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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3강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행3:1-26
요절/행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늘 말씀에는 사도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한 사람을 걷고 뛰게 하는 회복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는 심히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을까요? 또 이 기적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제 구시는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과거 인간적인 야심으로 ‘누가 크냐’ 서로 경쟁하던 사이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사는데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해주는 그런 동역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 문에 못 걷게 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고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40여 세나 되었습니다. 40여 년간이나 한 번도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족이나 동료 친구들이 날마다 그를 메고 와서 미문이라 불리는 성전 문에 앉혀 놓습니다. 여기 ‘미문’은 말 그대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중에 가장 아름다워 사람들은 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미문은 황동으로 입혀져 반짝였고 높이가 23m나 되어 웅장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 미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경건한 유대인들로서 기도를 구제와 금식과 함께 중요한 경건 생활로 삼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미문 앞은 예루살렘에서 구걸하기 가장 좋은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성전 문 앞에 있지만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데 왜 나만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는 걸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인생은 변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 되는대로 살자. 그러나 밥은 굶지 말자.” 이것이 그의 인생철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뿐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한낱 구걸의 수단이 됩니다. 그날도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구걸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을 주목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내게 유익이 되고 나의 명성에 플러스 알파가 될만한 사람들을 주목하고 그들과 사귐을 갖고자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주목합니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도 나에게 어느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그 사람을 주목합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재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게 되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에 의해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자,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그 한 사람을 관심가지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 강림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구걸하는 그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고뇌하던 세리 레위를 주목하여 보신 예수님처럼, 뽕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자 했던 삭개오를 주목하여 보신 예수님처럼,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아무도 소망을 두지 않고 자기 자신도 소망을 가질 수 없었던 그 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깊은 애정 가운데 바라보았습니다.
또 베드로는 그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 했습니다. 구걸하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 했을 때는 뭔가를 줄 수 있는 게 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줄 수 없는데 ‘우리를 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 사람과 장난치거나 조롱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확실히 있었습니다. 구걸하던 그 사람의 귀가 순간 번쩍 뜨였습니다. 오늘 월척 하나 건졌나보다 하는 기대로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무슨 색깔의 돈이 나올까? 5만원권 하나라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베드로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을 향한 베드로의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의 첫마디는 실망스럽습니다. 한마디로 “나 돈 없어. 기대하지 마.” 뭐, 이런 소리 아니겠습니까?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처럼 절박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 사람에게 있어 돈은 곧 하루 식량이고, 구걸한 돈이 곧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제는 실제적인 문제를 도와주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형제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할 때 시원한 냉수 한 사발 주는 것은 귀한 섬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도 돈이 필요합니다. 캠퍼스 점심 모임 때도, 예배 후 식사 교제 때도 돈이 들어갑니다. 동역자들과 양들을 섬길 때 여러모로 물질이 사용됩니다. 복음 역사뿐만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차도 굴리고, 집도 장만하고, 자녀 교육도 할 수 있습니다. 안정적인 노후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합니다. 본문의 은과 금으로 대변되는 돈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베드로도 없는 은과 금, 물질만 생각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진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없는 것을 바라보기보다 자기에게 있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6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나 그 사람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베드로가 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만물을 만드시고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예수님 자신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38년 동안 누워 꼼짝 못 하던 병자도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 구걸하던 사람이 바라던 돈은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심 기대했다가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를 가지고 노나!” 화도 났을 것입니다. 이런 그 사람에게 베드로는 “내게 있는 이것”을 준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내게 있는 이것”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베드로에게는 은이나 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그 사람, 구걸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과거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한 거지를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하며 운명적이고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지금의 베드로는 돈을 구하는 앉은뱅이 걸인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어 돕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일어나 걷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자 그의 말라비틀어진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걷습니다.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35장 6절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메시아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날입니다. 한숨과 슬픔이 변하여 기쁨과 찬송이 된 날입니다. 그에게 있어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했지만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불구자는 성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인생 문제를 해결함 받고 회복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흥분되고 감동적인 그 순간, 자신을 회복시키시고 새 삶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평생 인도 선교사로 산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69세 때 중풍에 걸려 보스턴 병원에 5개월간 입원했을 때 쓴 책입니다. ‘디바인 예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예스’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중풍으로 누워 있을 때 그는 간호사에게 부탁합니다. “아침에 나를 보러 올 때 ‘굿모닝’하지 말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리에서 일어나라’라고 말해 주겠어요?” 간호사는 황당했지만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병실로 들어가면서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탠리 선교사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의료진의 예측을 뒤엎고 5개월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 후 20년 동안 더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 한번 해볼까요? 중세 시대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중세 시대)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엄청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우리의 교회는 땅도 많이 가지고 있다. 건물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었다.”
이것은 중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 미국 신학자인 스윗은 오늘날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이 안 계신다. 교회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 그 병은 예수 결핍 장애(JDD: Jesus Deficit Disorder)이다.” 교회가 성경이나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강조하고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에 예수님이 없다는 모순을 지적한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합류하여 세상이 원하는 은과 금을 교회에서 이야기합니다. 교회도 돈을 이용한 세상의 원리가 작용하기 쉽습니다.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과 빵빵한 앰프 시스템 시설, 각종 편리한 부대 시설과 오락 프로그램 등이 갖춰져 있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교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구제도, 교육 사업도 해야 합니다. 병도 고쳐주어야 하고, 사회 개혁도 외쳐야 합니다. 교회에 이런 사역들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교회 핵심 사역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교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그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소망을 주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겪는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산적한 문제 해결의 답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알았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 이름으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죽은 이름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선포할 때,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역사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백성들이 크게 놀라 솔로몬 행각에 모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 두 번째 설교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앉은뱅이가 걷게 된 기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어떤 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모이게 하기 위해 종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과 경건에 관심을 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목에 힘이 들어가고 마치 자기들이 이런 역사를 이룬 것처럼 자랑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유혹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는 것은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요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교회에는 서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운한 것들을 달래는 것이 목회라고까지 말들 합니다. 왜 서운할까요? 내가 드러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셔야 하는데 내가 영광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 형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예수님께 영광 돌려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무엇이 못 걷던 그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 믿음을 가진 주체를 베드로와 앉은뱅이로 보았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집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상황에 집중하면 우리는 믿음을 잃고 주저앉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집중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예배시간, 기도 시간은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믿음은 우리를 전능하신 예수님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고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합니다. 베드로는 기적 자체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는 기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방향을 틉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기 쉽습니까? 우리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후에 한 선지자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무엘 이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럴 때 새로운 날이 옵니다. 여기 ‘새롭게 되는 날’은 ‘숨통이 트이는 날들’, ‘상쾌한 날들’, ‘생명력이 충만한 날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신체의 어떤 부위가 꽉 막혀서 답답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 몸에서 여러 조직이나 기관이 굳어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심장이 굳어버리면 숨을 쉬지 못하고, 위장이 굳어버리면 음식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폐가 굳어버리면 산소공급이 안되어 죽습니다. 손, 발이 굳어버리면 움직일 수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과 생각이 굳어버리면 그 사람은 내적으로 죽습니다. 새로운 것을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회개하면 꽉 막힌 영혼의 숨통이 트이고 상쾌하고 생명력이 충만한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 인생의 새날은 결코 금과 은을 많이 얻는 데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조건을 개선하는 데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행을 즐기고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새날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이전과는 다른 새 인생이 펼쳐집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님 재림 시에 만물이 회복되는 새날을 경험하게 됩니다(20,21).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록 육신은 약해지지만, 영혼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죽으면 육체는 한 줌의 흙이 되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합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강하고 신령하고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모든 만물도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함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성도들의 참된 소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택한 자녀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회개’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참된 복은 진실한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진실하게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심령 깊이 영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모든 불신과 한계적인 생각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므로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이 예수님을 통해 준비하신 복들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