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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
날짜: 1977. 6. 19(일)
장소: 미국
하나님에게도 소원이 있어
우리 인간세상을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법관, 어떤 사람은 사업가, 어떤 사람은 과학자가 되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개인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국가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런 소원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분야라든가 문화적인 분야라든가 혹은 종교적인 분야를 중요시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렇듯 각 나라마다 여러 가지 방향을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세계는 “이래야 된다.” 공산세계도 “이래야 된다.”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에게도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이 가는 길, 나라가 가는 길, 혹은 세계가 가는 길,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에 나가 보면 바다가 아무리 넓더라도 거기에는 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이 흐르는 데는 반드시 골수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 전체가 움직이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공기도 역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생활을 보면 과거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살아갔고, 현재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 후대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살 것입니다. 일상 생활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오늘은 재수가 있으면 좋겠다. 오늘 나가면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바랍니다. 춘하추동이 있으면 “춘하추동 전부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좋은 계절이 되면 좋겠다.” 하고 바랍니다. 또 청년시대, 장년시대, 중년시대, 노년시대에도 “아, 이렇게 되면 좋겠다.” 하고 바라는 것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94-9)
이 우주는 원칙에 의해 돌아가게 되어 있어
이렇게 볼 때, 이 우주가 도는 것에도 운세가 있습니다.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움직여 나가는 것이 질서에 맞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가 “내가 이렇게 정해 가지고 간다.” 해요,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다.” 해요? 어떤 거예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가 중심일까요, 어떠한 법과 어떠한 원칙이 중심일까요? 원칙이 중심입니다. 모든 존재물은 존재하기 전에 원칙이 있어서 그 원칙에 따라서 존속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앙-” 하고 울며 숨을 내쉽니다. 또,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여러분이 그것을 하겠다고 해서 됐어요, 그냥 됐어요? 그냥 됐습니다.
태어날 때는 눈을 감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내가 언제 눈을 뜬다.” 하고 뜬 것이 아니라 자연히 떴습니다. 또, 엄마의 젖을 먹는다는 것도 교육을 받지 않고 자연히 알았습니다. 작용하는 모든 것의 원칙적인 길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작용이라는 것은 우연히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은 “우주가 발전했다, 자연발생이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냥 그대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인도 없고, 동기도 없고, 과정도 없고, 결과도 없이 발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동기, 즉 원인이 제일 먼저고 그 다음이 방향입니다. 그러면 방향이 왜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나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것을 의식하고 가지 않습니다. 눈은 왜 떠지는 거예요? 눈을 뜨면 뜨자마자 안을 들여다봐요 밖을 내다봐요? 왜 그렇게 봐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향성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존재하는 것은 방향을 따라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주는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 발생적이다.”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연이 그냥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연 가운데는 원인이 있고 방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연은 반드시 방향성을 가지고 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인 방향성이 결집되어 하나의 완성된 물건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는 돌아간다고 하고 역사도 발전하여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화하는 모든 단계는 왜 돌아가지 않느냐? 왜 발전만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환하는 세계를 두고 볼 때, 여기에서 윤회설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구요. 사람이 동물로도 돌아가고 나무로도 돌아가고 무엇으로도 돌아간다고 보는 것도 이러한 세계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94-10)
이 우주가 왜 원형을 닳았느냐
그러므로 사람도 역시 그런 순환 법도에 순응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결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흙에서 나 가지고 진화과정을 거쳐서 발전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보다, 사람의 출발점은 흙이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보이지 않는 인격자, 보이지 아니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원리라는 것이 보여요? 원리는 설명을 해서 아는 것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면서 설명할 수 있는 원리적인 것 자체는 보이는 자체보다도 차원 높은 주체성을 갖고 있고 내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인해 태어나 보이는 사람이 됐다가 그 다음에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우주가 왜 원형을 닳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안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는 힘과 받는 힘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직선으로 부딪치면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상충되지 않기 위해 원형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것일수록, 완전히 주는 힘일수록 둥그렇습니다. 완전히 받으려고 하면 둥그래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칙입니다.
우주가 왜 둥그러냐 하면 주고받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둥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말의 원만(圓滿)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원만한 인격자라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만이란 것은 꽉 차게 둥글다는 것입니다. (94-12)
우주의 운세와 조화를 이루어야 영원히 존속할 수 있어
우주는 돌아가는 원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고받는 힘의 작용으로 우주는 둥그래집니다. 줄 수 있는 문화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받을 수 있는 문화와 하나 안 되어 가지고는 둘 다 망하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산에 비유하자면 백인은 산꼭대기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산꼭대기는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산꼭대기 때문에 있는 것이냐, 골짜기 때문에 있는 것이냐?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굴러 떨어지는 돌은 전부 다 골짜기로 가게 마련입니다.
앞으로 서양문명은 결국 골짜기 같은 곳, 동양문명에 가서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동양문명은 어디 가서 드러나느냐? 서양문명과 더불어 하나될 때입니다.
그래서 세계가 하나되려고 할 때, 끝날이 되면 될수록 백인은 아시아를 돕고, 중동을 돕고 흑인을 돕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미국이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오늘 전세계 백인 국가를 대표한 미국이란 나라가 왜 아시아를 돕고 아프리카를 도와줘야 되느냐 하는 생각을 안 해봤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 대신 자리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을 백인이 갖게 됩니다. 그것을 못 하니까 레버런 문한테 그 특권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백인과 흑인과 황인을 전부 다 섞어서 결혼을 해 주려고 합니다. 극과 극입니다.
백인이 백인 아기를 젖먹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그러나 백인이 흑인 아기를 젖먹이면 얼마나 자극적이에요! 하나님이 볼 때 어떤 것에 더 취미가 있겠어요? 하나님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백인 사회에 레버런 문이 왔는데 많은 언론계가 왜 이렇게 주목하고 왜 이렇게 야단하는 거예요? 백인과 다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주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자연 이치입니다.
미국 사람들 눈에는 나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게 될 때는 푸른 바다에서 배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황인인 내가 푸른 바다 같은 백인 가운데 배와 같이 나타났으므로, 하나님이 보게 될 때 그 배에 매력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빨간 기(旗)를 달아 올릴 뿐만 아니라 빨간 기로 신호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디에 관심이 있겠어요? 푸른 바다가 아닙니다. 검은 배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진짜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시장에 백인들만 모여있는 것과 오색 인종이 모여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게 멋지겠느냐 말이에요? (94-17)
지혜로운 사람은 우주의 법도에 박자를 맞추는 사람
오늘 제목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되어지는 모든 것은 인간이 아무리 주장하고 아무리 야단했댔자 이 우주의 천운이 원하는 대로 박자가 맞아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는 한 여기에 순응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순응하는 도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우주의 운세와 맥박과 더불어 발전해 나갑니다. 영원히 존속할 것입니다.
아무리 서양 사람 마음대로 했댔자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우주의 법도를 따라 거기에 박자를 맞추겠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원칙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다시 연장되어 아시아 및 세계의 문화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라나 혹은 개인이나 무엇을 막론하고 망하겠다고 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망해가요? 그것은 우주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인간들은 천운의 법도에 따라 박자를 맞추는 데서 존속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영웅이 안 되고 싶고 성인이 안 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원하지요? 그러면 왜 전부 다 그렇게 원하는데 어떤 사람은 망하고 어떤 사람은 발전하고 그래요? 그것은 우주의 박자에 맞추느냐, 안 맞추느냐 하는 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위대한 사상을 가져야 됩니다. 뛰는 시간은 잠깐인데 준비하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하나님이기 때문에 시작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긴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뛰지 않았습니다. 한번 뛰는 날에는 휙 점핑하여 오를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여러분의 생각만으로는 지상천국이 다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은 무척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떤 녀석들은 “아이구, 통일교회의 원리말씀은 참 좋지만 통일교회의 행동은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용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행동하고 걸어 나가야 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전진하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것만 틀림없다고 하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희망을 가지고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압박받는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압박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몸은 압박을 받더라도 마음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혁명이 벌어지고 새로운 문화가 창건됩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회가 반대를 받고 통일교회의 일이 험하고 살기 어렵더라도 우리의 마음만 올라가면 세계에 없는 새로운 문화를 창건합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94-20)
어떤 사람이 정상에 오를 것인가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던 사람은 높은 산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산꼭대기는 골짜기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꼭대기와 꼭대기가 연결되는 법이 없습니다. 꼭대기는 전부 다 골짜기와 연결되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우주의 원칙입니다.
근세에 종교 단체로서 이렇게 세계적으로 골짜기에 처박혀 보는 것은 통일교회가 처음입니다. 통일교회가 여기서 기어올라가느냐, 못 올라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올라가 거기에 쇠기둥을 박고 줄을 달아 다리를 놓든가 케이블카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데리고 간다면 제일 힘든 길, 사탄도 못 따라오고 악한 사람 그 누구도 못 따라올 골짜기로 끌고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골짜기에 떨어졌으니 골짜기에서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간 역사의 제일 깊은 골짜기에 내려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우리가 가진 사상과 같은 높은 사상이 없었습니다. 천주주의, 하나님의 사랑을 전부 다 독점하겠다고 하는 이런 주의와 이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케이블카를 만들어 놓았을 때, 세계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올라가려고 하는 행렬이 얼마나 길 것 같아요? 역사상 제일 긴 행렬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구경하겠다는 사람의 행렬이 세계에 없는 제일 긴 행렬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공사장에 와서 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버런 문은 뭐냐? 총감독이요, 총책임자입니다.
하나님한테 “하나님, 당신도 수고해 봤소?” 하고 물어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에이 녀석아, 수고라 하면 누구보다도 수고했지!”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의 제일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제일 높은 산꼭대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넘어가려고 일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 여자들은 “아, 아름다운 곳이다.” 하며 좋아하고 장단에 춤추더니 시일이 가면 갈수록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못 가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남자들은 자기가 세계에서 무엇이든지 한번 해 보고 나폴레옹보다도 누구보다도 나은 영웅이 되겠다고 큰소리치고 천하를 다 움직이겠다는 배짱을 가지고 나타나서 신나게 따라오더니 한 5부 능선서부터는 “아이구, 내가 이렇게 땀을 흘리다가는 죽겠다.” 하면서 다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다 죽겠다. 하나님이고 무엇이고 나 혼자 살아야 되겠다.” 하면서 일시에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가도 가도 한정이 없는 것입니다. 산 속에 들어와 보니 꼭대기는 안 보이고 숲밖에 안 보입니다. 전부 숲이고 꼭대기는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꼭대기가 보이면 좋겠는데 안 보입니다. 위로 올라갈 것을 생각하면 막막하고 내려다보면 내려갈 길이 훤하게 있으니 “모르겠다. 내려가는 게 지혜롭겠다.” 하고 내려가는 어리석은 녀석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가까워 오면 올수록 “헉헉헉…!” 하면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영웅이 되겠다고 욕심을 가진 사람은 다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남아질 것이냐? “이 산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서 나는 죽겠다.”고 결심한 사람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내 앞에 있기 전에는 나는 후퇴를 모른다.” 하는 사람만이 전진할 것입니다. 만약에 죽더라도 “내가 가려고 해도 못 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못 가니 후대의 사람들은 이런 준비를 해 가지고 가라!” 하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 사람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데 있어서 정신적으로 살아 남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죽었더라도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협조해서라도 갈 길을 안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럼 몇 번이나 죽을 각오를 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을 때까지는 나는 죽었다 살아났다 죽었다 살아났다 하면서 가야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과 쓰러진 사람 이상의 결심을 하고 모든 것을 준비해서 빠른 시일 내에 직선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더라도 무엇을 남기겠다는 사람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장래에 발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겨야 됩니다. 레버런 문도 지금 거기를 향해 올라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이 올라와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다 눈 아래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계에 가 있는 어떠한 사람보다도 우리가 높은 자리에 있고 이 세계의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94-22)
보다 큰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
그러면 편안히 가고 싶어요, 죽을 각오를 하고 가고 싶어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이구, 됐다!” 하고 풀석 앉아서 죽겠어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잔치를 할 수 있는 정각을 짓고 죽겠어요? 하나님하고 잔치를 할 수 있는 정각을 짓고 죽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잔치를 준비하면서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활동만 하지 않습니다. 신문을 팔고, 장사를 하고, 공장을 만들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광산에 가서 금을 캐고 다이아몬드를 캐는 일도 다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끝낼 때까지는 어느 누구의 인정도 못 받고 비참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위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망했다가는 그 사람이 잔칫날에 “하나님, 아무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면서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둑질을 해서 하는 게 아니라 피와 땀을 흘려서 벌어 가지고 잔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서 잔치해야 됩니다. 만약에 잔치를 못 하겠거든 거기에 부조라도 할 수 있게끔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통일교회에서 축복을 받고 잔치를 하는데 통일교회가 나라를 찾고 잔치를 해 봤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를 찾고 잔치를 해 봤느냐구요? 몇 천만 번 가정잔치를 하는 것보다도 한 번 나라잔치를 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전부 다 하나로 만든 후에 지상세계의 잔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들어 가지고 천주적인 잔칫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잔치가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복받는 것은 나라잔치를 이어받기 위한 준비요, 나라잔치를 하는 것은 세계잔치를 이어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또, 세계잔치를 하는 것은 하늘땅의 잔치를 위한 출발의 준비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보다 큰 것을 향하여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데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가진 사람은 “가정을 잘해 놓고 살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 문제가 아니다. 나라를 잘해 놓고 살자.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잘해 놓고 살자.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땅을 잘해 놓고 살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보다 나라, 나라보다 세계, 세계보다 하늘땅을 잘해 놓겠다고 하는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9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