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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2열왕 24,8-17
복 음 : 마태 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고 또 글도 많이 쓰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은퇴 후의 삶이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다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셨습니다.
은퇴하셨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 형제님은 삶이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거실에서 미끄러져서 고관절골절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운동도 또 독서도 또 밖으로 외출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는 지인이 이 형제님을 만나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폭삭 늙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무엘 울만의 시 ‘Youth’(청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꿈도 없고 또 열정도 없다면
나이가 얼마 안 되어도 늙은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청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약하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상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의 시련에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청춘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노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만 넘쳐난다면 충분히 청춘으로 삽니다.
이렇게 청춘을 사는 사람만이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4)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 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이 양식이다.’(요한 4,38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잔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곧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었습니다.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고,
그러고도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곡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상황에 대처하는 인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문제(Problem)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Task)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긍정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과제는 능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바뀌고, 흙길은 포장이 되고,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습니다.
집 집마다 자동차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과제는 희망이 되고, 과제는 성취가 되고,
과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을 문제로 보느냐, 과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원천석은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슷한 시조로, 길재는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국가도 찬란한 꽃이 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이방원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왕조는 사라지고, 화려했던 궁궐은 사라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멋진 풍류와 문화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겪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언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지내야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비극과 고통을 ‘문제’로 생각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비극과 고통을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겨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희망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 희망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을 준비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희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문제로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혼인법을 지켜야 하고, 금육과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미사참례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문제로 접근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리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과제로 접근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릴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과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는지, 과제로 인식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라야
조욱현 토마 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착하게 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 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22-23절)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름과 능력을 빙자하여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치유나 기적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이 있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처음에는 제대로 믿고 덕을 쌓으며 기적을 일으키고 마귀도 내쫓을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자기를 내세우는 거짓 모습과 욕망으로 기우는 모습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면서도 진실한 믿음의 행실이 따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를 모래 위에 집짓기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23절) 하신다.
이 말씀은 현세의 삶과 그것이 맺는 열매와 그 안에서 덕이 얼마나 큰 힘을 미치는가를 가르치신다.
덕의 힘은 삶의 어려움에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지닌다.
그는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어떤 재앙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반석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강물은 유혹과 박해의 형태로, 꿋꿋이 서 있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들이친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바닥과 기초로 모시고 있지 못하면 무너지고 만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이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져 모든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며,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유혹이 불어닥치면 그 집은 무너진다.
사악한 바람이 불어닥치면 그 집은 모래 먼지로 가득하고
성난 물이 그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 혼탁한 죄의 강물은 그 집의 주춧돌까지 뒤흔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서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
그 권위는 그분의 말씀에서 드러난 사랑 때문이었다.
참사랑에서 참된 권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우리가 되자.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전삼용 요셉 신부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아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 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 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영혼 없는 로봇 같은 신앙을 극복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야트막하지만 산상에서 행하신 설교를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행하십시오.
당대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 악행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 주님!’ 하며 입으로는 늘 그분을 찾았지만,
언행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나 지도자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결실과 성공을 주님께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며,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실행 쪽으로만 과도하게 치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영적 생활과 사랑의 실천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적 선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연료가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으나 영혼 없는 로봇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석해 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행은 그다음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본질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다음 순서가 실행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 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 측에 의무와 과제를 지우는 강제 소집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행 자체였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인간 측의 응답도 책임감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 사랑으로부터 분출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 측의 응답은 사랑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는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카 6,17-47)에 담겨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도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을 사람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줄곧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를 요구하셨다.
이 정의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는 설교를 경청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시는 정의가 만들어진다.
들은 것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래도 다짐해야 한다. 다짐은 출발점이고, 이는 길을 열어준다.
많은 것은 한꺼번에 다짐하지 말자. “1%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의 변화와 전진과 개선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완성은 꿈도 못 꾼다.
“생각을 바꾸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의 기반이 된다.
실수가 잦으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어버리듯이
조그만 것이라도 빈도가 많아지면 습관이 되는 법이다.
조그맣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좋은 생각과 좋은 다짐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연습을 하자.
말은 행동이 아니니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설교의 내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반석 위에 나의 집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자.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