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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8일 금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2열왕 25,1-12
복 음 : 마태 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죄인이라는 낙인으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육체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유행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를 경계해야 했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낫게 할 수도 있었는데 손을 대시며 마음을 쏟아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 시켜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나야 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사는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죄의 용서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이는 마치 이집트에 내린 열 개의 재앙(탈출기 7,14-12,36)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암시해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치신 바를 몸소 성취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하산은 당신이 구원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를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98년 제기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칠갑산 청소년 수련장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둘째 날에 본당 신부님께서 사목위원들과 캠프장으로 방문 왔습니다.
먼 길인데도 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사목위원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간식을 준비해 왔고,
본당 신부님은 필요한 데 쓰라면서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보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1시간 정도 머물기 위해서 왕복 8시간을 걸려서 왔습니다.
신부님에게 왕복 8시간 걸리는 거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당의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4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학생들이
부주임 신부님의 인솔하에 오스틴에 있는 피정의 집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저도 사목위원들과 함께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피정의 집으로 격려차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격려금을 주고, 1시간가량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적당히 구름이 낀 날이어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제가 선글라스 케이스를 가져간다는 것이
서두르는 바람에 면도기 케이스를 가져갔습니다.
선글라스를 쓰려고 케이스를 열었는데 면도기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왕복 8시간을 길 위에 있으면서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들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길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대관령도 미시령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차량 통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잊혀지는 걸 보았습니다. 산보 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덜 피곤하고, 덜 피곤하니 산보가 즐겁습니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가축을 길들였습니다.
‘개, 양, 소, 말, 낙타, 닭, 고양이, 돼지’는 인류가 길들여서 같이 지내는 가축입니다.
신발도 처음에는 발에 익숙하지 않지만, 자꾸 신으면 길이 들어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사제복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입으면 사제복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익숙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잘 키운 부부는 닮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눈빛이 비슷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가 비슷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님께서 격려 방문한 것을 배웠듯이,
부주임 신부님도 언젠가 그렇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 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 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러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 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한센병 환자의 치유
조욱현 토마 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며 치유해 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 시대,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을 꼽자면,
첫 번째로 꼽을 사람들은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사제로부터 나병 확진을 받는 순간, 그들은 성 밖으로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만 해도 억울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부정을 탄 사람이니만큼 성 밖에 나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혹시라도 인기척이라도 나면 사람들에게 주의하라는 표시로
이렇게 큰 소리로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으로 한 나병 환자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다는 그 자체가 위법이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나병 환자라는 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멀쩡한 옷도 찢어 입어야 했습니다.
머리도 풀어 산발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윗수염도 가려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마치 성 밖 토굴 속이나 무덤가에서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그였습니다. 인생의 막장 앞에 선 그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든 법적 장벽과 인간이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에는 율법이고 전통이고 필요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만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음으로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사제들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좀 나은 사제라면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겠죠.
“이러면 안 되지. 자네 이거 불법인 거 잘 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서로가 좋을 일 하나도 없네.
힘들겠지만 꾸준히 약 먹고 치료에 전념하게.
그리고 나중에 병이 진정되면 그때 한번 만나세.”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진물투성이인 그의 몸에 다정하게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위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납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납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린 한 사람이 만납니다.
빛과 어둠이 만납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입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8, 2. 3)
「나는 치유되었다.」의 저자 밥슈츠는 이 책에서
예수님과 만남은 치유로 나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 구조 안에 낫고 싶은 강한 마음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또 16세 교황의 말씀대로, 치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목적을 위해, 곧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아버지와 인간 상호 간의 충만한 친교 안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습니다.』 성
경의 수많은 사람, 곧 육체적인 여러 질병으로 죄인이라 불리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 부서지고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달라지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산에서 제자들과 당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뿐만 나병 환자 또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사실 구약, 특히 레위기에 의하면, 이는 결코 있을 수 없고 해서도 아니 되는 행동입니다.
나병 환자는 레위기 13, 45~46에 의하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물러나 근접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과 사람들을 피하도록 소리를 외쳐대지도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해 엎드려 절합니다.
이 짧은 맥락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 간의 극명한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나병 환자이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기 위해 다가왔고, 엎드려 간청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8,2)
나병 환자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 깊은 심층
곧 영혼 안에 심어 놓은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은 갈망’에 따라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이는 곧 아빠 하느님께서 그를 예수님께 이끌어 데려온, 치유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께 단지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십사고 강요하지 않고,
온전히 그분의 뜻대로 하시도록 순명의 자세로 내어 맡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훗날 겟세마니에서 아빠 하느님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26,39)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이 나병 환자 또한 자신의 바람보다
예수님의 의향과 의지에 전적으로 내어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바람보다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시고 하시기에 우리의 삶에서 매일 기적이, 치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나병 환자처럼 주님께 온전히 신뢰와 의탁의 마음으로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닌 깨끗하게 되어라.”(8,3)하고 말씀하시자,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은 용서와 치유의 말씀이며 생명과 사랑의 말씀임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산에서, 곧 기도하고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
우리 또한 단순히 우리의 욕구 충족과 바람만을 청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며 이루어진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참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