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GqVogrLEE4?si=pdoH8yzibW2hTzdp
Sergei Prokofiev : Alexander Nevsky, Op.78 (Yuri Temirkanov 지휘. St Petersburg Philharmonic Orchestra)
작품배경
러시아의 민족적인 영웅 알렉산더 네브스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첫 유성영화로, 13세기 중엽 몽고족과 게르만족의 침입에 맞서, '레닌'적 인물인 알렉산더 네브스키가 민중을 조직하는 과정과 승리를 담고 있다. 개봉 당시 흥행은 물론 39년 레닌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당시 스탈린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이젠슈타인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를 최초로 고민하고 실험한 작품으로 '사운드 영화 선언'에서 주장한 화면과 음향이 대위법적 효과를 내는 수직의 몽타주가 선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정교한 회화적인 이미지와 함께 한편의 오페라 같은 영화로서 극찬을 받았으며, 특히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빙판 위의 전투'가 영화에서 가장 정교한 연출과 양식미를 선보이고 있다.
Aleksandr Nevsky, 1220경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1263. 11. 14 고로데츠.
1547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1월 23일과 8월 30일.노브고로트 공(1236~52), 키예프 공(1246~52), 블라디미르 대공(1252~63). 독일인과 스웨덴인의 동진을 저지했으나 몽골족이 러시아를 통치하는 데는 협력했다. 스웨덴 침략군을 이조라 강과 네바 강의 합류점에서 격파해(1240) '네바 강의'라는 뜻의 네프스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러시아 군주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 2세 프세볼로도비치의 아들로 태어나 1236년 노브고로트의 공으로 선출되었으며(이 직책은 단순한 군사지휘관에 지나지 않았음) 1239년 폴로츠크 공의 딸과 결혼했다.
1240년 러시아가 바다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침공한 스웨덴군을 이조라 강과 네바 강의 합류점에서 격파했다. 이 승리로 지위가 높아진 그는 노골적으로 시정(市政)에 개입하려 들다가 몇 달 후에 추방되었다. 발트 해 지역을 '그리스도교화'하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지시를 받은 튜튼 기사단(독일기사단)이 그 직후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노브고로트 시는 알렉산드르를 다시 불러들였다. 수차례의 전투 끝에 알렉산드르는 1242년 4월 추트스코예 호와 프스코프 호 사이의 좁은 수로에서 유명한 '빙상의 살륙전'을 벌여 독일인을 결정적으로 물리쳤다. 스웨덴인과 독일인을 상대로 계속 싸움으로써 그들의 동진을 저지시킨 알렉산드르는 또한 이교도인 리투아니아족과 핀족을 상대로 많은 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몽골군이 정치적으로 조각나 있는 러시아 영토 대부분을 정벌하는 중이었다.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야로슬라프 대공은 러시아의 새로운 통치자들을 섬기기로 동의했으나 1246년 9월 몽골의 대(大)칸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에 독살당했다. 뒤이어 대공위를 놓고 싸움이 벌어져 알렉산드르와 동생 안드레이가 몽골 킵차크 한국의 바투 칸에게 탄원을 내자 바투는 이들을 대(大)칸에게 보냈다. 대칸은 아시아의 장자상속 관습을 무시하고 안드레이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그리고 알렉산드르를 키예프 공으로 임명했다. 이는 알렉산드르를 총애하는 바투가 대칸과 불편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던 것같다.
안드레이가 다른 러시아 제후들 및 서방 민족들과 함께 몽골 지배자들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알렉산드르는 볼가 강변의 사라이로 가서 바투의 아들 사르타크에게 자기 동생을 탄핵했으며 사르타크는 군대를 보내 안드레이를 폐위하고 알렉산드르를 대공으로 세웠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북동부 러시아의 제후들은 10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몽골의 지배에 도전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르는 요새와 교회를 건축하고 법령을 공포해 러시아를 복원시키고자 했다. 대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는 자기 아들 바실리를 통해 노브고로트를 계속 통치했으며 이렇게 해서 노브고로트의 통치체제를 초청에 의한 개인 통치체제에서 러시아의 최고군주에 의한 제도적 통치체제로 변화시켰다.
1255년 대공의 통치에 진력이 난 노브고로트가 바실리를 추방하고 몽골의 지배에 적대적인 인물을 군주로 초청하자 알렉산드르는 군대를 모아 자기 아들을 다시 복위시켰다. 1257년 몽골족은 세금 부과를 위해 러시아 대부분 지역에 대해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대해 반대가 거의 없었으나 노브고로트에 그 소식이 전해지자 봉기가 일어났다. 1258년 알렉산드르는 노브고로트 반란 때문에 러시아 전체가 몽골족의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해 인구조사와 과세에 복종하도록 노브고로트에 압력을 가하는 데 조력했다. 이 덕택에 몽골족은 북부 러시아에 통치의 고삐를 죄어가는 과정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1262년 킵차크 한국의 이슬람교도 세금징수청부인에 반발해 여러 성읍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알렉산드르는 몽골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4번째로 사라이에 갔다. 이 여행에서 그는 목적을 달성했으며 아울러 이란 침공계획에서 러시아인의 징집을 면제받는 데 성공했다. 본국으로 돌아와 알렉산드르는 1263년 11월 14일 볼가 강변의 고로데츠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러시아는 또다시 여러 봉건적 소국으로 분할되었다. 제후·대귀족(보야르)·성직자의 지지와 아울러 러시아인의 몽골족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그의 개인적 권력은 연약한 아들들은 물론 어느 누구도 넘겨받을 수 없었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르가 몽골족 정복자들과 관계하면서 매국행위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실상 러시아의 일부 제후들은 국내 경쟁관계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 수세기 동안이나 투르크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어왔다. 알렉산드르는 자발적인 협력자였기 때문에 칸과의 관계에서 일반백성을 위해 중재하는 입장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교회의 지지를 받았으며 교회는 몽골의 보호와 세금면제 혜택으로 번창을 누리면서 로마 교황청과 손잡은 반(反)몽골 제후들을 오히려 두려워했다. 이런 이유로 알렉산드르는 1381년에 지방 성인의 지위로 격상되었고 1547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알렉산드르의 아들 다닐은 모스크바 가문을 창시했으며 이 가문은 이후 북부 러시아를 재통일해 1598년까지 통치했다.
알렉산드르는 당대의 위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스웨덴과 독일인의 침략에 맞서 러시아의 서부 국경을 지켰다. 그의 이런 이미지는 북서부 러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고 뒤이은 수세기 동안 선전목적으로 숱하게 인용되었다. 그리하여 스웨덴과의 전쟁이 종결된 뒤 1725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이 제정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 7월 독일이 소련 영토 깊숙이 침공해 들어왔을 때 스탈린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민족 영웅으로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딴 군사훈장을 제정했다.
글쓴이: philharmonic
https://youtu.be/AoXMUOpdUVc?si=-ScdLIZhS6bYzGpM
Serge Prokofiev ‘Alexander Nevsky’ – Leonard Slatkin condu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