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한국 선수들은 정신력과 근성이 강한 걸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허정무는 이 부분에 있어서 '독보적 존재'로 불리었다. 그 시절 한국 선수들이 태국 방콕 같은 더운 지역에 원정을 가게되면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이 피로를 호소하는데 유일하게 허정무 만큼은 일체 내색을 안했다고 한다.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허정무는 어릴 적부터 탁월한 운동 신경과 소질을 갖고 있었으나 다니는 학교에 운동부가 없어서 운동 선수로서의 꿈을 제대로 키우질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목포중에 입학을 했지만 그 학교 역시 운동부가 없었다. 그 때 집안 내, 삼촌뻘 되는 허윤정(60년대 국가대표)선생이 허정무의 재능을 발견하고 축구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허정무는 서울 중동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당시 중동 중학교 코치는 유판순 선생이었는데 키도 작고, 체구도 가냘픈 허정무를 보고 '축구는 안하는 게 좋겠다!'고 말을 했단다. 그 말을 들은 허정무는 '6개월만 축구부에서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안 되면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유판순 코치를 설득하고 축구부에 들어갔다.
허정무한테는 운이 좋았던 게 그 무렵 중동 중학교엔 선수가 13명 밖에 되질 않아서 연습 게임에는 허정무가 교체 선수로 뛸 수가 있었다. 그 기회가 올 때 마다 허정무는 유판순 코치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허정무가 최초의 공식 대회에서 교체 멤버로 들어가 골을 터뜨리자 그 후부터 유판순 코치는 허정무를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
중동중 졸업과 동시에 허정무는 유판순 코치를 따라 축구부를 재창단 하는 영등포 공고에 입학하며1학년 때부터 주전 센터포오드로 뛰기 시작했다. 2학년 때인 1972년이 영등포공고의 전성 시절이었는데 그 해에 영등포공고는 전국 대회에 일곱 차례나 결승에 올라 무려 세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허정무는 고2 때 최종덕, 박종원, 조영증, 홍성호, 박병철, 이영무, 신현호, 박창선, 유동춘 등과 함께 청소년 대표에 선발되어 73년 테헤란에서 벌어진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출전하면서 실력을 인정 받았다. 1974년 영등포공고를 졸업한 허정무는 진주고의 조광래, 경신고의 박종원, 영남고의 이강민 등이 같이 연세대에 입학을 했고, 그 해 열렸던 제 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 직후 대표팀에 선발이 됐다. 그 후부터 허정무는 네덜란드에 진출(80년)하기 전까지 2년 선배인 차범근과 함께 '한국 축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아시아를 호령했다.
개인기가 좋은 허정무는 드리블에 이은 돌파가 주특기였는데 특히 정적인 상황에서 수비수와의 1대1에 싸움에 강했다. 허정무는 차범근-변병주 처럼 빠른 발을 이용한 돌파가 아닌 페인팅을 써서 돌파하는 스타일이었다. 허정무의 페인팅은 동작이 크지 않으면서 매우 깔끔했다. 그 무렵 대표 1진인 화랑팀이 한 수 위인 유럽이나 남미 클럽팀과 경기를 하면 한국 선수들 중 유일하게 15번 레프트윙 허정무와 11번 라이트윙 차범근 만이 상대 수비수들을 따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1979년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의 명문팀인 아인트라하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 하자마자 곧바로 유럽 축구계를 뒤흔들자 서독을 비롯한 유럽 일부 클럽팀에서 한국의 스타급 선수들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표적은 역시 허정무였다. 당시 분데스리가 보쿰을 비롯한 유럽의 몇몇 팀에서 허정무에게 큰 관심을 표명해 허정무도 분데스리가로 진출하지 않겠냐?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허정무는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과 계약을 맺었다. 허정무는 아인트호벤에 입단한 후 팀에 적응될 때까지 약 반년 간은 교체 멤버로 뛰다가 그 이후로는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그 시절엔 국내 축구계를 비롯한 언론이 유럽 리그에 관심을 갖고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네덜란드 리그 수준이 어느 정도이고 또한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MBC에서 분데스리가를 녹화 방송해주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팬들로서는 허정무의 네덜란드 진출 배경 및 허정무가 네덜란드 리그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차범근과 허정무 두 핵심 선수가 유럽으로 진출하자 대표팀 전력에 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선수의 공백은 너무도 컸다.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때 이것이 여실히 입증됐다. 1981년 쿠웨이트에서 벌어진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이 홈팀 쿠웨이트에게 0대2로 완패하면서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 되고 말았다. 당시 허정무와 차범근이 대표팀에 합류 했었더라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리 심판의 편파적 판정이 있었더라도......
당시 한국 대표팀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GK김황호/조병득을 비롯해 수비진에 조영증-홍성호-박성화-최종덕-장외룡 등이 있었고 미드필드진에 조광래-이강조-이태호 등, 그리고 공격진에 정해원- 최순호-이태엽-이정일-변병주 등이 포진해 있었는데, 문제는 대표팀 공격진이 패기만 있었지 경험과 노련미를 갖춘 선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격수들 대부분의 나이가 22세 전,후였으까...... 요즘으로 말하면 올림픽 대표 선수들 연령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게, 당시 차범근은 합류하기 어렵더라도 허정무 만큼은 합류가 됐어야 했다.
그러면 당시에 왜 허정무와 차범근이 대표팀에 합류를 못했을까? 정확한 건 모르지만 필자가 주워들은 바로는 차범근의 경우엔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할 때 '월드컵 예선 및 본선과 같은 주요 시합 때는 모국 대표팀에 합류한다'는 조항을 당시에 넣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는 클럽팀과 계약을 어떻게 하는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기에 아마 이러한 세세한(?)부분까지 신경을 못쓴 것 같다.(레버쿠젠과 계약할 때는 이 조항을 넣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허정무는 차범근의 선례가 있기 때문에 아인트호벤과 계약 할 때 그 조항을 넣은 걸로 알고 있고, 또한 아인트호벤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낸 걸로 알고 있는데 허정무가 아시아 지역 예선 때 합류를 못한 것이다. 당시에 협회에서 허정무를 안 부른 건지? 아니면 합류를 요청했지만 아인트호벤 측에서 거절을 한 건지?에 대해선 필자인 제가 알지 못한다.
아인트호벤이 1982,1983년 연속으로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를 했을 때 허정무는 아인트호벤의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활약하며 고국 팬들에게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83년 대회에 아인트호벤이 우승) 3년여 간의 네덜란드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허정무는 1984년 당시 국내 선수 중 최고 금액을 받으며 현대(당시 감독: 문정식, 코치: 조중연)에 입단을 했다. 허정무의 현대 입단은 수퍼리그(현K-리그)인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허정무는 3년여 만에 대표팀에 복귀해 멕시코 월드컵 본선 대 이태리戰에서 1골을 기록했고,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노련미를 과시하며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허정무가 오랜 기간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많은 득점을 올렸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은 바로 이 골이 아닐까 싶다. 1985년 11월 3일 일요일 낮.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인 대 일본戰이 열리는 날이었다. 도쿄에서 벌어진 1차전 어웨이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을 2대1로 이겼기 때문에 서울 홈게임에서 이기면 한국이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하게 되는 거라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히 컸다. 이 날 잠실 운동장에는 8만 명의 대관중이 입장을 했다.
전반부터 한국은 최순호-김종부 투톱을 앞세워 일본 문전을 위협했다. 그리고 1차전과 마찬가지로 정용환과 조민국이 일본의 간판 스트라이커 하라와 하시라타니(90년대 일본 대표팀 주장이었던 하시라타니 테츠지의 친형)를 맨투맨 마크했고, '프리킥의 명수'이자 요주의 미드필더 키무라 카즈시는 4번 조광래가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전반 내내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득점을 올리지 못한 한국은 후반전에 무릎 부상 중인 허정무를 기용하며 공격의 수위를 높혔다.
후반 15분 경, 주장인 10번 박창선이 일본 페널티아크 왼 쪽 부근에 있던 최순호에게 센타링을 해주자 최순호가 이 볼을 가슴으로 트레핑 한 후 지체없이 왼 발 논스톱 슛을 때렸는데 그만 오른 쪽 포스트를 맞고 나왔다. 그 순간 17번 허정무가 날렵하게 뛰어들며 볼을 골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허정무의 이 골은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 짓는 감격적인 골이었다. 사실 이 날 허정무는 무릎 부상이 심해 출전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남 감독이 허정무를 후반전에 해결사로 투입했고, 허정무는 그 기대에 부응을 해준 것이다.
허정무는 원래 공격수이지만 때에 따라선 미드필더와 수비수도 겸할 수 있는 선수였다. 허정무는 어느 포지션을 맡더라도 제 몫을 다 했고 또 위력적인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감독들은 허정무를 폭넓게 활용했다. 허정무가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때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지만 본선에서는 왼쪽 사이드백으로 출전했던 걸 보면 그 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허정무는 뛰어난 두뇌 플레이어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국내 선수 중 허정무가 ‘헐리우드 액션의 선구자' 가 아닌가 생각된다. 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예선 대 말레이시아戰(서울 홈 경기)때 첫 골을 박창선이 페널티킥으로 득점했는데 그 페널티킥을 허정무가 얻어냈다. 전반 12분 경에 말레이시아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허정무가 말레이시아 수비수에게 걸려 넘어졌는데 이 때 허정무가 동작을 크게 하면서 쓰러졌다. 당시만 해도 국내 선수들이 워낙 순진해서 경기 중에 그러한 '지혜로움'을 보여주는 선수가 거의 없었는데 허정무 만은 예외였다.
무엇보다 허정무는 볼에 대한 집착력이 대단히 강한 선수였다. 드리블을 치다가 볼을 빼앗긴다던가 하면 곧바로 볼을 빼앗은 선수에게 달려들어 기어코 다시 볼을 빼앗고야 마는 악착같은 성격이었으니까....... 허정무는 체구는 크질 않았지만 몸싸움에 매우 능했다.
허정무의 현역 시절 플레이를 직접 보질 못하고, 소문으로만 이야기를 전해들은 젊은 팬들은 허정무를 '과격한 선수'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아마도 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戰에서 마라도나에게 두 세차례심한 반칙을 했던 것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한데 허정무는 매너가 안 좋거나 거친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절대 아니었다. 허정무는 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했고 매너 또한 좋은 선수였다.
허정무는 실력과 실적에 비해 약간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거다. 허정무 역시도 한국이 낳은 위대한 플레이어이고 또한 '한국 축구의 레전드'라는 걸 이 기회를 통해 말씀 드리고 싶다.
허정무 나이: 55년생(실제 나이는 53년생이라고 함.) 포지션: FW 및 MF 신장: 176cm 출신교: 영등포공고-연세대 소속팀: 한전(실업)-해군-PSV아인트호벤-현대 대표 경력: 74년~86년.
주요 타이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북한과 공동우승)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우승
- 사진 설명 - *사진 1: 전남 드래곤즈 허정무 감독이 수원 삼성과의 경기 전에 선배인 차범근 감독에게 다가가 예의를 갖추고 인사하는 장면.
*사진 2: 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 예선 첫 게임. 대 아르헨티나戰 한국 베스트 11. 뒷 줄-GK 21번 오연교, 20번 김용세, 9번 최순호, 14번 조민국, 11번 차범근. 앞 줄-10번 박창선, 16번 김주성, 12번 김평석, 17번 허정무, 2번 박경훈, 5번 정용환.
*사진 3: 아르헨티나戰에서 허정무가 디에고 마라도나를 걷어차는 장면. 이 날 경기가 시작된 후 12번 '족쇄' 김평석이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했다. 김평석은 당시 국내 최고의 맨투맨 수비 능력을 자랑했고, 100m를 11초 대에 주파하는 준족의 수비수였기에 키가 작은 마라도나를 어느 정도는 잡아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수비로는 도저히 마크할 수 없는 '괴물'이었기에 마크맨이 김평석에서 '깡좋은' 허정무로 바뀌었다. 그 때부터 우리 수비수들이 어쩔 수 없이(?) 마라도나를 '담그기' 시작한 것이다.
첫댓글 호벤에서 골도마니넣으셧네
허정무형!ㅋ
유상철 이전의 원조 멀티 플레이어내요. 전 수미인줄알았는대, 마라도나는 사람이 아니였다 ㅋㅋㅋㅋ 공감합니다
저도 영등포공고다니는데
ㅋㅋㅋ 제가 목동중 1학년 축구부인데 영둥포공고 자주만나용~
k리그 발족하자마자 왔네.. 에인트호벤에서 좀 더 뛰어도 됐을텐데..