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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9월 (15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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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1일 (정사) [양력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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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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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자 출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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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여덟 시에 몰운대를 지날 무렵 샛바람이 갑자기 일고 파도가 크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대선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아홉 척, 절영도에 이르러서는 왜대선 두 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스락을 의지하여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삼도의 수사가 거느 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丁傑)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깨어 부수고, 배 안에 만재한 왜놈의 물건과 전쟁 기구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여 모두 불태웠으나, 왜놈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 보며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머리를 베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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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절영도 안팎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로 즉시 소선을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적선을 자세히 탐망케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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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오백 여 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의 언덕아래 줄지어 대었으며, 선봉 왜대선 네 척이 초량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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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므로 원균(元均) 및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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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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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고 독전기를 휘두르며 진격했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鄭運) ∙ 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 ∙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權俊) ∙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 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적도들이 헤엄쳐 뭍으로 오르므로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 때를 이용하여 승리한 깃발을 올리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으로 돌진했다. 이 때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오 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사백일흔 여 척이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 고 있으므로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 ∙ 산 위 ∙ 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갖고 거의 다 산으로 올라 여섯 곳에 나누어 머물며 내려다 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 처럼, 우레 처럼 쏘는 것이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모과만 하며, 혹 수마석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주발덩이 만 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 어 돌진하면서, 천자 ∙ 지자 총통에다 장군전 ∙ 피령전 ∙ 장전과 편 전 ∙ 철환 등을 일시에 일제히 쏘며, 하루종일 교전하니 적의 기 세는 크게 꺾이었다. 그래서 적선 백 여 척을 삼도의 여러 장수 들이 힘을 모아 쳐부순 뒤에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으로써 토굴 속에 끌려 들어간 놈은 그 스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배를 쳐부 수는 것이 급하여 머리를 벨 수는 없었다. 여러 전선의 용사들 을 뽑아 뭍으로 내려서 모조리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무릇 성 안 팎의 예닐곱 곳에 진치고 있는 왜적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 고 용맹을 보이는 놈도 많은지라, 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가벼이 뭍으로 내리게 한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 아니며, 날도 저 물었는데,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환 란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를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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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양산과 김해에 정박한 왜선이 혹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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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본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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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마는, 몇달 이내로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스스로 알고 모두 부산으로 모이는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산성 안의 관사는 모두 철거하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이미 소굴을 만든 것이 백 여 호 이상이나 되며, 성 밖의 동서쪽 산기 스락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도 거의 삼백 여 호이며, 이것이 모두 왜놈들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중의 큰 집은 층계와 희게 단장한 벽이 마치 불당(절간)과도 비슷한 바, 그 소행을 따 져보면 매우 분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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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2일 (무오) [양력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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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을 불태우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부수려고 하였는데,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널리 가득차 있으므로 그들의 귀로를 차단한다면, 궁지에 빠진 도적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해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풍랑이 거슬러 전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많이 있으므로 전선을 수리하면서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고 또 육전에서크게 물러나오는 날을 기다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하여야 하기 때문에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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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10일 (병인) [양력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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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원균(元均)은 그 뒤 적선이 많이 온다고 잘못 듣고서 포위한 적을 풀고 가버렸기 때문에 뭍으로 올라간 왜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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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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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는 바,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 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다. 이 내용을 갖추어서 장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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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정묘) [양력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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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이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격발하여 나라를 위해서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더욱 더 하므로 믿을 사람은 오직 정운(鄭運) 등 두세 사람이다. 세번 승첩을 했을 때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에 부산포해전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하였으며,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鄭運)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늠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남을 경계해야 겠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변방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 네번이나 적을 무찌를 적에 반드시 앞장을 서서 분격하였으며, 당항포 접전을 할 때에는 왜 장을 쏘아 목을 벤 그 공로가 월등하다. 뿐만아니라, 사살하는데만 전력하고 목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들어 별도로 장계하였는데, 이번 포상의 글월 중에 이순신(李純信)의 이름만 들어 있지 않으니 해괴하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權俊) ∙ 이순신(李純信) ∙ 어영담(魚泳潭) ∙ 배흥립(裵興立) ∙ 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권준(權俊)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 되었으나, 오직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 므로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엎드려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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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을 사실대로 잘 아뢰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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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무진) [양력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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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당항포 승첩계본을 받들고 올라간 전생서(典牲署:궁중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는 종6품의 主簿) 이봉수(李鳳壽)가 가지고 내려온 우부승지(이국)의 서장 내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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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난 이래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패퇴하였는데, 이번 당항포 싸움에서 비로소 대승리를 하였으므로, 특히 경을 `자헌대부'로 승진시키니, 끝까지 스스로 힘써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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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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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장계를 보니, 각 목장의 말들을 몰아내어 길들이고 먹여서 육전에 쓰도록 해 달라고 건의하였는데, 경이 그 수를 급히 몰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성공을 기다려서 그대로 영구히 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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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 분부의 서장 등을 본영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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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갑술) [양력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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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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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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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 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狀紙)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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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신사) [양력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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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순천에 사는 전 훈련원봉사 정사준(鄭思竣)은 사변이 일어난 뒤에 상제의 몸으로 기복된 사람인데, 충성심을 분발하였으므로 경상도와 접경한 요충지인 광양현 전탄의 복병장으로 정하여 보낸 뒤, 무릇 매복하여 적을 막는 일에 있어서 기특한 계책을 마련하여 적들로 하여금 감히 경계선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정사준(鄭思峻)은 순천부의 외로운 선비이며, 전훈련봉사였던 이의남(李義男) 등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義捐穀)을 모아서 모두 한 배에 싣고 행재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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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의 공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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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죽(箭竹)을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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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으나, 부산 승첩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육로로 올라가야 하는 먼 길에 가져 가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올려보내지 못했는데, 비로소 이번에 정사준(鄭思峻) 등이 올라갈 때에 장편죽전과 종이 등의 물품을 함께 봉하여 같은 배에 함께 싣고 물건의 목록은 따로 적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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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부사 권준(權俊)과 낙안군수 신호(申浩) ∙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등도 수군 위부장으로서 본영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사변에 대비하면서 각각 공문으로 보고한 내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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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변 각 고을의 관원들이 사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군량을 원 수량 이외에 별도로 쌓아 두었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하신지 벌써 여섯 달이 되어 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양식을 계속 지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신하된 자의 정의에 통곡함을 이기지 못하여 위에 별도로 쌓아 둔 군량 등 물품을 각각 배에 싣고 자원해 들어온 사람에게 맡겨 주어 올려 보낼려 했으나, 수령들로서는 진달할 길이 없으니, 이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여 함께 장계하도록 공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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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그런데, 권준(權俊)은 원수량 이외에 군량 백 섬과 다른 잡물을 함께 정사준(鄭思峻) 등이 의연곡을 싣고 가는 배에 같이 실어 우선 올려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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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申浩) ∙ 어영담(魚泳潭) ∙ 배흥립(裵興立) 등이 올려 보내는 군량과 군기 등 물건은 각각 그들의 배에 싣고 각 고을에서 자원해 들어온 사람들에게 맡기어 올려 보내므로 물목을 만들어 주어 올려 보냄을 차례로 아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