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 Chris Martin and Gwyneth Paltrow
2014 - 기네스 펠트로-크리스 마틴, 결혼 11년 만에 이혼
할리우드 톱스타 기네스 팰트로(41)가 남편인 크리스 마틴(37)과 고심 끝에 결별한다고 밝혔다. 기네스 팰트로의 남편 크리스 마틴은 영국의 유명 밴드 콜드 플레이의 보컬이다. 기네스 팰트로와 크리스 마틴은 2003년 결혼해 11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했으며 슬하에 9세 딸과 7세 아들을 두고 있다.
기네스 팰트로는 25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 '굽'(goop.com)에 올린 두 사람의 명의의 글을 통해 "가슴 아프지만 우리는 갈라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네스 팰트로와 크리스 마틴은 "지난 1년 이상 같이 살지 헤어질지 깊이 고민했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네스 팰트로는 아이 양육 계획과 관련해 "우리는 두 아이들의 부모 역할에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아이들의 사생활은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2014-03-26 16:54:00
2012 - 호랑이굴 ‘금의환향’ 한 타이거
PGA 정규투어 아널드 파머 대회서 챔피언
분석가 “골퍼들 조심하라! 우즈가 돌아왔다”
“피지에이(PGA) 투어 선수들이여, 조심해라! 타이거가 돌아왔다.”
타이거 우즈(37·미국)가 25일(현지시각) 30개월 만에 미국프로골프 투어 우승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리자, 미국 <엔비시>(NBC)의 분석가 조니 밀러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골프황제’의 화려한 귀환과 이후 투어 무대에 이어질 파장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우즈는 이날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베이힐클럽&로지(파72·7381야드)에서 열린 시즌 15번째 대회인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총상금 600만달러)에서 합계 13언더파 275타로 우승했다. 4라운드 버디 4개와 보기 2개를 묶어 2타를 줄이며, 챔피언조에서 동반플레이를 펼친 그레임 맥도월(북아일랜드)을 5타 차 2위로 따돌렸다. 우승상금 108만달러.
우즈가 피지에이 투어 정규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은, 2009년 9월13일 베엠베(BMW) 챔피언십 이후 정확히 924일, 108경기째 만이다. 피지에이 투어가 아닌 11월 호주 마스터스 우승을 기준으로 하면 2년4개월 만이다.
우즈는 그동안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만 무려 7승을 쓸어담았다. 피지에이 투어 통산 우승도 1996년 프로데뷔 이후 72회(메이저대회 14승 포함)로 늘렸다. 챔피언조에서 맥도월을 제압한 것도 뜻깊었다. 우즈는 2010년 12월 이벤트 대회인 ‘셰브런 월드 챌린지’에서 맥도월과 맞대결을 펼쳐 연장전에서 패했다. 그러나 1년3개월 만에 통쾌하게 설욕을 했다. 우즈는 경기 뒤 “기분이 너무 좋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한다”고 했다.
재미동포 나상욱(29)이 공동 4위(5언더파)로 선전했고, 노승열(21·타이틀리스트)은 공동 20위(2언더파)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우즈가 우승하던 이날 아널드 파머(82)가 고혈압으로 병원에 이송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 때문에 파머는 자신이 주최하는 대회 우승트로피도 주지 못했다.
김경무 선임기자 kkm100@hani.co.kr /한겨레 2012.03.26 19:52
http://www.hani.co.kr/arti/sports/golf/525286.html
2010 - 안중근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 엄수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오늘 저녁 서울 백범기념관에서는 안 의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향'이 거행됐습니다.
행사는 안 의사 유족과 광복회원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 의사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전통 방식의 제사로 치러졌습니다.
광복회측은 "100년만에 처음으로 국민을 대신해 제사를 올리는 의미가 크다"면서 "하루빨리 안 의사 유해가 발굴되길 염원한다"고 밝혔습니다.
권순표 앵커 kspja@imbc.com /MBC 뉴스 20100325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594481_5780.html
- 'The Little Mermaid', by Edvard Eriksen
2010 - 덴마크 `인어공주'像, 생애 첫 해외여행 나서
상하이 엑스포 덴마크관 홍보 전시 위해
덴마크의 관광명물인 '인어공주'상이 '2010 상하이 세계무역박람회(EXPO)' 덴마크관에 전시되기 위해 25일 코펜하겐 항을 떠났다. 96세 생애에서 첫 해외여행이다.
덴마크 조각가인 에드바르트 에릭슨이 덴마크의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기리고자 만든 인어공주상은 환송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럭에 실렸다.
정확한 수송경로는 보안상의 이유로 비밀이지만 이 1.5m짜리 동상은 상하이 EXPO 개막(5월1일) 1주일 전쯤 덴마크관의 인어 연못에 놓일 예정이다.
그러나 인어공주의 외출은 덴마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화재를 홍보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 보내는 것은 무례한 처사이므로 복제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지만, 크리스토퍼 보 브람센 덴마크 측 EXPO 준비위원장은 "실물을 보낼 수 있는데 왜 복제품을 보내야 하느냐"며 일축했다.
이날 행사 관중 가운데 사라 아메드(16)는 "인어공주는 21세기 덴마크인들의 삶을 상징할 수 없으니 다른 것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앤 마리 헤닝(92)은 "근처에 살아서 오랜 세월 인어공주를 봐왔는데 인어상이 없으면 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어공주가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11월까지 인어공주상 자리에는 세계적인 중국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의 비디오 작품이 전시된다. 이를 통해 상하이에 있는 인어공주의 전시 모습이 생중계될 예정이다.
인어공주는 1913년 처음 자리 잡은 후 수리할 때를 빼면 한 번도 자리를 떠난 적이 없으나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인어공주는 1964년 목이 잘려 없어지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끝내 잘린 목을 찾지 못해 원본 틀로 새 목을 만들어 붙였으나, 그 후에도 팔이 잘리거나 페인트를 뒤집어쓰거나 폭발물로 인해 나뒹굴기도 했다.
지난 2004년엔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 반대론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이슬람 여성용 부르카를 입힌 일도 있다.
(코펜하겐 AP=연합뉴스) damia0511@yna.co.kr /연합뉴스 2010/03/26 10:56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03/26/0200000000AKR20100326071600009.HTML
2008 - T-50 최종호기 초도양산 완료
한국항공우주산업은 오늘 오전 경남 사천시 사남면에 위치한 본사에서 공군과 방위사업청 등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최종호기 납품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지난 2005년 8월부터 1호기를 양산해 공군에 인도해 왔으며 이번에 모두 25대의 납품을 마쳤습니다.
T-50 고등훈련기는 지난 1997년부터 한국항공우주산업과 미국의 록히드마틴사가 공동으로 개발에 착수해 만든 국내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로 현재 아랍에미리트와 싱가포르를 상대로 수출 협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종혁 [johnpark@ytn.co.kr] /YTN 2008-03-25 13:25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573&key=200803251325461756
2006 - 벨라 바르토크 생가 박물관으로 단장
헝가리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벨라바르토크(1881-1945)의 생가가 그의 탄생 125주년을 맞아 박물관으로 개조돼 지난 25일 일반에 공개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내 부더지구에 자리잡은 생가는 바르토크가 나치의 압박을피해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 전인 지난 1932년부터 40년까지 살던 곳으로, 일부는 콘서트홀로 바뀌었지만 3개의 방에는 그가 쓰던 피아노와 가구를 그대로 보존했다.
특히 그가 연주하던 작은 피아노는 연주가 가능하도록 수리, 앞으로 헝가리의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콘서트를 제작해 TV에 방영할 계획이다.
이 생가는 1981년 부다페스트시가 탄생 100주년 당시 인수, 일부를 콘서트홀로 사용해왔으며, 이번에는 그의 작품 판권을 갖고 있는 가족들이 1억2천만 포린트(한화 6억여원)를 들여 박물관으로 단장했다.
부다페스트 시 관계자는 "박물관 개관을 2년 전부터 준비해왔다"며 "방문객들은 바르토크가 살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헝가리 현대 음악의 창시자로 불리는 바르토크는 작곡가 졸탄 코다이와 함께 헝가리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마자르족의 민속음악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 민요의음계와 리듬을 살린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담한 화성과 불협화음, 불규칙한 리듬,황금분할에 기초한 기하학적인 화성구조를 사용했으며, 교향시 '코수트', '랩소디',오페라 '푸른 수염 공작의 성(城)'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국 뉴욕으로 망명한 뒤 가난과 백혈병으로 불행한 만년을 보내다가 1945년 세상을 떠났다.
(부다페스트=연합뉴스) /쿠키뉴스 2006.03.27 10:33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1143385279&code=30110000
1998 - 마다가스카르 메뚜기떼 공습
[책갈피 속의 오늘]1998년 마다가스카르 메뚜기떼 공습
소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는 별 B-612의 ‘골칫거리’였다. 막 꽃을 피웠을 때는 아름답지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면 별을 망가뜨리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작은 지혜를 발휘한다. 바오밥나무가 막 싹을 틔웠을 때 양이 먹도록 한 것이다.
이 소설로 유명해진 바오밥나무의 본고장은 아프리카 동남쪽 인도양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다. 58만7041㎢에 인구 1660만 명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섬나라다.
그러나 실제 마다가스카르의 골칫거리는 바오밥나무가 아니었다.
1957년에 이어 1998년 3월 25일, 이 섬의 하늘은 시커멓게 물들었다. 메뚜기 수십억 마리가 훑고 지나간 논과 밭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폐허가 됐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피해복구에 나섰고 유엔까지 메뚜기 떼를 퇴치하기 위해 농약과 항공기를 지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메뚜기의 반란’은 아프리카는 물론 한국과 인접한 중국 하이난(海南)과 칭하이(靑海) 성에서도 최근 발생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이들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가 세계적으로 100만 ha(약 30억2500만 평)가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메뚜기가 극성을 부리는 까닭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훼손이 주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수십 년간 대량 벌목으로 삼림 면적이 감소하면서 일부 지역이 열대성 초원상태로 바뀌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었던 30∼40년 전 한국에서 메뚜기는 어린이의 영양 간식이었다. 메뚜기 다리를 떼어낸 뒤 기름에 살짝 볶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요즘도 일부 음식점에서 메뚜기 튀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메뚜기를 보기는 쉽지 않다. 농약을 많이 쓴 탓에 일부 유기농 농가를 제외하고는 메뚜기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나는 모양이다. 메뚜기 떼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본 마다가스카르나 메뚜기 만나기가 힘들어진 한국이 그렇다.
메뚜기가 ‘지구 황폐화’의 상징이 되고 있는 현실은 새삼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소설 속 어린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성들여 별의 몸단장을 해 줘야 해. 규칙적으로 신경을 써서 장미와 구별할 수 있게 되는 즉시 그 바오밥나무를 뽑아 버려야 하거든…그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쉬운 일이기도 하지.”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동아닷컴 2006-03-25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325/8288640/1
- Mir, Cosmonauts' Day, 1989
1992 - 우주미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13일 만에 귀환
우주정거장 미르호(Mir)에서 우주 탐사임무를 수행하다가 구 연방의 해체로 지구귀환이 늦추어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알렉산데르 볼코프 등 우주비행사 3명이 우주선 소유즈 TM-13호를 타고 우주미아생활 313일 만인 1992년 3월 25일 귀환했다.
1991년 5월 18일 구 소련 우주정거장계획의 하나로 미르호에 탄 크리칼료프는 만10개월 열흘간을 우주에 머물며 각종 측량과 기계실험을 해왔다. 크리칼료프가 우주미아가 된 것은 러시아가 돈이 없어서 그의 귀환을 위한 우주선을 발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가 돌아오게 된 것은 독일이 2천4백만달러를 지원해 귀환을 위한 우주선 발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1983 - 마이클 잭슨, 문워크를 처음 선보이다.
팝 황제의 ‘위대한 유산’
[세상을 바꾼 노래 97]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1982년)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 논쟁거리다. 그럼에도 어떤 긍정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이제 비로소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잭슨을 향해 미디어가 보여준 조소 어린 태도는, 연예계의 냉정한 생리를 고려하더라도 지나친 것이었다. 인격체로 크기도 전에 스타로 키워졌고, 인생을 알기도 전에 무대를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뒤틀린 삶에 대한 공감은 그만두더라도, ‘팝의 황제’로 사랑받았던 예술가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던 잔인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랑받는 자가 되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했다. “인간이라는 이해타산적 족속에게 사랑은 손쉽게 팽개쳐버릴 수도 있는 가치지만,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는 그의 통찰은, 유폐된 황제로서 잭슨의 말년에 대한 완벽한 메타포다.
그런 점에서 <타임>의 비평가 조시 타이런기엘의 관점은 모범이 될 만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작품들을 꼽으며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얼마나 훌륭하냐고? 지금 당장 앨범을 (플레이어에) 올려놓으면 알 수 있다. (잭슨의) 20세기 말 가장 기괴한 대중적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사라져 없어지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잭슨에 대한 피상적 관념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음악적 위업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너로서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스릴러>만으로도 족하다. 단일 앨범으로 역사상 유일하게 판매량 1억장을 돌파했고, 7곡을 히트 차트 톱텐에 올려놓았으며, 8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쓸어 모은 이 작품은 잭슨 이력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팝 음악 역사의 고원이기도 하다. 예술적인 혁신은 말할 것도 없다.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의 말마따나 이 앨범은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 그러므로 <스릴러>의 성공을 촉발한 기폭제로서 ‘빌리 진’의 가치는 그 자체로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앨범의 가장 독보적인 트랙으로서 ‘빌리 진’의 아이콘적 위상은 전방위의 자취를 남겼다. 미니멀하게 축소시킨 다양한 사운드 요소들의 중첩을 통해 아르앤비의 미래를 연 파격은 말할 것도 없고, 흑인 뮤지션의 곡으로는 최초로 엠티브이의 집중 방송을 끌어낸 비디오의 파괴력 또한 거대했다. 문워크를 처음 선보인 1983년 3월 25일의 ‘모타운 레이블 창립 25주년 기념 콘서트’는 티브이로 방영되어 5000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기도 했는데, 비평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그날 이후, 더 낫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했을 정도다.
잭슨의 죽음 이후 ‘빌리 진’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광적인 여성 팬의 스토킹에서 가져온 노래의 소재가 스타의 삶에 드리운 그늘을 상징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든 이를 즐겁게 했으나 스스로는 결코 즐겁지 못했던 잭슨의 인생이 거기 투영되어 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한겨레 2009-10-20 오후 06:08:26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382888.html
- 1982 Constitution
1982 - 영국 의회, 캐나다 헌법 승인
1982년 3월 25일 영국 의회가 캐나다 헌법을 승인했다. 이어 4월 17일에 엘리자베스 2세가 개정된 새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캐나다는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1867년 빅토리아 여왕이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캐나다를 하나의 자치령으로 합병하고,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와 영토가 이 자치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 영국령북미법을 승인한 지 115년 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캐나다의 공식 언어는 2개이다"라는 피에르 엘리오트 트뤼도 총리의 관점과 각 주의 특별한 문제간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권리와 자유의 헌장에서는 캐나다에서 준수되어야 할 34가지 권리, 즉 종교의 자유에서부터 인구조사에 근거한 언어와 교육의 권리 등을 규정했다. 한편 강력한 분리입장을 취했던 퀘벡 주정부는 헌법개정에 반대해 법원에 제소했으나 캐나다 연방대법원은 헌법거부청구에 대한 기각판결을 내렸다. /브리태니커
1981 -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 이갑성(李甲成) 사망
이갑성 [李甲成, 1889.10.23~1981.3.25]
역사속 오늘[1981년 3월 25일] 3.1운동대표 연당 이갑성 타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지막 생존자였던 연당 이갑성 선생!
1981년 오늘 아흔두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연당은 3.1운동 당시 서른 살의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이갑성 선생은 1933년 신간회 사건 때문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8.15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아홉 차례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과도 입법의원과 민의원,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연당의 유해는 국립묘지의 제1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YTN 2011-03-25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3250219350110&s_mcd=0422&s_hcd=
- 'Homage to the Square' - 'Homage to the Square'
- 'Sanctuary, Zinc Lithograph, 1942'
1976 - 독일 태생의 미국 화가 조셉 앨버스(Albers, Josef) 사망
앨버스 [Albers, Josef, 1888.3.19∼1976.3.25]
독일 보트로프 출생. 베를린·에센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되었다. 입체주의·구성주의, 또 그룹 <다리>의 영향도 받았다. 1933년 미국으로 가서 블랙마운틴대학·예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즉흥적 또는 계획적인 방법에 의한 실험을 하였는데, 시각의 상대성이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기본적인 형체의 조합을 통한 색채표현을 탐구하였다. 대표작으로 《정사각형 예찬》 연작이 있다. 회화 이외에도 그래픽아트·유리·브론즈 등을 사용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야후 백과
- Saudi Arabia, 5 Riyals (Banknote)
1975 -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Faisal of Saudi Arabia) 암살
파이살 [Faisal ibn Abdul Aziz Al Saud, 1906(1903)~1975.3.25]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왕 피살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1975년 3월 25일 조카에게 피살돼 오후 2시13분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조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리야드 궁전에서의 암살 사건은 국민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왕실은 정신이상인 조카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파이잘 국왕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두형에 처해졌다.
1964년 11월 국왕에 즉위한 파이잘은 곧 국가재정을 건전히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제3차-4차 중동전 때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에게 석유금수라는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중동평화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평화추진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
1967 - 마틴 루터 킹, 반전집회 이끌다
[어제의 오늘]1967년 마틴 루터 킹, 반전집회 이끌다
ㆍ미국의 베트남전 맹렬히 비판
1967년 3월25일 미국 시카고에서 5000여명이 참여한 베트남전 반대 집회가 열렸다. 집회를 이끈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 킹 목사는 이 자리에서 미국의 베트남 침공이 “미국이 표방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말했다. 킹 목사의 본격 가세로 미국의 반전운동은 흑인 민권운동과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흑인과 빈민의 친구가 왜 전쟁 반대에 큰 목소리를 내게 되었을까.
당시 킹 목사는 시카고 서쪽의 한 빈민가에서 민권운동을 벌이던 중이었다. 시카고는 킹 목사가 미국 남부에서 이미 몇 차례 성공적으로 이끈 민권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택한 북부 도시였다. 시카고 집회 열흘 뒤 뉴욕 집회에서 했던 그의 연설에 흑인 민권운동이 반전운동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바로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을 이등시민 취급했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 하는 “잔인한 역설”이다. 킹 목사는 전쟁에 쏟아붓는 막대한 돈이 실은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일 돈이라고도 했다. “해마다 국방에 쓰는 돈이 사회적 향상을 위해 쓰는 돈보다 더 많은 이 국가는 영적인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미국 내 약자의 시선을 가졌던 킹 목사의 외침이 보편성을 얻었던 것은 그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사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베트남의 토지 분배를 반대하는 미국 정부를 비판했고, 미국의 베트남 침공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지역이 구미 자본가들의 이윤 착취 격전장으로 변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연설에서 드러내놓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매카시즘의 광기가 채 가시지 않은 미국에서 공산주의 낙인이 운동을 위해서도 이로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자본주의에 뭔가 문제가 있다. 부의 분배가 더 이뤄져야 하고, 미국은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전집회 연설 이후 미국 남부의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그를 헐뜯었다. 킹 목사가 관계를 맺었던 주류 언론들도 등을 돌렸다. 잡지 ‘라이프’는 킹 목사 연설을 “하노이 라디오 방송에서나 들을 법한 (미국에 대한) 선동 비방”이라고 했다. ‘좌파 목사’는 그로부터 1년 뒤 암살당했다.
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3-24 18:17: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3241817565&code=100100&s_code=ap005
- 국제상업위성통신 개시기념, 1967
1964 - 미국-일본간 TV 우주중계 실험에 성공
텔스타위성 [Telstar] - 미국 최초의 실용 통신위성. 1호는 1962년 7월 10일에 발사되어 근지점 948㎞, 원지점 5636㎞, 주기 157.6분의 궤도에 진입하였다. 무게는 77㎏이며 최초의 능동형 통신위성으로서 발사 다음날에는 미국∼유럽 사이의 전화 및 텔레비전 중계에 성공하여 우주통신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텔스타 1호를 이용하여 다중전화·사진전송·고속데이터전송·컴퓨터제어·일기도전송 등도 시도하였으나 4개월 뒤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고장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해 5월 7일 2호가 발사되었는데, 원지점이 1만㎞로 끌어 올려져 이용가능시간과 범위가 증대되었다. 현재의 통신위성은 이런 종류의 이동형이 아닌 정지형이며, 미국전화전신회사(ATT)도 그 뒤 통신위성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야후 백과
1963 - 소련 국방장관 인도네시아 방문
역사속 오늘[1963년 3월 25일] 소련 국방장관 인도네시아 방문
1963년 오늘!
소련의 국방장관 말리노프스키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를 방문한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는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의 방문 5년 뒤인 1968년 3월 수하르토 장군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산당을 불법화해 두 나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YTN 2011-03-25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3250220400055&s_mcd=0422&s_hcd=
- 10th Anniv. of the Treaty of Rome, establishing the European Common Market,
1967 Mar. 25
1957 - 유럽 6개국 대표가 유럽경제공동체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에 서명
유럽경제공동체 (EEC) 출범
유럽은 작은 땅에 여러 나라가 얽혀 있는 탓에 역사적으로 늘 경쟁과 대립, 그리고 이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 세력에 뒤져 있던 유럽이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인들은 반복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꿈인 유럽통합을 모색한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석탄과 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창하며 꿈의 실현에 나섰다. 이 제안은 유럽연합이 이 날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기념할 만큼 유럽통합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듬해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시키면서 ‘유럽 합중국’을 향한 유럽인들의 먼 여정이 시작됐다.
1957년 3월 25일에는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 간 자본·상품·노동력·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창설에 조인함으로써 유럽통합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조선
1954 - 제1회 학-예술원 회원 선출
대한민국학술원은 학술발전에 공적이 있는 과학자를 우대·지원하여 학술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자들의 대표기관이다. 1952년 제정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3월 25일 초대 학술원회원 50명을 선출하고 같은 해 7월 17일 개원하였다. 1985년 8월 12일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통합되었으며, 1988년 12월 31일 대한민국학술원법이 제정되면서 문화보호법은 폐지되었다. 1990년 1월 3일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다시 분리되었다. ...
대한민국예술원은 우리나라 예술가의 실질적인 대표기관이다. 1952년 8월 7일 법률 제248호 문화보호법에 따라 설치되어 1954년 7월 17일 443명의 문화인 대표들이 뽑은 25명의 일반회원과 이들이 추천한 10명의 추천회원 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한 4명의 임원회원 등 총 39명의 회원으로 개원하였다. 초대회장은 고희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