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정조의 원대한 꿈(수원 화성건설)
(1)천장(遷葬:묘소이장)
사도세자의 묘소는 양주 배봉산 갑좌 언덕이었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라 올리고 봉호를 영우원(永祐園),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칭했다. 영우에는 천지신명이 사도세자를 영원히 도와 달라는 뜻이, 경모에는 부친을 향한 지극한 사모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양주 배봉산은 비극의 장소였다. 영조가 신경을 써서 선택한 장지였지만 비참한 죽음 끝에 실려 온 곳이었다. 따라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곳이 결코 아니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정조는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영우원을 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장은 노론의 격심한 반발을 살 일이었다. 노론은 사도세자 문제만 나오면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왜냐하면 사도세자를 죽인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정조를 도와 준 인물이 금성위 박명원이었다. 그는 정조13년 7월 11일 사도세자 묘소 문제를 거론했다.
금성위 박명원은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이었다. 사도세자와 처남·자형사이였으므로 사도세자 묘소 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충분했다. 게다가 화평옹주는 동생 화완옹주와 달리 사도세자와 유독 친했던 누이였다.
화평옹주는 42년전인 영조24년에 세상을 일찍 떠났는데, 영조가 그녀를 각별히 사랑했으므로, 그녀가 살아 있었으면 사도세자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있었다.
박명원은 상소에서 사도세자 묘소는 비전문가가 봐도 지세가 좋지 않다고 했다. 정조는 박명원의 상소에 감복했다. 박명원은 일찍부터 왕실 외척의 모범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부마였지만 일절 정사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조가 상가에 들르겠다고 하자 박명원은 땅에 엎드려 안 된다고 간쟁했다. 임금이 사가에 조문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조가 박명원의 상소에 비답 했다.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가슴속에 담아두고 답답해하기만 하였는데 경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결정하겠다.”
정조는 대신을 모아놓고 승지에게 박명원의 상소를 읽게 했다. 자형이 처남의 천장을 요구하는데 반대 목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대신과 예조 당상들이 한목소리로 성명(成命)받들기를 청했다. 정조는 눈물을 삼키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나는 본래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는데 지금 도위(박명원)의 소를 보고 또 본원(영우원)에 대한 경들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
한참동안 호흡을 고른 정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찌 한 도위(부마)의 상소로 인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정상인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 속에 맺혀 있다.”
정조는 어느 지사(地師)못지않게 풍수에 밝았다. 그러나 그는 그답게 풍수가 후손들의 화와 복을 가져온다는 화복설은 배격했다.
사실 정조는 묘소 이전에 대해 수백, 수천 번도 더 생각했고, 명당들도 미리 조사를 해 놓은 상태였다. 풍수가들은 저마다 명당을 추천했지만 정조의 의중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정조가 오래 전부터 의중에 있었던 명당 길지는 바로 수원에 있었다.
치밀한 성격답게 정조는 그동안 온갖 명당자리의 득실을 다 따져 본 다음
옥룡자, 곧 최고의 풍수가인 도선의 설로써 마무리했다. 수원 장지는 과거 효종의 국상 때 윤선도가 최길지의 명당으로 꼽았으나 서인 송시열 등의 반대로 무산된 곳이었다. 정조는 남인 윤선도의 주장을 예로 들면 노론에서 반대할지 모르기 때문에 대신 도선의 설을 언급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판중추부사 김익이 화답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들으니 신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겠습니다. 옥룡자는 바로 도선의 호인데 그의 논평이 이와 같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서 길지를 구하겠습니까.”
정조가 이장지로 점찍은 곳은 수원의 용복면 화산이었다.
7월 13일 영의정 김익,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체제공 등은 수원 화산에 가서 봉표 지역을 살펴본 후 정조에게 보고했다.
“화산이 왼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떨어져서 주봉우리가 되고 서북쪽의 주산이 서북과 북쪽사이로 내려오다가 북쪽으로 돌고 다시 북동쪽으로 뻗어오다가 동북쪽으로 바뀌면서 입수합니다. 앞에 쌍봉이 있는데 두 봉우리 사이가 비었고, 안에 작은 언덕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구슬 같습니다. 청룡 네 겹과 백호 네 겹이 에워싸 자리의 기세가 만들어졌는데 혈이 맺힌 곳이 마치 자리를 깐 것처럼 펑퍼짐하니 혈 자리가 분명합니다. 뻗어온 용의 기세가 7백리를 내려왔는데 용을 보호하는 물이 모두 뒤에 모였으며 현무로 입수하였으니 천지와 함께 영원한 더할 수 없는 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경기도 이천 세종의 영릉과 함께 국내 최고의 길지로 꼽히는 수원 화산에 대한 지관의 해석이었다.
사도세자 묘소 이장이라는 국가적 대사가 단 한명의 반대도 없이 결정되었다. 다음은 이장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였다. 과거 윤선도가 효종의 능으로 이곳을 꼽았을 때 송시열 등은 장지로 결정되면 백성들이 이주해야 한다며 반대했었다. 정조는 과거 송시열 등의 반대 논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명의 백성도 손해 보지 않고 이장 문제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따르는 것은 자신은 물론 사도세자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백성들의 눈물이 아니라 환호 속에 천장하고 싶었다. 정조의 지시를 받은 장지 선정을 맡은 신하들은 용복면에 살던 백성들이 이주할 장소를 물색했고, 임금의 특명을 받은 수원 부사 조심태가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 장계를 올렸다. “팔달산 아래의 땅이 국세가 크게 트여 큰 고을을 조성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정조는 이장지에 살던 백성들을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켰다. 내탕금을 풀어 후한 보상을 해 주었으므로 백성들은 만족했다.
정조에게 사도세자 묘의 천장 목적은 사도세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만 있지 않았다. 화산에 살던 백성들과 다른 곳의 백성들이 이주하여 건설할 새로운 도시를 정조는 꿈꾸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부친 묘 이장은 정조가 수없이 그려보았던 원대한 구상의 첫 단계였다. 그 원대한 구상이야말로 다시는 이 나라에 사도세자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방책이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의 건설과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그려보고 있었다.
정조13년(1789년)10월 4일 사도세자의 영구는 양주 배봉산을 떠나 수원으로 향했다. 정조는 영우원에 나가 빈전에 곡을 했다. 어가와 영여(시신을 실은 수레)가 함께한 행렬은 웅장했다.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어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다.
사도세자의 영여가 수원부의 신읍에 들렀다가 영원한 안식처인 이장지에 도착한 것은 10월7일 , 정조는 걸어서 주산 봉우리까지 올라갔다. 보여를 타고 산등성이를 빙 돌아 보여를 멈추게 하고 하교했다. “이 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이후 화산은 말 그대로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륭원이라 이름 짓고는 틈만 나면 찾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 6월 18일 정조는 수빈 박씨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자를 얻었다. 6월24일 정조는 원자 탄생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정조는 이 같은 경사는 부친의 묘가 물이 고여 있던 악지에서 천하의 길지로 이장한 보답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누워있는 이곳 수원은 더 나아가 조선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이었다. 정조는 조선의 정치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사도세자의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재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을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 중심지가 바로 이곳, 사도세자가 누워있는 화산을 배후에 둔 수원성, 즉 화성이 될 것이었다.
첫댓글 가슴에 두고두고 안고 있던
사도세자 묘소이장
성공리에 잘 마무리 되서
정조의 꿈이 이루었졌네요 축하드리고
근데 수원인구가 몇명인가요
122만명인가요
어찌되든 생각하고 구상한
목표 계획을 차질없이 무리없이
잘 진행 수행하고 있네요
다음 연재편 흥미진진 기대됨니다
수고 했습니다
기만용용님 항상 애독해 주시고 댓글 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ㅡ
다저스님..
옛말에..
<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 라는
말이 있듯이..
어릴때, 아버지 사도세자 (장헌세자) 의 일을 겪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랬을까요.
그래서
<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 속에 맺혀 있다.> 고
정조도 말했겠지요.
< 나의 가슴이 정상이 아님을 경들도 알 것이다. >
이러한 증상이 자주 나타났기에
정조는 위와 같이 말했겠지요.
오늘날로 말하자면,
정조의 증세는 ㅡ
심장이 갑자기 짓눌려 지듯이 아프면서,
징하게 막히고
고통스러우면서,
갑자기 의식이 흐려져서
잠시 호흡을 가누지 않으면
꼼짝 못하는 증세를 말하고 있는듯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정조는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일들을 겪어내었을까요.
아프지 않으면 이상하지요.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감사 합니다.
정조의 효성과 대대적인
정치개혁의 구상과 현실화
점차 흥미가 더해 가네요
< 정조는 어느 지사(地師)못지않게 풍수에 밝았다.
그러나 그는 < 풍수가 후손들의 화와 복을 가져온다는 화복설은 배격했다.>
우와 ~~~!!!!
정조는 어떻게 1789년 그 당시에,,
오늘날에도
풍수에 대한 의견이, 설왕설래 하는데,
확신을 가지고,
화복설을 배격할 수 있었을까요.
실로 놀랍습니다.
사도세자는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헛되진 않았습니다.
슬하에 저리 충실한 정조를 두었으니요.
조심성 있게, 잘 정리해서
노론의 반대 없이 잘 이장을 하였군요.
그간 공부해서 머리 속에 간직했던
지식으로 꼼꼼히 처리 잘 했습니다.
요즘은 자기 땅을 내 놓아야 할 경우 넉넉히 쳐주는 것인데
저 당시는 거의 빼앗앗을 정도일 텐 데
원성없이 잘 넉넉히 해결해 주고
현명한 왕이셨습니다.
자세한 뒷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효심깊은 정조대왕을사모하는 이유중 하나입니다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를 모시고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꿈꾸는 정조
조선의 발전을 새롭게 개조해서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려는 꿈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