 그저 좋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겸손에 대해서 미국 대학농구의 전설적인 감독, 존 우든이 한 말이 있습니다.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다, 겸손하라. 명성은 인간이 준 것이다, 감사하라. 자만은 자신이 준 것이다, 조심하라”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이 꼭 내 능력과 장점을 숨기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겸손은, 관계 속에서 적응하고 남을 배려하며, 자신의 능력 정도를 알고 있으며, 나아가 그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비책은 겸손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그 시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대인관계가 어려워서 성당에 가기 힘듭니다"
질문
청소년기부터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어디를 가든 다른 사람들이 저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고 제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당에 가서도 주일미사만 참례하고 사람들을 피하듯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 자체가 어렵습니다.
답변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느냐의 문제 아닐까 합니다.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하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곤 합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리학 이론들 중에 ‘대상관계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인간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생애 초기에는 양육자, 주로 어머니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코헛이라는 대상관계 심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감탄과 찬사를 받으려는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초기 양육자인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일이 나타난다고 보입니다. 결국 태어나서 얼마동안은 주 양육자가 아이를 잘 돌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한 가지 걱정은 뭔가 자녀에게 어려움이나 잘못이 생기면 주 양육자인 어머니가 잘못 키워서 그렇다고 비난하기 쉽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이 세상 대부분의 어머님들이 억울해 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그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생득적인 생물학적인 존재이기도 하기에 대인관계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성격 특성도 한몫을 하기에 문제가 생길 때 자기 스스로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특징이 있지만, 거부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커서 오히려 혼자 지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질 때 회피적 성향의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성격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한국인들 중에는 내향적인 사람이 많아서 대인관계에 대부분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받은 여러 심리적인 어려움, 예를 들자면 모욕감, 무가치함, 소심함, 수줍음, 열등감 등도 작용해서 시간이 갈수록 더 위축되는 삶을 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주장 훈련이나 사회 기술 훈련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만, 혼자 하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우울이나 불안, 분노 등이 나타나게 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초대하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이것도 다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만나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잘 맺으신 뒤에 그런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 모두는 예쁘게 보일 것입니다.
또래관계에서도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친구만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지 말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도 만나면서 차츰 관계를 넓혀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행동을 담담하게 해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용기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열등감에 괴롭습니다
질문
어릴 적부터 괜히 저 스스로가 못나 보여서 괴롭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공부도 빼어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중간 정도는 됐고, 외모도 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저보다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힘들고 질투심도 나고 주눅이 듭니다.
답변
델라웨어(Delaware)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모스트(Most)와 로렌소(Laurenceau)의 연구(2010)에 따르면 질투는 실제로 ‘맹시’(盲視)를 만든다고 합니다. 즉, 질투심을 느낀 사람들은 불쾌한 감정 때문에 정신이 혼란하여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고 합니다. 인간의 뇌는 특히 정서적인 정보에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에 정서적 자극이 나타나면, 그것에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질투는 유기불안(遺棄不安)으로부터 분노나 굴욕에 이르는 아주 포괄적이고 복잡한 감정 상태입니다.
질투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며, 타인이 소중한 관계에 위협적일 때 특히 영향을 받게 됩니다. 즉, 금실이 좋은 부부관계를 위협하는 미모의 이웃 여성이라든지, 깊은 우정을 흔들리게 하는 새로운 친구의 등장 같은 것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질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며,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당신이 가진 것을 나도 갖길 바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당신이 가진 걸 나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위적인 사고인데, 이는 질투심이 결국 개인적 우월성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질투는 고통스런 감정 경험이긴 하지만 심리학자들 중에는 질투가 일종의 마음의 신호라고 말합니다. 즉, 소중한 관계가 위험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일종의 경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질투가 유발되면 가족들 간이나 애인, 친구 등과의 애정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좀 더 나은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질투는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오히려 도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쩌면 필요한 감정일 수도 있답니다.
그렇다고 질투를 마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가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 ‘니나’는 동료 ‘밀나’를 질투한 나머지 정신증적으로 혼란한 가운데 환영인지도 모르고 충동적으로 ‘밀나’를 찔렀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칼로 찌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질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과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정은 절대적이며, 그중에서도 질투는 가장 절대적인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단 질투가 생겨나면 저절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많은 시간 동안 질투하는 대상에게 집중하는데도, 정작 질투를 받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질투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듯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안의 욕망을 찾아서 알아줘야 하겠습니다. ‘내가 1등 했어야 하는데’가 아니라 ‘내가 1등을 하고 싶었구나!’, ‘내가 더 예뻐야 하는데’가 아니라 ‘나도 예뻐지길 바라는구나’, ‘나도 돈이 많았으면…’이 아니라 ‘나도 부자가 되고 싶어 했구나’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나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감추려고만 할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드러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저 질투가 아닌 나의 바람(want)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그걸 얻기 위해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노력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남의 행복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답니다. 한번 시작해 봅시다. 지금 바로.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지옥이 있나요?
질문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라고 하는데 왜 당신이 만드신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도록 하시는 것은 모순 아닌가요?
답변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가톨릭 이외의 종교에서도 내세를 이야기하고, 천당과 지옥을 설파하고 있는데 그 나름대로 각각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각 종교의 교리에서 천당과 지옥을 언급하고 있고 신자들은 그 교리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의 종교는 대부분 이원론적인 사상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 이런 두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도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옥을 알기 쉽게 설명을 하기 위해서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을 했다고 보입니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질문에 쓰신 대로 ‘지옥’은 악마건 인간이건 저주받은 자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입니다. 죽은 인간이 영원한 벌을 받는 장소와 상태를 지칭하기에 우리에게는 시각적 이미지로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지옥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중 어느 개신교 교회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인 피지라는 나라를 낙원이라고 하며 이주해 노동하면서 사는 신도분들의 모습이 방송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준비한 측에서는 ‘천당이라고 불리는 지옥’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싶습니다. 지옥은 못 견디게 고통스럽거나 참담한 형편에 사는 우리의 모습을 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요즘에는 갑질이라든가 왕따라든가 하는 여러 형태의 어려움이 우리를 지옥과 같은 삶으로 몰아넣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일부러 고통 속에 빠뜨리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잘 생각해보고, 사물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의 기쁨을 좀 더 많이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참으로 다양한 성품을 지닌 존재입니다. 나약해 보이면서도 또 고결하고 강인한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실현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긍정적인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친밀감을 통해 생애 만족감을 경험합니다.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직업적인 성취로 만족을 얻고, 봉사활동으로 사회적으로 기여하며 여가활동으로 현실의 기쁨을 향유합니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성숙을 키워 나갑니다. 즐겁고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생활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의 열쇠를 찾아낸다면, 이미 천국의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천국의 선택을 통해 멀리 떠나보내는 것은 어떨까 라고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혼자 있는 것이 힘듭니다
질문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두렵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를 보고 쾌활하고 항상 분주하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혼자서 있는 시간이 두렵고 힘들어서 사람들을 찾아 만나고 일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하지만 잠시라도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되면 안절부절 못하고 두렵고 힘이 듭니다.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제가 학창시절 개교기념일이라서 집에 엄마랑 하루 종일 같이 있던 날이 기억납니다. 그날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형제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퇴근하고 오신 아버지나 형제들이 하나같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 ‘엄마!’, ‘여보!’라고 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아버지나, 형제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엄마’를 찾았던 것은 ‘엄마’라는 애착 대상에 대해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애착이란 특정 대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유대감 같은 것으로, 극소수의 제한된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의 끈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애착 대상과 분리될 것 같을 때 ‘분리 불안’(separation anxiety disorder)이 발생합니다.
흔히 분리 불안 장애가 아동에게만 일어나는 증상으로 보기 쉬운데, 분리 불안 장애는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과 노인에게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성인의 분리 불안 장애는 배우자나 가족, 친구, 연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기본적으로 분리 불안 장애의 특징은 애착 대상과 분리되는 것을 부적절할 정도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고, 애착 대상에게 해로운 일이 생길까봐, 혹은 애착 대상을 상실하게 될까봐 불안해하여 멀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악몽을 꾸거나 신체적인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인이라도 분리 불안이 심각한 경우에는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직업이나 학습 활동을 하는 동안에 주의 집중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특히 분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상대방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강한 분노를 보이기도 합니다. 즉, 배우자나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고, 지나치게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상대방에 집착하기 때문에 당사자나 상대방이나 모두 생활에 매우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부모의 과잉보호적인 양육 방식이 있었던 경우에는 성인이 되어도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닐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애착 대상에 대해서 ‘갑자기 떠날지도 모른다, 또는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생각과 왜곡된 생각들이 강한 불안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분리 불안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로부터 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착 대상과 분리되는 경험이 ‘나쁘다’라고 인식되는 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독립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기 위해서 의존적이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개개인이 독립성이 발달해야 건강한 상호 의존성이 가능합니다.
우선, 분리 불안은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애착 대상과 잘 협력해서 조금씩 조금씩 분리되는 연습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나이가 들어가면서 엄마랑 조금씩 떨어져서 학교도 가고 직장도 다니고 했듯이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랑과 관심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애착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금 당신이 사랑받고 있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음성으로 들리지 않아도 지금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으니, ‘지금 내 옆에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 어디 있어? 나왔어’라고 했듯이, 지금 혼자라서 두렵다고 느껴질 때 큰소리로 불러 보십시오. 곁에 계신 ‘하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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