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이겨내고 베풂의 삶 사는 인생 여정 한 권에 담아
치과라는 이미지에 마음이 밝아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치과하면 이가 갈리게(?) 아픈 기억이 떠오르고, 윙윙 기계 소리에, 입이 떡 벌어지게 비싼 진료비까지. 치과에 대한 불편한 기억들을 떠올리다보면 결국 머릿속 유쾌한 기억이 자리 잡을 한줌 공간마저 허공으로 횡 하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불자들 사이에서 치과에 대한 상큼한 기억들이 조금씩 쌓이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길들여지는 여우처럼, 최근에는 치과하면 깨끗함, 친절함, 신심, 자비로움 등이 떠오른다. 변화의 진원지는 불자 치과의사 최우환 원장. 그의 맑고 아름다운 삶이 치과에 대한 불편한 기억까지 정화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7월, 최 원장은 조계사 인근에 궁플란트치과를 개업했다. 독실한 불자인 최 원장이 스승과 도반 그리고 수행을 할 수 있는 도량이라는 3대 조건이 갖춰진 곳을 물색하다 신문에 우연히 난 분양 광고를 보고 부처님 품에 깃들게 됐다.
그는 교통, 상권, 학군이 강남 부럽지 않은 목동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병원이 잘되고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마음은 갈수록 허허로워졌다. 병원을 조계사 인근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무슨 절 근처에 치과를 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마음 속 물욕을 모두 털어버리고 수행과 사회봉사로 삶을 회향하자는 결심을 하니, 준비는 의외로 쉬웠다. 병원은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게 꾸민 까닭에 개업 초기부터 화제의 대상이었다. “호텔처럼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동양미와 서양미가 균형 있게 혼합돼 있다. 왕의 대접을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치료를 받고 나온 이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찬사가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손님이 몰렸고 최상의 의료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치과 의사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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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플란트치과에서 스님을 치료하고 있는 최우환 원장. 그는 병원이 수행을 위한 도량이라 말한다. |
평소 『금강경』을 읽으며 마음을 비우고 하심(下心)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있는 최 원장은 친절함이 각별했다. 환자의 기분 상태에 따라 대화를 나누고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남모르게 치료비를 덜어 주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매주 조계사 법회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은 물론 참선과 독경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특히 스님들 치료에 각별히 신경을 쓰다 보니,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듯이 불자들 사이에서 최 원장의 이름이 조금씩 회자되기 시작했다.
조계사에 들릴 계획이 있는 지방의 스님들은 볼 일이 끝나면 으레 최 원장을 찾아 치과 치료를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최 원장의 꿈은 조금 앞서 있었다. 어려운 불자들을 위해 가진 능력을 회향해야겠다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인연의 돌파구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나서자니 생색내는 것 같기도 하고, 특별히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꿈결처럼 시절인연이 도래했다. 조계사 주지 세민 스님의 내방이었다. “궁플란트치과가 소문이 나면서 조계사 부주지 스님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치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계사 주지 세민 스님이 치과 치료차 들으셨지요. 치료를 하면서 앞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조계사 사무처장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조계사와 제휴를 맺으면 어떻겠느냐고.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주지 스님께서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구나 하는 마음에 거듭거듭 감사의 합장을 했지요.”
수행 위해 조계사 인근에 치과 개원
최 원장은 2009년 1월 28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협력병원 조인식을 가졌다. 그리고 협약 내용에 따라 매달 조계사에서 선정한 무의탁 독거노인 한 분에게 틀니를 무료로 시술해주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이 3명을 선정해 무료로 치료하고 있다. 그렇게 펼치고 싶었던 사회봉사의 꿈이 시작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런 선행들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종로구청으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왔다. 조인식을 갖고 구내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조계사 인근에 병원을 개원한지 불과 6~7개월만의 일이었다.
최 원장이 가난한 이웃들의 살림살이를 누구보다 가슴 저리게 생각하는 것은 『금강경』을 독송하며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마음이 젖어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릴 적 기억의 응어리들 때문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어린 시절을 무허가 판자촌에서 지냈습니다. 장마라도 지면 집채만 한 바위가 굴러 떨어져 많이 깔려 죽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개울가에 사람의 시체가 떠내려 오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시체들 속에는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죽은 내 또래 어린 학생도 있었는데, 그게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난 탓이지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것이 삶의 최대 화두였던 시절. 그러나 최 원장은 꿈을 잃지 않았다. 자신보다 두 배나 큰 자전거로 쌀을 배달하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자투리 시간이라도 나면 책을 펼쳤다. 학력고사 체력장을 앞두고 쌀 배달을 위해 쌀가마를 들다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점수를 거저먹는다는 체력장을 망치고 말았다.
비록 학력고사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가난에 더욱 진저리가 났다. 대학 내내 라면으로 세끼를 때우면서도 최 원장의 성적은 언제나 최상이었다. 오로지 땀과 피가 밴 노력만이 평생을 일관되게 이어온 유일한 힘이었다. 이런 까닭에 최 원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보면 눈가에 물기부터 오른다. 가난 때문에 피워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던 또래 아이들. 그 한이 절절하기 때문이다.
스님과 불우이웃 돕기로 맑은 삶 살아
최 원장은 늦깎이 불자다. 계룡대 군의관 시절 불교를 만났다. 당시 군종감실에서 근무하던 이치영 법사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이치영 법사는 최 원장에게 잊히지 않는 좌우명을 새겨주었는데,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삼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한평생 탐착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먼지와 같다.”는 뜻이다.
이후 최 원장은 금과옥조와 같은 이 구절을 사무실 탁자에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좌우명처럼 매일을 쳐다보며 마음에 새기고 있다. “저에게 의사는 부업이고 본업은 불자입니다. 그래서 병원은 도량이고 병원을 찾는 스님과 환자들은 저의 스승이자 도반입니다.”
그는 최근 이런 자신의 삶을 담은 책 『성공인생 마음공부』를 출간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수행과 자비로 삶을 채우고 있는 인생 역경을 진솔하게 담았다. 한 인간의 삶 만큼 가슴 절절한 교훈은 없다. 치과 의사 최 원장의 투명한 삶 속에서 경전 한권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1만 2000원.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1016호 [2009년 09월 28일 18:04] var TSIZE = 5; function haFont(SIZE) { TSIZE = parseInt(SIZE) + parseInt(TSIZE); document.getElementById("news_content").style.fontSize=TSIZE; } haFont('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