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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재반격
제 1 절 쌍방의 정책과 전쟁지도
'50.6.25일부터 '51.5월에이르기까지 쌍방은 어느 한쪽이 일시적으로 우세를 독점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결정적 승리는 쟁취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이 수반ㄷ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유엔군은 자유우방지녕 국가들의 전쟁 조기 종결을 바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미국의 경우는 더욱더 내부적인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기며 행정부와 군부의 갈등은 깊어갔다. 맥아더 원수의 해임이 가져오는 효과가 전쟁종식이란 "큰 산"이라면 무책임하게 한국민의 바램(북진통일)을 저버리고 바로 휴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중공의 무력개입에 속수무책으로 미군이나 유엔군이 돌아서서 그들의 요구대로 한반도에서 물러나기에는 앞으로 미칠 파급효과(전 세계의 공산화)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반면 중공의 입장에서는 무한정의 인력동원(북한군 포함 80개 사단)으로 유엔군을 그동안 밀어붙였지만 이제는 인적자원이나 보급면에서 어느정도 한계치에 도달하고, 기대했던 러시아의 지원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싯점에서 계속적으로 인해전술이란 파상공격에만 의존해서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결정적 승리를 쟁취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개달았다.
결국 이러한 쌍방의 인식에서 전쟁 1년 만에 전선이 전쟁전의 현상으로 회귀하여 38도선 부근에서 교착하게 되자, 군사적 수단 대신 정ㅊ치적 수단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1. 유엔군의 정책과 전략
유엔군은 1951년 초,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수도서울을 넘겨주고 37도선으로 철수하는 위기상ㅎ황을 극복하고 '51 1월 말 평택-삼척선에서 재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도선으로 진출함으로서 전쟁전의 상태로 회복하였다. 그리고 4월 초에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유리한 지형을 연결한 이른바 "캔사스 선"까지 진출하였으며, 그후 중부전선의 방어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철의 삼각지의 저변을 연결하느 "와이오밍선"으로 진격을 하게 된다.
이 무렵 미 행정부는 적절한 시기에 대한 정책을 수정하여 "적절한 휴전장치하에 전쟁을 종결하고 전쟁전의 상태로 복귀한다"는 새 정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의 임무는 적에세 충분한 피해를 가하여 적들로 하여금 미국의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은 변함이 없이 일관되게 통일된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우리의 조국을 분할하는 여하한 결정도 절대 반대한다는 것이엇다.
이와 같이 전쟁수행 정책 결정을 두고 한미 간의 갈등이 표출되는 와중에 미국은 '51.4월 11일 그동안 미 행정부의 대한 정책에 잦은 불화를 초래해 왓고, 휴전협상 제안에 마찰을 빚은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미 제8군사령ㄱ관인 리지웨이 대장을 임명하였다.
리지웨이 대장의 부임으로 미국은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제한하려는 정책목표를 추진하게 된다. 리지웨이는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에게 "미 제8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당시 점령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만 38도선 북쪽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하도록 허가"되었다.
그렇지만 캔사스-와이오밍선을 초월하는 주요부대의 전진은 오직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에 의하여 실시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제8군의 부대는 만주나 소련의 국경선을 넘어서는 안되며, 그 국경선에 인접한 북한 영토에서 작전하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특히 극동 해공군사령관에도 이러한 지시가 하달되었으며, 극동군사령관(유엔군 사령관 겸임)의 사전 승인없이는 한만, 혹은 한소 국경선을 넘어서는 안되며, 나진이나 압록강상의 수력발전 시설에 대하여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적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후 유엔군의 작전방침에관한 논의가 발전되어, 투르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대한 정책의 핵심은 목표를 둘로 구분하였다. 최종목표로서 한반도에 통일. 독립민주국가의 수립문제는 군사적 수단과는 별도로 정치적 수단에 의거 계속 추구하며, 당면 목표로는 한국전쟁의 해결은 유엔기구를 통하여 추구하되, 적절한 휴전협정으로 적대행위를 종결하며,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38도선까지 미칠 수 있도록 경계선은 그 북쪽에 설정하며 이러한 당면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침략자에 대한 응징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민국은 제외되었으며, 특히 당시 국방장관 마샬이 도쿄를 경유, 대구의 미제8군사령부을 방문하고도 우리 정부와 아무런 협조도 없이 귀국해 버렸다.
2. 공산군의 기도와 전략
모택동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후 '51.2월 공세까지 4차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싣도, 서울을 점령하고 최대 37도선(평택-제천-삼척)까지 진출하기는 하였으나 유엔군의 섬멸과 축출에는 실패하였다. 오히려 그동안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됭어 '51년 3월 말에는 38도선 북쪽으로퇴각하여 바아진지를 편성하였다.
이곳에서 거의 2개월 동안 재편성과 병력을 증원하여 두 차레의 춘계공세를 전개한다.
먼저 '51. 4월 하순에난 서울 점령을 목표로 중서부전선에서, 5월 중순에는 중동부전선에서 국군 주력을 섬멸을 목표로 연속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을 무기로 공세를 펼쳣지만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결국 오히려 8만 5천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는다
결국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유엔군의 화해전술에(포병항공해군) 패하고 만다. 적은 병력으로는 현대화된 장비를 압도할 수 없음을 개닫게 되엇도, 당시 그들의 군수지원 능력으로는 공세작전을 7~10일 정도 밖에 지속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춘계공세에 참패한 중공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5월공세를 예정보다 일찍 종료하고 4월 공세의 출발지점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다시 그곳에서 재정비와 현대적 작전수행 능력을 향상시켜 새로운 전투에 대비한다는 비장한 결의를 하였다.
이러한 전황에 접한 중공지도부는 "장기작전을 준비하여 미군을 섬멸하고, 조선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여 이른바 "지구선"으로 전화하고 미국측의,휴전제의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6월 중순 지구작전과 평화회담을 통하여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새로운 전쟁지도 지침을 채택하고, 군사작전 면에서는 지구전과 적극방어의 방침을 확정하였다.
즉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한편으로는 적극방어의 수단으로서 적군으이 유생역량을 대량 살상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장비개선과 훈련을 강화하여 작전능력을 증대시켜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거나, 적군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게 한다는 방침을 결정한다.
결국 한국전쟁은 개전 1년 만에 쌍방의 이해타산에 의거 전선은 교착되고, 전선에서의 열전ㄱ과 협상 테이블에서의 설전이 교차하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으로 변모하개 된다.
제 2 절 전쟁전 현상으로 회귀
1. 피아의 전선 상황
가. 중공군의 철수
중공군은 5월 16일 중동부 전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2차 춘계공세(5월 공세)를 개시하여 현리일대에 종심 약 60km 에 달하는 대규모돌차구를 형성하면서 하진부리-유촌리까지 진출하엿으나, 20일을 전후하여 주력부대의 공세활동이 현저히 감소된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지연작전과 강력한 포병 및 항공폭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중공군 제12군과 제15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더이상 공세작전을 펼칠 수 없었으며, 이로인해 돌파구 첨단인 경강국도로 진출 중인 중고욱ㄴ 제20군과 제27군, 그리고 북한군 제2군단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고립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당시 에비대를 투입도 가능하였지만 공격제대들의 피해가 주로 유엔군의 포병화력과 항공폭격에 의한 것임을 상기할 때 증원부대의 투입이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검토한 지원군사령관 팽덕회는 5월 21일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하게 화천저수지 북쪽의 북한강을 전투지경선으로 하여, 중공군이 저수지 서쪽으로, 북한군이 그 동쪽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공산군은 21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동부의 돌파구 첨단인 하진부리-유천리에 진출한 적은 명령이 늦게 도착하여 22일부터 야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한편 북한강 서쪽의 중공군 제19병단도 미 제1군단, 제9군단과 접적을 단절하고 임진강 상류와 철원 부그으로 , 북한군 제1군단도 임진강 북쪽으로 서둘러 철수하게 된다.
나. 유엔군의 반격작전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절정에 도달한 5월 18일, 풍암리로 진출한 준공군이 미 제2사단에 압력을 가하며, 선두부대들은 국군이 방어 중인 숙사리-하진부리 방향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여 유엔군의 중동부 전선이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춘천 서쪽의 중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 4개 군이 배치되어 있으나, 일부 부대의 소규모 양공작전만 펼칠 뿐 두렷한 공격 징후가 보이질 않았다.
전황을 분석한 유엔군사령관은 18일 중동부전선에 집중된 적의 기세를 왆화시킬 방안으로 미 제8군사령관에게 서부전선에서 철의 삼각지대로 이어지는 주요 병참선을 위협할 수 있도록 2개 사단 규모로 철원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51.5.19일, 이 지시에 의거 미 제1군단, 미 제9군단이 공격준비를 하는 동안에 유엔군사령관은 19일일 본인이 직접 실시한 정찰을 통하여 중동부 전선에 적의 전선이 과도하게 돌출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그는 이 약점을 이용하여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도록 미 제8군사령관에게 공격범위를 전 전선에서 확대하여 반격작전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때 미 제8군사령관도 적이 아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내륙 깊숙이 진출하였으나, 수일내 병참선의 신장과 산악지형으로 군수지원에제한을 받아 공격이 지체되거나 정짇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기회에 신속히 공격을 개시하여 적 후방의 병참선을 차단하면 적을 "긴자루" 모양의 함정에 몰아넣어 결정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제1단계 목표인 문산-가평-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신속히 제2단계 작전으로 철원방향으로 신속히 전환하여 교통의 요지로 "긴자루"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포천-철원 축선상의 영평 부근과 춘천-김화 축선상의 화천 부근을 점령하여 적의 목을 조르듯 퇴로를 차단한다는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게획에 의거 미 제1,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은 적의 주력부대나 예비대가 방어준비를 갖추기 전에 그들을 섬멸하기 으ㅟ해 '51.5월 20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도 21일 전후하여 강력한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하에 풍암리-하배제-속사리를 연하는 선에서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자, 즉시 미제10군단은 양구-인제를, 국구 ㄴ제1군단은 양양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2. 캔사스선으로 진출
가. 임진강-영평 진격전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은 5월 20일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캔사스선상의 영평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1사단을 문산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을 동두천 축선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을 포천 축선에 투입하여 3개 사단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임진강-영평 진격전('51.5.20-27)
백학 전곡 한탄강 캔사스선
고랑포 영평 관모봉 연곡
적성 미1기병 미25사 금촌
장파리 감악산 일동
미1기병=미25사
임진강 동두천
금곡 해룡산 포천 미25=국2사
칠봉산
문산 법원리 덕정 토페카선
토페카선 국1사=미1기병
국1사 가납리 미1기병
내화산 동거리 문산천 대보리
금촌 봉일천 국2사
명봉산 앵무봉 의정부 미25사 신촌 미1군단=미9군단
지영리
관산리 고양
곡릉천
고봉산
일산 삼송리 지축 미1기병 미25사
국1사 마석
미 제1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은 삼송리-봉일천-동거리를 연하는 도로의 좌측ㅇ에 제11연대, 우측에 제12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관산리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제15연대를 작전지역 중앙에 투입하여, 죽원리에서 지영리 일대로 진출한 제15연대는 곡릉천을 도하하여 북동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엿으나, 연대의 공격도 봉일천-삼송리 도로 동쪽 248고지 일대의 적의 적의 공격으로 일시 돈좌되었지만 야간 공격으로 기습을 달성하여 목표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사단의 우인접 미 제1기병사단도 지축일대에서 공격이 돈좌되었다. 이로인해 국군 제1사단은 측방노출을 우려하여 내화산-명봉산을 연하는 선에서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날 저녁 상황을 분석한 제1사단장 강문봉 준장은 적이 주력의 임진강 선 이북으로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고 잇다고 판단하고 북한군 제1군단의 임진강 도하를 차단하하여 지대내에서 격멸하기위해 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21일, 그러나 적이 먼저 21일 03:00시에 법원리 남쪽 외화산에서 제11연대를 선제 기습공격하여, 처음부터 고역이 차질을 빗게 되고, 제15연대는 문산천 북쪽의 가좌현에 배치된 적의 박격포 사격으로 문산천 도하에 실패하였다. 여기에 종일토록 비가 내리어 문산천 도섭을 불가능학게 하였다.
22일, 공격 제대들은 필승의 각오로 다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미 적은 주력이 임진강 넘어로 도주하고 경게부대만이 남아 있어 주력 결멸에는 실패하고 군단 공격제대 중 가장 먼저 토페카선을 점령하였다.
23일, 한편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우전방 미 제25사단은 공격초기부터 적의 완강한저항에 동두천-포천 간의 적의 주저항선을 돌파하는데 지체되면서 23일 저녁 무렵에 미 제1기병사단은 가납리, 미 제25사단은 신촌 부근의 토페카선에 도달하였다.
25일,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지난 5월 부산에 도착한 캐나다 제25여단을 미제25사단에 배속하여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도록 하여, 군단 선봉에 나선 미 제25사단은 "돌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25이 영평을 점령하였으나 적이 먼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하엿으며, 국군 제1사단도 적이먼저 강북으로 철수함으로서 지난 4월 공세시 이 지역에서 물러난 이후 한달 만에 다시 임진강변으로 복귀하였다.
27일,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이 임진강-전곡을,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전곡-영평의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자 군단장은 추가적인 공격을 종료하고 캔사스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하였다.
미 제1군단은 적 주력을 격멸에는 실패했지만 중공군 제65군이 해룡산-칠봉산을 연하는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아군의 공격을 저지할 게획을 무력화시켰다.
나. 가평-화천 추격전
※'51.5.28일, 결국 중공군이 대규모로 투항하는데 하루에 38,000명의 적이 아군에 투항하였다.
※이러한 낭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 작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화천 저수지를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국군 제2-31연대 제1중대 제2소대는 청평-가평 도로의 감제고지인 174고지를 공격하면서 중공군 2개 중대를 개활지로 유인하여 격멸함으로서 한국군 최초로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금번 작전간 목표인 화천 점령이 너무 지연되어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완전 포위는 못하였지만, 미 제9군단은 이번 작전간 총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군단은 341명 전사, 2,011명 부상, 195명이 실종처리 되었다.
가평-화천 추격전('51.5.20~5.28)
광덕산 미7사 화천 화천저수지
두류산 캔 사 스 선
백운산 사창리 구만리 병풍산
국2사 국6(-)사
장암 수밀리 미24사 신포리 캔사스선
국망봉
캔사스선 국2사 화악산 지암리 미7사 미7=국6 미9군단=미10군단
일동 적목리 가덕산 국6(-)
미25=국2 강씨봉 국2=미24사
청계산 국2 토페카선 토페카선
미1=미9 북배산 국6=미7 북한강
운악산
토페카선 계관산 춘천
신팔리 가평 국6 매봉
현리 미24(-) 북한강
개주산 국2 원창고개
신점리
미7사
청평
호명산
174 국6=미7
북한강 홍천강 미9=미10
미24=국2 국2=국6 홍천
미24사 국2사 국6사 미7사 미1해병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도 좌인접 미 제1군단과 같이 5월 20일 가평-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화천을 점령할 목적으로 좌초부터 미 제24-국2사-국6사-미7사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9군단장 호지 소장은 각 사단장들에게 22일 중으로 홍천강 북쪽 3~5km까지 진출하여 중공군의 주력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도록 하였으나 4개 사단 모두가 홍천강변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23일, 미 제8군사령관은 중동부전선의 중공군 5월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미 제10군단의 전투정면을 축소하기 위해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ㅁ미 제9군단이 미 제10군단의 좌전방 홍천 부근 지역을 인수하였다. 이 조치로 미 제9군단장은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한 미 제7사단으로 하여금 홍천-춘천-화천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화천저수지 서쪽지역을, 국군 제6사단은 북한강 서측의 계관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좌전방으로 진출하는 미 제24사단은 국군 제2사단의 엄호하에 청평-가평도로를 따라 신속히 가평을 공격하고, 국군 제2사단은 미 제24사단의 가평진출을 엄호한 후, 대보리로 진출하여 좌인접 미 제1군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군단은 이 계획에 의거 5월 24일 07:00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중공군은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중대단위 적은 우회하여 신속히 진출하여 화천을 점령하도록 독촉하였다. 잉에 미 제9군단장은 미 제7사로 하여금 춘천까지 기계화부대로 공격하도록 하여, 제7사단장은 "하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춘천을 정찰하도록 명령한다.
하젤 특수임무부대가 공격하자, 중공군 제60군의 1개 연대가 춘천 남쪽 신점리와 원창고개에 이르는 고지군에서 강력히 저항하였다. 이로 인하여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이 지연되면서 오후에 춘천ㅇ에 도달하였으며, 무방비 상태로 후퇴하는 중공군을 공격하여 다수를 살상하고 생포하였다.
이 무렵 미 제7사단장이 하젤 특수임무부대를 순시하기 위해 전방으로 이동 중에 신점리 부근에서 중공군의 매복대에 고립되었다가 전차솓대의 지원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구출되기도 했다. 저녁 무렵에 튻이무부대는 복귀하여 25일 재배치되었다.
26일, 새벽에 항공관결과 약 10,000여 명의 중공군이 춘천-화천 도로와, 부근의 보조도로에 집결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춘천 서쪽과 북서쪽에도 다수의 중공군이 식별된다.
중공군은 24일 춘천으로 진출했던 하젤특수임무부대를 주공으로 오인하여 신속히 화천 북쪽으로철수하기 위해 밤새도록 이동하고 있엇던 것으로 후일 밝혀졋으며, 유엔군은 항공과 포병화력으로 맹폭하여 중공군은 혼란에 빠졌다.
기회를 포착한 미 제7사단은 제17연대를 기동화하여 춘천으로 진출시키고, 국군 제2사단의 엄호하에 가평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은 가평-지암리 도로를 따라 공격을 한다.
한편 국군 제6사단도 좌우인접에서 미 제24-21연대와 미7-17연대가 지암리와 화천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북한강 북쪽에서 가평-춘천 사이의산악지대로 공격하여, 제2, 제7연대가 적의 방어거점인 계관산-북배산을 연하는 고지군을 공격하고, 제19연대는 우회기동으로 북배산 후방으로 진출,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싯점에 항공관측에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빠져나오는 중공군 1만여 명의 병력이 차량 및 야포와 함게 행군대형으로 화천저수지 남쪽을 지나 화천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날렸다.
이에 제9군단장은 적의 퇴로를 봉쇄하기 위해 작전지역 중앙에서 진격 중인 국군 제6-19연대는 계속하여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고, 사단 주력은 미 제7사단과 화천저수지를 공격하기 위해 춘천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51. 26일, 공격의 선봉에 나선 미 제24사단의 제21연대와 미 제7사단의 제17연대는 26일 오전에 지암리에서 합류하고, 이 무렵 국군 제6-19연대도 지암리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써 3개 연대는 춘천-화천도로와, 가평-지암리 도로, 그리고 지암리 남쪽의 국군 전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우리 속ㅇ에 중공군을 몰아 넣었다.
27일, 미 제17연대가 먼저 화천을 보전조로 공격햇지만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더디고, 살상가상으로 구름이 깔려 항공지줜조차 어려웠다. 이에 27일 아침을 전후하여 중공군이 대대규모로 포위망 탈출을 기도했으나 모두 격멸되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한 중공군은 무질서하게 퇴로를 찾아 방황하다 2,000여 며이 포로가 되었다.
'51.5.28일, 결국 중공군이 대규모로 투항하는데 하루에 38,000명의 적이 아군에 투항하였다.
이날 오후부터는 기상이 화창하여, 항공과 포병의 지원 속에 미 제7-17연대는 화천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아직도 중공군 제20군의 1개 사단이 화천 북방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중공군 전사에는 " 중공군 제180사단은 27일 아침 우측의 매봉을 점령했으나, 적이 북쪽의 사창리-화천선을 점령하여 포위되었다. 이때 사단의 주요지휘자들이 동요하고 주저하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전투력을 집중하여 적의 배치 간격을 돌파하지 않고 분산 돌파를 채택하여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작전에서 중공군 제180사단은 완전 포위되어 와해되었다.
이 무렵 지암리를 공격 중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이동한 국군 제6사단(19연대 결)도 공격을 개시하여 적을 격퇴하면서 구만리발전소-병풍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상황을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적이 길강에 늘어져 있어 쓰레기 줍듯이 트럭에 실ㅇ어 담앗으며, 아군 소대병력이 적 대대병력을 무더기로 생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포로호의 진실]
이러한 낭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 작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화천 저수지를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한편 국군 제2사단은 23일 청평호 북쪽 174고지에서 중공군을 격파한 후 바로 호명산을 점령한다. 24일은 군단의 전선 조정게획에 의거 미 제24사단으이 가평 진출을 엄호한 후 군단의 좌전방 영 제28여단의 현리-원홍리ㅐ-개주산 지ㅐ역을 인수받았다.
26~28일, 국군 제2사단은 거대한 암석이 연결된 운악산 공격에 적의 엄폐물을 이용한 저항에 고전하다가, 제31연대 제2대대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수류탄 공격으로 격파하였다. 이후에 중공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분산철수 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청ㄹ계산-강씨봉-적목리-수밀리를 경유하여 28일 석룡산, 백적산으로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 제31연대 제1중대 제2소대는 청평-가평 도로의 감제고지인 174고지를 공격하면서 중공군 2개 중대를 개활지로 유인하여 격멸함으로서 한국군 최초로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51.5월 28일 ,항공정찰 결과 화천저수지 남쪽에는 적이 없음이 확인되어 미 제9군단의 가평-화천 진격은 일단락 되고, 군단은 캔사스선 방엉에 주력하게 된다.
금번 작전간 목표인 화천 점령이 너무 지연되어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완전 포위는 못하였지만, 미 제9군단은 이번 작전간 총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군단은 341명 전사, 2,011명 부상, 195명이 실종처리 되었다.
다. 양구-인제 진격전
※ 결과적으로 미 제10군단은 재반격작전에서 공산군 주요부대에 심대한 손상을 주었지만, 철수로상의 요지인 양구-인제 지역의 확보가 지연되어 포위망 구축에 실패하면서 적의 탈출을 허용하고 말았다.
미 제8군사령관은 22일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이 공산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 전황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자 군단의 방어정면을 축소 조정한 후, 공세작전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신속히 소양강 선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지대내 적을 포위섬멸하고, 적의 증원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은 한계-인제 도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양구를, 미 제2사단(배속 미 제187공정단,국군 제7-3/5연대)은 한계- 간성도로 동쪽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미 제3사단(배속 국군 제8/9사단)은 운두령 점령에 이어 숙사리-현리 도로와 하배제-양양 도로의 교차점 부근인 창촌을 각각 점령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단 예비인 국군 제5사단은 하안홍리, 국군 제7사단(3/5연대 결)은 유동에서 계속 부대정비를 실시한다.
'51.5. 23일 08:00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산악지형에다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여 진출이 느리자, 미 제8군사령관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된다. 이에 미 제2사단장 러프너 소장은 한계-인제 도로로 진출 중인 미 제187공정단에 증원된 제72전차대대와 사단에 배속된 제64전차대대의 각 1개 중대와 제187공정단 제2대대로 "제르하르트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히 진출하도록 하였다.
24일, 제72전차대대의 도착이 지연되어 정오부터 공격이 진행된다. 그러나 중공군이 도로에 설치한 대전차 장애물 제거를 위해 일시 정지하게 된다. 이를 헬기에서 지켜본 군단장은 뉴맨 소령에게 직접 명령항여 , 적의 지뢰지대에 봉착할 때까지 최고 속력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고, 주력부대들도 전차만이라도 서둘러 공격을 재개하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뉴멘 첨병부대가 북쪽으로 진출함으로서 음양리 남쪽에서 아군의 공중공격을 받고 무질서하게 후퇴하던 중공군 4,000여 명의 후방퇴로를 차단하여 공격함으로서 엄청난 손실을 주었다.
이에대해 중공군 전사에는 "24일 미군이 소양강 도하장인 부평리, 구만리를 차단하여, 중공 제9병단 제27군은 부평리 남쪽 홍천-인제 간 도로 양측 고지에 고립되었다. 이로인해 최초 소양강을 이용하여 적을 저지하려던 임무를 수행 할 수 없게 되엇다"고 기록하고 있다.
25일, 이때부터 미 제2사단은 25일 제23연대가 소양강 북쪽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제38연대는 북한군의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현리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이 무렵 사단의 좌인접에서 양구로 공격 중인 미 제1해병사단은 지형이 험한데다 적의 저항이 거세어 겨우 자은리 일대로 진출하고 있었고, 우인접의 미 제3사단은 하진부리-속사리에서 창촌을 목표로 공격 중에 있었다.
그러나 군단의 공격이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군단장은 아직 섬멸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미 해병사단은 양구를, 미 제2사단도 인제를 점령한 후 "베이커특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히 간상을 점령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리고 미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 정면의 적을 포위공격하기 위하여 "탈리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하배제에서 양양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공격할 계획이었다.
'51.5.26일, 비가 멈춘 5월 26일 오후 항공관측에 현리-인제 도로와, 인제 북쪽의 도로변에 적의 부대와 차량들이 이동한느 것이 관측되어 전폭기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여세를 몰아 제38연대가 현리 부근에서 전과확대를 위해 강력한 정찰활동을 펼쳤으나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의 저지로 공격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양양을 목표로 진출한 미 제3사단 찰리 특수임무부대도 적이 매설한 지뢰와 기동로상 교량이 파괴되어 진출이 불가능하였다.
이 무렵 한계-인제 도로 남쪽으로 진출하였던 적 주력을 포위섬멸하기 위해서 인제 점령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적도 화천저수지-인제 간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철수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북한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을 재배치하기 시작하여 군단의 공격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27일, 군단장은 베이커특수임무부대로 하여금 신속히 인제를 점령하고, 이어서 국군 제1군단과 협조하여 간성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이 도처에 지뢰를 매설하고 도처에서 완강하게 저항하여 진출이 더디게 진행되엇음며, 베이커부대의 간성 진출은 이미 국군 제1군단이 간성까지 진출하여 취소되었다.
결과적으로 미 제10군단은 재반격작전에서 공산군 주요부대에 심대한 손상을 주었지만, 철수로상의 요지인 양구-인제 지역의 확보가 지연되어 포위망 구축에 실패하면서 적의 탈출을 허용하고 말았다.
라. 양양-간성 진격전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제13연대는 간성 서북쪽 진지를, 제26연대는 향로봉-1079고지를, 제1연대는 당정곡-매봉산-칠절봉을, 제1기갑연대는 칠정봉-1166-원봉을 점령하도록 하여 별 접촉없이 31일 오후에 책임지역을 점령한다
※제11사단은 , 제20연대는 용대리-미시령 남쪽 고지에, 제9연대는 설악산 서쪽 능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제3-18연대는 마산리-가라피돌 남쪽 감제고지에 배치되었다.
양양-간성 진격전('51.5.26~5.31)
건봉령 국13연
미10군단=국1군단('51.5.30)
팔음 송죽리
간성
1079 국26연
향로봉 신평 504
원봉 삼포리
소 국1기갑연 미10군단=국1군단
칠절봉
양 천도리 국1연 신선봉 수도사단 용포리
용대리 미시령
강 미10군단=국1군단(5.30)
당정곡 국20연 토교리 속초
국9연 마등령
캔사스선 하도문
국5사 캔사스선 설악산 국11사 캔사스선
원통 한계령 마산 가라피 양양
인제 가리산
현리 서림리 인구리
하월천
가진리
매복산 주문진
복용산
만월봉 연곡천 국11사
오대산 국수도사
청동리 진고개
하배제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중서부전선과 중동부전선의 미 군단들이 캔사스선 진출작전을 펼치고 있을 무렵, 5월 25일까지 하진부리로 진출한 중공군의 일부와 대관령에서 격전을 펼쳐 격퇴하면서 캔사스선 진츨작전에 동참하게 된다.
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지난 5월 공세의 여파로 국군 제3군단과 육군 전방지휘소가 해체되고 군단마자 미 제10군단의 작전통제를 받은 일이 있어 국군의 위상이 실추되었음을 통감하고, 이번 반격작전에서 국군의 위용을 만회하기로 결심하였다.
군단은 1단계로 매복산-가잔리-인구리를 연하는 목표로 좌전방 산악지대에 수도사단, 우전방 동해안에 국군 제11사단으로 병진공격을 실시하고, 국군 제3군단에서 배속이 전환된 국군 제3사단은 송계리에서 군단에비로 부대정비를 하도록 하였다.
군단의 공격제대들은 26일 06:00시에 경강국도 변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 중공 제9병단 제27군단과 북한군 제12사단은 대관령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미 제10군단에 퇴로가 차단되는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철수하게 된다.
27일, 대관령 전투에서 사기가 오른 수도사단의 제26연대는 오대산 북쪽의 두로봉-매복산을, 제1기갑연대는 복용산을 목표로 공격하고 제1연대는 예비로서 진고개에서 증원준비를 하는 가운데 27일 매복산, 복용산으로 진출하였다.
27일, 그리고 수도사단의 우인접 제11사단도 26일 주문진 남쪽의 연곡천변의 도로에서 1단계선인 가잔리-인구리를 목표로 3개 연대 병진 공격하여 남대천을 도하 27일 양양에 무혈입성한다.다만 작전지역 중앙으로 진출하던 제13연대는 주문진 서쪽 하월천리에서 북한군 1개 대대 규모의 적과 28일 02:00시까지 치열한 전투를 펼쳐 격퇴하였다.
한편 미 제8군사령관은 국군 제1군단ㅇ의 좌인접에서 병진 공격 주인 미 제10군단의 공격ㅇ리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부진하자, 정면에 배치된 적을 분산하고 동해안의 전술적 요충지인 간상을 점령할 목적으로 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만월봉-설악산에서 북쪽의 504고지로 연장하고, 간성 북쪽의 504-팔음리-송죽리를 조속히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무렵 항공관측과 수색정찰 보고에 의하면 적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13사단을 한계리-원통 선에, 군단직할의 1개 연대를 군단 정면인 마등령-미시령 선에 배치하여 철수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을 엄호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지난 5월 초순 이 지역에서 북한군을 격퇴하여 지형에 익숙한 제11사단을 설악산에(최덕신 준장 후임으로 오덕준 준장이 사단장 취임), 수도사단은 적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는 간성을, 그리고 재편성을 마친 제3사단 제18연대를 살악산 남쪽 가라피-마산리 일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51.5.28일, 군단의 명령에 의거 수도사단은, 제1연대는 속초 북쪽 용포리로, 기갑연대는 삼포리로, 그리고 제26연대는 울산바위 북쪽의 토교리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3-18연대는 송천리 일대의 제20연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작전지역을 인계한 제11사단은 설악산을 공격하기 위해 제9연대를 설악산 신흥사 부근에, 제20연대를 둔전리에, 제13연대를 강선리에 집결시켰다.
29일, 수도사단 제1연대는 간성 북쪽 504고지를, 우전방 기갑연대는 간성을, 제11사단 제20연대는 신선봉을, 그리고 제3사단 제18연대는 가라피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가장 적의 저항이 강력하리라 에상되었던 간성은 의외로 적정이 경미하여 수도-기갑연대는 공격 4시간도 안되어 09:30분에 간성을 점령하였다.
30일, 공격을 계속한 제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는 토기점-화진포로, 제1연대넌 간성 서남쪽 어천리-신평리로, 사단 수색중대넌 고성으로, 제11사단 제20연대는 신선봉 일대에, 제9연대는 마등령에, 그리고 제3-18연대는 가라피를 경유하여 마산리로 진출하였다.
'51.5.30일, 군단의 작전이 종료될 무렵 제8군사령관은 30일을 기하여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서쪽으로 10km 이동시켜, 1098-매봉산-당정곡-안산-가리봉으로 연하는 선으로 조정하고, 협조점인 당정곡에서 제10군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단의 주보급로인 인제-간성 도로의 확보에 필수적인 전방의 향로봉-1079-건봉령을 연하는 향로봉 산맥을 점령하돌 고 명령하였다.
잉에 따라 국군 제1군단장은 부대 배치를 조정하여, 수도사단은 제11사단 에비인 제13연대를 배속받아 당정곡-향로봉-거진을 연하는 전방지역을 방어하고, 제11사단은 군단의 측후방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31일, 이 계획에 의거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제13연대는 간성 서북쪽 진지를, 제26연대는 향로봉-1079고지를, 제1연대는 당정곡-매봉산-칠절봉을, 제1기갑연대는 칠정봉-1166-원봉을 점령하도록 하여 별 접촉없이 31일 오후에 책임지역을 점령한다
한편 제11사단은 , 제20연대는 용대리-미시령 남쪽 고지에, 제9연대는 설악산 서쪽 능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제3-18연대는 마산리-가라피돌 남쪽 감제고지에 배치되었다.
군단은 6일간의 공격작전에서 캔사스선을 확보한데 이어 그 보다 약 40km 북쪽 간성까지 진출하여 향로봉산맥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로인해 군단과 좌인접으로 진출한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5사단 사이에 부채꼴 모양의 공간이 생겨 적의 측방경계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국군과 유엔군은 5월 하순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중공군 제180사단을 섬멸하는 등 적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가하고 캔사스선을 재확보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이 최초 계획한 적의 에상 집결지인 영평, 화천, 인제 점령이 지연되면서 적 주력의 대포위는 계획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유엔군으로서는 전쟁지도부의 작전방침에 의거 축격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한된 공격작저능로 전환하게 된다.
3. 와이오밍선 확보
국군과 유엔군은 전술적으로 방어하기에 용이한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으나, 이 선의 요새화와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방어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엔군사령부와 미 제8군은 이 조치의 일환으로 적 춘계공세 이전에 확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여 캔사스선과 함께 이중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이는 철의 삼각지가 적 공세의 근원지이므로 이곳이 적의 수중에 들어 잇는 한 캔사스선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이러한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철의 삼각지에서 화천저수지와 춘천으로 향하는 적의 주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와이오밍선으로 제한된 공격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 작전의 명칭은 "말뚝을 박듯이 전선을 튼튼히 한다'는 의미로 "파일 드라이브"라 명명하였다.
이 무렵 적도 38도선 북쪽으로 철수한 후 아군의 작전이 제한된 공격으로 전환하였음을 간파하고, 예비대를 투입함은 물론 철수하던 패잔병을 집결시켜 캔사스선 북쪽ㅇㅔ서 저항하기 시작함으로서 철의 삼각지대를 두고 다시 한번 혈전이 펼쳐지게 된다.
가. 철원-김화 진격전
※ 국군 제9사단은 '51.6월 11일 고대산을 점령하므로서, 지난 5월 현리전투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 장병들의 사기도 충천하였다.
미 제8군사령부는 이번 작전의 중점을 미 제1군단의 책임지역인 철원과 김화지구의 봉쇄에 두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엇던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을 5월 29읽부오 미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시켰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을 임진강 남쪽에, 미 제1기병사단(배속 영28여단)을 전곡 남쪽에, 국군 제9사단을 영평 북쪽의 누대에, 미 제3사단을 운천 남쪽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배속)을 도평리 일대에 배치하여 전선을 조정하였다.
'51.6월 3일,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 북쪽에서 강력한 정찰활동으로 군단의 서측바을 엄호하는 동안, 군단주력은 6월 3일 좌전방 미 제1기병사단이 전곡-연천 도로를 따라 북서쪽의 임진강을, 중앙의 국군 제9사단이 향로봉-지장봉을 연하는 산악지대를 따라 고대산을, 미 제3사단이 운천-평강 도로를 따라 철원을, 미 제25사단이 도평-금성 도로를 따라 김화를 각각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의 저항이 완강하고, 5월 30일과 31일 내린 비로 인해 도로망이 엉망인데다 구름과 안개로 근접한공지원이 제한되었다. 궂은 기상조건으로 포병과 항공지원이 제한적인 가운데 군단의 작전은 6월 5일까지 부진하였다.
이때 국군 제9사단이 공격하게 될 산악지혀인 가치항-지장봉-고대산 일대에는 중공 제65군 예하 1개 사단 규모가 주력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시간을 획득할 목적으로 축차진지를 점령하면서 지연전을 기도하였다.
6월 5일, 국군 제9사단장 최석 준장은 1개 연대로 향로봉을 점령하면, 2개 연대로 병진공격하여 철원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여 제28연대가 6월 5일 한탄천변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을 개시하자 적 1개 대대규모가 가치항(713)-향로봉 선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하고 저항하여 공격이 일시 돈좌되기도 하면서 향로봉으로 진출하여 공격발판을 마련하였다.
6월 6일, 사단은 6일 좌전방에 제30연대를 투입하여 2개 연대 병진 공격을 시도했으나 기동공간이 협소하고, 적이 지장봉 일대에서 강력하 저항하여 악전고투 끝에 제28연대는 공격 3일 만인 7일 고대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지장봉을 정면과 양측바응로 포위공격하여 점령하였다.
6월 7~9일, 이어서 바로 고대산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우전방 지장봉의 제28연대를 기습하고, 좌전방 제30연대를 먼저 기습하여 공격이 부진하였다.
사단이 9일 공격을 재개하자, 적은 지장봉 북쪽의 402고지와 638고지 일대에서 강력하게 적이 저항하여 최대의 격전을 펼치게 된다. 좌전방 제30연대는 철원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대광리 북쪽의 천광곡을 점령했으나, 우전방 제28연대는 우인접 미 제3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측방노출이 우려되어 일시 방어로 전환하였ㄷ다.
11일, 이때 사단의 우인접에서 진출하던 미 제3사단 제7연대는 산악기동에 미숙하고 적이 강력히 저항하는 관계로 11일에야 신흥동에서 국군 제28연대와 연결되었다. 이날 양 연대는 병진공격하여 최종목표인 고대산을 점령한다.
사단은 이날의 승리로 지난 5월 현리전투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 장병들의 사기도 충천하였다.
한편 사단의 우인접에서 공격 중인 미 제3사단과 미 제25사단도 6웕 8일까지는 기상악화로 항공 및 포병지원이 어려워 적에게 다소 불리하였으나, 9일부터 기상이 호전되어 근접항공지원과 포병화력의집중적인 지원 속에 적은 대대단위로 바어선을 이탈하가 시작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추격전을 전개하여 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와이오임선의 좌반부를 점령하였다.
철원-김화 전투('51.6.5-6.13)
시변리 평강 평강 금성
김화 와이오밍선
와이오밍선
철원 584 화천
동막 와수리
토성리
와이오밍선
천광 고대산 미3=미25
임진강 638 미1=미9군단
신흥동 신술리
지장봉
구하리 가치항 향로봉 광덕산
연천 국9=미3
미1기병=국9 운천
누대 미3 도평리 미25
와이오민선 전곡 국9 캔사스선 캔사스선
캔사스선 영평
미1기병 양문리 국망봉
영28여 동두천
포천 일동
나. 김화-화천 진격전(대성산-취봉 전투)
※국군 제2사단은 '51.6월 6일, 사창리 복계산 일대에서 7회의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하고 그 북쪽 853고지를 기습공격항여 중공군 113명을 사살하고 20명을 포로로 생포하였다.
미 제9군단은 최초 백운산-사창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캔사슷선에 국군 제2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6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방어 중이었다. 와이오밍선 진출 계획에 의거 군단은 3개 사단 병진공격을 실시하고 1개 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좌전방에 국군 제2사단은 김화 동쪽의 도로를 , 중앙 미 제7사단은 적근산 남쪽의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우전방 국군 제6사단은 화천저수지 북쪽의 주변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취봉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 제24사단은 예비로 사창리에 집결하였다.
미 제9군단은 와이오밍선을목표로 6월 5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미 제1군단 상황과 같이 적의강력하 ㄴ저항과 기상악화로 화력지원이 불리한 가운데 공격을 계속하였다.
[국군 제2사단]
좌전방 국군 제2사단은 제31연대가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 통로 좌측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제17연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의 두류산 부근 진지를 인수받아 통로 우측 능선을 공격한다. 우전방 제17연대는 적의저항이경미하였으나, 좌전방 제31연대는 6일 복주산 일대에서 7회의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하고 그 북쪽 853고지를 기습공격항여 중공군 113명을 사살하고 20명을 포로로 생포하였다.
김화-화천 전투('51.6.5-6.11)
평강 금성 북한강
와이오밍선
김화 적근산 백암산
철원 와이오밍선
와수리 육단리 마현리 미9=미10군단
대성산 국2=미7 수리봉 당거리
1041 취봉
미7=국6
복계산 1054 사방거리 997
887
미1=미9군단 643 재안산
일산
신술리 다목리 신읍리
853 화천 와이오밍선
복주산 1152 캔사스선
두류산 화천저수지
캔사스선 캔사스선
백운산
국군 제2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이틀동안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실시한 제31연대를 에비로 전환하고 제32연대를 좌전방에 투입하였다. 사단이 공격을 재개하지 이번에는 우전방 제17연대가 대성산 바로 남쪽 1041고지에서 진내전투를 치르며 점령하였다.
'51.6월 10~11일, 사단이 예상치 못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복주산과 1041고지로 지출하자, 적은 지연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적을 추격한 제32연대가 10일 육단리 부근의 와이오밍선을 점령한데 이어 제17연대도 11일 대성산을 확보하여 김화-화천 도로로 진출하여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였다.
[미 제7사단]
그리고 중앙의 미 제7사단은 우전방 제31연대가 작전지역의 일부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에 인계하고 화천-김화 도로를 따라공격하였다.
'51.6월 7~10일, 그러나 7일 신읍리 북쪽에서 2개 대대규모의 적의 지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는 위기를 맞자 사단 예비인 제32연대를 투입하여 이 들을 격퇴하였다. 9일은 다목리 동쪽 고지에서 적 1개 대대규모의 적을 격퇴하고 10일 와이오밍선인 마햔리-사방거리를 연하는 도로변으로 진출한다.
[국군 제6사단]
미 제9군단의 공격제대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우전방 국군 제6사단이었다. 사단은 북한강 서쪽의 산악지대임을 고려하여좌전방 제7연대는 미 제7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백암산(1179)에서 화천으로 뻗어내린 취봉-992-887-643고지로 연결되는 일련의 종격실 능선을 따라 공격했다. 우전방 제19연대는 화천저수지 북쪽의 일산(1190)-재안산(1034)을 점령하고 제7연대는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한다
이때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20군이 취봉 일대에 3개 연대 규모로 축차적인 지연진지를 구축하였고, 일산과 재안산에는 경미한 적정이었다.
제7연대장 양중호 대령은 미 제17연대장으로부터 643고지에 적이 전초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고 인계받는다. 그리고 미 제17연대가 6월 3일부터 5일까지 항공과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탈취에 실패했다고 했다.
'51.6.6~10일, 이에 연대장은 6일 오전에 양측방으로 포위공격을 감행하고, 1개 중대가 적 후방으로 진출하자 적은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하여 축차진지인 887고지로 철수하면서 증원부대와 합류하여 연대규모로 증강되었다. 887고지는 전사면이 급경사에 기동공간도 협소하고, 교통호로 연결된 유개호를 구축하여 저항하였다. 8일에는 설상가승으로 안개가 짙게 깔려 항공과 포병지원이 불가한 틈을 이용하여 적들은 진지보강과 병력을 증원한다.
제7연대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887고지를 공격하여 한때는 일시적 탈취에 성공했지만 곧바로 적의 역습에 물러나야만 했다. 이때 우측방 제19연대가 재안산을 점령하여 적의 좌측방을 위협하게 되었다. 9일 기상이 호전되어 연대는 3면에서 포위공격을 하여 887고지를 두번째 점령하였다. 연대는 10일 새벽 제27포병대대가 취봉 전후방에 위치한 922고지, 수리봉(1057)에 이르는 능선에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고 3개 대대병진공격으로 취봉을 점령하여 백암산 공격의 발판을 확보하였다. 연대는 802-취봉-1057고지를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항여 당거리로 진출한 제19연대와 연결되었다.
이로써 미 제9군단도 11일을 전후하여 김화 동쪽 와이오밍선의 우반부를 확보하고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정찰대활동을 실시한 결과 적은 김화남쪽에 배치되고 있었다.
4. 신캔사스선으로 진출
미 제10군단은 적의 저항이 완강하고 지형이 험준하여 중서부전선의 부대들이 와이오밍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5월ㄹ 말경 화천저수지-양구-인제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다. 이 무렵 군단에 배속 중이던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이 미 제1군단으로 배속 젆환됨에 따라 , 군단의 좌전방 화천저수지 남쪽에는 군단의 예비인 국군 제7사단을 투입하고, 양구 일대는 미 해병1사단이, 소양강 동쪽에는 국군 제5사단이 미 제2사단의인제-원통 일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간성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과 전선의 균형을 유지함은 물론, 중동부 및 동부전선의 부대들이 24번도로(홍천-안제-간성)를 주복브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복안으로 캔사스선을 이 도로의 북쪽 화천저수지-펀치볼(해인분지) 남쪽- 향로봉- 거진 선으로 조정하여 "신캔사스선"이라 명명하고 파일드리이브 작전의 일화능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이 선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국군 제7사단은 화천저수지 북쪽의 군량현을, 미 제1해병사단은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와 같이 양구 북쪽의 해안본지를, 그리고 국군 제5사단은 원통 북방의 서화리를 공격하게 된다.
군량현-도솔산 전투('51.6.3~18)
금강 노전평
북6사 북12사 해안분지
백석산 비아리 대우산 운전동
917 국7사=미1해병 도솔산
국1해=미5해
731 간평 757 7해병=국1해병 대암산
원당리 1121 1175
504 2대대 3대대
수입천 군량현 국3연 가아리
북한강 미9=미10 마석봉
화 천 저 수 지 국5연
수리봉 함춘리 광치동 인제
양구
가장촌
사명산
가. 군량현 전투
국군 제7사단은 중공군 5월 공세시 소양강 남쪽의 음양리 부근에서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고 하안홍리 일대에서 재편성 중에 군단의 신캐사스선 점령 명령에 5월 31일 화천저수지 남쪽의 미 제1해병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다시 전선에 복귀하였다.
이 무렵 양구 일대는 적의 시체들이 도처에 참혹하게 널려 있었다. 이로 인해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민연되어 미처 피난가지 못한 다수의 이재민들이 병망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단장 김용배 준장은 부대의 방역조치를 강화하는 한편 공격에 앞서 대민 방역과 구휼 조치를 병행하였다.
사단은 6일, 군단으로부터 신캔사스선상의 마석봉-504-757고지를 확보한 후 백석산 남쪽의 731고지와 931고지에 강력한 정찰거점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장은 작전지역을 분석결과 작전지역이 험준한 고지이고, 기동공간이 협소하여, 최초 신캔사스선 점령에는 제5연대만 투입ㅁ하고, 이 선을 확보한 후 정찰거점 공격시에 제3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목표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5연대는 7일 오전 내평리에서 공격대기지점인 양구 남쪽의 가장촌 부근으로 이동하여 공격준비를 하고 잇던 중에 적의 기습포격으로 연대장과 장교 2명, 사병 16명이 부상하여 후송되고, 후임 연대장으로 김용배 중령이 부임하였다.
'51.6월 8~9일, 예상치 못한 연대장의 부상으로 연대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하였으나 심기일전하여, 8일제1대대가 마석봉을 제3대대가 757고지를 각각 공격하였다. 종격실 능선을 따라 적이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저항하는 가운데 좌전방 제1대대는 마석봉을 무혈입성 하였다가 야간에 적의 기습으로 물러나고, 우전방 제3대대는 757고지 공격은 중도에 돈좌되었다.
10일, 계속된 공격으로 마석봉은 재탈환하였고, 757고지는 예비인 제2대대를 투입하여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이에 사단장은 제3연대를 제5연대를 초월하여 공격하도록 조치하여 공격하도록 하고, 사단을 방문한 미 제10군단에게 건의하여 미 제1해병연대의 대전차포 등 화력을 추가로 지원하돌고 조치하였다.
그러나 지형이 험준하고 적이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항공과 포병화력으로도 진지를 파괴가 쉽지않았다. 이에 제1대대장 이종택 소령은 2개의 특공조를 편성하여 21:00에 근접전투를 감행하여 자정이 넘어서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엿으며 제5연대는 성곡령으로 진출하였다.
12일, 사단은 12일 공격을 재개하여 제3연대가 백석산으로 연결되는 917고지로 진출하고, 제5연대는 731고지로 진출하면서 제3연대의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제3연대는 신캔사스선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사단은 마석봉-757고지를 연하는 신캔사스선 전방의ㅡ 731-917고지를 연하는 전진기지를 점령하여 정찰활동에 주력학고, 적은 백석산 일대에 진지를 강화하면서 전선은 7월의 무더위와 함께 일시적 소강상태를 맞이 하였다.
나. 도솔산 전투
※ 국군 제1해병연대는 6.25전쟁 중 최초로 '51.6월 11일 02:00시에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적의 주저항선을 점령한다. 당시 북한군 제12사단은 그들의 상용전술인 야간 공격을 예측하지 모샇고 일부 부대만 경계부대로 배치하고 주력은 후방에서 취침한 것으로 후일 포로의 심문과정에서 밝혀졌다.
※ 해병은 두더지처럼 교통호를 구축해가며 적진으로 접근한 후 야간공격으로 19일 새벽 마침내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적 사살 2,263명. 생포 42명의 전과를 올렷으나, 아군도 희생이 커 전사 123명, 부상 582명이었다. 결국 연대는 신캔사스선상의 대암산-도솔산을 확보하고 펀치볼 남쪽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군량현-도솔산 전투('51.6.3~18)
금강 노전평
북6사 북12사 해안분지
백석산 비아리 대우산 운전동
917 국7사=미1해병 도솔산
국1해=미5해
731 간평 757 7해병=국1해병 대암산
원당리 1121 1175
504 2대대 3대대
수입천 군량현 국3연 가아리
북한강 미9=미10 마석봉
화 천 저 수 지 국5연
수리봉 함춘리 광치동 인제
양구
가장촌
사명산
국군 제7사단이 군량현 전투를 개시할 때 우인접의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도 양구 북쪽의 대암산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떼 국군 제1해병연대는 양구 남쪽의 원당지곡에서 사단에비로 부대 정비를 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획에 의거 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이 소양강 서쪽까지 확대되자, 사단은 대암산-도솔산-대우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형을 공격 중, 적으이 완강한 저항과 산악지형으로 막대한 임명 피해를 입운 미 제5해병연대를 소양강 서쪽으로 이동시미고 국군 제1해병연대를 제5해병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국군 제1해병연대가 공격할 광치동에서 대암산에 이르는 산악지형에는 북한군 제12사단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고지마다 항공포격이나 포병사격에도 견딜 수 있는 개인 및 공용화기 진지를 구축하고, 능선 통ㅇ로상에도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여 강격한 거점을 구축하였다.
'51.6월 4일, 국군 제1해병연대는 6월 4일 대암산을 목표로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하에 2개 대대 병진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부진하여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에비인 제3대대를 우전방에 투입항여 3개 대대가 병진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5일, 게속되는 공격에도 지형이 급경사에 기동공간이 협소하여 기동에 제한되고, 특히 안개가 짙게 끼어 화력지원에 곤란을초래하고 공격은 지지부진하였다.
이후에도 6일간의 공격에 11121-1175고지선을 돌파하고자 육탄공격에도 계속 실패하게 되고, 1121고지는 탈취하였다가 철수했다.
'51.6.10일, 연대장은 10일 6.25전쟁 중 최초로 야간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미 제1해병사단장이 반신반의 하면서 야간작전을 승인하였다.
'51.6.11일, 드디어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6월 11일 02:00시에 무조명 무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개시 3시간 만에 난공불락이던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12사단은 그들의 상용전술인 야간 공격을 예측하지 모샇고 일부 부대만 경계부대로 배치하고 주력은 후방에서 취침한 것으로 후일 포로의 심문과정에서 밝혀졌다.
사기가 충천한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전과확대를 위한 추격작전을 펼ㅊ쳐 , 경미한 적의 저항을 격퇴하고 대암산을 연하는 신캐사스으로 진출, 우인접 미 제5해병연대와 연결했다.
14일, 미 해병 제1사단장은 14일 해안분지 남쪽의 도솔산을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좌인접에 새로이 미 제7해병연대를 투입하였다.
15!~19일, 도솔산에 이르는 통로가 협소하여 대대단위로 공격을 계획하고, 15일 선봉으로 제2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정은 경미하였으나 짙은 안개로 항공 및 포병화력지원은 정확성이 없었다. 17일 다시 공격을 개시하자, 적은 박격포를 쏘아대며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해병은 두더지처럼 교통호를 구축해가며 적진으로 접근한 후 야간공격으로 19일 새벽 마침내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적 사살 2,263명. 생포 42명의 전과를 올렷으나, 아군도 희생이 커 전사 123명, 부상 582명이었다. 결국 연대는 신캔사스선상의 대암산-도솔산을 확보하고 펀치볼 남쪽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 서화리 전투
※국군 제5-27연대 제3대대장 박원관 소령은 각 중대는 수류탄만 휴대한 특공조를 앞세워 공격을 감행토록 명령하여 무려 5시간의 혈투 끝에 136명을 사살하고 명당산을 확보하였다.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단은 15일부터 제35연대는 840고지를, 제36연대는 981고지를 공격했으나 목표탈취에 실패하였다. 17일 다시 마지막 일전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근접전투로 동 고지를 점령하여, 14일간의 격전 끝에 신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사단은 소라지-송노평-이현리를 연하는 선에서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를 보강한다
서화리-향로봉 전투('51.6.4~6.17)
소양강 고성 건봉령
북27사 국1기갑 간성
1079
노전평 고성리 향로봉 신평리
가전리 적2사
원봉 국26연
해안분지 981 산두곡산
916 804 진부리
대곡 칠절봉
서화리 840
미1해병=국5사 1112
천도리 매봉산 국1연
851 1242 용대리 속초
대암산
명당산 당정곡 활철봉
양구 국5사=수도사 백담사
원통 미10군단=국1군단
인제 가리봉 한계령
현리 양양
국군 제5사단은 미 제2사단과 함께 캔사스선으로 진출하던 중 원통 부근에서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확에 의거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미 제10군단의 우전방으로 후덕리-981-산두곡산(1019)을 연하는 신캔사스선을 목표로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51.6월 4일, 좌전방 제27연대는 서화리-인제 간의 도로 우측 명당산-피양동-서화리-987굊로, 우전방 제36연대는 향로봉산맥 서쪽의 1242-1122-산두곡산으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능선 접근로를 따라 기동하는 제36연대는 적의 저항이 경미하여 1242고지 일대를 점령하여 공격발판을 확보했다. 그러나 좌전방 제27연대는 명당산 일대에서 포병 및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적 1개 대대 규모와 접전하여 공격이 돈좌되었다.이에 제3대대장 박원관 소령은 각 중대는 수류탄만 휴대한 특공조를 앞세워 공격을 감행토록 명령하여 무려 5시간의 혈투 끝에 136명을 사살하고 명당산을 확보하였다.
이에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좌인접 미 제5해병연대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던 적의 일부가 제27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2사단 제4연대를 증원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적이 논장리-천도리 축선에서 지연전을 기고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우전방 제36연대로 하여금 일부 병력으로 적진 후방의 서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36연대가 서화리 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제27연대는 명당산에서 연 이틀 게속 적의 선제 기습공격을 포병화력을 지원받아 격퇴하였다. 적이 철수한 후 제10중대가 주변 수색정찰에서 송학동 부근 계곡에서 적의 무기고를 발견하여 다량의 화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이후 연대는 명당산 북쪽의 752-851고지 쟁탈전을 펼치며 적의 저항으로 진전이 없었다. 이에 사단장은 예비인 제35연대를 천도리 일대로 투입하여 적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51.6.10일, 이 무렵 미 제10군단장은 신캔사스선으로 진출한 좌우인접부대와의 전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사단의 공격을 독촉하였고, 이에 사단장은 제27연대는 중간 목표인 851고지를, 제35연대는 천도리를, 제36연대는 1122고지를 탈취하도록 하였으나 짙은 안개와 적의 종격실 능선에 구축된 방어진지를 단숨에 돌파할 수 없었다.
[미 은성훈장을 받은 원계희 이등병]
이날 공격에서 제27연대 제3대대는 공격개시 4일 만에 적의 강력한 거점인 851곶를 제9중대 원게희 이등병이 수류탄 12발을 휴대하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적 화기진지 3개소를 폭파하는 용맹속에서 점령하였다. 후일 박이등병은 미 은성훈장을 수여 받았다.
11~12일, 11에도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짙은 안개로 일시 멈추었다가, 12일 다시 제27연대가 정면에서 제35연대 제2대대가 우측방에서 공격을 개시하자 포위를 우려한 북한군 제4, 6연대의 주력이 8일 동안 고수하던 천도리 일대의 저지진지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13~14일, 사단은 그동안 근접전투를 벌인 제27연대를 에비로 돌리고, 제35연대를 투입하여 신캔사스선을 점령하도록 독려한다. 14일 우전방 제36연대는 1122고지에서 빈번히 공격이 돈좌되었으나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속에 기필코 고지를 점령하고 산두곡산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좌전방 제35연대도 적의 후방 거점인 서화리 부근으로 진출하여 신캔사스선 진출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15~17일,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단은 15일부터 제35연대는 840고지를, 제36연대는 981고지를 공격했으나 목표탈취에 실패하였다. 17일 다시 마지막 일전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근접전투로 동 고지를 점령하여, 14일간의 격전 끝에 신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사단은 소라지-송노평-이현리를 연하는 선에서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를 보강한다.
결과적으로 미 제10군의 작전지역은 중동부 산악지대로 지형이 험준하고 기동로가 제한ㄷ되며 특히 도로에는 적의지뢰가 다량 매설ㄷ되어 제거작업에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다. 특히 작전 기간 중에 짙은 안개로 항공 및 포병화력 운용에 애를 먹었으며, 적의 계속되는 역습으로 저항하여 공격부대들의 피해도 많았다.
결국 군단은 마석봉-성곡령-757-도솔산-916-981고지를 연하는 신캔사스선을 점령하여 전선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라. 향로봉 방어 전투
※이 무렵 군단 후방지역으이 적 패잔병 활동이 미미한 반면 정면의 적이 강력하게 저항하제 되자, 군단장은 주저항선 방어태세를 보강하기 위해, 부대 배치를 조정한다. 이에 따라 대승령일대에서 군단의 측후방을 방어하던 제11사단 제9연대가 간성 북쪽에 배치되고, 용대리-미시령을 방어하던 제20연대가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제1연대의 당정곡-매봉산 진지를 인수하게 된다. 이로써 군단은 당정곡-향로봉-건봉령-거진을 연하는 신 캔사스선 주저항선에 좌로부터 제20, 제1, 제1기갑, 제26, 제13, 제9연대를 배치하여 주저항선의 방어를 보강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서부전선의 와이오밍선과 중동부전선의 신 캔사스선을 확보함으로써, 한강하류-문산-전곡-연천-철원-김화-산양리-펀치볼-서화-거진 선까지 진출하엿다. 이때 전곡 동쪽의 부대들은 캔사스선 보다 16~48km 북쪽으로 추진배치되었다. 이선은 유엔군측이 계획한 휴전에 대비한 방어선인 동시에 적을 휴전회담에 임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제한 공세작전의 전진한계선이기도 하였다.
서화리-향로봉 전투('51.6.4~6.17)
소양강 고성 건봉령
적 13사
북27사 국1기갑 간성
1079
노전평 고성리 향로봉 신평리
가전리 적2사
원봉 국26연
해안분지 981 산두곡산
916 804 진부리
대곡 칠절봉
서화리 840
미1해병=국5사 1112
천도리 매봉산 국1연
851 1242 용대리 속초
대암산
명당산 당정곡 활철봉
양구 국5사=수도사 백담사
원통 미10군단=국1군단
인제 가리봉 한계령
현리 양양
5월 말 향로봉 산맥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당정곡-칠절봉에, 기갑연대를 원봉 정면에, 제26연대를 향로봉-건봉령에 배치한 후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전방지역에 대한 위력수색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우인접에는 국군 제11사단이 간성 북쪽의 주저항선을 방어하고 잇고, 좌인접에는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5사단이 인제-원통선에서 신캔사스선 진출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전방의 북한군 제13사단은 서화리-산두곡산 일대에 강력한 진를 편성하고 중동부 전선에서 후퇴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군 제5사단과 수도사단의 포위공격 위협에 직면하자, 증원병력을 투입하여 측방경계를 강화하였다.
'51.6월 3일, 적 1개 중대규모가 선젝오격으로 제1연대 제1대대의 칠절봉 부근 주저항선을 공격하고, 이어서 안개 낀 틈을 이용하여 기갑연대의 전초기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방의 1209고지, 제1연대의 칠절봉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결국 기갑연대는 산두곡산과 원봉 전방 1209고지에서 철수하여 주진지로 복귀하였다.
6일, 한편 군단장은 좌인접에서 공격 주인 국군 제5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의 일부병력으로 적 후방 방어 요충인 서화리르ㅓㄹ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1기갑연대 제3대대와 제1연대 제1대대가 칠절봉-대곡리-평촌을 엲라는 계곡 통로를 이용 공격햇으나 적 2개 대대규모의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되어 복귀하게 된다.
이 무렵 군단 후방지역으이 적 패잔병 활동이 미미한 반면 정면의 적이 강력하게 저항하제 되자, 군단장은 주저항선 방어태세를 보강하기 위해, 부대 배치를 조정한다. 이에 따라 대승령일대에서 군단의 측후방을 방어하던 제11사단 제9연대가 간성 북쪽에 배치되고, 용대리-미시령을 방어하던 제20연대가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제1연대의 당정곡-매봉산 진지를 인수하게 된다. 이로써 군단은 당정곡-향로봉-건봉령-거진을 연하는 신 캔사스선 주저항선에 좌로부터 제20, 제1, 제1기갑, 제26, 제13, 제9연대를 배치하여 주저항선의 방어를 보강하였다.
8일, 적 1개 대대규모가 제1기갑연대 제1대대가 방어 중인 1079고지로 공격을 감행하여, 한때 주저항선이 일부 돌파되기도 하였으나, 예비대를 증원하여 다시 주저항선을 회복한다.
9일과10일에도 적은 향로봉 부근으로 공8회에 걸쳐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고성리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서부전선의 와이오밍선과 중동부전선의 신 캔사스선을 확보함으로써, 한강하류-문산-전곡-연천-철원-김화-산양리-펀치볼-서화-거진 선까지 진출하엿다. 이때 전곡 동쪽의 부대들은 캔사스선 보다 16~48km 북쪽으로 추진배치되었다. 이선은 유엔군측이 계획한 휴전에 대비한 방어선인 동시에 적을 휴전회담에 임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제한 공세작전의 전진한계선이기도 하였다.
이 재반격작전에 의거 지난 춘계공세 이후 궁지에 몰린 공산군은 궁여지책으로 휴전협상에 응하게 되면서, 그들은 협상을 미기로 체면을 호도함은 물론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전력 증강에 혈안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