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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Scene 20. The Tears /눈물/
따가닥 따가닥
여유롭게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별다를 것 없는 흔한 들판
의 풍경이 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한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말을 달
리고 있는 렌의 표정은 조금 힘들어 보였다.
힘들지 않았더라도 말의 속력을 더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속
력을 늦출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카르나스는 반드시 한 번
은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렌의 뒤에는 두 마리의 말이 그녀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길 안내를
한다며 지크힐트가 붙여준 자들이지만 아마도 감시일 게 뻔했다. 그러
나 렌은 감시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
는 건 그들의 정체였다. 보이는 대로라면 그들은 섀도우 블레이더. 쫓
기는 가문의 후계들에게는 양립할 수 없는 세력이며 한때는 죽음의 사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섀도우 블레이더들이 지크힐트의 명령에 따르며 카르나스와 함께
한다는 것은 가주라는 사람의 말대로 카르나스가 섀도우 블레이드와
손을 잡았다는 의미이다. 그동안 그녀가 '설마' 하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렌은 항상 카르나스의 계획을 알았다. 그것은 그의 계획은 곧 렌의 계
획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카르나스가
자신에게 무언가 조금씩 숨기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렌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그가 계획에 이용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
렇게 대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결국에는 렌을 찌르기까지에 이르렀다.
무엇을 위해 그녀를 찔렀는지는 분명했다. 렌의 목숨을 담보로 고대의
봉인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원한다면 한번에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
는 그가 렌에게 치명상만을 입혔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카르나스가
고대의 유적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카르나스. 왜……'
왜 그랬을까? 왜 카르나스는 렌에겐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찌르는 것
을 택했을까? 그것 말고는 정말로 방법이 없었을까? 설령 그것밖엔 방
법이 없었다고 해도 도대체 왜?
렌은 이를 악물었다. 이때껏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의 중심엔 카르나스
가 있었다. 힘없이 쫓기던 자신이 제국의 수석기사가 되고, 레이디 렌
남작이 되고, 그리고 마녀가 되기까지 언제나 그 중심엔 카르나스가
있었다. 그래서 들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대답을 반드
시, 그리고 직접 듣고 싶었다. 설령 뻔하디 뻔한 변명일지라도 말이
다.
"하아!"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의혹과 불안을 털어버리기라도 할 듯 렌의 입에
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렌이 말의 속도를 높이자 뒤에서 따라오
던 두 사람의 속도도 정확히 렌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높아졌다.
'이제 곧……'
멀지는 않을 것이다. 카르나스의 대답을 들을 시간도, 그녀가 제국을
떠날 날도, 그리고 그녀의 목숨도. 렌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마치 깃발처럼 휘날렸다. 그것은 길 위를 달리는 검은 조기(弔旗)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아! 하아!"
수도 외곽으로 향하는 길에 말 한 마리가 질주하고 있었다. 가끔씩 길
을 지나던 사람들은 미친 듯 질주하는 말을 피해 허겁지겁 길 아래로
내려섰고, 말이 일으킨 먼지에 콜록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말
을 달리는 지호에겐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렌
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카르나스라니! 대체 왜!'
지호의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요동쳤다. 카르나스는 검으로 렌
을 찌른 사람. 비록 그가 렌과 오랫동안 함께 한 사이라고 해도 그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렌은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것일까?
-렌은 카르나스의 여자예요!
아이리스의 말이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래서 간 것일까? 비록 자
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라 해도?
"하아! 하아!"
지호는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말의 속도는 지금도 한계
였다. 지호도 그것을 알았지만 그의 초조한 마음은 말에게 박차를 가
하지 않을 수가 없게 했다. 낙마라도 하게 되면 목숨을 잃을 것이 뻔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도 지호에게는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또!'
갈림길이 가까워 오자 지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갈림길 가운데
한 곳의 나뭇가지에 검은 띠가 매여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길을 알
리는 것이 분명한 표식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지호 자신을 향한.
"하아!"
지호는 말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고삐를 틀어 검은 띠가 매여져 있는
갈림길로 방향을 잡았다. 벌써 여러 번,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이런
신호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의구심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혹시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
다.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호 자신을 향한 신호라는 확신
이.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호의 말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땅을 박찼다. 귓가로는 매서운
바람소리가 웅웅거렸고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때 길 가운데 서 있는 검은 무리들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웃!'
가늘게 뜬 지호의 눈에도 그들이 뭔가 낮게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이 보
였다.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석궁의 발사 자세였
다.
지호는 조금씩 말의 속도를 낮췄다. 만일 그들이 정말 석궁을 겨누고
있고, 그래서 그의 말을 향해 쏜다면 큰일이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한
말은 나뒹굴 것이고 지호는 큰 부상을 당할 것이 분명하니까.
"워어! 워어!"
지호의 말은 검은 무리들의 조금 앞에서 멈추어 섰다. 기세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말이 제자리에서 말발굽을 따각거리며 흥분을 삭이지 못
한다. 지호는 길을 막아선 것이 지크힐트와 그의 섀도우 블레이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렌은 어디 있지?"
지호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예상
대로 섀도우 블레이더들은 지호를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었지만 발사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지호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 전에 쐈어야 했
다.
"훗! 오랜만이군, 애송이. 어쨌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테니까.
"
지크힐트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지호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지호는
순순히 말에서 내렸다. 지크힐트의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은 그의 말투를 걸고넘어질 때가 아니다. 말에서 내리는 지호를 쏘아
보고 있던 지크힐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고대의 봉인을 열 줄 알면서 왜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거지? 바보인가?"
지크힐트의 물음에 지호는 얼굴을 굳히고 딱딱하게 말했다.
"너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렌은 어디 있지?"
"나에게 명령하듯 말하지 마!"
갑자기 지크힐트가 고함을 쳤다. 그는 지호에게 손가락을 뻗으며 이글
거리는 눈빛으로 씹듯이 말했다.
"지금은 널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 알았나? 애송이!"
"네 마음 같은 건 상관없어. 렌은 어디 있지? 그걸 알려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닌가?"
지크힐트의 살기어린 눈빛에도 지호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큭큭, 큭큭큭."
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크힐트가 갑자기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카르나스 그 녀석에게 둘이나 뺏긴 주제에 말은 그럴듯하게도 하는
군. 큭큭큭."
"둘?"
지호가 반문하자 지크힐트의 눈동자가 어떤 쾌감으로 번들거리기 시작
했다. 그의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짙게 깔렸다.
"그래. 그리고 그중에 한 사람이 곧 네 길을 막으러 나타날 거다."
지크힐트는 손을 뻗어 길옆으로 무성한 수풀을 가리켰다. 조금 언덕이
지기 시작하는 그곳은 작은 산이 시작되는 언덕 같은 곳이었다.
"분발하는 게 좋아, 마녀의 기사님.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테니까.
큭큭큭."
지크힐트가 가리킨 숲을 쳐다보던 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지크힐트는
손을 들어 자기 목에 가져다 대더니 옆으로 스윽 그었다.
"너의 그 마녀님이 말야. 이번엔 진짜라구. 남자의 질투란 정말이지
…… 큭큭, 큭큭큭."
지호는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벌써 지크힐트가 가리켰던 방
향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렌!'
지크힐트가 했던 다른 말 따위는 이미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저 그
녀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지호는 이미 수풀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군. 하지만 카르나스, 그리 쉽게 당신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걸? 큭큭큭."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는 지호를 보며 지크힐트가 미소를 지었다.
"가자. 나머지야 배우들이 알아서 잘 할 테니. 큭큭큭큭."
그의 말과 함께 검은 그림자들은 마치 안개가 흩어지듯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고 길 위에는 지크힐트의 웃음소리만이 남아 떠돌고 있었다.
* * *
그리 울창하지는 않은 숲이었지만 구름 가득한 하늘 덕분인지 산길은
꽤 어두운 편이었다. 그 길 사이를 렌은 조금 거친 숨소리를 내가며
오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로 숨이 가쁘지는 않았겠지만 지
금은 달랐다. 자신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렌 자신도 분명히 느낄
정도다.
사락
정상은 아직 멀었지만 렌은 발걸음을 멈췄다. 나무들 사이로 무엇인가
붉게 빛나는 것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람결에 조금씩
흔들리며 마치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는 그것은 아름답고 긴 붉은 머릿
결이었다.
"카르나스."
마치 렌의 부름에 응하듯 단아하게 깎아내린 조각처럼 햐얀 카르나스
의 얼굴이 나무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렌."
옅은 미소가 떠도는 아름다운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부드러운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카르나스는 렌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몸은 괜찮나, 렌?"
카르나스의 말에 굳어 있던 렌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지금 걱정하는 건가요? 당신이 나를?"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카르나스는 그저
미소 지을 뿐 렌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다, 렌."
렌의 눈초리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카르나스의 표정에
는 미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어찌 보면 상대를 향한 감사와 신뢰를
보내는 그런 표정처럼 보이는 모습. 렌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이젠 어쩔 작정이죠, 카르나스?"
카르나스는 한 손을 내어밀며 말했다.
"어쩌다니? 렌, 네가 아는 그대로다. 우리의 계획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어."
"그 우리의 계획이란 것에 내가 당신에게 칼을 맞는 게 있는 줄은 몰
랐군요."
렌이 차갑게 노려보았지만 카르나스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왜 날 찔렀죠?"
렌의 싸늘한 목소리가 카르나스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을
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우르릉
하늘을 온통 덮어버린 구름들 사이로 멀리 천둥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며 숲의 나뭇가지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이제 금방이다, 렌. 우리가 원하던 복수가 이제 눈앞에 있어. 손만
내밀면 그것은 우리 것이 된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말해요, 카르나스! 왜, 왜 날 찔
렀어요!"
우르릉
먼 천둥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카르나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일그
러졌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렌은 싸늘하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의 복수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카르
나스."
카르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의미 없이 피를 흘리는 건 그만둬요, 카르……."
"이해하지 못하는군."
카르나스가 렌의 말을 끊었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카
롭게 날이 서 있었다.
"이해하지 못해!"
그의 눈이 점점 빛을 내기 시작했다. 카르나스의 싸늘한 눈빛이 렌이
눈동자에 박혀왔다.
"너는…… 이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카르나스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