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미국에서 거의 같은 시기(2011∼2013년)에, 같은 이슈가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사후(事後)피임약을 의사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오랜 공방 끝에 두 나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미 연방법원, “나이 제한은 과학적 근거 없는 정치적 결정”
준비 없이 일이 벌어지고 난 후라도 72시간 내에 먹으면 임신을 85%까지 막을 수 있다는 ‘사후피임약’. 미국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제품이 테바(Teva)사(社)의 ‘플랜B-원스텝(one step)’이다. 플랜B는 1999년 미국 FDA에서 ‘처방약’으로 시판 허가를 받았지만, 2001년부터 여성단체 등을 중심으로 약국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일반약(OTC)으로 바꿔 달라는 요구가 계속돼 왔다. 과학자들은 안정성이 확보돼 일반약 전환에 문제 없다는 의견을 냈으나, 보수적인 공화당 부시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고 2006년에 와서야 18세 이상일 때만 약국에서 처방없이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2009년 오바마 정부는 16세 이상으로 다시 제한 나이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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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시판중인 사후피임약 플랜B와 세컨드 챈스./ 구글 캡처
그러다 2011년 사달이 났다. FDA가 “연령 제한을 없애고 플랜B를 일반약으로 푼다”는 방침을 정했으나 보건부 장관(캐슬린 시벨리우스)이 이를 묵살해 버린 것이다. 법적으로는 보건부 장관에게 산하기관인 FDA의 결정을 번복할 권한이 있다. 하지만, 의약품 전문가들이 과학적 근거에 따라 내리는 FDA의 결정을 장관이 뒤집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선택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던 민주당 정부 치고는 의외의 결정이었다. 시벨리우스 장관은 11세 소녀도 10%는 임신이 가능한데, 플랜B의 안전성이 11세 어린 여성에서까지 입증되지는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재임을 노리던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가능성이 높은 이슈를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연령 제한 없이 약국에서 사후피임약을 살 수 있게 되면, 부모에게 알리지 않아도 아이들 마음대로 피임약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반대 여론을 의식한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법정 싸움으로 번졌다. 2013년 4월 뉴욕 연방법원은 “시벨리우스 장관의 결정은 과학 보다 정치를 앞세운 결정이었다”며 “플랜B에 대한 연령 제한을 철폐하고 누구나 약국에서 처방없이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과학적 근거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상식적 판단도 중요하다”며 버티는 듯 했다. 16세 제한을 15세로 낮춰 넘어가보려 했지만 법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법무부를 통해 항소할 뜻을 강하게 내비치던 오마바 정부는 지난해 6월 결국 항소를 접고 물러섰다. 이렇게 해서 플랜B는 시판된지 10여년 만에 연령 제한 없이 약국에서 바로 살 수 있는 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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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사후피임약 시장의 9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플랜B-원스텝./구글 캡처
한국, 의사·종교계 반대로 여전히 처방약미국의 플랜B에 해당하는 약이 우리나라에선 ‘노레보’다. 공방은 2011년부터 뜨거웠다. 의사 처방이 반드시 필요한 전문약 일부를 일반약(약국이 자유롭게 파는 약)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놓고 의·약계가 팽팽히 맞서면서부터다. 약사회와 시민단체들이 노레보를 처방 없이 살 수 있도록 일반약으로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의사협회는 한발 더 나아가 사전(事前)에 먹는 피임약까지 아예 전문약으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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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시판중인 다양한 피임약들. 이 가운데 노레보가 대표적인 사후피임약이다./조선일보 DB
40여년 전 피임약이라는 것이 처음 국내에 도입될 당시에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일반약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최소 수년 이상 먹어야 하는 피임약이야말로 의사 진단이 필요하며, 미국·일본·영국 등 의약 선진 8개국이 모두 전문약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논리에 따라 2012년 6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사전피임약을 전문약으로, 사후피임약은 일반약으로 전환하는 ‘의약품 재분류’ 안(案)을 발표했다. 그러자 의사회와 약사회·종교계·시민단체 사이에 찬반 논쟁이 불붙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사전피임약이 약국에서 파는 일반약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전피임약 복용률은 2%에 불과하고 미국(14%), 프랑스(36%)와 큰 차이가 있다”면서 “사전 피임율이 이렇게 낮은데 노레보가 일반약이 되면, 피임을 전적으로 사후피임약에 의존할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종교계는 “사후피임약은 단순한 피임약이 아니라 수정란이 자궁 내막에 착상하는 것을 막는 반(反)생명적 낙태약”이라며 일반약 전환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피임약 재분류 안을 철회하고 예전처럼 사전피임약은 약국에서 사는 일반약으로, 사후피임약은 의사 처방을 받는 전문약으로 남겨뒀다.
논란의 불씨는 아직 남아최근 유럽에선 노레보에 대한 약품설명서 내용을 바꿨다. 노레보는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되는 것을 막지는 못하며, 다만 배란을 지연시켜 피임 효과를 낸다고 썼다. 종교계가 주장해 온 것과 달리 수정란을 낙태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또 몸무게 80㎏ 이상에서는 피임 효과가 거의 없다는 설명이 추가됐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다시 플랜B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개혁법 내용 중에는 여성들의 피임약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해 무료로 살 수 있게 하라는 것이 있다. 미국인 절반 이상은 고용주(회사)로부터 건강보험을 제공 받는다. 고용주 가운데 일부는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낙태 효과가 있는 플랜B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없다고 버텨왔다. 심지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정책이라며 소송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새로 나온 플랜B의 작용에 대한 설명이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피임약은 낙태 허용 여부, 생명 윤리 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다. 평소 한치의 의심없이 ‘의학은 과학’이라고 믿고 있다가 실제 환자를 고치는 의료는 또한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