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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 유낙준주교.
부서짐과 믿음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곱의 집안이 야만족을 떠나올 때(시편 114:1) 유다는 그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시편 114:2). 땅이여, 너는 네 주인 앞에서, 야곱의 하느님 앞에서 떨어라(시편 114:7). 그분은 바위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바위로 하여금 샘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시편 114:8). Judah became the Lord’s holy people, Israel became his own possession(Psalms 114:2).”
우리가 정작 살 곳이 어디입니까? 이곳이 우리가 살 곳이라고 확신을 가졌다가도 살다보니 이곳이 살 곳이 아니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탄탄한 근거에서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부실한 근거에서 제대로 된 확신을 갖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갖는 확신이 수없이 변하면서 지금의 나가 되었고 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작 살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살 곳을 하느님은 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 곳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땅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사는 우리에게 산과 들까지도 환영하는 자리를 손수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었을 때에도 우리를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곳으로 우리를 안전하게 이동시켜주십니다. 산 사람이 죽은 이를 매고 이동할 때 우리 기도서(434쪽)에서는 시편 118, 42편, 93편, 25편을 낭송합니다. “하느님은 어지시기에 감사를 바치라(시 118:1).”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시 42:1). “주님은 왕이시다. 위엄으로 옷을 입으시고 땅을 견고하게 하셔서 움직이지 않는다(시 93:1).” “야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시편 25:1).”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산 사람이 함께 걷는 시간이 시신을 운구할 때입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동행하는 운구하는 사람과 이를 보는 사람들이 이 시편을 마음에 담게 되어 입으로 이 시를 슬프게 노래합니다.
단테의 “신곡”의 제 2곡에서는 천사가 뱃사공이 되어 영혼들을 배에 태워 연옥으로 옮겨 줍니다. 인간의 도구들인 돛과 노를 거부하고 오직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배를 이동시키는 천사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천사의 이러한 자세가 그리스도 신앙인의 자세로 보여집니다. 자신의 공들임 없이 너무 쉽게 남의 힘으로 사는 현대인들은 이 천사로부터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영혼들이 시편 114편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2곡 46절)” 전능하신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노래를 부릅니다. 산 사람이 죽은 몸에 베옷을 입히면서 그리고 베옷을 입힌 죽은 몸을 이동시킬 때 전능하신 하느님을 떠올리게 되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새가 둥지를 떠나면서 지저귀다가 높은 곳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고 둥지에 들어오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그 새처럼 창공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이 노래가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부르는 시편 114편의 노래입니다. 천상에서 더 크게 울려 퍼질 이 노래를 홀로 제단 아래에서 자주 묵상을 하곤 합니다.
“죽어갈 몸으로 그대를 사랑했듯이 풀려나서도 사랑하기에(신곡 2곡 88-89절)”라는 연옥에서 만난 음악가인 친구 카셀라가 단테에게 말합니다. 영혼이 육체에 얽매여 있을 때, 즉 살아있을 때 단테를 사랑했던 것처럼 육신이 죽어 영혼이 풀려난 지금도 사랑한다니 서로가 무진장 사랑에 빠졌다는 소리로 들려옵니다. 살아있을 때의 사랑으로 죽어서까지 사랑하는 우정의 깊은 노래로 들려옵니다. 카셀라의 사랑의 삶으로 인하여 영혼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연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탄절로부터 부활절까지 삼 개월 동안 영혼들이 살았을 때의 깊은 사랑으로 인하여 죄를 사면받는 대사면령이 내려져 모두가 연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석 달 동안 살았을 때 죽어서도 가져갈 사랑으로 사는지를 질문하는 사순절기가 들어있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사랑으로 산 것이 너무 큰 사람은 벌을 받았지만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내 욕망을 잠재우게 한 카셀라의 노래로 단테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 모두가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산으로 가는데 가로막는 때를 씻어 내도록 하라.”는 진지한 노인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곳을 떠나게 되는 것이 단테의 제 2곡의 마무리입니다. 죽어서도 이어질 살았을 때의 사랑이라면 죄를 사면받고 하느님의 산으로 가는데 가로막는 때를 씻어내게 된다는 이 시로 인해 속은 뒤로하고 말로만 용서하는 시대에 큰 위로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감사성찬례를 바치기 직전에 사제가 하느님의 옷을 입는 예복실에는 늘 손을 씻는 세수대가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손이 될 사제의 손에 묻은 죄를 씻는 세수대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예복실에서 이미 사제는 은총의 손으로 변화되는 홀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면서 손을 물로 씻습니다. 사제의 손이 믿음을 주는 은총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제의 손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표지가 됩니다. 돌봄의 손이자 안수의 손이자 강복의 손이 사제의 손입니다. 중세 이후까지 지속되어 온 풍습에 의하면, 승리나 평화 같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왔다고 전합니다.
40주야 비가 내리고 물에 잠기게 하여 모든 것을 멸하신 하느님의 위엄을 경험한 노아와 노아의 배 안의 생명체들입니다. “하느님이 노아와 생명체들의 생각이 나셔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8:1).” 150일간 물을 빠지게 하여 아라산 등마루에 머물렀고, 74일이 지나서 산봉우리가 드러났고, 40일이 지나 배를 열고 까마귀를 보냈고, 7일이 지나 비둘기를 보냈습니다(40주야+ 150일 물에 잠김+ 74일 물 빠짐+ 40일 더 빠짐+ 7일 올리브 가지 봄= 301일). “비둘기는 저녁때가 되어 되돌아왔는데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있었다. 그제야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창세 8;11).”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아시고 하느님이 마음이 아프시어(창세 6:5-6) 무법천지가 되어 썩은 냄새를 피우는 세상을 삼백일 동안 물에 잠기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노아만이 올바르고 흠없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창세 6:8-9). 삼백일간 땅을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무진장 답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답답한 시간을 이겨낸 노아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참지 못하고 버팅기지 잘 못하는 인내심이 부족한 우리의 믿음이 노아의 강건한 믿음으로 이어지길 빕니다. 노아의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비둘기가 부리에 물고 온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 A fresh olive leaf” 가 생각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소식을 갖고 온 비둘기처럼 좋은 소식을 갖고 온 사람은 올리브 이파리를 손에 들고 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이 온몸에 새겨져 있는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성공회 신앙인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 땅이 있다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성공회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지성으로 신앙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지성이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야만 하느님의 신성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켄테베리의 안셀무스 대주교님(1033-1109)은 말씀하셨습니다. “믿기 위해 이해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해를 하기 위해 믿는다.”고 제기하신 것입니다. 사람과의 제 관계도 보면 “알고 나서 믿는다.”이기보다는 “먼저 믿고 후에 이해한다.”로 이루어집니다. 부모를 믿으니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가정에서의 배움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해하여야 믿게 된다고 배워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성숙해서야 가정에서의 배움인 “믿어서 이해를 한다.”는 자리로 옵니다. 사람들간에도 먼저 믿고 볼 일입니다. 물론 손해를 잠시 보기도 하겠지만 점차 신뢰의 사회가 되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우선하는 교회는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사회를 세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란 책에서는 “좌절한 이들이 모이면 의심의 기운이 만연하다. 흘끗흘끗 엿보고 고자질하고 감시하며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긴장감이 팽배하다. 이런 병리적인 불신은 충동보다도 엄격한 복종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명령받은 행동과 견해를 열심히 추종함으로써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고 하여 우리 자신을 깊이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우리가 사는 나라, 우리가 사는 동네, 우리가 사는 교회가 어쩌면 에릭 호퍼가 제기한 인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두패로 나뉘어 싸우는 한국사회의 불일치도 에릭 호퍼의 이 글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획일적으로 안 살아도 되는데 우리 안의 흠으로 인해 획일적으로 자신을 가둬두며 사는 모습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누구도 정해진 틀에 구성원을 따르게 하지 않고, 단지 자제심을 기반으로 한 각 구성원의 독자적인 기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집단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독자성이 감소되면 집단에 기여의 정도도 감소되는 것이어서 획일성은 집단의 기여도를 낮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마사 누스바움 Martha Nussbaum(1947생. 미국철학자)은 인간가치를 높이는 글을 썼습니다. “혐오는 우리를 갈라놓지만, 취약함은 우리를 뭉치게 합니다.” “사랑을 아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통제하려는 모든 종류의 요구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지속성과 습관, 상호작용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대안적인 길을 마사 누스바움이 제안한 듯 합니다. 노아가 하느님 마음에 들었던 길을 찾는 마사 누스바움으로 보여집니다. 믿음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듯이 말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으로 우리는 깨끗한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비누의 발견으로 인구가 급증했다는 강의를 대학교 일학년 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병균과 싸우는 꿈 이야기를 자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계몽주의의 산물로 살은 제 모습이 보입니다. 깨끗하게 하려고 걸레를 수없이 들고 있는 제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저분한 제 모습을 씻으려는 모습이 이제는 그간의 인간의 경험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깨끗해지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더 깊이 자신을 이해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지저분해야 먹을 게 보여.”라는 시골 아저씨의 말씀이 귀하게 들려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이 부분적이라는 사실만 인정하고 산다면 함부로 전체를 말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겸손함일 때 우리는 심장이 뛰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에 서 있고 서 있게 됩니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고 밤이 지속될 가능성은 없는 이유는 지구가 멈추지 않고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신 하느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만 인정한다 해도 우리는 믿음생활로 복을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은 전체를 보며 살게 합니다.
신도는 세상의 리더이고 사제는 교회의 리더이고 주교는 사제의 리더입니다. 이 말이 고루하게 들린다면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신도는 세상을 섬기고 사제는 신도를 섬기고 주교는 사제를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여 이천년간 이어져 온 것입니다. 편협하고 옹졸한 인간이 교회의 리더가 되면 세상이 위험해지고 재앙이 됩니다. 하느님의 가치에 근거를 두고 세상을 형성하려는 중세시기를 보면 쉽게 암흑시대라고 말하기 어렵게 됩니다. 중세의 시작은 서로마제국이 망한 476년부터 중세의 끝을 동로마제국이 망한 1453년간을 말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혜택을 누리려는 현대인에게 중세인들은 수도원의 삶의 이미지로 고루하고 지루하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온몸으로 사는 신비와 거룩함이 존재합니다. 우리 시대에 신비와 거룩함이 존재하게 하는 교회가 성공회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온몸으로 신비로 살고 거룩함으로 살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위험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크신 하느님의 힘으로요. 온몸으로 사는 믿음입니다.
성공회는 미래만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성공회는 과거만 말하지도 않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향하게 하고 미래를 현재로 집중하게 하는 성공회입니다. 공상적인 이상과 과거에 대한 집착은 분별에 눈을 감는 방식입니다. 분별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의 지혜를 지닌 성공회는 합리성을 주장하다가 인간성을 잃는 어리석은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인 성령의 안내를 갖춘 신앙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보다 나은 인간을 세우기 위한 방향으로 세상을 좀 더 밀어붙이는 신앙인이 성공회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성공회 안에서 나타나는 시끄러움은 선과 악과의 다툼이 아니라 선과 선과의 우위를 선전하려는 논쟁일 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강건하게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지혜를 기반으로 한 신앙의 성공회는 단점을 파악해 배제하려는 부정적인 점을 보려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장점을 찾아 긍정적인 선택을 하게 하여 사람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성공회입니다. 성공회는 정보의 과부하와 사회적 속도의 가속화로 인하여 부정적인 선택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줍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짓을 더 이상하지 않게 안내해 줍니다. “언젠가는 후손들이 우리가 동물을 잡아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변명을 후손들에게 말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헬런 맥도널드의 “메이블 이야기”에서).” 이처럼 앞선 고민을 먼저 하면서 스스로 들어가지 않기로 한 그 문을 열어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성공회입니다.
선하게 살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신념을 잃어가는 시대에는 최악의 무리들이 더 열정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길게 살아야만 보이는 선한 열정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선한 열정이 숨을 쉬고 있는 곳이 성공회입니다. 적어도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성공회 신앙이 그래서 아름답고 좋은 느낌을 주는 이유가 됩니다. 영혼이 없는 허벅지만 살을 찌우는 시대에 괜찮은 척하고 살지만 속은 수없는 물질욕과 음란욕의 갈증에 목이 타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위험도 구원도 없는 시대로 보일지라도 구원을 향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고, 지질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성령의 불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이 성공회에 있습니다. 쾌활함과 엄격함과 보편성을 주는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시는 하느님은 성공회의 전례생활로 성사적인 삶에서 자신을 제대로 된 사랑으로 드러내십니다. 특히 감상성찬례의 참여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앞에 서게 하고 하느님 나라를 맛보게 합니다. 성공회에서 참 신앙생활로 자신을 뜻있게, 의미있게, 가치있게 살게 하십시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복의 통로인 사제의 강복기도가 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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