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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이 교실 창가를 깊숙이 비추는 시간이다. 아이들과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마다의 도화지 위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릴 때 보미가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예쁘게 해 줄게요” 보미는 내 손을 살며시 만지작거리더니 분홍색 사인펜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고는 내 손톱 위에 색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촉촉하고 서늘한 감촉을 느껴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손톱에 작은 봄을 칠하고 있었다.
유치원 현장에서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흔히 만나는 귀여운 놀이다. 나는 그 모습이 예뻐 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손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보미의 분홍색 사인펜은 멈출 줄 몰랐다. 열 개의 손톱을 모두 분홍빛으로 다 채우고도 모자라 손가락 마디와 손톱 사이의 틈새까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일 기세였다. 슬며시 걱정이 밀려온 나는 꾀를 내었다.
“선생님은 분홍색보다 초록색이 더 좋은데, 초록색으로 발라주면 안 될까?” 보미가 초록색 사인펜을 찾으려 교실 구석으로 눈을 돌린 틈을 타, 나는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세면대에서 비누칠했다. 거품을 내어 손을 씻고 있으려니 뒤에서 쪼르르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따라온 보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미는 비누를 빼앗아 들더니 제 손으로 꼼꼼히 거품을 냈다. 그러고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를 잡고 손톱 사이에 묻은 분홍색 자국을 정성스럽게 문질러 지워주기 시작했다. 구석구석을 살피며 거품을 내는 솜씨가 여간 애살스럽고 다정한 게 아니었다. 세면대의 물방울 속에서 번져나가는 분홍빛 물보다, 내 손을 꼭 잡고 위로 아래로 문지르는 보미의 작고 따뜻한 손길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알싸하게 번져왔다.
사실 보미는 우리 반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고, 때로는 모두를 긴장하게 만드는 아이였다. 학기 초, 보미를 우리 반으로 배정받았을 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묵직했다. 지난해에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악을 쓰며 울고 특이한 행동을 해 선생님들을 힘들게 했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유별난 행동이야 어디나 조금씩 있기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막상 보미와의 일상이 시작되자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처음 한 달은 탐색전이라도 치르듯 평화롭게 지나갔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 교실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보미의 거친 날개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놀이 시간이 되면 오직 자신이 원하는 놀이만 고집해야 했고, 밥을 먹기 싫은 날에는 좋아하는 간식 외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달래고 품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호불호가 명확한 어린아이의 특성이라고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진짜 문제는 교실을 벗어나 외부 견학이나 소풍을 나갈 때 터졌다.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나 나무껍질 하나도 보미에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탐구의 대상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면 반드시 손으로 만져보아야 하고 때로는 그것을 지나가는 친구를 향해 덥석 던져보기도 했다. 보미가 던진 돌에 맞은 친구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반응을 보이면 아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곤 했다. 주변의 위험이나 선생님의 제지, 친구들의 당황스러움은 보미의 안중에 없었다. 오직 제 안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렇게 거칠고 사나운 가시를 세우고 서 있던 아이다. 하지만 그날 손을 씻겨 주는 보미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또 다른 보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보미는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렀을 뿐, 마음속 깊은 곳에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보듬고 돌보고 싶어 하는 따뜻한 온기가 차고 넘치는 아이였다. 한번은 놀이 시간에 보미가 보이지 않아 교실 안을 한참 찾은 적이 있었다. 구석진 사물함 쪽으로 가보니 보미가 다른 친구의 사물함 앞에 주저앉아 그 안의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있었다. 깜짝 놀라 달려가 물건을 도로 넣으라고 하자, 보미는 고개를 저으며 지저분해서 정리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사물함 주인이 달려와 자기 물건을 만지지 말라고 속상해하며 화를 냈지만 보미는 친구를 바라보며 단단하게 설득했다.
마음 한쪽이 비어 있어 그 외로움을 공격성으로 내뿜는 것은 아닐까. 나는 보미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작고 소소한 행동 하나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이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쭈볏거리다가 매일 같이 내밀어 오는 내 손의 온기를 느꼈던 탓인지 아이의 손가락은 내 손가락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보미의 거칠었던 작은 손은 내 손과 단단하게 하나로 얽혀 있었다.
어원을 찾아보면, ‘매니큐어(Manicure)’라는 단어는 손을 뜻하는 라틴어 ‘마누스(Manus)’와 돌봄 또는 치유를 뜻하는 ‘큐라(Cura)’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즉, 매니큐어의 본래 의미는 단순히 손톱 위에 화려한 색을 칠하는 장식이 아니라, ‘손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일’이다.
손으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언어보다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아주고 지친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에게 따스한 온기를 나누어주는 일일 것이다.
뿌리치기만 했던 아이의 작은 손이 어느새 내 손안에 따스하게 쥐여 있듯, 보미는 스스로 세상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손끝에 분홍색 물감을 채우듯 마음속에 다정함을 채워 넣을 줄 아는 아이. 훗날 이 세상의 외롭고 그늘진 어느 구석에, 보미의 그 꼼꼼하고 따스한 손길이 닿아 환한 봄날이 되기를 가만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